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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스윙 - 그해 우리의 헛 방망이질
작가 : 톰과제리2
작품등록일 : 2018.11.19

1990년 서울의 산동네, 이화동을 배경으로 한 성장 소설.
화가인 엄마는 이혼 후 미국으로 자신의 성공을 위해 이민을 갔고,
아빠는 새로 결혼한 여자와 강남 아파트에서 단란하게 살고 있다.
할머니의 미싱 일을 도우며 살던 단비가 아빠 집으로 들어가 살게 된다.
그러나 위선적인 아빠와 새엄마에게 염증을 느끼고
학교에서 도둑 누명을 쓴 절친, 민희와 학교를 탈출하여
친엄마의 친척들이 살고 있는 여수로 떠난다.
그러나 마주하게 된 진실은 단비가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민희는 실제로 지갑을 훔쳤고 위선적이기만 한 아빠에게도 하나의 진실은 있었다....

 
8. 지덕쳇! 괴상한 학교
작성일 : 18-11-19 10:48     조회 : 290     추천 : 0     분량 : 14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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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지덕쳇! 괴상한 학교

 

  B여고는 시내에서 제일 붐비는 길 중 하나인 종로에서 겨우 한 블락 정도 떨어져 있었으나 도심의 부산스러움과는 상관없다는 듯 초연하게 서있는 학교였다. 학교 주변에 수 십 층 짜리 현대식 건물들도 꽤 있었지만, 그 동네는 밝은 날도 응달 속에 있는 기분이 들게 하는 곳이었다. 아마도 B여고 뒤에 고요한 한옥 동네가 숨어 있어서 그런지도 몰랐다. 그리고 걸어서 얼마 안 걸리는 거리에 창경궁, 비원, 종묘 같은 조선의 궁궐이 섬처럼 흩어져 있어서 도시의 소음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 동네에선 사무실이 꽉 들어찬 평범한 건물조차 비밀스런 사연과 음모를 많이 품고 있을 것으로 보였고, 앞으로 나서기 보다는 뒤에 물러서서 자신만의 시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같은 느낌이 들었다.

 

  B 여고에 입학한 후, 어느 새 일 학년, 이 학기도 반 쯤 지나 가을이 되었다. 평화로우면서 따분한 일상의 날들이 계속 되었다. 단비가 김 여사 집에서 중학교 다니던 때가 불과 일 년 전이었지만 아주 오래된 과거 같았다. 산동네의 집에서 아파트로 주거 환경이 바뀌어서 이기도 했고, 고등학교 생활이 중학생 때와는 많이 달라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단비는 입학 후, 학교 근처 지리에 익숙해지면서 방과 후에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날들이 점차 늘었다. 집에 아주 늦게 들어가는 것은 아니었고 그저 삼 십 분이나 한 시간 쯤 학교 주변을 배회하다가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갔다.

  왠지 모르겠지만 학교 뒤쪽으로는 갈 생각이 들지 않았고, 한옥과 일본식 집들이 섞여서 남아 있는 학교 앞 큰 길 골목을 주로 쏘다녔다. 그 골목들을 헤매며 다니다가 빠져나오면 옛날 밥주발이나 개다리소반, 작은 불상 같은 민속품들을 거리에 내놓고 파는 큰 길로 나올 수 있었다.

  중학교에 비해 다른 것은 학교 주위 환경만이 아니었다. 단비는 수업시간만 아니라면 교실에서 만화책을 마음 놓고 펼쳐놓을 수 있었는데, 중학교 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중학교 때엔, 학교에 만화책을 들고 온 다는 것은 당연히 안 되는 것이었고, 연필로 그린 만화 컷들이 담겨 있는 '연습장'마저 면학 분위기를 해친다는 이유로 소지품 검사에서 압수당한 적도 있었다. 단비는 고등학생이 되어 대단한 자유를 누리는 것만 같아서 불안할 지경이었다.

  최소한 B 여고에서는 학생의 연습장까 지 트집을 잡아 뺏을 선생님은 없었다. B 여고 교사들은 그런 사소한 것 따위엔 관심도 없었다. 오히려 방송반을 맡고 있는 국어 선생님은 단비의 연습장을 보고는 즉석에서 방송반 게시판을 꾸미는 일을 맡아 달라고 제안을 할 정도였다. 덕분에 단비는 게시판과 무대 미술 담당하는 역할로 방송반원이 되었다.

  단비는 이제 중학교 때와는 달리 무작정 선생님이라는 존재를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다. 반 아이들에게 단비 자신이 먼저 연습장을 보여주고, 보겠다는 아이들이 많아지면 순서도 정리해주기까지 했다. 반 아이들은 단비가 연습장 책에 들인 노력과 시간을 알아주며 기꺼이 독자가 되어주었다. 단비로서는 동찬이 아직 미련을 못 버리고 있는 K 고로의 전학은 점점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이 되어갔다.

