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초대 받은 손님
“독립 운동의 정신적 토대는 단군이었어요, 일제 강점기에 나라를 구하기 위해 싸운 독립군 의 품에는 단군의 영정이 있었어요. 우리 할아버지는 단군의 기상을 세우기 위해 구월산 삼성사에서 승천하셨어요, 홍암 나 철은 대한민국의 간디에요.”
“일본이 망해야 조선이 산다? 진짜 그렇게 믿어?”“예, 당연하죠!”
나 돌은 당연 한 걸 왜 묻냐는 표정으로 요코를 보았다. 요코는 손에 들었던 소주를 마시고, 일어났다. 나 돌은 얼결에 따라 일어났다.
“저기, 가시게요?”
요코의 느닷없는 행동에 나 돌은 저기라는 표현으로 어이없음을 드러냈다. 증조할아버지 나 철을 한국의 간디라고 말하는 것도 가슴 아팠다. 어려서 세계 위인으로 간디를 읽으면서 우리 할아버지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버렸는데, 왜 간디는 위인이라고 배우면서 나 철은 가리키지 않는지 불만이었다.
“저기, 한 대 맞고 싶구나?”
요코는 정색을 하고 나 돌을 응시 했다. 나 돌은 마주보다 시선을 돌렸다. 요코와 눈이 마주치면 속이 울렁거리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왜요? 갑자기 일어나서 가면 어쩌라고요?”
“그래도 저기는 아니지, 요코가 만만하니, 쉬워 보이냐고?”
“그게 아니라, 대화 중에 일어나면..... 뭐가 돼요?”
“대화? 일본이 망하면 좋겠다면서? 그럼 난? 요코 망하면 좋겠다는 말 듣고 앉아 있어? 싫 어, 한국이 망하면 좋겠어? 딴 사람들은 지난 일이라고 잊는 게 좋다고 하던데, 넌 이상해.”
요코가 식당 문을 열고 나갔다. 나 돌이 따라가려는데, 카운터에서 주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 돌은 주머니에서 손을 넣고 뒤졌다. 만 원 권 한 장이 나왔다. 체크카드에는 잔액이 떨어진 지 오래였다.
“저기.... 얼마에요?”
“오만 칠 천 원이에요.”
“오만.... 만원 밖에 없네..... 어쩌지....”
나 돌은 당황스러웠다. 그렇다고 요코를 불러서 화가 났더라도 계산은 하고 가라는 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저기요, 다음에 드리면 안 될까요, 뭘 맡기고 갔다가..... 핸드폰 맡길게요. 갑자기 가는 바 람에.... 그거 참....”
나 돌은 머리를 긁적이며, 주인과 시선을 옆으로 하고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 분이 사기로 하고 그냥 갔나 봐, 학생이 화나게 만들었구나?”
“화났나 봐요, 일본이 망해야 한다고 했더니, 그건 일제 때 그렇다는 말이었는데....”
“일본이 망하길 바라는 사람은 지금도 많아, 어쩌나.... 핸드폰은 필요 없고 번호 남기고
갔다 와요.”
50대 여주인은 순순히 가라고 했다. 나 돌은 미안하기도 하고, 다행스럽기도 해서 연신 고개를 숙이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리고 메모지에 핸드폰 번호를 적었다. 식당 문이 열리고 요코가 들어 왔다.
“깜박 했네, 얼마에요?”
“학생이 핸드폰 번호 알려 줬는데, 계산하게요?”
여주인은 요코에게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주인의 일본에 대한 거부감이 전달되었다.
요코는 여주인의 사무적인 목소리와 표정이 거북스러운지, 카드를 내밀었다. 나 돌은 계산 하는 옆에 서 있기 어색해서 다른 곳을 보았다. 계산을 마친 요코가 먼저 나갔다. 나 돌은 여주인에게 인사를 넙죽 하고 따라나섰다.
“많이 맞아야 정신 차리겠다.”
식당에서 나와 주차장을 갈 때까지 입을 다물었다. 미안하다고 하기에는 미안한 게 없었고, 이야기를 이어가기에는 길거리라는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요코의 회색 승용차가 보였다. 식당에 올 때 같이 타고 왔었다. 차에 도착한 요코가 리모컨을 눌러, 차에 불이 깜박였다. 어정쩡하게 뒤에 서 있는 나 돌에게 맞을 거냐고 물었다. 웃음기 없는 얼굴로 아름다움의 정석을 보여주었다. 딱히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한국에 나온 지 일 년 만에 일본을 싫어하는 사람을 만났더니 기분 안 좋네.... 하필 그 사 람이 나 돌이라 더 안 좋다, 기분을 풀려면 어쩌면 좋을까?”
“기분을 맞추려고 거짓말을 칠 수는 없어요. 교수님이 예뻐서 기분 맞추려고 건성으로 말하 는 사람들만 만나서 그래요, 어떻든 화나게 해서 미안해요.”
