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1일간 안보이기 닫기
모바일페이지 바로가기 > 로그인  |  ID / PW찾기  |  회원가입  |  소셜로그인 
스토리야 로고
작품명 작가명
이미지로보기 한줄로보기
 1  2  3  >>
 1  2  3  >>
 
자유연재 > 일반/역사
스윙 - 그해 우리의 헛 방망이질
작가 : 톰과제리2
작품등록일 : 2018.11.19

1990년 서울의 산동네, 이화동을 배경으로 한 성장 소설.
화가인 엄마는 이혼 후 미국으로 자신의 성공을 위해 이민을 갔고,
아빠는 새로 결혼한 여자와 강남 아파트에서 단란하게 살고 있다.
할머니의 미싱 일을 도우며 살던 단비가 아빠 집으로 들어가 살게 된다.
그러나 위선적인 아빠와 새엄마에게 염증을 느끼고
학교에서 도둑 누명을 쓴 절친, 민희와 학교를 탈출하여
친엄마의 친척들이 살고 있는 여수로 떠난다.
그러나 마주하게 된 진실은 단비가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민희는 실제로 지갑을 훔쳤고 위선적이기만 한 아빠에게도 하나의 진실은 있었다....

 
5. 이런 것도 형벌일까
작성일 : 18-11-19 10:42     조회 : 295     추천 : 0     분량 : 9491
뷰어설정 열기
뷰어 기본값으로 현재 설정 저장 (로그인시에만 가능)
글자체
글자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5. 이런 것도 형벌일까

 

  곧 날이 밝으면 추석이었다. 김 여사는 자신의 방에서 먼동이 트느라 희뿌연 빛이 감도는 미닫이문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자고 일어났지만 머리가 맑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밤에 김 여사는 프라이팬으로 단비 등짝을 패기까지 하면서 싸웠기 때문이었다.

 

  전날 김 여사는 당숙과 고개 아래 어른이 이번 명절에 안 오실 것 같다는 것을 예감에 사로 잡혀 있었다. 이러한 불길한 생각은 단국이만이라도 꼭 와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단국이가 오기로 되어 있었지만 왠지 불안해진 김 여사는 혀가 마르고 얼굴은 열로 홍조를 띠었다. 이로써 김 여사가 윤숙에게 전화를 해야 하는 이유는 충분해졌다.

  지난 십 년 동안 한 번도 상대방이 전화를 받지 않았음에도 매번 김 여사는 명절이나 제사가 다가오면 전화기 번호를 눌렀다. 세상 누구도 납득할 수 없는 이유였지만 김 여사에게는 매번 그럴 듯한 명분이 있었다. 그러나 유윤숙은 단 한 번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유윤숙이 십 년 전에 이 집 대문 문지방을 넘어간 이후, 김 여사는 유윤숙의 '후'하는 숨소리 조차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김 여사는 십 년 째 저렇게 전화를 포기하지 않고 했다. 김 여사는 윤숙이 단 한 번도 전화를 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만 콕 집어 기억 못하는 부분 기억상실증 환자 같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런 김 여사에게 가장 무서웠던 것은 아들, 동찬이었다. 동찬은 정신과 병원에 상담예약까지 해놓고선 김 여사 몰래 김 여사를 병원에 데리고 가려 하다가 들킨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동찬보다는 머리가 커졌다고 김 여사에게 대드는 단비가 더 무서운 존재가 되었다.

 

  "전화만 걸어봐. 내가 와서 전화기 전기를 뽑아 놓을테니까. 아니 부숴놓을 꺼야."

 

  추석 전날 연휴라서 단비는 학교에 가지 않고 있었다. 단비는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면서 김 여사가 전화기를 드는 낌새만 보여도 득달같이 달려와서 김 여사를 향해 눈을 부릅떴다. 어린 것의 눈치를 보느라 전화를 못 걸자 김 여사는 체한 것처럼 답답한 속을 혼자 다스려야 했다. 결국 김 여사는 그 날 저녁에 마루에 나와 앉아 부침개를 만들다가 단비에게 한 소리를 하고 말았다. 김 여사와 단비의 다툼은 단비가 지난 번 명절에 윤숙의 아파트를 둘러보고 온 것에 대해서 캐묻다가 시작되었다. 윤숙이 김 여사와는 그렇게 철저하게 단절을 했지만 단비에게는 최소한의 친절은 베풀고 있었다.

 

  "지난번에 갔을 때도 집 여전히 깔끔했고?"

