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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위험한 투자가
작가 : 새라새
작품등록일 : 2018.11.7

기적의 투자가라고 불리운 여자의 모든 것을 건 사랑의 한판승!

알코올 중독자로 생을 마감한 루비가 신의 손을 가진 투자가로 돌아왔다.
12년 전으로 회귀한 루비는 증시의 폭락과 화려한 부활을 꿰뚫고 있다.
그녀는 금융가에서 '미래를 아는 소녀'라 불리며 베일에 싸인 어둠의 여왕이 되었다.
어느덧 사랑하는 K와 재회한 루비.
그를 낭떠러지로 떠밀었던 비참한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24화. 아서 해리슨(2)
작성일 : 18-11-09 16:09     조회 : 276     추천 : 0     분량 : 5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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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5.

 K가 손을 내밀어 내 손에 무언가를 쥐어주었다.

 하얀 아스피린이 든 작은 종이상자였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들릴락말락하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약, 먹고 가자.”

 

 K는 엘리베이터 앞 정수기에 비치된 종이컵 하나를 꺼낸 후 더운물을 받아서 내밀었다.

 

 “고마워요.”

 

 나는 아스피린 두 알을 입 안에 넣었다.

 물을 마시며 알약을 삼키는 척 했지만 하얀 알약은 반쯤 녹은 채 내 입안에 있었다.

 

 혀 위에 놓인 아스피린은 아릿하고 쌉싸름하면서도 감미로운 뒷맛을 남겼다.

 마치 지금 이 순간, 그와 함께 있는 나의 심정처럼···

 

 그를 향한 사랑은 고통스러웠지만 쓰디쓰지는 않았다.

 곧 이별을 앞두고 있는 사랑은 괴롭고 쓸쓸했지만 길고 달콤한 여운이 남았다.

 나는 그가 준 아스피린이 완전히 형체가 없어져서 내 몸에 흡수될 때까지 간직하고 싶었다.

 그리고 한없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K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K는 주차장에 육중하게 도사리고 있는 근사한 남색 SUV의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푹신한 가죽 시트 위에 올라앉자, 곧이어 차에 탄 K가 내 쪽으로 몸을 굽히고 안전벨트를 채워 주었다. 그에게서 시원한 아쿠아마린 스킨 향이 풍겨왔다.

 

 편안하게 검은 가죽 시트에 몸을 파묻었다.

 

 오늘 하루는 나에게 주어진 새로운 선물이었다.

 과거로 돌아온 후, 나에게 모든 날들은 하루하루가 선물이었다.

 

 예전에, 몸살감기를 앓던 나에게 아스피린을 건네주던 K의 모습을 떠올렸다. 잠들 때까지 손을 잡아주던 다정한 그의 기억 또한 나에게 남아 있는 소중한 선물이었다.

 어둠을 헤치고 도로 위를 나아가는 K의 능숙한 운전에 몸을 맡긴 채 차 안의 은밀한 공간을 공유하는 지금 이 순간을, 그의 아쿠아마린 스킨 향을, 도로 위를 수놓는 한강변의 아름다운 불빛들을, 나는 생이 남아 있는 한 고스란히 기억 속에 담아둘 것이다.

 못 견디게 그가 그리울 때면, 언제든지 꺼내 볼 수 있도록.

 

 한 사람의 생은 타인의 생을 침해하지 않고도 온전히 완성되는 것이다. 나는 운명을 거슬러 역주행을 감행한 이유를 이해했다.

 

 나는 눈을 감고, 그와 함께 있는 순간의 공기에 입 맞추고, 숨을 들이마시며 그 느낌을 마음 속 깊이 새겨두었다.

 

 56.

 대문 앞에서 K를 배웅한 후, 집 안으로 들어오면서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현관문 앞의 센서가 작동하지 않았을 무렵부터였다.

 익숙한 집 안에는 평소와 다르게 묵직하고 서늘한 냉기가 고여 있었다.

 스위치를 찾아 거실 등을 켜 보았지만 불빛은 들어오지 않았다.

 다른 스위치를 눌러봐도 마찬가지였다.

 

 어디선가 습기를 머금은 밤공기가 흘러들어왔다.

 거실의 북쪽으로 이어진 부엌 쪽 창문이 열려 있었다.

 

 온몸의 땀구멍이 죄어들며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창을 열어두고 외출한 기억이 없었다.

 나는 열린 창 쪽을 쳐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면서 섬뜩한 한기가 등골을 타고 내려갔다.

 

 검은 그림자가 천천히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가 누구인지··· 나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루비.”

 

 그가 작은 손전등을 켜고 내 이름을 불렀다.

 흐릿한 불빛 속에서, 푸른 눈이 광인의 눈빛처럼 유난히 번득이는 그 남자는··· 아서 해리슨이었다.