 

  그렇다고 해서 단비가 B여고에 대해 아무런 의문사항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B 여고엔 수업 시간 이후에 남아서 하는 '강제자율학습'이 없었다. 이학년부터 원하는 학생들만 신청을 받아서 학교 도서실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단비는 시내의 모든 인문계 고등학교는 방과후에 학생들을 자율학습 명목으로 저녁 아홉시나 열시까지 잡아 두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학생들은 '지옥의 입시 경쟁'으로 공부만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안 그런 학교도 있었다. 바로 B여고였다. 단비는 강제적인 자율학습이 없어서 좋았지만 다른 학교 학생들은 다 한다는 것을 안 하는 것 같아서 약간은 불안하기도 했고 서운하기도 했다. B여고가 이상한 학교라는 생각도 했다.

  학교 친구들의 말에 의하면, B여고는 여러 동네에서 주소지에 따라 배정될 때 배정되지 못하고 남는 아이들이 배정되는 학교였다. 그래서 비교적 멀리에서 버스를 타고 오는 애들도 많다고 했다. 학교 뒤 쪽의 한옥과 개인주택 마을이 있다지만 그 동네에 있는 학생들은 B여고가 아닌 다른 곳으로 배정이 되었다. 그래서 B여고 학생들은 스스로를 '외인부대'라고 불렀다. 다른 학교에는 있는 열혈 학부형이 B여고엔 매우 적었는데, 선배들은 그 이유가 학생들이 사는 동네가 여기저기 띄엄띄엄 있어서 엄마들이 뭉쳐서 학교에 뭔가를 요구할 수가 없어서라는 '예리한' 진단도 내놓고 있었다. 어찌 보면 '자율학습'이 없는 B여고의 모습은 지극히 정상적이었는데, 교사나 학생들이나 이 상황을 정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언제부터인지 교사들은 학생들에 대해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있었고, 그런 '비정상적인' 학교 상황이 억지로 이런 '정상적인 학교 모습'을 만들고 있었다.

 

  '외인부대'와 함께 스스로를 자조적으로 일컫는 말 중에 '지‧덕‧쳇, 교육을 실천하는 학교'라는 말도 있었다. B여고는 봄이면 체육대회, 가을이면 합창음악대회에 축제까지, 학생들이 감성을 개발할 수 있는 행사를 꼬박꼬박 열었다. 이런 행사들은 B여고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유독 이 학교의 일, 이학년 학생들은 열과 성을 다해 행사에 참여를 하는 분위기였다. 단비가 입학했을 때만 해도 그런 행사들은 명목상 몇몇 학생들만 나서서 몇 시간 하다가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러다가 단비는 온 반이 몇 달 동안 열심히 준비하는 것을 보고는 내심 놀랐었다.

  결과만을 놓고 말할 때, 졸업 후에 사 분의 일 이하의 학생들만 대학을 가는 통계가 나오는 학교였으니 많은 학생들이 특별활동을 하면서 즐겁게 학교를 다니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공부를 하겠다는 상위권자들은 알아서 자기 나름대로 공부를 하면 되었다.

 

  '때르르릉', 사 교시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국사 선생님인 허현식이 교실에 들어왔고 수업이 시작되었다.

 

  "크게 보자면 여기 북악산과 남산 사이, 청계천이 흐르는 이 땅이 사대문 안이자 조선의 핵심이란 말이지. 청계천이 특이하게 이렇게 흐르는데 남쪽 건너편이 남촌이고 반대 건너편은 북촌이야. 남촌엔 주로 벼슬에 나가지 못한 선비들이 많이 살았고, 북촌은 궁궐이랑 가까우니까 세도가 양반들이...."

 

  허현식은 향토사학자가 되어 학교 주변을 칠판에 지도를 그려가며 설명을 하고 있었다. 정규 진도는 고대사 부분이었지만, 수업시간의 마지막 오 분 정도는 늘 다른 이야기를 하는 편이었다. 그는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온 도시의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그의 머릿속엔 한양과 경성의 도심 지도가 그려져 있는 듯 보였다.

 

  "청계천 주변으로는 중인들이 많이 살았는데, 광통교가 여기 쯤 있었고, 광통교 앞에는.... 여긴 구름 언덕이라고 불려서 한자로 운현궁이 있는 거야. 이 동네에 역사 깊은 사립고등학교들이 몰려 있는데, 재단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일제 시대 때 세워졌지. 지금까지 학교 세운 집안들이 운영 하고 있어."

  "우리 학교 재단도 그렇죠?"

