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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스윙 - 그해 우리의 헛 방망이질
작가 : 톰과제리2
작품등록일 : 2018.11.19

1990년 서울의 산동네, 이화동을 배경으로 한 성장 소설.
화가인 엄마는 이혼 후 미국으로 자신의 성공을 위해 이민을 갔고,
아빠는 새로 결혼한 여자와 강남 아파트에서 단란하게 살고 있다.
할머니의 미싱 일을 도우며 살던 단비가 아빠 집으로 들어가 살게 된다.
그러나 위선적인 아빠와 새엄마에게 염증을 느끼고
학교에서 도둑 누명을 쓴 절친, 민희와 학교를 탈출하여
친엄마의 친척들이 살고 있는 여수로 떠난다.
그러나 마주하게 된 진실은 단비가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민희는 실제로 지갑을 훔쳤고 위선적이기만 한 아빠에게도 하나의 진실은 있었다....

 
4. 천생연분 – 찌질남과 악녀
작성일 : 18-11-19 10:37     조회 : 268     추천 : 0     분량 : 15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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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천생연분 – 찌질남과 악녀

 

  구 월 말이었지만 날씨는 여전히 후덥지근했다. 추석 휴가가 앞에 있는데다가 큰 화젯거리나 사건이 없다 보니 사무실이나 복도엔 나른한 기운이 감돌았다. 몇 시간 전 부터 동찬의 눈은 책상위의 자료에 두고 있었으나 전혀 읽지 않고 있었고, 손가락은 전화기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명절 앞, 동찬은 음식 장만처럼 몸을 움직여 해야 할 노동이 따로 임무로 주어진 것도 아닌데, 하기 싫은 숙제를 앞에 두고 있는 기분이었다. 동찬 앞에 놓인 숙제란 친척들에게 전화 대 여섯 통화를 돌리고 다음 날 오전 중에 아들, 단국이를 데리고 김 여사 집에 가는 것이었다. 이 소리를 주부들이 듣는다면 몽둥이를 들고 자신에게 쫓아올지도 모를 일이라고 동찬 스스로 생각했다. 그만큼 너무나 작은 숙제를 앞에 두고 우습게 쩔쩔매고 있었다. 동찬은 심호흡을 하고 제일 쉬운 일부터 시작해 나갔다.

 

  "심부름 센터 사람이 면세점에서 산 양주 한 병을 들고 댁에 곧 도착할 겁니다."

  "뭘 그런 걸...."

  "명절이잖습니까. 우리 애 학교 배치 잘 부탁드립니다."

  "알았네.... "

  "명절 끝나고 형님들 모이실 때 저 좀 다시 불러 주십쇼."

 

  지난 번에 만났을 때 그 선배는 단비가 원하는 학교에 배정받을 확률은 반이라고 말을 했었다. 그러면서 혹시 아이가 'P고등학교'로 배정을 못 받는 다고해도 실망하지 말고 조금 기다리라고 했다. 전학은 꼭 성사시킬 자신이 있다고 말을 했다. '중간에 전학시키지 않으려고 이러는 거 아니냐'는 말이 목구멍 안에서 치솟았지만, 동찬은 꾸욱 참고 웃으며 선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동찬은 자신이 그랬듯 단비 역시 운이 좋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을 갖고 있어서, P고등학교로의 배정을 믿고 있었다.

 

  동찬은 선배와 통화를 하고 난 다음 다시 멍한 상태로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전화가 스스로 신호음을 냈다.

 

  "형님. 이번 명절엔 아버님이 못 가실 거 같아요. 엊그제 병원에서 폐렴진단 받으셔서요. 그리고 고개 너머 어른 댁에서 조금 전에 저한테 연락이 왔는데요. 내일 못 가실 거 같다고 합니다. 그 집 어른도 몸이 불편하신 거 같더라고요."

  "잘 알아들었고. 모레 저녁에 내가 당숙 어른 찾아뵙는다고 말씀 드려라."

  "형, 바쁜 데 일부러 발걸음 하지 마셔요."

  "아냐. 오후이든 저녁이든 짬을 만들어 보마."

  "그리고 큰 어머니한테는 형이 잘 좀 전해주세요."

  "그래."

 

  결국 동찬의 예감이 맞아 떨어졌다. 이제 이 소식을 김 여사에게 전해야 하는 숙제만 동찬에게 남겨진 셈이었다. 동찬은 얕은 한숨을 쉬었다.

  당숙 어른과 고개 너머 삼촌은 종형(從兄)이자 장손이었던 동찬의 아버지와 김 여사 주위를 평생 맴돌면서 종가집을 지켜주었던 어른들이었다. 동찬은 그들이 팔팔하던 사 오 십대를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당숙은 버스 운전을 했고, 고개 너머 삼촌은 동네에서 구멍가게를 했다. 명절에 윷놀이나 화투같은 것을 할 때는 참 재미있는 참가자였고, 싱거운 농담으로 집안 여자들을 웃겨 주는 것도 잘 했다. 그리고 동찬을 귀여워해주었다.

