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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스윙 - 그해 우리의 헛 방망이질
작가 : 톰과제리2
작품등록일 : 2018.11.19

1990년 서울의 산동네, 이화동을 배경으로 한 성장 소설.
화가인 엄마는 이혼 후 미국으로 자신의 성공을 위해 이민을 갔고,
아빠는 새로 결혼한 여자와 강남 아파트에서 단란하게 살고 있다.
할머니의 미싱 일을 도우며 살던 단비가 아빠 집으로 들어가 살게 된다.
그러나 위선적인 아빠와 새엄마에게 염증을 느끼고
학교에서 도둑 누명을 쓴 절친, 민희와 학교를 탈출하여
친엄마의 친척들이 살고 있는 여수로 떠난다.
그러나 마주하게 된 진실은 단비가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민희는 실제로 지갑을 훔쳤고 위선적이기만 한 아빠에게도 하나의 진실은 있었다....

 
11. 상식의 이면
작성일 : 18-11-19 10:56     조회 : 272     추천 : 0     분량 : 9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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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상식의 이면

 

  방학이 시작된 지 일주일 쯤 지난 아침이었다. 단비는 뚜렷한 계획 없이 자기 방에서 뒹굴다가 주방으로 나와 먹을 것을 찾아 먹고 있었다. 동찬과 윤숙이 아침부터 주방 식탁에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동찬은 지난 저녁에 퇴근하면서 주차장에서 본 윗집 여자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지 잘못 아니라고 일단 소리부터 지르는데 여자가 어찌나 억세던지. 삼백 사호 남자는 기가 막혀서 코웃음을 치면서 피하더라고."

  "그 여자 뭐 입고 있었어?"

  "모피코트였던거 같았는데."

  "촌스럽게 요즘 누가 모피를 입어."

  "진짜 던데."

  "그러니까 촌스럽다는 거지. 나이 칠십 쯤 먹었으면 몰라도."

  "어학원 원장이라는 여자가 왜 그렇게 교양이 없어 보이던지."

  "국졸이잖아. 남편이 학원 차려 줘서 원장 노릇 하는 거고."

 

  별 생각 없이 있다가 '남편이 학원을 차려 줘서'라는 윤숙의 말을 듣는 순간, 동찬은 괜히 윗집 여자 이야기를 꺼냈다고 후회를 하기 시작했다. 윗집 여자가 요즘 윤숙의 질투와 분노의 표적이 되고 있음을 동찬은 깜박 잊고 있었다.

  윗집 여자는 오전 열 시나 열 한 시 즈음에 출근을 했다가 남자들이 퇴근하는 여덟 시 쯤 집으로 돌아왔다. 오전에 장을 보러 가거나 아이들을 데려다 주고 돌아오던 아파트 단지 여자들은 단국이 네 윗집 여자가 출근하는 모습을 보고 그 여자에 대해서 호기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학원에 다니는 자녀가 있는 어느 집에서 윗집 여자에 대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 여자의 남편은 장사로 잔뼈가 굵은 남자였는데 음식점 장사로 큰 돈을 벌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자신이 하던 가게 근처에 매물로 나온 토익과 토플을 전문으로 하는 성인 학원을 인수하게 되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남자가 하려고 했으나 음식점과 같이 두 가지를 하는 것이 벅차서 아내에게 줬다는 것이었다. 여자는 초등학교졸업이 최종학력에 영어라면 알파벳도 모르지만 그런 대로 학원이 굴러가게 한다고 했다.

  윤숙은 대학생 아들이 있는 동네 여자와 함께 그 학원에 상담 겸 구경을 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날, 하필 학원 안내를 맡는 직원이 잠시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윤숙 일행은 열려진 문 틈 사이로 원장실에서 벌어지는 일을 볼 수가 있었다. 윤숙이 본 것은 윗집 여자가 선생 세 명을 앞에 두고 서류를 집어 던지면서 '수강생들이 떨어져 나가는데 수업을 안 바꾸면 어쩔 거야! 니들만 강사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모습이었다. 같이 간 두 명의 동네 여자가 그 광경을 보고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아무리 월급 받는 강사라지만 저렇게 하면 붙어 있나?"