 

  국사 선생님 턱 밑, 맨 앞자리에 앉은 영경이가 한 마디 했다. 잠시 국사 선생님의 얼굴에 '하필 왜 그걸 묻냐'는 듯 난감한 표정이 살짝 스쳤다.

 

  "에... 학교를 세운 분들은 자본주의를 빨리 파악하고 앞서나간 선구자라 할 수 있지. 그런 소리 하려고 한 말은 아니고. 옛날에 우리 학교를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던 학교들은 죄다 교외로 이사 나갔거든. 우리 학교는 그냥 있지만. 아무래도 아파트같은 대규모 주택지가 있어야 학생이 많거든."

 

  잡담이나 야사도 논리 정연하게 풀어내던 국사 선생님의 이야기가 뭔가 건너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그 날따라 줏대 없이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문화재 관리를 잘한다고 할 수는 없어. 내가 어제 오면서 보니까 우리 옆 학교 담장이 옛날 조선 말기에 지어진 궁궐 부속 건물 담인데 말이야, 구석이 좀 허물어졌다고 시멘트로 바르고 있더라고. 저쪽 ** 고등학교 이사 간 자리에 남은 소나무는 조선 후기에 좌의정을 지낸 김**가 심은 건데...."

 

  그 때 다른 애 하나가 끼어들어 말을 했다.

 

  "선생님. 우리 학교 뒤 공터 우물, 시멘트로 막았어요. 그거 조선 시대에 동네 우물이라서 궁녀들이 빠져 죽었다면서요."

  "그런 설이 있지. 그래서 비오는 날이면 니네 선배들 중에...."

 

  국사 선생님이 근엄하고 학구적으로 보이는 분위기를 걷어 내고 씩 미소를 지었다. 아이들이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아이들은 무서운 척 표정을 지으며 한 마디씩 거들고 나섰고, 아우성을 치다시피 떠들어 대기도 했다.

 

  "복도로 귀신 나온데요."

  "막아놔도 귀신이 우물에서 기어 나온데요."

  "무서워요."

  "복도 천장에서 물 새는 자리가 귀신 나오는 자리래요."

 

  단비가 시계를 보니 수업 끝나기 일 분 전이었다. 문화재 얘기로 시작했으나 끝은 귀신 얘기로 허무하게 끝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날도 있기 마련이고 단비는 다른 수업보다는 훨씬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오후에 잡혀 있는 재미 없고 암울하기 까지 한 물리, 영어 같은 수업에 비하면 귀신 얘기라도 나온 것은 꽤나 재미있는 수업이었다. 그러나 그 때 어떤 애의 입이 작은 사고를 치고 말았다.

 

  "졸라 무서운 얘기네요."

 

  그리고 국사 선생님의 입에서 애들과 단비를 놀라게 한 대답이 튀어 나왔다.

 

  "요즘 애들은 왜 이렇게 천박한지 모르겠어!"

 

  교실에서 나가려고 출석부를 만지작거리던 국사 선생님의 얼굴에 경멸의 빛이 스쳤다. 수업시간 내내 무표정한 얼굴로 있다가 귀신 얘기에 갑자기 생기가 돌던 아이들은 국사 선생님의 표정을 보고는 순식간에 얼어붙고 말았다. 학교란 곳에서 항상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아왔을 터인데 국사 선생님은 여고생들이 이런 말을 쓰는 것을 아예 본 적이 없다는 얼굴이었다. 어쩌면 정말 처음 본 것일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단비는 어이가 없었다.

  교실 분위기가 급격히 바뀌자 '졸라'라는 단어를 말 한 애는 자신의 입을 꿰매고 싶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국사 선생님은 잠시 무엇인가 더 모욕적인 말을 생각하려는 듯 보였으나 마침 수업을 끝내는 종이 쳤다. 국사 선생님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도로 차갑게 그 아이를 째려 본 다음 교실을 나갔다. 모든 아이들의 시선이 그 아이에게 꽂혀 있었고 교실은 조용했다. 그러나 그 때 주위에 있던 친구들이 그 아이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면서 말을 걸었다.

 

  "잘했어. 국사 완전 이중인격자야."

  "뭘 그렇게 모르는 척이야."

 

  그 아이는 얼떨결에 경직되어 있던 어깨를 풀고 웃어 보였다. 비로소 반 분위기가 쉬는 시간답게 돌아왔다. 아이들이 목소리 높여 떠들기 시작했다.

 

  "완전 백조 아니냐? 겉으론 우아한 척 물 위에서 떠 있는데, 물속에선 양 발을 이렇게 엄청 저어야 한다는 거야."

  "딱이네. 혼자 고고한 척 하는 거."