  "몇 번을 말해? 그 집 어지럽히는 사람은 아빠라고. 아빠가 지나간 자리만 지저분하다니까."

  "니 새 엄마가 살림은 딱 차고 앉아 잘 하니까 믿고 그러는 거겠지."

  "청소는 파출부가 하잖아."

 

  김여사는 윤숙과 동찬에게 티끌만큼이라도 불리한 말이 나오면 딴청을 피우거나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단국이는 뭐 하고?"

  "뭐하긴. 애인데 학원 한, 두 군데 가고 놀지. 그 여자가 단국이 방 새로 꾸며줬어. 혼자 잔대."

  "벌써 커서 그러는 구나. 근데 넌 몇 번을 말해야 고치니? 단국이 에미도 니 에미야. 같이 살지도 모르는데...."

  "그게 말이 돼?"

 

  덤덤한 말투로 시작한 대화는 점점 신경질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김 여사나 단비나 서로가 듣기 싫어하는 말로 상대방의 마음을 할퀴고 꼬집는 데는 이골이 나 있었다. 거기다가 단비는 이제 컸다고 김 여사에 대해 쉽게 물러나 주지 않았다

 

  "그래도 이치라는 게 있는 게야. 새엄마지만 니가 단국 에미한테 잘 하면 집안 화목해져서 좋고, 그러면 니 애비 집안 신경 안 써서 좋고. 니가 단국 에미한테 투정을 해 쌓으니 아범이 얼마나 신경 쓰이겠니?”

  “이 집안에서 아빠랑 새엄마 사이에서 아빠 피 말리는 건 할머니라고 생각 안 해? 아빠 젤로 괴롭히는 사람이 누군데?”

 

  익숙한 싸움을 하던 두 사람의 대화가 잠시 끊어졌다. 거기서 그만 했어야 했는데, 기어이 김 여사와 단비는 서로의 감정을 더욱 깊게 할퀴고 말았다.

 

  “세상에 애 본 공은 없다드니. 핏뎅이를 사람 멩글어 놨구만. 저래 뎀비는 걸 보면 딱 지 에미야. 암.”

  "할머니는 평생 그 년 목소리 못 들어. 그 년은 끝까지 할머니 인간 대접 안 할 꺼라고!"

  "뭬야? 그 년이라니! 이 년이 어디 어른한테...."

 

  김 여사는 단비의 버르장머리 없음에 참을 수가 없어서 충동적으로 프라이팬으로 단비의 등짝을 때려주고 말았다. 화가 난 단비가 휴지를 집어 던졌고 김 여사는 단비 등짝과 팔뚝을 몇 대 더 패주었다. 결국 싸움은 단비가 제 방으로 줄행랑을 치듯 도망가 버리는 바람에 끝이 났다.

 

  그런 난리를 치다가 잠자리에 들다 보니 꿈자리가 영 뒤숭숭했다. 꿈속에서 김 여사는 이미 돌아가신 시어른 세 분을 뵈었다. 남자나 여자나 두루마기 차림으로 미닫이문을 열고 문지방을 넘어서서 김 여사를 조용히 보다가 사라졌다. 아주 가깝거나 각별했던 분들은 아니었지만 가끔 들러서 종부宗婦 노릇을 하고 있는 김 여사의 어깨를 다독여주고 가던 분들이었다. 김 여사는 지난밤에 어린 것이랑 대거리를 한 일과 기묘한 꿈을 떠올리다가 서글퍼져서 눈물을 훔쳤다. 꿈속에서나마 이북 고향에 두고 온 형제와 어머니, 아버지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시집 어른들이 나타났다는 것이 아쉬웠다.

 

  어느 새 날은 밝았지만, 서쪽으로 미닫이문이 있는 김 여사의 방은 여전히 어두웠다. 김 여사는 동찬과 자신, 그리고 단비와 단국이, 이렇게 가족만 달랑 모여 명절 차례를 치루는 날이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은 김 여사네 집만의 일은 아니었으며 섭섭할 수는 있으나 딱히 불행한 일은 아니었다. 김 여사도 이제는 손님들이 안 오면 번잡스럽지 않아서 좋다고 생각하려 들었다.