  동찬이 고등학교 일학년 때 설이었던 거 같았다. 당시 아버지는 이미 거동을 못 했고 삼 년 째 누워 있었다. 그 해가 아버지가 살아있었던 마지막 해였다. 그 때만 해도 그 작은 산동네 집에 이 십 여 명 쯤 되는 일가 사람들이 아침부터 몰려 왔었고, 집안이 협소하다 보니 아이들은 감히 방안에 있지도 못했다. 아이들은 엄동설한 날씨에도 지들끼리 마당에서 놀거나 골목을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시간을 보냈었다.

 그날 동찬은 마당 구석에서 조무래기들과 놀고 있었는데, 당숙 어른이 방에서 있다가 마루로 나왔다. 당숙은 물끄러미 동찬을 지켜보다가 다가와서 어깨를 신통하다는 듯 잡아 보면서 말했다.

 

  "간난쟁이부터 봤는데 내가 왜 니 인물이 이렇게 잘난 것을 몰랐나 싶다. 형님과 다르게 어깨도 다부지구나. 이제 이 집은 니가 희망이다."

 

  동찬은 그 날 당숙 어른의 목소리와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서 울리는 것만 같았다. 동찬은 왠지 다음 명절부터는 그 어른들을 뵙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잠시 우울해졌다. 그 분들이 그렇게 나이 들었다는 것은 동찬 역시 그만큼 나이를 먹었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동찬은 김 여사에게 전화 걸기 전에 화장실을 먼저 다녀오기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사 화장실 창 너머로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은 후미진 샛강 일부가 보였다. 관리를 받지 않고 마구 자란 잡목과 잡초가 뒤엉킨 덤불이 있었는데, 아직 가을이 먼 이야기인 냥 초록색 기운이 절정에 있었다. 앞으로 한 달 안에 저 초록색의 가장자리부터 노랗게 물들어 갈 것이었다. 그러나 잡목 덤불은 그런 앞날은 모른다는 듯이 당장은 터질듯이 부풀어 올라있었다. 동찬은 화장실 창 너머의 덤불이 매우 오만해 보인다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동찬이 그렇게 서 있었는데 등 뒤에서 손을 씻으며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 보너스는 그냥 차비야."

  "차비는 너무 했고 차비에 휴게소 밥값은 나온다고 해줘라."

  "나도 한 때는 월급 안 받고 김밥만 먹으면서 일해도 좋을 줄 알았는데. 이젠 일이라면 무섭다."

  "내가 아는 장 피디는 어디 간 거야?"

 

  연휴를 앞두고 있어서인지 친구들과 동네 호프집에 앉아서 할 만한 말들이 회사 안에서 들리고 있었다. 동찬은 장 피디의 목소리임을 단번에 알아채고는 어떻게 피해갈까를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이미 몸은 돌아서 있었고 동찬의 얼굴을 장 피디가 보고 있었다. 장 피디는 동찬을 알아보고 예의 그 형식적이면서도 재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화장실에서 사라졌다. 동찬도 화장실에서 나와 복도를 걸어가는데 그 얼굴을 본 것만으로도 뒤끝이 영 개운하지 않았다.

  동찬이 입사해서 일한지 십 년이 넘었다. 이제 출발이 달랐다는 과거에 대한 자의식은 많이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그것은 단지 십 년이라는 물리적 시간이 지나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그 동안 동찬이 흘린 땀과 몸부림치며 살아온 시간이 쌓여서 생긴 자부심이었다. 최소한 동찬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장 피디의 시선은 언제나 동찬에게 '나는 근본 없는 너와는 다르거든.'이라고 말 하는 것만 같았다. 동찬은 장 피디와 시선이 부딪힐 때마다 잊고 싶은 '입사의 기억'이 떠올랐다. 동찬의 자의식을 탓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면서는 그런 느낌을 못 받았으니 동찬은 자신의 자의식 탓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동찬이 처음 방송국 문턱을 넘었을 때, 그가 이토록 오래 보도국에 남아 제 역할을 찾아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동찬은 공채가 아니라 경력직으로 보도국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 경력직 입사라는 것이 살펴보면 매우 의심스러운 것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몇 사람 정도는 임원의 연줄, 이사회의 추천 등 각 종 이유로 공채를 거치지 않고 들어오는 인력이 있었다. 회사 사람들은 동찬이 윗사람의 개인적 추천을 통해 입사했다는 것을 어느 정도 눈치 채고 있었다. 그럼에도 별 말이 없었던 이유는, 동찬이 입사하기 이전에도 이런 인력이 여러 명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들어온 인력들은 모두 들어 올 땐 보도나 제작 쪽에 배치되었지만 일 이 년 후엔 짐을 싸서 비제작, 비보도 부서로 옮겨가는 것 또한 눈에 보이지 않은 규율이기도 했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특유의 분위기에서 적응을 못하고 스스로 짐을 싸서 옮기게 되어 있으니, 기존의 제작 부서 사람들은 그런 이유로 불쑥 누군가가 들어와도 별 말 없이 지켜볼 뿐이었다.