 

  점심시간이어서 교실은 자리를 옮겨 다니며 밥 먹는 아이들과 밖으로 나가는 아이들로 시끄러워졌다. 도시락을 미리 까먹은 단비는 혼자 앉아 있었는데 영경이가 뒤를 돌아서 단비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럴 줄 알았어."

  "뭐가?"

  "국사 말이야. 우리 언니가 우리 학교 재단은 친일파가 일제시대에 땅을 거머쥐고 운영해왔다고 했거든. 우리 학교가 요 모양인 것도 재단 탓이고. 근데 국사, 우리 언니도 아는 뻔한 사실을 딱 부러지게 말 못하고 어버버한 거잖아."

 

  영경이는 오빠와 언니가 있는 삼남매의 막내였고, 여섯 살 위의 언니는 B여고 졸업생이기도 했다. 단비는 영경이가 공격적으로 나오자 국사 선생님을 위해 조금은 방어적으로 말하고 싶어졌다.

 

  "그래도 자기가 일하는 학교니까 좀 좋게 말하고 싶었던 거 아닐까. 또 문제가 될 수도 있잖아."

  "문제는 무슨. 설마 경찰이 와서 잡아가겠냐? 그냥 인간이 소심해서 그런 거지."

  "근데 우리 학교 선생님들을 입만 열면 우리 학교가 십 년, 이 십 년 전에 좋았다는 말만 되풀이 하지 않나? 오 십 년 째 똑같은 재단이라 던데 왜 다른 거지?"

  "그 땐 시험 봐서 애들 뽑던 시절이고. 같은 강 씨 집안이라도 지금 교장의 작은 아버지가 맡아서 할 때였다고 하던데 뭘."

 

  거기까지 말하고 영경이는 다른 애들과 교실 밖으로 나갔다. 그날 수업 마지막에 있었던 일 때문인지 아이들은 계속 국사 선생, 허현식에 대해 험담을 하고 있었다.

 

  "야, 국사가 또 졸라 싫어하는 게 뭔 줄 알아?"

  "뭔데?"

  "조용한 자습시간에 코를 팽 풀거나 방귀 뀌는 사람. 그리고 쉬는 시간에 '똥 싸러 가자'라고 소리치는 애. 큭큭큭."

  "그 때 천한 것들이라고 했냐?"

  "응. 근데 애들 앞에서 못하고 뒤 돌아서서 중얼거렸대. 푸하하."

 

  확실히 그날 단비는 국사 선생인 허현식에 대해 실망스러웠지만 그를 조롱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래도 허현식 덕분에 단비는 학교 주변에 있는 운현궁과 천도교 회관, 조선시대 고관들의 집터를 알아보게 되었고, 그것은 단비에게 소소한 기쁨을 안겨 주었다. 한 가지 우스운 사실은 똑같이 수업시간에 듣고도 아무도 단비가 기억하는 것들을 기억하는 아이들이 없다는 것이었다.

 

  단비는 학교 근처 만화방에서 빌린 만화책을 돌려주기 위해서 교실을 나섰다.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누리는 자유 중 하나는 점심시간 같은 때에 잠시 학교를 빠져 나갔다 올 수 있는 것이었다. B여고도 다른 학교처럼 교칙으로 일단 학교에 오면 방과후 시간 전에 교사의 허락 없이 절대 학교 밖으로 나다닐 수 없도록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이 학교 학생들은 점심시간에 살금살금 눈치를 보면서 나다녀도 뒤탈이 없었다.

 

  단비는 다 본 만화책을 반납하고 교문 밖을 나간 김에 군것질 거리까지 사가지고 당당히 교문을 통과하여 학교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하필이면 그 때 본관 건물 쪽, 교문 맞은 편에서 교장인 강경민이 걸어오는 것이 눈에 뛰었다. 큰 키에 작은 두상, 노년임에도 호리호리한 몸에 좋은 양복, 멀리서 보면 멋진 신사의 모습이었다. 얼굴만 빼고 보면 분명 그는 그랬다.

  그러나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게 되는 순간, 더 정확하게 눈을 보게 되는 순간 생각은 변했다. 단비는 교장과 맞닥뜨린 순간 허락 없이 밖에 나갔다 온 것이 켕겨서 속으로 움찔했었고 군것질 거리를 든 손은 반사적으로 뒷허리로 숨기고 있었다. 그런데 교장은 학생을 향해 웃지도 화내지도 않은 맹해 보이는 얼굴로 그냥 자신이 가던 길을 가버렸다. 정말 멍청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물론 교장이 그 짧은 순간에 학생들이 무단 외출을 했다는 것을 모를 수도 있고, 사무적으로 신경 쓸 일이 많아서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린 학생들도 예감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었다.

  그 때 이미 지나가 버린 교장의 뒷모습에 대고, 단비 옆에서 누군가가 잽싸게 뱉어낸 말이 들렸다.