  그러나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는 그 순간에도 김 여사는 자신의 말년 인생에서 겪은 모든 불행과 고난이 한 사람 탓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김 여사의 눈앞엔 벌써 십 오 년 전, 저 문지방을 넘어 오던 한 젊은 여자의 얼굴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김 여사의 눈빛은 두려움과 미움이 섞여 흔들거리고 있었다. 평소에는 집안 어딘가에 잠복해 있다가 명절이면 등장하는 그 형상은 불길하고 기분 나쁜 황주미의 얼굴이었다.

 

  동찬과 함께 첫 번째 며느리 황주미가 처음 인사를 왔을 때, 김 여사는 보자마자 인상이 찌푸려졌다. 황주미는 젓가락처럼 삐적 마른 몸에 얼굴은 마른 고구마처럼 길쭉했고 광대뼈도 약간 나와 있었다. 악한 인상은 아니지만 박복해 보였었다. 인상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살아온 이야기를 대충 들어 봐도 그랬다. 어려운 환경에서 직장생활을 해가며 돈을 모아 독학과 개인 지도만으로 미술을 공부하여 조그만 대회에서 상도 받았다고 했다. 동찬은 그런 면이 마음에 든다는 투로 이야기 했는데, 김 여사는 황주미의 그런 고집 센 성격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여자는 고집이 세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고집을 부린 대상이 마음에 안 들었다. 장사라도 해서 돈을 번다거나 약사 같은 전문직에 도전을 하면서 그런 집념을 보였다면 몰라도, 그림을 그리겠다고 그랬다는 것이 반갑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동네 구석에 미술 학원이라도 차려서 학생들 뒤치다꺼리 해나갈 주변머리도 있어 보이질 않았다. 황주미의 얼굴에서 어떤 외골수 기질을 읽은 김 여사의 기분은 고약스러웠다. 분명 시집을 오면 오 씨 집안을 생각하기 보다는 지 고집대로만 하려 들것 같았다. 그림 생각에 빠져서 한 푼이라도 모을 생각은 안 하고 물감 살 궁리나 할 것 같았다.

  겨우 한 두 번 본 인상으로 이렇게 판단하는 것은 매우 경솔한 생각일 수 있었다. 어쩌면 그저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생긴 피해의식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김 여사는 황주미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직감을 삶의 연륜에서 나온 지혜로 여기고 있었다.

 

  "집안에 그림 그리는 사람 하나 쯤 있어도 좋잖아요. 너무 많은 걸 바라시지 마시고요."

  "너, 말 잘했다. 너는 회사 다니며 간, 쓸개 다 빼주고 다니는데, 내가 걔한테 좀 바라면 안 되냐?"

  "제가 뭘 다 빼주고 회사에 다녀요?"

 

  김 여사는 황주미의 얼굴을 들여다볼수록 약지 못한 아들, 동찬이 원망스러워졌다. 내조를 제대로 받아도 시원찮은 마당에 자신이 뒷수발을 들어야할 여자를 골랐으니 미련한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완고한 김 여사도 동찬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결혼 후, 김 여사는 그래도 자신이 살던 안방을 내주고 구석방에서 지냈고, 동찬은 문 옆에 있던 광을 손수 고치고 치워서 황주미의 그림 작업을 위한 공간으로 꾸며 주었다. 그러나 연탄 냄새나 나야할 광에서 나오는 물감 냄새는 산동네 골목집과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것이었다.

  황주미는 결혼 초기에는 김 여사와 잘 지내려고 애를 쓰는 거 같았다. 그러나 불안하게 시작한 황주미와 동찬의 결혼생활은 김 여사의 예상을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김 여사는 황주미가 마음에 안 들어서 기어코 이 눈치 저 눈치를 줘서 마당 구석의 작업실에 못 들어가게 만들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황주미는 매일 쫓기는 사람처럼 반쯤은 그림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결국 낮이면 회사에 나가 집에 없는 동찬도 그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알게 되었다. 그래도 뱃속의 아이가 태어나면 좀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했었다. 그러나 단비가 태어난 이후에도 황주미의 신경은 더욱 날카로워지기만 했다. 결국 단비가 아장아장 걸어 다닐 무렵, 동찬의 결단으로 동찬 부부는 김 여사 집 근처에 전세방을 얻어서 따로 나가 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동찬 부부와 김 여사의 긴장된 관계는 잠시 타협점을 찾는 듯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낮에 김 여사가 황주미와 동찬이 사는 전세 집에 잠시 들른 일이 있었다. 당시 집엔 아무도 없어서 그냥 돌아오려던 차에, 옆집 여자가 아직 어린 아이인 단비를 데리고 있는 것을 보고 말았다. 옆집 여자에게 물으니 아이 엄마가 아이를 잠깐만 봐달라고 해서 맡겨 놓고 오전에 나갔는데 오후가 되도록 안 돌아와서 걱정이라고 한 것이었다. 누가 데려가도 모르게 혼자서 남의 집 툇마루에 포대기에 쌓인 채 놓여 있는 어린 손녀를 본 순간 김 여사의 인내심은 바닥을 보이고 말았다. 김 여사는 아이 엄마, 황주미가 저녁이 다되어가도록 안 돌아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단비를 아예 집으로 데려와 버렸다.