  "유독 여기 강사가 자주 바뀌는데 이유가 있었어."

  "그래도 학원이 안 망하는 것은 워낙 자리가 좋아서일테고."

  "우리 애가 그러는데 강사들이 원장 싫어하는 것 같데요. 하루는 원장실 문 앞에 '원장님 BABO' 라고 누가 써놨대요. 근데 원장이 'BABO'가 뭔지 몰라서 멀뚱멀뚱 있었다가.그 때 강사가 그 꼴을 보고 '원장님 브라보'라고 말해 주었더니 그 말을 믿고 허허 웃었대잖아."

  "하하. 생긴 대로 논다더니."

 

  윤숙과 같이 온 여자들이 학원 로비의 벤치에 앉아 원장 여자를 한껏 비웃어 주고 있었다. 그러나 윤숙은 동네 여자들의 대화에 끼어 학원 원장 여자를 비웃지 않았다. 윤숙은 같이 온 동네 여자들과 생각이 달랐다. 윤숙은 그 윗집 여자가 소리 지르는 모습을 본 순간 자신의 내부에 잠들어 있던 또 다른 자아가 깨어나는 듯한 감정을 느꼈다. 윤숙이 느낀 감정은 그 원장 여자처럼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윤숙은 어쩌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잘 모른 채 쭉 살아왔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윗집 여자가 학원 강사들을 불러다가 실적 들이밀며 소리치는 모습을 본 순간, 윤숙은 진정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발견한 것 같았다. 남에게 일시키는 일만큼은 잘 할 자신이 있었다.

  단국이가 아직은 엄마의 손이 필요한 나이이지만 삼 사 년만 지나면 엄마의 손을 귀찮게 여길 때가 될 것이었다. 윤숙은 결혼 전에는 결혼한 다음에는 일 을 할 생각이 없었는데 막상 결혼 생활을 쭈욱 해오다 보니 자신의 일을 찾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윗집 여자가 원장 노릇을 하는 것을 보니 자신도 윗집 여자처럼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그렇게 좋아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막상 학원을 차릴 궁리를 해보니 말만큼 간단하지는 않았다. 가장 큰 장애물은, 윤숙에게는 윗집 여자처럼 현금을 많이 돌릴 수 있는 남편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친정에서 받은 재산을 장사 밑천으로 밀어 넣는 것도 만약을 생각한다면 위험천만한 짓 같았다. 어느 순간부터 윤숙은 자신이 적성에 딱 맞는 어학원 원장이 못 되 것은 동찬 탓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윤숙은 그 누구와도 결혼이라는 것을 하기 전에 남편은 으레 의사나 법조인 정도는 돼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첫 결혼에 실패한 후에는 자신의 집안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사'자 직업을 가진 남자 중에 선을 보겠다는 남자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사실 윤숙은 첫 번째 결혼을 한 후에 돈이나 지위 보다 성격 원만하고 인물 좋은 남자와 짝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먹고 살 돈이야 자신의 친정에서 어떻게든 마련해 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에 만난 것이 동찬이었다.

 윤숙은 동찬을 알게 된 후에 동찬을 자신이 취향에 맞게 꾸며서 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윤숙은 자신의 부모와 작은 아버지에게 부탁을 해서 동찬을 방송국 사람으로 만들었다. 당시 윤숙은 신의 한수라고까지 자평했었다. 그러나 십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다 보니 윤숙은 '신의 한수'라고 속으로 좋아했던 자신이 너무 일찍 호들갑을 떨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윤숙의 눈에 동찬은 눈치 없이 답답한 사람이었다.

