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요코의 향기
요코가 뒤에 있는 사내들에게 눈짓을 했다. 사내 셋이 일제히 시게이 뒤에 있는 사내들 앞으로 가더니, 다리를 벌리고 섰다. 요코가 시게이의 얼굴을 발로 찼다.
“윽!”
시게이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나 돌이 깜짝 놀라서 눈이 커졌다.
“이게 벌이다, 그 정도면 족하다, 가!”
“더, 마음 풀릴 때까지 때려.”
시게이는 담담하게 요코에게 더 때리라고 사정했다.
“한마디만 더 한다, 날 지배할 생각이 아니라면 가!”
요코는 담담하게 시게이에게 명령했다. 요코가 시게이의 앞으로 가서 어깨를 위로 잡아 당겼다. 시게이가 일어나 요코와 마주 섰다.
“용서 해줘, 내일 올게.”
“연락하기 전에는 오지 마.”
시게이는 고개를 앞으로 내밀어 요코와 얼굴을 가까이하고, 눈을 맞추고 돌아섰다. 밖을 향해 가는 시게이의 뒤를, 부하 셋이 따라갔다. 요코가 부하 셋에게 눈짓을 던졌다. 부하 셋이 허리를 굽혀 예의를 표하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어디 아퍼?”
“이제 안 아파요.....”
식탁 의자에 나란히 앉아서, 요코가 나돌에게 걱정스럽게 물었다. 나 돌은 시게이와 어떤 관계냐고 묻고 싶었다. 요코는 나 돌의 손목을 잡았다.
“눈을 감아, 그리고 숨을 길게 들어마셔.....”
나 돌은 눈을 감았다. 요코의 향기가 손목을 타고 몸으로 퍼졌다. 손목의 맥을 잡은 요코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손목으로 뜨거운 기운이 들어왔다. 허리와 얼굴에 뜨거운 기운이 뭉쳤다. 나 돌은 눈을 살짝 뜨고 요코를 보았다. 바로 앞에 긴 머리를 옆으로 넘긴 요코가 있었다. 숨을 크게 쉬면 안 될 것 같아 멈추었다.
“눈 떴네? 어때?”
“좋아요, 몸에 따뜻한 기운이 돌아요.”
요코의 눈동자가 나 돌의 손목을 보고 있었다. 나 돌은 부끄러움에 손목을 거두고 싶었다. 요코가 손을 떼면서, 뜨거운 기운이 멈추었다.
“들어가자, 맛있는 거 해 줄게.”“집에 사람이 많아 보이던데, 나가요.”
“무슨? 그럼 내가 섭섭하지, 가자.”
요코가 일어났다. 나 돌은 집에 들어가는 것 보다,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능력 밖에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들었다.
*..*
거실 벽에는 일본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림 밑에는 옆으로 넓게 퍼진 상이 놓였다. 의식을 치루기 위한 상이었다. 요코는 가볍게 허리를 숙여 그림에 예의를 표했다. 나 돌도 따라서 허리를 앞으로 구부렸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으로 거실은 단아함을 품어냈다. 방문 3개는 닫혀 있었다. 벽 한쪽을 차지한 책장에는 일본 책과 한국 책이 섞여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다.
“2층이 좋겠다, 계단 올라갈 수 있지?”
“하나도 안 아파요.”
나 돌은 사람이 많을 줄 알았는데, 한 명도 보이지 않아 마음이 놓였다. 2층 거실에는 사무용 책상과 소파가 창문 쪽으로 놓였다. 방문은 닫혀 있었고, 사람이 없어서 안심되었다. 큰 냉장고와 싱크대가 창문 맞은편 벽을 채웠다. 싱크대 앞에는 묵직한 식탁이 놓여 있다. 일본 무사 복장의 요코가 시게이와 칼을 부딪치며, 허공에 떠 있는 사진이 눈길을 끌었다.
“난 해 본 적이 없어서 요리는 꽝이야, 그래도 내가 한 거니까 맛있게 먹어.”
“맛있겠다, 같이 먹어요.”
식탁에는 일본식 회덮밥이 두 사람 앞에 놓였다. 나 돌은 거실을 구경하며 식탁에 앉았고, 요코가 정성스럽게 식탁을 차렸다.