  당시 김 여사는 황주미가 아이를 찾으러 오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아이를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갔는데, 그날 저녁 동찬이 아이를 데리러 왔다. 단비 에미가 시어머니와는 얼굴을 마주치고 싶어하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아들이 손녀를 데리고 간지 불과 두 어 달이 지났을 무렵 동찬이 어느 날 단비를 데리고 다시 김 여사집 대문을 넘었다. 그 날 동찬은 이혼이야기를 꺼냈다. 결혼할 때 황주미에 홀딱 빠져 있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결말은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온 셈이었다.

  황주미는 김 여사네 집에 들어와 사 년을 못 채운 채, 어린 딸은 남겨 놓고 몸만 쏙 김 여사 집에서 빠져 나갔다. 참으로 황망한 결말이었다. 아들은 멀쩡히 다니던 회사에서 자리보전도 못하고 이혼남이 되어 퇴하샜다. 그리고 이전 회사에 비하면 형편없는 사무실에 다니는 눈치였다. 개인적인 불행을 딛고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 아들을 위해 김 여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어린 것을 거두는 것이었다. 그렇게 졸지에 김 여사는 단비를 떠맡게 되었다.

  아들이 단비를 혼자서 데리고 온 날, 김 여사는 말대가리같이 생긴 년이 들어와 집안을 쑥대밭을 만들어놓고 나갔다는 생각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통곡을 했다. 그런데 의외로 김 여사가 속 태우는 시간은 그렇게 오래 가지 않았다. 동찬이 이혼 한지 간신히 일년을 지나 이 년을 향해 가고 있을 때, 동찬이 김 여사를 밖으로 불러냈다. 손아래 동서와 함께 간 호텔 커피숍이라는 곳에서 김 여사는 유윤숙을 처음 보게 되었다. 김 여사는 그 날도 오랫동안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윤숙은 상견례에 온 여자답게 맞춤 원피스를 입고 공손히 앉아 있었다. 둥근 얼굴과 동그란 눈매, 거기에 안색까지 밝아서 어른이 좋아하는 후덕한 인상이었으나 자신의 나이에 비해 서 너 살은 위로 보이는 면도 있었다. 한 마디로 그렇게 예쁜 얼굴이 아니라 맏며느리 상이었다.

  손아래 동서가 김 여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단비 에미와는 영 딴판이구만. 저렇게 눈매가 땡그란...."

 "재수 없게 걔 얘기는 왜 꺼내."

 

  김 여사가 눈치를 주자 동서가 입을 닫았다.

  김 여사는 어느 모로 보나 두 번째 며느리 감에 흡족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집안도 재벌 쪽으로만 연결된 것이 아니라 교수라든가 공무원도 있었으니 흠 잡을 데가 없었다. 그런 집안이 왜 자신의 집안과 연을 맺으려 하는지 따져 볼 만도 했지만 이미 뜻하지 않은 행운에 감격한 김 여사의 머릿속에 그런 의문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들, 동찬이 곧 방송국에 경력직 기자로 입사한다는 소리를 듣고 나니 김 여사는 세상 근심이 다 날아간 것 같았다. 이제 눈 앞에 앉은 유윤숙은 며느리가 아니라 은인으로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장사를 하면서 사람을 많이 봐온 동서는 눈을 내리 깔고 앉아 있는 유윤숙의 얼굴에서 흠칫 놀랄 만큼 차가운 기운을 감지했었다. 그러나 그저 남의 집 잔칫상에 재 뿌릴 수 없는 마음으로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대개 사람들은 윤숙의 평범한 얼굴만 보고 윤숙에 대해 긴장을 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막연히 여유 있는 집안 출신이구나라는 생각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윤숙은 자신과 비슷한 계층이거나 자신이 생각하기에 마음에 드는 사람한테는 그런대로 잘 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무시하는 정도가 심한 성격이었다. 또 윤숙은 한 두 번 만난 사람에게는 자신의 그런 특성을 숨기면서 상대방을 어떻게 이용할지 먼저 궁리하는 쪽으로 천성이 발달해 있었다. 결혼할 때 동찬 쪽 식구 중에 이런 성격을 눈치 챈 이는 거의 없었다. 특히 동찬과 김 여사가 윤숙의 그런 면을 전혀 감지하지 못 했다.