  방송국에서 일 이 년 하다가 나와서 친정 집안이 하는 회사나 다른 회사에 들어갔다면, 지금 방송국에서 받는 월급보다 두 배는 더 받을 수 있었다. 어쩌면 사업 아이템이라도 들고 나와 사업을 시작하여 지금 월급과는 비교할 수 없는 목 돈을 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황당한 생각까지 했다. 진즉 눈치를 채고 방송국에서 나올 것이지 미련하게 버텨서 근근이 먹고사는 꼴이니 동찬은 곰 중에서도 둔한 미련 곰탱이가 아닐 수 없었다.

  결혼 전에 본 윤숙이 본 동찬의 모습은 지금과는 달랐다. 그 때 동찬의 눈엔 돈을 찾는 사나운 사냥개 같은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먹이가 보이면 진짜 달려들들 것 같은 간절함이 있었다. 그러나 십 년 동안 남들한테 잘난 척 하는 버릇만 몸에 배어서 그런지 아니면 그냥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이제는 그냥 현관문 앞에서 대충 짖어대며 사는 애완견이 된 것 같았다.

  이른 아침부터 회한에 잠긴 윤숙은 시큰둥한 얼굴로 식탁에 앉아 있었고, 동찬은 그런 윤숙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당신은 옷가게 해보면 어때? 아르바이트 써서 손님 접대 시키고 당신은 물건만 골라오면 되잖아."

  "내가 옷가게 해야겠어?"

 

  옷가게 이야기는 얼마 전에 윤숙이 스스로 한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윤숙은 '옷가게' 소리를 끄집어 낸 동찬에게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동찬에게는 뭘 해도 안 되는 아침이었다. 동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식탁 끝에 그림처럼 앉아 있는 단비로 옮겨졌다.

 

  "단비 방학특별보충수업은 안 가니?"

  "우리 학교는 그런 거 없는 데요."

  "그런 게 없다고?"

 

  동찬이 단비가 한 말을 천천히 씹어 말하듯 되물었다. 이번에는 단비가 아차 싶었다.

 

  "빨리 전학을 시키던지 해야지. 내 원.... 그리고 당신 비자 신청은 다 끝난 거지?"

  "빠꾸당했잖아. 서류 미비로."

  "당신이 걸릴 게 뭐가 있어?"

  "한 번 작은 거에서 걸리니까 아주 지랄 맞더라고. 신경질 나는 데 캐나다로나 가버릴까...."

 

  윤숙은 단국이와 둘이 미국에 이 주 정도 갔다 오려고 비자를 알아보는 중이었다. 원래는 다음 해 여름에 미국에 가겠다고 했으나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겨울에 당장 가겠다고 나섰다. 그런데 비자가 안 나오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아침 식사시간이 끝나는 듯 했는데 동찬이 갑자기 뭔가 생각이 났다는 얼굴로 윤숙에게 다시 말을 했다.

 

  "단비 영수 과외 선생님 좀 알아봐."

 

  '이건 또 뭐지?' 단비는 입 한 번 잘못 놀려 아침부터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윤숙은 이런 질문에 준비되어 있었다는 듯이 차분하게 대답을 했다.

 

  "단비는 과외가 급한 게 아니라 미술학원을 알아봐야 해."

 

  동찬은 윤숙의 입에서 나온 미술이라는 단어를 듣고 놀랐다.

 

  "쟤는 예체능이 답이래. 가까운 길 놔두고 왜 돌아가?"

  "당신이 어떻게 알아?"

  "학교에 단비 엄마라고 전화해서 담임이랑 이야기 해봤어."

  "그래도 우리 단비는 인문계야."

 

  윤숙은 치밀하게도 단비 모르게 이미 학교에 전화를 해서 알아볼 것은 알아본 것 같았다. 이 집안에서 단비에 대해 비교적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고 있는 유일한 어른은 윤숙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단비는 인문계 쪽으로 가라고 묻지도 않고 우기는 동찬 보다는 윤숙의 치밀함 더 밥맛이 뚝 떨어졌다.