 

  십 년 전 방송국 경력직 입사라는 '신 포도'를 덥석 깨물었을 때, 동찬은 자신이 무얼 던져 버렸는지 몰랐었다. 그는 첫 직장에서 모자란 대접이든 후한 대접이든 당당하게 살아왔던 경력을 집어던져 버렸다. 우여곡절 끝에 방송국에 입사할 때 동찬은 자신이 갖다 버린 것은 용도 폐기된 기계나 망한 회사의 주식쯤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십 년이 지나자 그 때 자신이 버린 것은 시간이 지날 수록 가치가 커져가는 유망주였고, 자신이 선택한 것은 십년이나 이십년 후에도 똑같은 가격을 유지하는 지루한 주식이었다. 동찬의 십 년 전 선택은 자신의 욕망이자 욕심이 빚은 결과일 뿐이었다. 어쨌거나 얼결에 입사를 했고, 그것은 운명이었다. 동찬은 첫 번째 직장보다 훨씬 어깨를 펼 수 없고, 자신을 드러낼 수 없다는 생각에 숨이 막혀왔지만, 입사를 번복할 수는 없었다. 단순하게 회사에 입사만 한 것이 아니라 윤숙과의 결혼이 엮여 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윤숙과의 결혼은 재혼이었다. 동찬은 심지어 처가 쪽과 윤숙의 자존심을 위해 일 년만 다니다가 장사를 시작하거나 회사를 다시 알아 봐야겠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러나 눈칫밥도 먹다 보면 체하지 않고 술술 넘기는 법도 발견하기 마련이었다. 조직에서 한 달만 견디어 보자라고 스스로 다독이면서 바보가 되기도 하고 경주마가 되기도 하면서 버틴 세월이 일 년이 되고, 삼 년이 되었다. 그렇게 십 년도 되었다.

  장 피디는 동찬 보다 이 년 늦게 입사를 했는데, 입사 때부터 인재가 들어왔다는 소문이 회사 내에 자자할 정도로 주목을 받았었다. 그는 입사 시험 성적도 전설이라 불릴 만큼 좋았지만 대학 시절부터 촬영보조 아르바이트를 했고 아마추어로 간단한 영화를 만들 정도로 제작 경험고 갖고 있었다. 처음에 회사 선배들은 그가 드라마나 오락 쪽으로 나서서 연출능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예상을 했었다. 그는 회사에서 목 말라하는 제작에 특화된 인물로 성장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입사한 후 삼 사 년이 지나 자기 색깔을 내기 시작할 때부터는 입사 때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그는 시사 프로그램, 그 중에서도 어디와도 부딪히지 않는 무난한 시사 프로그램 감독을 하려 했다. 원래부터 사회에서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을 건드리겠다고 데스크와 대립각을 세우는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장 피디가 시사 프로그램 쪽을 돌다 보니 보도국 소속인 동찬과도 일을 여러 번 했었다.

  그는 애초에 피디란, 아니 회사란 재주를 부리는 곰이 되어서는 안 되고 곰 뒤에서 돈을 받아 챙기는 관리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괜히 재주 좀 부려보겠다고 곰처럼 구르고 넘는 짓을 하다가는 제풀에 나가 떨어지기 일쑤일 뿐이라는 사실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피디란 작가나 스태프의 능력이라도 잘 뽑아 쓸 줄 안다면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이면 되었다. 스태프들과 작가들은 항상 그 앞에서 웃으면서 그를 존중했고 그의 뒤에서도 그의 험담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 늘 그는 회사에서 승진을 할 것만 같은 사람이었다. 다만 여자 작가들은 그의 이름 앞에 '직장생활의 지혜'라는 별명을 붙여 불러 주었다.

  장 피디는 사장이라는 목표를 향해 회사 생활을 했다. 반면 동찬은 조용히 월급만 받다가 몇 년 안에 퇴사하면 되는 인간이었다. 물론 사장을 목표로 회사 생활을 한다고 다 사장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임원 정도까지 가면 성공한 것이고 거기까지 가지 못하는 인간이 대다수였다. 동찬은 어쩌면 자신은 그런 목표를 향해 노력할 필요가 없으니 실패할 염려가 없었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효율적인 회사 생활이었다.

 

  동찬은 휴게실에서 자판기 음료까지 뽑아 들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동찬이 자리를 비운 사이 누군가가 간단해 뵈는 서류를 놓고 갔다. 며칠 전에 인사팀에서 말한 올 해 말 진급에 필요한 '교육 일정에 대한 안내'였다. 동찬은 안내서를 훑어보다가 문득 보도국에 있으라고 붙잡을 때 비제작 부서인 '프로그램 판매부'로 가볼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 때 전화기 신호음이 다시 울렸고 동찬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동찬은 목소리를 듣자마자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정재식....