 

  동찬이 윤숙과 결혼을 하던 날, 김 여사는 그 날이야 말로 인생의 최고의 순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 여사가 이런 환상에서 깨어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김 여사와 친척들이 윤숙의 진면목을 본 것은 두 사람이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며칠 후에 있었던 첫 명절, 추석 때였다. 윤숙은 동찬과 함께 김 여사의 집의 문턱을 넘었다. 그 날, 윤숙이 딱히 무슨 말을 하거나 행동을 취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시집 식구들을 싸늘한 시선으로 쳐다본 것이 다였다. 그것뿐이었는데도 윤숙 앞에서 수 십 명의 오 씨 일가 사람들이 쩔쩔매고 있었다. 윤숙은 혼자였음에도 전혀 준욱 드는 감 없이 오 씨 집안 사람들과 김 여사를 마음껏 얕잡아 보고 내려다 보았다. 동찬과 김 여사는 얼이 빠져서 아무런 대처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오 씨 일가 사람들은 윤숙에게 감히 저항 따위는 생각도 못 한 채 슬금슬금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 당시만 해도 김 여사와 일가 친척 중에 김 여사가 평생 새 며느리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 날 이후 오 씨 일가 사람들과 김 여사는 김 여사의 집이든 어디에서든 유윤숙의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유윤숙이 김 여사에게 단 한 차례도 전화를 한 적도 없었고, 김 여사와 오 씨 집안 사람들이 아무리 전화를 해도 통화가 되질 않았다. 믿거나 말거나 김 여사는 '여보세요'의 '여'자 조차 윤숙이 말 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윤숙은 얼마 안 있어서 아이를 가졌고, 단국이를 낳았다. 평생 그렇게 전화조차 안 받을까 싶어 일단 기다렸는데, 그 사이 몇 년이라는 시간만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흘렀다.

  남의 가정사에 끼어들 만큼 한가하지 않았음에도 친척들은 팔자에 없는 흥신소 직원이 되어 동찬의 아파트 앞에서 진을 치고 윤숙이 나타나기를 기다려 보기도 했다. 그러나 상황 파악이 빠르고 용의주도한 윤숙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결국 스스로 구차스럽게 느낀 오 씨 사람들은 계획을 포기한 채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윤숙을 잡기 위해 나섰던 일가 사람들은 이제 다시 옛날 같은 명절은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이후 명절 마다, 오 씨 일가 사람들은 김 여사나 동찬이 자리를 비우면 너 댓 명이 앉아 중구난방으로 윤숙 욕을 하는 것이 일상적인 풍경이 되어 버렸다. 그 자리에서 윤숙을 만나러 가기까지 했던 가까운 친척들은 '단국이 엄마'라든가 '동찬이 처' 같은 통상적인 호칭을 쓰지 않고, '그 년'이라든가 'X 년'같은 험한 욕으로만 윤숙을 칭했다.

  단비가 기억하는 어렸을 때의 명절이란 친척 어른들이 쏟아 내던 유윤숙과 황주미에 대한 험담을 듣는 날이었다. 먹을 거 하나 들고 방구석에 콕 박혀 누워 있으면, 친척 어른들은 모두 어린 단비의 존재를 깜박 잊어주었다. 친척들의 대화 속엔 '데릴사위'니 '재취', '첩', '양 놈' 등등의 단비가 평소에 잘 들을 수 없는 단어들이 많이 튀어 나왔다. 단비가 아는 친엄마나 윤숙에 대한 이야기들은 모두 그렇게 주워들은 것들이었다. 어린 단비는 그렇게 자극적인 단어들과 함께 나온 이야기들을 하나도 흘리지 않고 자신의 마음속에 담아두었다.

 

  "종부가 벌 받은 거야. 암."

  "동찬 에미가 뭔 잘못이라는 게야?"

  "누가 잘 못 했대나. 말년 복이 없다는 소리지."

  "잘 못 한 게 왜 없어? 첫 번째, 그 순한 애를 좀 미워했어?"