 

  동찬이 출근을 하려고 현관으로 가자 단비가 쫓아갔다. 단비는 방학 내내 집에서 뒹굴 거리겠다는 계획을 재빨리 수정해서, 학교도서관에 가기로 했다. 난방비로 팔 천 원을 내면 선생님 감독 하에 한 달 내내 자습을 할 수가 있었다.

 

  "일반 보충수업은 없어도 도서관에서 하는 '특별보충학습'이라는 게 있어요. 그거 신청해 놨어요. 히히."

 

  신청이야 나중에 학교에 가서 하면 되는 것이었고, 단비는 아빠의 전학 소리를 막으려고 뭐든 한다고 해야 했다.

 

  동찬은 회사로 출근을 했고, 단비는 동찬이 사라지자 방금 전까지 당장 학교에 가기로 한 마음을 바꿔서 하루만 더 집에서 놀다가 가기로 했다. 단비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서 라디오를 틀어놓고 빈둥거리기 시작했다.

  한참 자신의 방에서 꼼짝 않고 있는데 거실에서 윤숙이 친척 동생과 전화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연히 단비의 신경은 방 밖 거실에서 나는 소리에 쏠렸다. 윤숙이 친척 동생에게 또 단비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단비는 본인 이야기가 화제로 등장하는 것이 싫었지만 못 들은 척 할 수 밖에 없었다.

 

  "어쩌겠어. 애 아빠가 데려와 살고 싶다는데..... 뻔하지. 거기에 두면 대학 못 갈 거 같으니까 자기 밑에 두고서 어떻게 해보겠다는 거지. 근데 대학등록금은 하늘에서 떨어져? .... 그렇지. 그게 다 결국은 내 뼛골 빼먹고 괴롭히겠다는 거라니까."

 

  그러니까 윤숙과 친척 동생은 단비를 언제까지 맡아야 할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고, 곧 닥쳐올 단비의 대학 입학에 대해서 걱정까지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동찬의 월급에서 단비의 학비로 돈이 나가는 것이 싫다는 소리 같았다. 그 이야기를 듣던 단비는 갑자기 대학에 가고 싶다는 욕구가 솟구쳤다. 빼먹을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윤숙의 뼛골을 빼먹으며 그 녀를 괴롭히고 싶어졌다. 그러나 윤숙의 뼛골 타령은 그저 속상한 척 하려고 늘어놓는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동찬의 집에서 살면서 윤숙을 가까이서 보면 볼수록, 단비의 윤숙에 대한 미움은 깊어져 갔다. 이를 테면, 단비 자신은 엄밀히 말해 분명 동찬이 정식 결혼에서 얻은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윤숙은 자신을 남편이 집 밖에서 낳은 아이까지 보듬어 주는 속 넓은 조강지처인냥 말을 하고 다녔다. 이렇게 윤숙은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이나 자신이 잘못한 일을 능숙하게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바꿔버렸다.

  또 단비가 발견한 사실 중 하나는 동찬의 가까운 친척들은 대개 서울이나 경기도에 산다고 해도 중구난방으로 흩어져 사는 것에 비해 윤숙의 가까운 친척들은 강남 중에서도 특정 한 두 군데 지역에 모여 살고 있었다. 덕분에 동찬의 친척들은 명절에도 간신히 모였으나, 윤숙은 평소에도 친한 친척들과는 자주 왕래를 했다. 특히 사촌이라는 친척 동생 여자와는 쇼핑을 같이 다니는 사이였다. 그 집 아이는 단국이와 비슷한 나이였고, 단국이와 같은 미술학원에 다니기 위하여 일부러 자신의 집에서 좀 먼 학원에 단국이와 함께 등록을 했다. 단비가 알기에 아빠 쪽 친척들 중에 나이 드신 어른들 말고 젊은 사촌지간에 이렇게 가깝게 지내는 경우는 없었다.