“밥하고 양념은 일하는 사람이 했지만, 그걸 버무려 섞은 건 나니까 내가 한 거지?”
“예, 맛있어요.”
요코는 나 돌에게 요리를 해 주는 것에 집착했다. 나 돌은 궁금증을 물었다.
“시게이가 또 올까요?”
“오겠지, 약혼자니까.....”
“아, 약혼한 사이에요? 결혼은요?”
“아직은 몰라.....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약혼한 사이야.”
나 돌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입안에 음식이 껄끄러워졌다. 시게이는 나 돌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이룬 게 많은 사람으로 보였다. 큰 키에 생긴 것도 괜찮았다. 부하를 거느리고, 경호 차량이 따라 다니는 경제력과 엄청난 무술을 구사하는 사람이었다. 저절로 작아지는 걸 느꼈다.
“시게이는 좋겠네요... 어울려요, 두 분이.....”
“어울려? 결혼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달라, 부모님 뜻에 따르는 결혼이라.....”
“불러 주세요.”
“뭘?”
“결혼식에요, 축하드리러 갈게요.”
“언제 할지 모른다니까, 축하하는 표정이 아닌데?”“아니에요, 축하해요. 아주 많이!”
나 돌은 음식을 씹으며 사무적인 음성으로 말했다. 요코는 입을 벌리고 웃었다.
“시게이한테 나 돌이 축하하더라고 전해 줄게, 아주 많이!”
“시게이가 많이 사랑하는 거 같던데, 그래서 맞아 주기까지 하고... 아까는 고마웠어요.”
“맞아 줬다고? 죽어, 나를 무시하는 행위는 죽음이야, 내 집에서 내가 초대한 손님을 건드 리고 살아남은 건, 내가 봐 준거야, 내가 미안하지..... 미안!”
요코는 진지하게 나 돌의 말을 바로 잡았다. 시게이가 봐 준 게 아니라, 요코가 봐 준 거라고 했다. 요코가 시게이보다 더 높다는 의미였다.
“교수님이 더 쎄요?”
“쎄? 아, 누가 더 무술이 뛰어나냐고? 모르지... 하지만 시게이는 엄청 잘못 했어, 그런데 무 술을 익혀야 하지 않을까?”
“저요? 그럼 좋겠지만..... 싸움 잘 하고 싶어요.”
“내 친구는 강해야지, 안 그래?”
요코는 웃으면서 나 돌에게 물었다. 입가에 번지는 미소와 살짝 보이는 보조개는 황홀하게 예뻤다. 요코는 단순한 체크무늬에 희미하게 영어가 적힌 블라우스와 검정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흰 티에 청바지를 입었었는데, 바꾸어 입고 있었다. 강해져야 아름다운 요코와 함께 할 수 있다는 말은 진리로 들렸다.
“친구요? 제가 무슨....”
나 돌은 어림도 없다는 뉘앙스를 남겼다.
“어때서? 한국 사람들은 나이를 많이 따지던데, 일본은 안 그래, 친구는 친구지.”
“교수님하고 학생이기도 하고, 제가 많이 어리기도....”
나 돌은 요코가 더 어려보이지만, 교수는 나이가 많아야 가능한 직업이었다. 어리다고 하면서도 요코에게 미안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어려서, 몇 살인데?”
“1995년생이요, 스물넷인데요.”
나 돌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고, 핸드폰 케이스에서 주민증을 꺼내 요코 앞으로 내밀었다. 요코는 주민증을 보면서 웃었다.
“사진이 이게 뭐니? 실물보다 너무 못 나왔다. 민증 보여 줄까?”
“괜찮아요.....”
요코의 나이는 처음부터 궁금했었다. 요코는 사무용 책상 서랍에서 주민증을 갖고 왔다.
주민증을 확인하고 나 돌에게 내밀었다.
“1990년생이네요, 스물 아홉이네요.....”
나 돌은 어리다고 하기에도, 많다고 하기에도 애매해서 웃음으로 때웠다. 교수나이는 최소한 서른은 넘어야 가능한 직업이었다. 아름다운 요코의 얼굴은 열아홉이라고 해도, 누구나 믿어 의심치 않게 생겼다.