“하나도 안 미안한 표정인데? 일본이 망해야 한다는 말은 거짓말이지?”
“일본이 망해야 우리가 독립을 하던 일제 때는 그랬어요, 지금도 일본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생각해 볼게요...”
“나 철이 할아버지 맞아?”“예, 증조할아버지요.”
요코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갸웃하면서 눈을 껌벅였다.
“우리 집에 올래, 맞지 않고 살려면 많이 배워야겠다.”
“집에요? 무술 가리켜 줄려고요?”
“무술? 그런 건 모르겠고, 일본에 대해 알려 줄게, 핸번 뭐니?”
나 돌은 핸드폰 번호를 요코에게 일러 주었다. 요코는 문자로 성북동 주소를 보냈다.
그런 연유로 성북동에 왔다.
요코를 학교에서 먼발치에서 보기는 했지만, 아는 척을 하기에는 멋쩍었다. 요코가 남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웃고 있는 모습은 자주 볼 수 있었다. 요코의 생명공학 강의는 학교에서 제일 큰 강의실에서 했다. 강의실은 남학생들로 꽉 차서 강의실 문을 열고 수업을 진행했다.
“와, 발음 죽인다.”
“죽이는 게 발음뿐이냐, 몸매 예술이다.”
“칠판은 행복하겠다, 매일 닦아 주니까....”
다른 학교에서 요코를 보려고 원정 오는 학생들도 있었다. 나 돌은 열린 강의실 문 사이로 정장차림으로 강의하는 요코를 먼 발치에서 보았다. 요코가 찾아오라고 했다고 무턱대고 찾아가기에는 멋쩍었다.
‘하이, 안 와?’
요코의 문자를 받고 한 나절 동안 가슴이 뛰었다. 수도 없이 문자를 썼다, 지웠다. 강의를 마치고 남학생들 사이에 싸여 계단을 내려오는 요코와 마주 쳤었다. 요코는 손을 가슴에 올리고 흔들며 웃었다.
“하이, 나돌!”
“예.....”
나 돌은 꾸벅 인사를 하고 지나쳤다. 요코를 둘러싼 남학생들의 부러움, 질투에 찬 시선을 받으며 바쁜 사람처럼 성큼 걸음으로 올랐다.
“요코네 집이 일본에서 먹어주는 재벌이라더라.....”
“재벌은 한국에만 있는 기업형태고, 굴지의 기업이라고 하는 게 맞아.... 일본에서 알아주는 족보 있는 집안이라던데.”
“야쿠자 집안이라던데?”
“나 돌을 한 방에 보내는 거 보면, 그 말이 맞는 말 같다.”
“역도부를 들어서 던지고, 격투기 선수 이를 아작 냈데, 예뻐서 맞아 준건가....”
학교에서는 요코에 대한 근거 없는 소문이, 부풀려져서 돌아다녔다. 궁금증이 증폭 되었다.
‘집 앞에 왔어요..... 문 열어 주세요!'
대문 옆 돌기둥에 박힌, 인터폰을 누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문자를 보내고 숨을 크게 쉬었다. 덜컥! 안에서 대문 열리는 기계음이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반갑다, 뭐 타고 왔어?”“마을버스요, 집이 어마무시 하네요.”
나 돌은 요코의 잘룩한 허리에 눈이 가는 걸 애써 외면하며, 2층 집과 정원에 시선을 주었다. 옆으로 길게 들어 선 2층 건물은 돌로 치장을 했다. 자연석 벽에 조그만 빨간 창틀이 눈에 띄었다. 동화에 나오는 그림 같은 집이었다.
“집하고 정원이 그림 같아요, 거인이 사는 성을 상상했어요.”
“어디 사는데?”
“허름한 아파트요, 얼마 전에 이사했어요.”
“부모님하고 살아? 형제는?”
“저 혼자고, 엄마랑 살아요, 아빠는 간혹 오세요.”
“간혹?”
요코는 나 돌의 주변 상황에 관심이 많았다. 나 돌은 엄마가 이혼했다는 말을 할 필요를 못 느꼈다.
“지방에서 일하거든요, 소나무가 사람 같아요.”
‘응, 이도령과 성춘향이야.“
요코의 입에서 이도령과 춘향이라는 말이 나오자, 웃음이 터졌다. 성인 키 높이의 소나무 두 그루가 비스듬히 기대고 서 있는 형상이 특이해서 물었었다. 요코의 대답이 의외라서 웃음이 쏟아졌다.
“왜 웃어? 춘향이 기대고 서 있는 거 같지 않아?”
“살짝 배가 나온 춘향이네요, 이도령이 더 수줍어 보이고....”