 동찬은 그를 친구나 선배가 아니라 그저 사회생활 중에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인연 정도로만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동찬의 학교 친구들 모두를 합친 것 보다 동찬의 운명에 더 큰 영향을 준 인간이었고, 늘 아는 것 같으면서도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는 의문의 인간이었다. 동찬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자신의 운명은 정재식이 짜놓은 마수인지 호의인지 모를 그물 안에서 놀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다. 동찬은 재식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거의 오 년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그 이후에는 일 년에 한 번씩 재식이 동찬에게 전화를 걸어와서 인연을 간신히 이어가고 있었다. 동찬이 재식에게 연락을 한 적은 거의 없었다.

 

  "나, 재식이다."

  "선배님. 한국에 계셨군요."

  "바다 건너를 매일 나갈 수야 없지. 잘 지냈냐?"

  "예. 선배님. 오늘 저녁에 따로 약속 있으십니까?"

  "엉? 아니."

 

  술을 함께 할 지인이 없는 것도 아닌데, 동찬은 그 순간 왜 그를 만나자는 제안을 던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동찬은 재식과 회사 끝난 후에 만나기로 약속을 잡고 전화를 끊었다.

  동찬은 얼마 전에 다른 일로 '나한'에서 과거에 임원을 지낸 사람을 만난 일이 있었다. '나한'은 동찬의 처인 윤숙의 친척들이 경영하는 회사였다. 그 임원이 정재식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다며 한 말은 이랬다. 정재식은 '나한' 선대 회장의 형제들 중 한 명의 세 째 부인의 아들이며, 당시 집안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나한'에 직접 뛰어 들 수가 없었다고 했다. 대신 정재식이 그렇게 대담하게 사업을 할 수 있었던 이유에는 음으로 뒤에서 도와준 부친과 부친으로부터 한 몫을 챙겨낸 어머니의 재력이 있다고 했다. 동찬은 이런 사실을 재식을 안지 십 여 년이 넘도록 모르고 있었다. 동찬은 윤숙에게 집안 사람인 '정재식'에 대해서 아느냐고 넌지시 물었지만 윤숙은 모른다고 답했다. 어쨌거나 정재식이 동찬을 윤숙과 엮어놔서 어떤 이득이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전화를 끊고 조용히 앉은 동찬의 머릿속에 재식과의 인연이 쭉 스쳐지나갔다.

  동찬은 대학 졸업 후 화학 쪽 중견 기업에 들어갔는데 정재식은 일 년인지 이년인지 근소한 차로 회사 선배였다. 나이도 동찬보다 너 댓살은 많았다. 그런데 동찬이 입사한 그 회사는 하필 당시 신사업 투자와 납품 관계를 어떻게 끌고 가냐를 놓고 사내 파벌 사이에 대립이 심한 시기였다.

  당시 그 회사는 기존에 자신들이 하던 사업을 바탕으로 잘만 하면 국내 독점 공급자 위치가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의 임원들은 전도양양한 분야를 외면한 채 기존의 싸구려 제품 생산에만 안주하려 하고 있었다. 동찬은 어쩌다 보니 새로운 쪽으로 사업을 해야 한다는 쪽으로 보고서를 쓰고, 그 쪽으로 일을 추진하는 편에 서고 말았다. 그러나 사업을 할지 말지 결정하는 순간이 오자, 이사들 간의 알력 싸움에서 회사를 그대로 유지하자는 쪽이 투자하는 쪽을 몰아내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상대편의 몇몇은 동찬의 이혼까지 거론하는 일이 있었다. 당시 동찬은 이혼한 자신의 사생활을 들먹이며 자신을 이상한 인간으로 몰고 가는 치사한 짓을 벌이는 쪽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동찬은 더 늦기 전에 회사를 나와야 겠다고 결심을 했다. 아마 지금이라면 동찬은 미꾸라지 같은 소수의 인간들이 그러려니 하며 참았을 지도 몰랐다. 그러나 당시 동찬은 그렇지 못했다. 더구나 동찬은 그들이 거론한 '사생활'로 몸이 몇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딸의 양육권 문제를 마무리 짓는 일만해도 동찬을 꽤나 힘들게 하는 일이었다. 결국 동찬은 회사에 사표를 쓰고 나왔다. 옮길 회사를 알아보고 나오는 것이 좋았지만, 개인적으로 복잡한 일 때문에 일단 회사부터 정리했다.

 

  한편 정재식은 이미 동찬보다 일 년 정도 앞서서 자신의 사업을 하겠다고 회사를 그만두고 나와 있었고, 아는 이로부터 '주간 현대섬유'라는 전문주간지를 펴내는 사무실을 인수 받아 운영하고 있었다. 재식은 회사에서 눈여겨 봐뒀던 후배, 동찬이 회사에서 나왔다는 소리를 듣자 동찬에게 자신의 사무실로 와보라는 연락을 당장 취했다. 재식은 동찬에게 일단 들러 보라고만 말을 던졌다.