  "걔가 뭐가 순해? 달밤에 널 뛸 년이지."

  "그럼 그 X 년은 며느리 감이고? 근데 그 X 년은 첫 번째 시집 간 집에서는 왜 기어나왔데. 지네 친정보다 더 큰 부잣집으로 가놓고."

  "그 X 년이 시집갔었던 데가 '봉황'이라는 데인데, 그 쪽 아들이 유전병이 있었다더만. 나이 들면 더 심해지는 불치병인데, 그걸 속였다잖아."

  "아니, 그 X 년 집도 돈으로 보나 성질로 보나 보통 집이 아닌데 어째 속았데?"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었던 게지."

  "다들 그만들 합시다. 장손이 좋은 집에 살면 됐지. 자식 지지리 궁상인 집과 결혼시키려는 에미 있어?"

  "하긴 우리 일가에서 동찬이 만큼 사는 애도 없구만."

  "연분이 별건가. 자식 키우며 갈라 선다 소리 없으면 된 거지."

 

  누가 들으면 뒤에서 상스런 욕이나 해대는 사람들이 모여 떠드는 소리일 뿐이었다. 그러나 윤숙으로부터 무시당했지만 앙갚음을 할 통로가 없는 오 씨 네 사람들은 그렇게라도 해서 분풀이를 하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일가 사람들 가슴 속에 맺힌 응어리는 김 여사와 동찬의 가슴에도 옹이처럼 뭉쳐 아픈 마디가 되어 있었다.

  늦은 오후, 친척들이 돌아가고 나면 김 여사와 동찬은 등을 맞대고 돌아 앉아 각자 다른 곳을 보았다. 그럴 때 두 사람은 서로의 슬픔을 들키지 않으려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어린 시절 단비에게 명절의 오후란 할머니와 단 둘이 종일 보낸 평일보다 더 쓸쓸한 때가 많았다.

  김 여사는 점점 흩어져 가는 집 안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무너져 가는 왕조의 마지막 상궁이라도 된 것 같은 착잡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런 슬픔이 뼈에 사무칠수록 김 여사의 미움은 한 곳을 향하고만 있었다.

 

  "그 년이 우리 집을 망가뜨려놨어!"

 

  김 여사는 자신의 방에 혼자 앉아 허공을 보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글자
18 18. 에필로그 - 완결 2018 / 11 / 19 267 0 2995   
17 17. 보는 이 없이 능소화는 지고 2018 / 11 / 19 286 0 4065   
16 16. 남쪽 나라에서의 반전 2018 / 11 / 19 289 0 17375   
15 15. 소방 호스를 타고 뛰쳐나온 펭귄 2018 / 11 / 19 277 0 10794   
14 14. 안개 속에서. 2018 / 11 / 19 256 0 2285   
13 13. 의문의 교사 2018 / 11 / 19 273 0 1259   
12 12. 새로운 사건의 발단 2018 / 11 / 19 276 0 8205   
11 11. 상식의 이면 2018 / 11 / 19 271 0 9340   
10 10. 추위를 싫어한 펭귄 2018 / 11 / 19 267 0 5485   
9 9. 민희네 비디오 2018 / 11 / 19 309 0 5507   
8 8. 지덕쳇! 괴상한 학교 2018 / 11 / 19 290 0 14838   
7 7. 강남 아파트 2018 / 11 / 19 269 0 5352   
6 6. 떠난 다는 것은.... 2018 / 11 / 19 259 0 2291   
5 5. 이런 것도 형벌일까 2018 / 11 / 19 296 0 9491   
4 4. 천생연분 – 찌질남과 악녀 2018 / 11 / 19 269 0 15980   
3 3. '미술'이라는 금기어 2018 / 11 / 19 254 0 12912   
2 2. 능소화 넝쿨에 휘감긴 집 2018 / 11 / 19 278 0 6381   
1 1. 미싱 소리가 들리던 동네 2018 / 11 / 19 429 0 6743   
이 작가의 다른 연재 작품
대포여신 서현금
톰과제리2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   신고/의견    
※ 스토리야에 등록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 본사이트는 구글 크롬 / 익스플로러 10이상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주)스토리야 | 대표이사: 성인규 | 사업자번호: 304-87-00261 | 대표전화 : 02-2615-0406 | FAX : 02-2615-0066
주소 : 서울 구로구 부일로 1길 26-13 (온수동) 2F
Copyright 2016. (사)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