잔디 위에 현관과 집을 이어주는 넓은 검정돌이 박혀 있었다. 나 돌은 돌을 밟고 있다, 소나무 옆에 섰다. 소나무 높이가 나 돌보다 한 뼘 정도 컸다. 위로 가늘게 선 소나무가 옆에 기대고 선 소나무보다 푸른색이 선명했다.
“춘향이 예쁘지? 배가 나온 게 아니라 한복이 펑퍼짐해서 그런 건데, 심하다.... 나무도 사람 말 알아들어,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해!”
요코는 옆으로 쫌 퍼져 비스듬히 서 있는 소나무 잎사귀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나 돌은 웃으며 가볍게 허리를 굽혔다. 요코가 하는 것처럼 손으로 소나무를 만졌다.
“점심 식사는 했어?”
소나무 옆으로 넝쿨이 왕성한 나무가 철로 만든 틀을 따라올라, 그늘을 만들었다. 그늘 아래에는 통나무 반쪽을 눕혀 만든 큼직한 식탁이 있었다.
“먹었어요, 오지 전에 짜장면 먹었어요.”
“여기서 기다려, 내가 먹을 거 같고 올게.”
요코는 웃음을 남기고 집으로 갔다. 평범한 청바지에 가슴에 까만색 영어가 적힌 흰 티를 입었는데, 잘룩한 허리의 곡선은 시선을 끌었다.
“괜찮은데....”
요코는 집 현관문을 열다가, 나 돌의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웃었다. 긴 생머리에 반쯤 가린 얼굴은 숨이 막히게 아름다웠다. 건물과 정원에서는 근대 한국식 부잣집의 분위기를 그대로 담고 있었다. 편하고 아늑하고 정겨웠다. 거기에 요코의 존재는 뿌듯함과 설렘을 불러왔다.
“내가 만들었어, 쫌 맛있을 걸!”
“예쁘네.... 고맙습니다.”
“고맙긴, 먹어 봐.....
콜라가 화려한 잔에 담겨 있었다. 하얀 접시에 빨간 살이 도톰한 초밥이 여덟 개 얹어있다. 회 밑에는 하얀 밥이 밤 톨 두 개 크기로 깔려 있었다. 침을 꼴깍 삼키고 젓가락으로 집어 먹었다. 입안에 확! 와사비향이 퍼지면서 눈가에 뜨거운 게 돌았다.
“윽, 하!”
뱉고 싶었지만, 마주 앉아 웃고 있는 요코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서 참았다. 얼굴이 벌개 졌다. 콜라를 바쁘게 마셨다. 후~ 후~ 입안에 불이 난 것 같았다.
“와사비가 넘 많구나, 내 입맛에는 맞던데.....”
요코가 미안한 표정으로 나 돌을 보면서, 빨간 회를 입에 넣었다. 윽! 요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입 안에 있던 음식을 손바닥에 뱉었다.
“누구, 누가 와사비를 더 넣었나 봐....”
요코는 식탁에 있는 벨을 눌렀다. 현관문이 열리고 기모노를 입은 40대와 30대로 보이는 여성 둘이 종종걸음으로 왔다.
“먹어 봐, 누가 와사비를 넣었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두 여성이 동시에 ‘제가요.’를 했다. 나 돌이 픽! 웃었다. 요코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따졌다.
“와사비 넣기 전에 색깔 안 봐요, 와사비로 비볐어, 먹어 봐요!”
요코의 음성은 담담하지만, 톤이 일정하여 명령조로 들렸다. 두 여성은 동시에 빨간 회를 한 점씩 입에 넣었다. 윽! 고개를 숙이고 입만 움직여 먹었다.
“뱉어요, 손님에게 사과하세요!”
두 여성은 고개를 넙죽이 숙였다.
“죄송, 죄송하므니다.”
나 돌은 벌떡 일어나서 같이 고개를 숙였다.
“괜찮스므니다, 정말이므니다.”
상대가 금방 알아들으라고 일본식 한국말로 받았다.
“다시 만들어 오세요.”
두 여성은 나 돌과 요코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들어갔다. 안 먹어도 된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요코의 영역이라 참았다. 현관에서 인터폰 소리가 들렸다. 요코가 현관을 주시했다. 현관 옆에 달린 자동 셔터가 안으로 올라갔다. 고급스런 검정승용차 두 대가 들어 왔다.
“벌써 왔네.....”
요코가 미안한 표정으로 나 돌을 보았다. 앞 차에서 건장한 사내 둘이 내렸다. 차에서 내린 사내 둘은 뒤차로 뛰어가 뒷문을 열고, 허리를 굽혔다. 운전석에서는 사각형 얼굴에 건장한 사내가 내렸고, 뒷문에서는 하얀 양복에 흰 구두가 어울리는 삼십 대 남성이 내렸다.
“요코!”
남성은 요코에게 손을 흔들며 웃었다.
9부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