 

  '주간 현대섬유' 사무실은 동찬의 예상과 달리 여의도의 그럴듯한 건물에 있었다. 재식은 동찬이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기자증과 편집위원 신분증부터 주었다. 그 때 동찬은 재식이 안겨준 코팅된 종이 카드가 새로운 세계로의 초대장이 될 줄을 꿈에도 몰랐었다.

 

  "선배님, 출판업 시작하셨어요?"

  "출판업은 무슨. 내가 회사나 공장을 돌고 있거든. 넌 따라만 다니면 돼. 그럼 거기 사장님이나 홍보실 직원이 글도 주고 광고 만들어 놓은 걸 알아서 줘요. 넌 그걸 모아다가 인쇄소에 맡기기만 하면 되고. 그럼 거기 직원이 다 알아서 할 꺼니까."

  "그게 출판이잖아요."

  "답답하긴. 그렇게 가는 김에 우리 사업계획도 설명하고, 그러다가 투자도 받아서 무역을 하자 이거지."

  "선배님. 저 아직 면접 진행 중인 회사도 있고요...."

  "알았어. 당장 내일 가더라도 오늘까진 여기서 일해. 그리고 그 인상부터 펴."

 

  재식의 사무실에 합류한 동찬은 다른 갈만한 회사에서 경력자를 뽑는 공고가 나기를 기다기면서 재식을 따라 다니기 시작했다. 재식의 사무실에 취미 삼아 다니기 시작한지 몇 개월 안 되었을 때였다. 재식이 동찬을 '나한'이라는 회사엘 데려갔다. 너 댓 명의 직원들이 있는 임원 사무실의 소파에 앉아, 재식과 동찬은 '나한'의 모 상무에게 사업 계획서를 내밀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날 다른 곳에 비해 좀 더 깊이 있는 대화를 했다는 것 말고는 동찬은 특별한 것을 느끼지 못했다. 동찬은 대화 중간에 재식의 말을 거들었을 뿐 가만히 앉아 있다가 나왔다. 그러나 그날, 동찬 인생은 동찬도 의도하지 않은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었다. 그날 저녁, 재식은 나한의 모 상무와 술을 마시는 자리에 동찬도 데리고 나갔다. 동찬은 그렇게 그 상무와 두 세 차례 술을 마시는 곳에 따라 나갔다.

  술을 마신 다음 날이었다. 오전 느지막이 사무실에 나온 재식이 느끼한 웃음을 띠며 동찬에게 말을 했다. '나한'의 상무님이 동찬을 괜찮게 봐서 사무실의 여직원을 소개시켜주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동찬의 입장에서는 난데없는 제안이어서 거절하고 싶었지만, 투자를 부탁하러 다니는 마당에 상대의 청을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만나게 된 것이 유윤숙이라는 여자였다. 재식은 여자와의 약속을 주선한 다음 동찬에게 그 여자는 나한 회장실과 가까운 친척이라고 말해주었다.

 

  동찬은 상대가 부담스러워서, 첫 만남에서 자신이 애까지 딸린 이혼남이라고 까칠하게 말해버렸다. 그랬더니 여자 쪽에서도 나이도 동찬보다 두 살 위이고 이혼을 한 경력이 있다는 말을 했다. 부잣집에 시집을 갔는데 남편과 집안이 하도 이상해서 도망치듯 이혼을 하고 나왔다는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했다. 비로서 동찬이 피장파장이라고 생각하며 윤숙의 얼굴을 편하게 보았을 때, 여자의 시선이 동찬의 어깨를 지나 두툼한 몸통을 훑고 있었다. 뚫어져라 쳐다 본 것은 아니었지만 꽤나 도발적이라고 느껴졌다. 그 순간 동찬은 이것이 자신의 의도이든 아니든 어떤 기회라는 것을 직감했다. 갑자기 마음속에서 뭔가 이전까지와는 다른 욕망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앞에 앉은 여자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단순한 욕망만은 아니었다.

  첫 만남에서는 데면데면하게 말을 하다가 헤어졌지만 두 사람은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윤숙은 자신이 혼자 쓰는 전화라고까지 했다. 동찬은 윤숙이라는 여자를 향해 승부수를 던져보고 싶어져서 윤숙에게 연락을 하지 않고 기다려 보았다. 그랬더니 윤숙이 먼저 연락을 취해왔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홀리듯 만남을 이어갔다. 그리고 얼마 후, 윤숙이 먼저 동찬에게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

 