 

  "아우, 흐리멍덩한 눈. 병딱!"

 

  그 말은 조금 전에 단비도 떠올린 말이었으나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이었다. 단비 옆으로 최민희가 스윽 지나갔다. 약간 큰 키에 여윈 어깨, 장작개비처럼 뻗은 팔과 다리, 단단해 보이는 뒷모습이었다. 단비는 금세 민희에게 주의를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나 평소에 교실에서 말을 한 사이가 아니라서 단비는 민희의 뒷모습을 잠시 보다가 교실로 들어왔다.

 

  교실로 돌아온 단비는 주위의 친구들에게 교장을 만난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모두 신이 나서 맞장구를 쳤다.

 

  "우리 학교가 조회를 한 학기에 한 번 씩만 하는 게, 국어가 훈화말씀 원고를 써줘야 하는데 매번 못 써줘서 그렇다며. 교장은 원고 못 쓰고."

  "삼 년 치 써놓은 거 번갈아 읽는다던데. 그마저도 교장이 원고를 이상하게 읽어서, 애들이 뭐라 할까봐 안 하는 거래."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

  "큭큭큭"

 

  입학한 후 했던 첫 조회 때부터, 교장은 좀 이상하기는 했었다. 단상에서 교장은 분명 시선을 원고에만 두고 연설을 하고 있었는데, 띄어쓰기마저 이상하게 읽어서 뭔 말인지 알아듣기가 힘들었었다. 그래도 그 땐 말투가 어눌한 어른이려니 했었다.

 

  "그러면서 교장은 어떻게 됐데? 교사 한 거 맞아?"

  "물려받은 거잖아."

  "대학 졸업장은 있을까?"

  "체육대 나왔는데 당구가 주종목이었고 포커가 부 종목이었데."

  "그 옛날에? 푸하하하."

 

  아이들의 짖고 까부는 이야기를 그대로 믿을 수 없었지만 단비는 그날 오후에 본 교장의 멍한 눈동자를 생각하면 그렇게 크게 과장된 얘기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니들 우리 학교 젊은 선생님들 중에 유독 강 씨가 많은 거 알지?"

  "아는데, 새로 온 가사는 이 씨던데?"

  "그 여자는 엄마가 강 씨래. 외가가 재단 친척."

  "그걸 어떻게 알아?"

  "지가 딴 반 수업시간에 말했다고 하더라."

  "푼수."

  "새로 온 수학은 최 씨잖아. 그 쪽도 엄마가 강 씨라는 거야?"

  "야, 수학은 임시잖아. 정규로 온 게 아니고."

 

  단비 반, 원래 수학니선생임은 정년퇴임을 일 년 앞두고 있었는데, 삼 주 전에 갑작스럽게 고혈압으로 교무실에서 쓰러진 후, 곧바로 학교 옆 병원 응급실에 실려갔으나 사망선고를 받았다. 돌아가신 선생님의 유족은 학생들의 조문을 받지 않았다. 다만 장례식이 끝 난 다음 관을 실은 영구차가 평생을 몸담았던 학교 운동장을 몇 바퀴 돌다가 나갔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 간 늦은 오후, 단비와 몇몇 학생들은 본관 옆 방송실 창밖으로 영구차가 운동장을 서서히 도는 광경을 우울한 얼굴을 하고 보았었다. 교사의 부재 상황이 발생했으니 학생들은 일주일 정도 자습을 해야 했고 학교는 부랴부랴 임시 교사를 구해야 했다. B여고에서는 이렇게 기이한 일들이 자주 일어났다.

 

  "그럼 수학 내 년에 우리 학교로 정식 부임하는 건가?"

  "그야 모르지. 올해만 땜빵하고 다른 선생님이 온다는 말도 있으니까."

  "그냥 쭉 우리 학교에 남았으면 좋겠는데."

  "야, 니들 같으면 우리 학교에 남고 싶겠냐?"

  "우리 학교가 어때서?"

  "그래. 나름 좋지. 자율학습도 없지. 보충 수업도 있는 둥 마는 둥이지. 학생 생활지도 하라고 닦달하는 교감도 없지...."

  "기지배들 교실 마루바닥에 침 뱉지, 침 뱉는 다고 주위 년들은 싸움 걸고 머리 끄댕이 잡지."

  "교복 짧게 입은 년들이 꼭 다리 벌리고 앉지, 이 교시 끝나고 도시락 까먹고 창문 안 열지..."

  "암. 분위기 좃 같은 거 유명하지."

  "클클클"

 

  아이들과 한참 정신없이 떠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단비는 자신의 시선이 교실 반대편에 앉은 최민희에 가있다는 것을 알았다. 민희는 다른 때와는 마찬가지로 책상에 엎어져 있었다.