“빽이 좋아, 와세다 대학 설립자가 우리 할아버지거든, 한국에 우리 집안에서 새운 대학 은 세 개야, 우리 대학도 그중에 하나고, 내가 원해서 교수 된 거야, 빽 좋지?”
“와~ 쎄다! 쎈 빽이네요.”
“나 돌은 나철이 빽이잖아?”
“그러긴 해도, 별로 쓸데가 없어요.”
나 돌은 나철이 배경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요코와 비교 할 바가 아니었다.
“나철에 대해 한국 사람들은 잘못 알고 있어, 그는 신은 아니지만 인간이 이룰 수 있는 최고의 경지를 이루었어, 나 돌 빽은 엄청나, 내가 알아 봤어.”
요코는 진심으로 나철에 대해 존경을 표했다. 나 돌은 그렇게 말해주는 요코가 고마웠다. 한국사람 절반은 알고 절반은 모르는 나철을, 최고라고 치켜 주는 요코가 성스러워 보였다.
“고마워요, 우리 증조할아버지를 알아주는 사람 흔치 않거든요... 교수님 고마워요.”
“교수님? 갑자기 멀게 느껴진다, 그냥 요코라고 불러, 친구하기 싫어?”
“친구요? 말도 안돼요..... 너무 과분해서.....”
요코랑 친구하는 건, 죄를 짓는 기분이 들었다. 아름답고 지적이고 사랑스러운, 너무도 사랑스러워 만질 수 없는, 마주 볼 수 없는 존재가 앞에 있었다.
“내가? 난 친구하고 싶어, 싫어?”
“그게 아니라..... 너무 아름답고, 지적이고, 빽도 쎄고, 저랑은 너무 멀어요..... 저는 교수님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요..... 진짜, 아주 많이요.”
“넌 너를 몰라, 나 철을 모르니까, 차 한 잔 할까?”
요코는 입가에 미소를 띠면서 일어났다.
“뭐가 좋아? 커피, 녹차, 꿀...”
“커피요.”
“사향 고양이 똥 커피 어때?”
“그게 뭔데요?”
“향기가 좋은 커피야, 동물 학대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좋아.”
요코가 정성스럽게 커피 머신에서 커피를 내렸다. 나 돌은 향기를 맡느라 커피 잔을 코 밑으로 하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향기가 은은하게 들어왔다.
“향기 좋아요, 교수님 향기보단 못하지만.....”
“또? 계속 그렇게 부를 거야? 요코, 요코라고 불러!”
요코는 정색을 하고, 나 돌에게 졸랐다.
“미안해서요, 요코님!”
“님? 선생님, 교수님, 고객님, 손님, 사장님, 요코님? 흔하디, 흔한 님을 요코 뒤에 붙이고 싶어? 그냥 불러.”
“요꼬, 오!”
“꼬, 오! 닭이야, 내가 닭이냐고?”
“요코, 요코,”
나 돌은 요코라는 발음에서 향기를 맡았다. 요코가 듣는데 요코라는 이름을 불러서, 더욱 향기로웠다. 요코는 입을 벌리고 웃었다. 요코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보이는 치아는 조그맣고 가지런해서 귀여웠다. 치아 사이로 언뜻 보이는 붉은 혀는 작아 보였다.
“나 돌이 요코라고 부르니까 내 이름이 빛나는 거 같다, 요코한테 향기 나?”
“예, 아주 좋은 향기가 나요.”
“어떤데?”
“뭐가요?”
“향기가?”
“좋아요, 향기를 설명해요?”
“응? 어떤지....”
“아주 많이 좋은 향기!.”
“훗, 좋다니 좋다, 나철의 후예가 좋다니 좋다. 나철은 죽지 않았다.”
요코는 기분 좋은 웃음을 날리면서, 나철이 죽지 않았다고 선언하듯 뱉었다.
“예, 할아버지가 죽지 않았다고요?”“나철은 죽지 않았어, 보여 줄까?”
요코는 일어나서 책장 제일 위 칸에서 누런색으로 바랜 책을 가지고 왔다.
첫 겉장에 ‘檀氣開天’이라는 (단기 개천) 한문이 적혀 있었다.
11부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