  동찬이 윤숙의 삼촌인 유원국을 만나게 된 때는, 아직 양쪽 집안에 인사를 가기 전이었다. 윤숙이 동찬에게 자신의 삼촌을 만나봐 달라고 제안을 해왔다. 삼촌이라는 이는 ** 방송국 이사였다. 퇴근 시간이 다 되어 가는 오후에 방송국의 유원국 사무실에 들른 동찬은 인사만 하고 나가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유원국이 난데없이 영어 사전과 함께 한국 경제에 관한 미국의 신문기사를 던져주면서 요약을 하라고 했다. 동찬이 유원국에게 대충 내용을 요약해 주자, 경제와 무역에 관한 이런 저런 질문을 해왔다. 전문적인 것은 아니었고 방금 읽은 기사를 요약해서 말해보라는 의도였다. 어찌되었던 동찬의 입장에선 예고 없이 기습 면접을 본 셈이 되고 말았다. 다음 날, 윤숙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방송국에 경력직 모집이 있으니 지원해보자고 했다. 동찬은 자신은 자격이 안 된다고 말하려 했으나 윤숙은 동찬의 목에 걸려 있는 기자증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정재식이 안겨주었던 알량한 편집인증과 기자증은 이력서에서 진짜 경력으로 둔갑을 하고 있었다.

 

  방송국 입사와 결혼, 일의 방향이 정해지자 어지러울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동찬이라고 그저 흥만 나는 것은 아니었다.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방향으로 인생이 굴러가게 되자 당황스러웠다. 동찬은 자신을 처가 덕을 입을 만큼 능력자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또 여자의 도움으로 뭔가를 해볼 생각을 한 적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동찬은 이혼 서류에 적힌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새 결혼을 결정한 자신에 대해서 약간의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혐오감은 잠시 스쳐 지나가는 상념일 뿐이었다. 동찬은 이미 롤러코스터 위에서 안전벨트만 꽉 쥐면서 자신의 인생의 레일이 바뀌었다는 것을 즐기면 되었다.

 

  이후 동찬과 재식은 아주 가끔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동찬은 윤숙과 결혼을 했고, 윤숙이 혼수로 들고 온 아파트에 살면서 방송국을 나가게 되자 속된 말로 신수가 훤해졌다. 팔자를 고친 셈이었다. 반면 재식은 동찬과 헤어진 후에도 한동안 제대로 된 수익 구조를 만들어 내지 못해 가방만 들고 여기저기 다니는 듯 보였었다.

 

  동찬은 퇴근 시간 후에 회사 주차장 입구 쪽에서 재식을 만났다. 중형차에서 내려서 걸어오는 재식을 보니 안 보는 사이 배가 더 불룩하게 나왔고, 볼 살마저 불어서 교양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인상이 더 강조되어 보였다. 동찬은 재식이 오 년 전 쯤부터 사업이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는 소리를 들어서 알고 있었다. 동찬과 재식이 마지막으로 만난 이후부터 운이 트이기 시작한 거 같았다. 오래 만에 만난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동찬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선배님. 사장님 티가 확 나십니다."

  "넌 얄밉게 살이 하나도 안 붙었구나."

  "그럴리가요. 요즘 잘 나가신다는 소리가 들리던데요."

 

  만나자고 한 사람은 동찬이었으나 재식이 아는 일식 집에서 두 사람은 밥을 먹고, 음식점 옆 건물의 이층에 있는 술집에 갔다. 그 곳은 삼 십 대로 보이는 여자가 마담이었고 재식은 단골 같았다. 술이 나오자 재식은 동찬과 며칠 전에 본 동료랑 떠들듯이 편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여자는 백마지. 중동 다니는 김에 겸사겸사 다니면 좋지. 그 맛에 일하는 거고."

  "사우디에 그런 데도 있나요?"

  "사우디만 중동이냐? 그리고 거기까지 한 번에 가는 게 아니라 여기 저기, 걸치면서."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재식의 대화엔 여자와의 유흥이 꼭 등장했다. 재식이 사업을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물로 그의 인생의 가장 목표는 돈이었지만, 또 다른 목표는 결혼 생활을 하면서 바람을 피는 것이었다. 그는 미혼으로 카사노바처럼 여자와의 유흥을 즐기는 것엔 관심이 없었다.

 

  "그나저나 요즘은 중동 바이어들 입질이 뜸하단 말이야. 중소 가전은 물량이 얼마 안 돼서 먹을 것도 없지만."

  "전 선배님이 그렇게 다양한 업종을 하시는지 몰랐습니다."

  "돈 되는 거 다 하는 건 대기업 상사도 다 똑같아. 빤스부터 미사일까지."

 

  동찬은 재식과 전화로 안부만 묻고 지내다 보니 막연히 섬유 쪽으로 재식이 계속 사업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듣고 보니 그렇지 만도 않았다. 도대체 어떤 업종으로 무슨 사업을 하고 있다는 말인지 동찬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요즘은 그래도 섬유 쪽으로 다시 집중 하려 한다."

  "섬유란 것이 이제 제 삼 세계 국가로 옮겨가는 추세 아닌가요?"

  "그래서 나는 고강도 섬유를 취급하려고. 요즘 내가 관심 있는 건, 특수 섬유 중에 칼이나 총이 뚫고 지나지 못하는 것이 있어. 내열 기능이 있는 것도 있고."

  "와, 쓰임새가 다양하겠는데요."