  단비는 그 날 이전에도 교실에서 민희를 의식한 적이 몇 차례 있었다. 그 때마다 단비는 민희에게 말을 걸고 싶었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다. 단비가 교탁을 중심으로 오른쪽 앞자리에 앉아 있다면 민희의 자리는 교실 제일 뒤쪽 휴지통 주위였는데, 대각선으로 가장 먼 거리였다. 그리고 민희 앞자리와 옆자리엔 학교를 일주일씩 안 나온 적이 있다거나 근처 야간 고등학교 애들과 싸웠다는 소문이 도는 애들이 포진해있었다. 앉은 자리로만 보자면 좀 센 애들이 호위 병사들처럼 민희를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었다. 거기다가 민희는 쉬는 시간 대부분을 엎드려 있었는데 '나 건들지마'라고 말하는 듯 보였다.

  민희는 혼자였고 민희와 같은 학교를 졸업했다는 아이도 본 적이 없었다. 교실에서 민희 자리 주위로 좀 쎈 애들이 배치된 것은 우연이었으며 민희가 걔들과는 함께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면서 민희는 교실이든 학교 밖에서든 큰 소리로 떠들어서 아이들이 자신을 보게 만드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규율을 어겨서 선생님들이 민희의 이름을 부르도록 만드는 일도 만들지 않았다. 단비는 그런 민희가 멋져 보였다. 그래도 아이들은 민희에 대해서 관심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민희가 노래를 잘 해서, 방과 후에 어느 업소에 나가 노래를 부른다는 말이 돌았지만 본인에게 직접 물어 봤다는 애는 없었다. 민희가 맨날 학교에서 엎드려 있는 것은 밤에 일을 해서 피곤해서라는 것이 반 아이들의 근거 없는 설명이었다.

 

  단비는 자신의 비장의 무기라 할 수 있는 연습장을 꺼내 들었다. 선생님이나 아이들한테 관심을 받고 싶을 때 단비는 늘 만화 연습장을 내보이면 성공을 했었다. 단비는 일부러 민희 자리 근처까지 갔다.

 

  "야, '미스터 블루' 삼 권 새로 그렸거든. 볼 사람?"

 

  단비가 일부러 민희 쪽을 흘끗 보면서 물었다. 주위의 애들이 단비 손에 들린 책에 시선을 두면서 보여 달라고 하고 있었다. 그러나 민희는 다른 때보다 더 몸을 웅크려서 책상 위에 엎어져 있었다. 분명 관심 없는 척이었다. 단비는 가까이에 가서 그렇게 느꼈다. 단비는 민희가 취하는 저 '웅크리기'라는 가면을 벗겨 보고 싶은 오기가 마음속에 생겼지만 그렇다고 억지로 다가가서 말을 걸을 수는 없었다. 실망한 단비는 연습장을 누군가에 줘버리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단비네 반에서 아이들이 '암울 삼종 세트'라고 이름 붙인 선생님들이 있었다. 아이들이 좋아하거나 존경하는 선생님 쪽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미움과 두려움의 대상도 아니었다. 존재가 잘 드러나지 않는 선생님들일 뿐이었다. 아이들도 이 분들이 최악의 선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선생님들도 직장인이고 수업만 제대로 이행했다면 뭐라 꼬투리를 잡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학생들의 별명 붙이기 놀이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암울 삼종 세트는 지리, 영어, 물리 선생님이었다.

 

  지리 선생님은 항상 양복을 입고 팔뚝엔 토시를 하고 교실에 들어왔다. 일제시대 관청 서무과에서 하루 종일 주판을 튕기는 주임 같은 모습이었다. 양복이 단 벌 밖에 안 돼서 소맷부리가 닳을까봐 토시를 끼고 다닌다고 했다. 와이셔츠도 단벌이어서 한복 동정 갈아 끼우듯이 칼라를 갈아 끼우고 다닌다는 소문도 돌았는데 확인 된 바는 없었다. 수업은 그런대로 열심히 하셨지만, 규율을 잡는 자리에 절대로 나타나는 일은 없었고, 학생들과 싸우지 않고 그냥 조용히 지내려한다는 것을 아이들도 본능적으로 알았다. 하여튼 꽤나 가난해 보였고, 아이들은 조용히 수업만을 들었다.

  영어 선생님은 집에 우환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얼굴이 어두웠다. 항상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어서 진한 눈썹은 송충이처럼 보였고, 아침에 면도한 수엽이 오후만 되도 도로 시커메지는 듯해서 안 그래도 수심 가득한 얼굴을 더욱 어둡게 만들어 주었다. 더구나 학생들 얼굴은 안 보고 혼자서 수업을 하다가 나가기 일쑤였다. 물론 영어 선생님이 아무리 잘 설명을 하려고 해도 애들 태반이 수업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태도 불량인 애들도 꽤 있었다. 언제인가는 참다 못 해 한 번 크게 학생들을 야단 친 적이 있었다.