  또 윤숙이 이웃들과 두루 어울리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단국이가 유치원에 가고 학교에도 입학하게 되자, 윤숙은 이웃 학부형 엄마들 몇 명과 알고 지내는 거 같았다. 단비는 '악독한 새엄마'가 혼자 고독하게 살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는데 그런 생각은 그야말로 선입견에 불과했었다. 윤숙은 그런대로 사람들 속에서 어울려서 잘 살아가고 있었다.

  또 단비는 윤숙이 명절이나 제사 때에 아예 시댁 문턱을 넘지 않고 산다는 것을 꽁꽁 숨기고 살 줄 알았었다. 그러나 윤숙은 자랑까지는 아니더라도 주위에 떳떳하게 잘도 말하고 다니고 있었다. 거기에 더욱 놀라운 것은 동네 여자들이 윤숙을 좀 냉정하지만 합리적인 여자이며, 한 발 더 나아가서 자신들이 부러워할 대상쯤으로 여긴다는 사실이었다.

  어쩌다 주차장이나 엘리베이터에서 윤숙과 아는 여자들이 만나면 이런 소리들이 들려오곤 했다.

 

  "나도 단국이 엄마처럼 단호하게 해야 했는데. 또 시집에 끌려가서 속만 끓이다 왔지 뭐야."

  "비법 좀 전수해줘. 나도 배워야지 안 되겠어."

 

  윤숙은 아는 학부형 엄마들한테 이런 소리를 자주 들었다. 그리고는 마치 자신은 그냥 내키는 대로 살아온 사람인냥 쿨하게 대답을 했다.

 

  "싫으면 싫다고 해. 간단하게."

  "그래. '노우'라고 말해야 하는데.... 자기 용기가 참 부럽다."

 

  윤숙은 이 동네에서 시집 때문에 신경쇠약증을 달고 사는 여자들에게 마음속에 있는 욕망을 대리 충족 시켜주는 존재이면서, '노우'라는 말을 잘 못하는 사람들에게 참신한 충격을 주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물론 여자들은 윤숙이 그렇게 거리낌 없이 '싫다'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은 남편 집에 비해 친정이 훨씬 잘 살아서 그럴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는 있었다. 주변 여자들은 윤숙이 돈을 믿고 시집에 당당하다는 것도 알았지만, 자신들은 돈이 있다고 해도 시집을 상대하면서 윤숙만큼 당당하고 능수능란할 수도 없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단비가 보기에 이웃 여자들은 윤숙이 왜 그렇게 자주 전화번호를 바꾸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윤숙이 동찬의 친척들을 송충이 취급한 과거 있다는 사실을 몰랐으며, 거의 십 년 세월을 시어머니가 일방적으로 전화를 해도 단 한 번도 전화를 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단비라고 시집에 한이 서려 있는 여자들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더욱 그 마음을 늘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용하는 윤숙이 가증스러웠다. 우연인지 윤숙이의 교묘한 미화인지는 몰라도, 단비는 윤숙이 간교하게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단비는 그날 저녁에 윤숙에게 바보짓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눈치 없이 단국이와 새 엄마의 오붓한 여행, 그것도 새엄마의 여동생 네를 찾아가는 여행에 끼어달라고 해보기로 했다.

 

  “나도 방학 동안에 미국에 가고 싶어요."

  “뭐?”

 

  윤숙 얼굴엔 분명 이 웬 뚱딴지 같은 소리야’라는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단비는 윤숙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았다. ‘내가 니 아빠가 벌어 오는 돈으로 단국이 미국에 보내는 줄 아니? 아니야. 친정에서 받은 돈이야. 그 돈으로 나랑 내 아들 미국 가보겠다는 데, 니가 왜 나서는 거야?’였다.

 

  "아빠가 허락 안 하실 거다."

 

  윤숙의 이 말은 동찬의 허락 없이는 이 집안에서 그런 중요한 결정이 내려 질 수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아빠가 허락하시면 저, 미국 보내 주실 거예요?"