  "군납 쪽 뚫을 거다. 방산업체 쪽으로 한 번 성사 되면 짭짤하잖냐. 그래서 내가 요즘 별들이랑 골프 좀 치고 다닌다."

 

  동찬은 재식의 이야기를 듣다가 내색은 않했지만 적지 않게 속으로 놀랐다. '방위산업이라니. 자기 전문 분야도 아니지 않는가. 왜 저 나이가 돼서도 저렇게 모든 것을 만만하게 보는지...' 동찬에게는 재식이 말하는 것이 허황되게만 들렸다. 재식은 일관성이 없는 것으로 늘 일관성이 있는 인간이었다.

  재식이 화장실에 가느라 자리에서 일어섰고,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동찬은 크리스탈 잔을 들어서 얼음물을 마셨다. 조금 전까지 재식의 번드르르한 말이 꽤나 우습게 들렸었는데 찬물로 각성을 하고 나니, 그가 아직 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뚜렷하게 머리에 새겨졌다. 사실 재식의 사업은 번성의 일로에 있었다.

  재식이 화장실에서 돌아와 자리에 앉았을 때 동찬이 자신의 마음속에 오래 있던 질문을 던졌다.

 

  "선배님, 옛날에 나한 상무님이 저를 윤숙이한테 소개시켜 주고 싶어했단 말 정말이에요?

  "아, 그 옛날 양반!"

  "진짜 나한 상무님이 먼저 저를 한 두 번 보고 그런 말씀 하셨냐고요? 그날 그 사무실에 윤숙이도 비서랍시고 있었잖아요."

  "야, 십 년 전 일이 기억 나냐?"

  "처음부터 선배님이 나를 소개시키려 해주신 거 아니에요?"

  "지금 그게 뭔 소용이야?"

  "아니면.... 이건 다른 이야기지만 제가 회사에서 나와 놀고 있을 때, 왜 선배님 사무실에 불러 주신 거에요? 제가 재주가 있다거나 특별한 놈은 아니었잖습니까?"

  "아냐. 그 회사에 있었던 놈들 다들 무식했어. 너는 그래도 안목이라도 좀 있었잖냐. 그리고 세숫대야 훤하고, 코 크고. 그래서 널 불렀지. 하하."

 

  재식은 그러면서 옆을 지나가던 마담의 손목을 잡아 옆에 끌어 앉혔다. 결국 이런 식이었다. 재식이 끝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동찬은 재식과 술을 몇 잔 더 마시다가 기분 좋게 헤어졌다.

 

  택시는 아파트 단지 앞에서 동찬을 내려놓고 떠났다. 적당히 차가운 구월의 밤공기가 동찬의 볼을 스쳐갔고, 아직 남아 있는 술기운 때문인지 볼이 후끈거렸다. 동찬은 집으로 곧바로 들어가지 않고 혼자서 단지 주위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동찬의 머릿속은 아직 술집에서 하던 생각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정재식이 성공한 사업가로 자신 앞에 나타나자, 동찬은 십 년 전, 자신이 애초에 있었던 화학계열 회사에서 쭉 있었거나, 그도 아니면 자신만의 사업을 개척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현재의 직장, 인간 관계, 재산에 동찬의 땀이 배어들지 않은 것들이 없었지만, 동찬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들엔 윤숙의 색깔이 섞여 있었다. 그것은 함께 살아온 부부라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동찬은 자신의 인생에 드리워진 윤숙의 그림자가 떳떳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동찬은 '재식 선배도 했는데 나라고 못 했을까'라는 말을 속으로 해보고 있었다. 처음엔 좀 힘들었을지라도 지금쯤 한 몫 손에 쥐고 더 단단한 위치에 있을 거 같았다. 그 때 방송국이라는 조직 대신 동찬 마음 속에 있던 계획대로 밀고 나갔다면 처갓집의 그림자 따위와는 상관없이 오롯이 오동찬의 성과만 남아 있을 것 같았다.또 지금 보다 나이 먹어서 일할 자리 걱정할 일도 없을 것 같았다. 못 가본 길에 대한 선망 때문에 가슴이 쓰렸다. 이런 막연한 생각은 그야말로 상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동찬은 이런 허황된 상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흐릿한 별빛 아래에서 불쑥 동찬의 입에서 튀어 나온 말이 있었다.

 

  "잡놈이네."

 

  재식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해 한 말이었다. 십 년 전 동찬은 재식을 내심 얕잡아 보았었는데, 그런 재식이 돈 좀 벌었다고 하니 그날 저녁 그가 좀 다르게 보였다. 동찬은 '포기했던 길을 선택했으면 어땠을까'라고 후회하는 자신의 모습에 쓴 웃음을 흘렸다. 동찬은 자신의 모습이 지저분하다고 느꼈다.