 

  "니들이 그 좋았던 학교를 망쳐 놓은 거야! 얼마나 좋았는줄 알아?"

 

  영어 선생님은 이 말을 한 번 했는지 몰라도 아이들은 이 소리를 일 년 사이 꽤나 여러 번 들었어야 했다. 그런데 학생들 입장에서는 안타까운 것이, 선생님들이 좋았다는 그 시절은 시험을 봐서 고등학교를 오던 시절이라는 것이었다. 상위권 애들은 '내가 그 시절이면 이 학교 안 온다'라는 눈초리로 선생을 보았고, 나머지 애들은 그 옛날과 지금을 왜 비교하는 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선생을 무시하는 눈초리로 쳐다봤다.

 

  세 번째는 원래 수학 선생님이었다. 그 분은 열성적으로 수업을 하셨으나, 많은 애들은 수학이라는 과목은 일단 포기하고 수업 시간에 집중을 하지 않았다. 다만 선생님이 아이들의 무성의한 수업태도에 교단에서 핏대를 세우는 일이 생기면 붉었던 안색이 검게 변하곤 했는데, 아이들을 뭔 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에 갑자기 선생님 얼굴에 집중을 했었다. 그럴 때 수학 선생님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그냥 가슴이 조마조마 떨려왔다. 그런데 그런 수학 선생님이 일 학기 중간고사가 끝나고 얼마 후, 갑자기 호흡 곤란으로 쓰러지더니 사망했다. 아이들은 교사가 죽었다는 사실보다 자신들의 불길한 예감이 맞아서 더 간담이 서늘해졌다.

  수학 선생님이 돌아가시자 아이들은 삼종 세트에 새로운 인물을 갖다 붙였다. 새로운 인물은 물리였는데 이 여자는 여러 모로 앞의 선생님들과 다른 분위기였다. 삼 십 대 후 반 정도로 보이는 이 선생님은 원래 유복한 집 출신에 시댁도 부잣집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중형 자동차를 몰고 학교에 출근을 했다. 근데 일주일에 하루 이틀은 운전 보조석에 자신이 키우는 값이 나가 보이는 미디엄 푸들을 태워 데리고 왔다. 그리고 그 강아지는 주인이 일을 하느라 바쁜 시간에 학교 주차장 옆, 수위실에 맡겨졌다. 학생들은 업무시간에 자신의 애완견을 학교에 데리고 오는 것이 합당한 일인지 따지기 이 전에, 그 귀족스런 풍모를 뽐내는 개에게 일단 반해버려서 다가가 쓰다듬어주기에 바빴다.

  헤어스타일마저 자신의 푸들처럼 옆머리를 늘어뜨려 파마를 한 물리 선생님은 강아지를 사랑하는 긍정적이고 밝은 인격체답게 늘 웃는 얼굴로 생활에서 느끼는 소소한 이야기를 하면서 즐겁게 수업을 이끌어가려했다. 그런데 물리 선생님의 재미는 악의적으로 말을 하자면 미용실 원장 언니 같은 재미였다. 학생들은 물리 선생님의 표정, 몸짓, 말투에서 그 녀가 물리라는 학문의 심오함과 거리가 멀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녀의 인생에서 어느 때이든 심각하게 뉴튼의 힘에 대해서 생각해 본적이 있을까 의구심이 드는 물리 선생님이었다.

 

  학교는 입시 수업 과정이 복잡하니 문과 고 삼 학생들한테 물리를 대입 선택과목으로 지정하지 말도록 아예 못 박아 놨고, 물리라는 과목을 피해갈 수 없는 소수의 고 삼 이과 반 학생들에게 '물리II' 는 혼자 알아서 공부하는 과목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학생들의 속내를 안다고 해도 물리 선생님은 그다지 놀라지 않는 얼굴을 하고 이렇게 말을 할 것 같았다. '세상에 과학 선생님은 모두 과학에 심취해야 하나요? 그것만큼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어디 있죠?' 아무리 밝게 웃어도 암울하다고 생각하는 학생들도 꽤 있었다.

 

  종례시간이었다. 얼마 전에 본 영어 수학 과목, '전국 모의 학력평가' 성적표가 나왔다고, 담임 선생님이 성적표를 나눠 주었다.

 

  "오단비, 이가희, 이영경...."