  "공부나 해."

 

  윤숙은 이치가 빤한 아이가 떼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아서, 미간이 찌푸려졌다. 오 단비, 남편 전처의 딸이며 앙큼한 성격에 야단칠 일을 잘 만들지 않는 아이였다. 윤숙은 단비가 고집이 있는데다가 눈썰미가 있어서 다루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를 닮아서 인물이 못 나지 않았고 재주가 있어 보였다. 재주 하나 만으로도 윤숙은 단비에게 어떤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윤숙이 동찬에게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감정인지도 몰랐다. 윤숙은 단비를 볼 때마다 저 아이를 잘 구슬려서 자신에게 고마운 감정을 갖도록 만들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단비를 한 집 식구로 받아들여 사는 이유였다.

  그러나 윤숙은 저 건방진 아이는 자신의 노력을 평생 인정 안 할 것이라는 것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단비는 윤숙이 전처 자식의 바람을 외면하는 계모의 모습을 자꾸 보이도록 옆에서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윤숙은 ‘내가 새엄마 노릇이라도 해주는 걸 고마운 줄 알아’라는 말이 치밀어 오르고 있었지만 참고 있었다.

 

  “미국은 학교 졸업하고 니가 알아서 가라.”

 

  단비는 윤숙이 허락해 줄 거라고 기대는 하지 않았기에 윤숙의 거절이 그렇게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그저 단비는 아둔한 말로 윤숙의 심기를 손톱만큼이라도 건드렸다는 데에 심리적 쾌감을 느꼈다.

  단비가 보기에, 윤숙은 자신이 새엄마라는 이유로 단비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단비는 윤숙이 새엄마인지 아닌지에 큰 관심이 없었다. 친엄마마저 포기하고 가버린 마당에 새엄마든 누구든 무시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단비는 윤숙이 김 여사한테 하는 짓, 십 년 째 철저하게 무시하는 그 짓이 끔찍이도 싫었을 뿐이었다. 단비가 추정컨대 윤숙은 이 사실을 죽을 때까지 이해 못 할 거 같았다.

 

  그날 밤, 단비는 자신의 방에서 혼자 있다가 며칠 전에 교실 구석에서 집을 나오고 싶다며 울던 친구 생각이 났다. 걔네 부모님이 이혼을 할 것 같다는 것이었다. 중학교 때는 아버지가 엄마와 애들을 때려서 도망 나온 애도 봤었다. 그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주위에서 한결같이 애뜻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부부들이 많지 않다는 것 쯤은 단비도 알고 있었다. 그런 집들에 비하면 동찬과 윤숙은 훨씬 화목하게 사는 것이었다. 알콩달콩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살벌하게 싸우는 일도 없었고, 윗집 여자 욕이라도 함께 하는 사이였다. 단비는 윤숙과 동찬이 괜찮은 부부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좋아 죽고 못 살 것처럼 그리워하는 부부란 드라마나 소설에나 있는 것이라고들 하니까, 두 사람 정도면 괜찮은 인연인 것 같았다.

  그렇지만 여전히 윤숙과 잘 사는 동찬에 대해 의문이 말끔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동찬이 회사일로 바쁘게 살아왔다지만 오랫동안 살아온 부부이니 윤숙이 얼마나 가증스러운지 잘 알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무던하게 잘만 사니 새삼 동찬의 속이 궁금해졌다.

  '아빠는 성격적으로 원래 무딘 사람일까? 아마도 단국이 엄마네 집이 부자라서 다른 면은 그다지 중요치 않다고 받아들이는 걸 꺼야. 혹시 그것도 아니라면 참을 수밖에 없어서 참고 사는 것일까....'

  도대체 동찬의 마음은 어느 쪽인지 단비는 알 수가 없었다. 한 가지 단비가 확실하게 말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은 이 집에서 이질적인 존재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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