 

  계속 걷다 보니 동찬의 오른 편으로 커다란 어두운 덩어리가 느껴졌다. 숙직실 외엔 불이 꺼져 있는 P 고등학교였다. 동찬은 수 개 월이 지나도록 단비가 김 여사의 집에서 이사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 생각났다. 내일 어머니의 집에 가서 싫다는 단비를 어떻게든 자신이 집으로 끌고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에 앞서 단국이를 김 여사 집에 데리고 가야한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그 생각을 하니 갑자기 뒷목이 뻣뻣하게 당겨왔다.

  동찬이 생각하기에 자신의 집에서 벌어지는 일 중에 가장 웃긴 일은 단국이를 두고 벌이는 부부의 대결이었다. 단국이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몇 년 전에 동찬은 명절 하루라도 단국이를 할머니 집에 데려가려고 했었다. 그런데 윤숙이 반대하고 나선 것이었다. 윤숙이 김 여사와 연을 끊고 사는 것에 대해서는 동찬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지만, 어린 손자마저 연을 끊게 만드는 것은 동찬도 참을 수가 없었다. 할머니, 김 여사는 단국이가 태어났을 때 잠깐 그것도 윤숙 몰래 동찬의 손에 이끌려 손자의 얼굴을 본 것이 다였고, 그 갓난아이가 세 살이 되어 뛰어다니도록 아이 얼굴을 못 보고 지냈었다. 동찬은 단국이가 세 살 되던 해부터 거의 이 년을 양보할 수 없다는 기세로 윤숙과 싸웠다. 그래서 결국 단국이가 명절에 김 여사 집에 갈 수 있게 되긴 하였다. 하지만 유윤숙이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의 뜻을 양보할리는 없었다.

  윤숙은 '반반 논리'라는 것을 내세웠는데, 아이의 반은 엄마로부터 온 것이고 나머지 반은 아빠로부터 온 것이므로 공평하게 홀수 년도엔 아빠인 동찬의 뜻에 따라 김 여사 집에 명절마다 보내고, 짝수 년도엔 윤숙의 뜻에 따라 안 보낸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협정을 맺으면서 윤숙은 동찬에게 무슨 은혜를 베푸는 듯 유세를 했고 동찬은 '이거라도 어디냐'하는 심정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그렇게 해서 단국이는 할머니, 김 여사의 집에 격년으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윤숙이 며칠 전 부터 단국이가 감기 기운이 있다는 말을 식탁에서 흘리고 있었다. 올 해는 분명 단국이가 김 여사 집을 방문할 수 있는 해였고 이미 설에도 갔었다. 동찬은 윤숙의 말에서 단국이를 김 여사 집에 보내지 않으려고 하는 느낌을 받았다. 안 그래도 이번 추석에 고정적으로 오시던 어른들이 안 오셔서 우울해할 김 여사의 모습이 동찬의 눈에 선한데 손주까지 안 오면 더욱 낙담을 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동찬은 윤숙이 내놓은 '반반 논리'를 생각하면서 창피한 나머지 어디다 하소연할 데도 없다는 사실에 더욱 화가 치밀었다. 한 가족 안에서 남녀가 평등하다는 주장은 아이를 격년으로 할머니를 만나게 하라는 우스꽝스러운 약속이나 만들어내라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동찬이 생각하기에 남녀 평등이란 가정 안에서 행복할 자격이 있음에도 불행하게 살 수 밖에 없는 여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말 할 수 있는 논리였다. 그런데 윤숙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신의 편리에 따라서 그런 논리를 잘도 갖다 부치고 있었다. 새삼 동찬은 윤숙에 대해서 치를 떨었다.

  어느새 동찬은 자신의 아파트 문 앞에 서있었지만, 선뜻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있었다. 문득 악처는 남편을 철학가로 만드는 법이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이 머리를 스쳤다. 동찬은 한 밤 중에 어두운 복도에서 모자란 사람처럼 혼자 키득키득 웃어댔다.

  윤숙 때문에 동찬 자신이 스크라테스같은 철학자 수준에 오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여자 덕분에 최소한 동찬의 머리는 늘 복잡했고 신경회로는 컴퓨터 못지않게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동찬은 사랑하고 좋아하는 배우자와 사는 것만이 가정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동찬에게 배우자에 대한 미움의 감정이란 가정을 깨야할 만큼 절대적이지 않았다. 이런 상태가 철학자들이 온갖 세상 문제로 고민하는 상태일까. 근데 맙소사! 철학자란 무슨 개밥그릇만도 못한 존재란 말인가. 복잡할 것은 없었다. 십 년 전, 돈과 가정, 직장을 한 방에 해결해 주는 종합 선물 세트가 눈앞에 펼쳐졌을 때 그것에 선뜻 손을 내민 것은 동찬이었다. 그리고 윤숙은 이혼 법정에 서는 세상의 많은 여자들과 비교했을 때 그렇게 악처는 아니었다. '윤숙은 동찬의 좋은 파트너였다'라고 말해야 했다.

  동찬은 자신의 아파트 출입문 문고리를 잡고, 이번 명절엔 꼭 단국이를 김 여사 집에 데려갈 것이고 단비를 데려오리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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