 

  지난해까지는 이런 시험에 일 학년은 참가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일 학년부터 자신의 수준을 알아야 한다는 항의가 있어서 학교가 일 학년도 시험을 치루게 했다. 그러나 종례시간이 끝나고 아이들은 교실을 나서기 전에 쓰레기통 앞에 서서 성적표를 박박 찢어서 버리고들 나갔다. 부모님들은 잘 모르는 시험이었고 그래서 부모님에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단비도 당장 찢어 버리고 싶은 유혹을 느꼈지만 그래도 교과서에 끼워 며칠 보관했다가 없애 버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이들이 대부분 집으로 돌아간 시간이었다. 단비는 우물쭈물 학교 옆 문방구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학교로 돌아와 운동장 구석에 있는 등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있었다. 운동장은 가을 햇빛을 받아 금빛 웅덩이처럼 잔잔히 빛나고 있었다. 그 때 학교가 끝나면 꾸물거리는 일이 없이 집으로 가던 영경이가 단비를 향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영경이는 지금 자신을 이해해 줄 사람은 단비 밖에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단비 옆에 앉은 영경이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자퇴 밖에 답이 없다.”

  “에?”

  “학교 그만두고 학원이나 다니는 게 나을 거 같아. 너 구윤지, 양원희 알지? 걔들 중학교 때 나보다 공부 못 했잖냐. 둘 다 다른 학교로 갔고. 근데 이번 연합 모의고사에서 일등급에 전국 등수가 되게 좋게 나왔데. **대 영문과 합격 가능 등수라는 거야. 이 학교에선 불가능한 일인데.”

  “아직 일학년이니깐 좀 더 봐야 하지 않을까?”

  “우리 학교에서 최근 이 년 간 재수하지 않고 곧바로 **대에 붙은 졸업생 거의 없었어. 이럴 줄 알았다니까.”

 

  단비는 성적도 상위권이고 학교에서 늘 칭찬 받는 쪽인 영경이 같은 아이가 자퇴 이야기를 꺼낸 것이 신기했다. 단비의 상식 속에 자퇴란 퇴학당할 만큼 큰 사고를 친 아이가 퇴학당하기 전에 어떻게든 좀 더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처벌을 약화시키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아주 가난하거나, 병약해서 학교에 다닐 수 없는 학생이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 자퇴였다.

  영경이의 입장에서는 다른 애들한테 말해 봤자 공부 잘 하는 애의 투정 정도로만 비치겠지만 그래도 단비는 자신과 초등학교부터 동창이고 해서 자신의 입장을 이해해줄만한 아이였다. 영경이 눈에 단비는 성격 무던한 아이였다.

 

  "난 모의고사는 일학년이라서 신경 안 써도 되는 줄 알았는데."

  "너는 예체능이니까 그렇지."

 

  단비가 한 번도 미술을 하겠다는 말을 한 적도 없는데 영경이는 알아서 단비를 예체능 지원자라고 짐작해 주었다. 단비는 갑자기 작은 공격을 당한 기분이 들었고 잠시 의기소침해졌다. 단비가 계속 말을 했다.

 

  "근데 자퇴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거냐?”

  “부모님이 동의하면 돼.”

  “이상한 애들만 하는 거 아냐?”

  “아냐. 우리 오빠 친구 중에 외국어 고등학교에 간 애가 있는데, 거기는 경쟁이 치열해서, 내신 등급이 너무 안 나왔데. 그래서 작년에 자퇴했다고 들었어. 검정고시 봐서 대학 간다고 하더라.”

  “우와....”

  "이럴 줄 알았으면 자퇴하는 한이 있어도 언니가 외고 시험보라고 할 때 보는 건데. 괜히 등록금 비싸다는 소리에 겁먹어서... 단비야, 우리 중학교 정말 좋지 않았냐? 학교가 정말 학교 같았어.”

  "그렇긴 했어."

 

  단비는 필요 이상으로 무서웠던 S 여중 선생님들과 늘 억눌려 있던 기분의 분위기를 싫어했다. 단비는 영경이의 마지막 물음에 '아니, 넌 그랬는지 몰라도 난 아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엄마가 그러던데 너 아빠 집에 들어갔다며?"

  "응."

  "그 쪽 동네 학교 안 가고 왜 이 학교에 온 거야?"

  "뺑뺑이에서 밀렸나봐."

  "너도 운이 안 좋았구나."

 

  단비도 운이 안 좋았다고 생각하니 영경이는 조금이라도 위로를 받는 듯한 모습이었다. 우울해 하던 영경이의 얼굴이 밝아졌다. 영경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고 교문쪽으로 사라졌다. 단비는 얼마 동안 혼자 벤치에 앉아 있는데 영경이가 한 '너도 운이 안 좋았구나'라는 말이 귓가에서 아직 맴돌고 있었다. 그러나 단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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