 

 “···어떻게 들어왔어요? ···연락도 없이.”

 

 침착하게 말하려고, 떨지 않으려고 애썼다.

 평소와 전혀 다른 그의 모습이 낯설었지만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해야 했다.

 

 “네가 걱정되어서 왔지. 안색이 안 좋네.”

 

 아서가 얼음처럼 차가운 손가락을 뻗어 내 얼굴을 건드렸다.

 한눈에 보기에도 아서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되도록 그를 자극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저도 모르게 흠칫,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아서···”

 “······”

 “제이슨이 걱정하고 있어요. 대체 무슨 일이에요?”

 “······”

 

 아서가 한발 더 내 앞으로 다가왔다.

 

 “널 데리러 왔어.”

 

 낯선 모습의 아서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가 내 어깨를 손으로 잡더니 아플 정도로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아서는 나를 끌어당기고는 두 팔로 안았다.

 

 그의 몸에서 오랫동안 씻지 않은 것 같은 케케묵은 냄새가 풍겼다.

 아서는 몹시 불안정하고 위험해 보였다.

 그렇지만 그와 나는 한 때 마음이 통하는 친구였었다.

 그가 무엇 때문에 고의로 나를 파산시키고 내 집에 침입하였는지, 대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정신을 바싹 차리고 그와 이성적인 대화를 시도해 보아야 했다.

 

 “아서··· 일단 앉아 봐요. 무슨 일인지 먼저 나한테 얘기해 봐요. 우리는 친구잖아요.”

 

 나는 그를 소파에 끌어다 앉혔다.

 그는 내가 끌어당기는 대로 옆에 앉았지만,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 말을 부정했다.

 

 “아니야, 루비. 네가 틀렸어.”

 

 “······”

 

 “네가 거짓말을 하던 날부터 우린 더 이상 친구가 아냐.”

 

 “······”

 

 “네가 날 배신했던 그날 밤에··· 나도 과거의 나를 버렸어. 그저 네 마음에 들고 싶어서 겉으로만 친절하게 구는 나약하고 비겁한 남자를 말이야.”

 

 “······”

 

 “넌··· 그자에게 아무 감정도 없다고 했잖아.”

 아서의 이글거리는 눈빛이 내 앞에 바짝 다가왔다. 그가 이를 갈 듯 거칠게 말했다.

 

 “서울에 광고회사를 차리고 회사를 그자에게 넘겨주면 곧장 이곳을 떠날 거라고 했었지. 두 번 다시 만날 리 없는 사이라고.”

 

 “······”

 

 “그 자가 널 보던 눈빛을 칼로 도려내서 너에게 보여주고 싶어. 너도 마찬가지야. 역겨워.”

 

 아서가 다시 내 양팔을 꽉 붙잡더니 거칠게 흔들었다. 나는 아픔을 참으며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어떻게 그를 설득할지 방법을 생각해내야 했다.

 

 “넌 여기를, 그 자를 떠나지 않을 거야. 넌 곧 떠날 거라고, 떠나고 싶다고 그렇게 말했지만 네 의지로는 절대로 그렇게 못해. 더러운 년. 그자에게 몸을 내줬지? 앞으로도 몇 번이고 계속 그러려고 했지?”

 

 “왜 이래요, 아서.”

 

 그의 팔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했을 뿐이었다.

 

 “난 네가 스스로를 망치려고 하는 걸 차마 두고 볼 수가 없어. 내가 나서서 네가 뜻을 이루도록 널 도와주겠다는 거야.”

 

 그의 눈빛이 위험하게 번쩍였다.

 나는 다시 한 번 몸을 비틀며 세차게 그의 팔을 뿌리쳤다.

 

 “놔요, 아서··· 당신은 나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 없어요. 당신이 나에게 뭔데요, 그냥 동료일 뿐이잖아요. 당신은··· 그런 이유로··· 고의로 나를 파산시킨 건가요?”

 

 “그래··· 맞아.”

 

 갑자기 그의 표정이 절박하게 변했다.

 

 “루비, 나와 함께 떠나자. 네가 나와 함께 이곳을 떠난다면 네가 잃은 돈은 죄다 너에게 돌려주겠어. 내가 우리 재산을 몽땅 탕진해 버릴 만큼 어리석을 리가 없잖아. 너의 계좌와는 정반대로 반대매매를 걸어둔 계좌를 은닉해놨어. 네가 잃어버린 만큼 난 땄어. 우린 여전히 부자야, 루비, 나와 같이 가자.”

 

 아서는 내 팔을 잡고 흔들며 나에게 애원했다.

 

 "제발···"

 

 “······”

 

 내가 끝내 대답하지 않자,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진 아서는 무서운 힘으로 나를 잡아끌었다.

 그의 안색이 유령처럼 창백했다.

 

 “아서··· 왜 이래요? 당신, 몸이 아주 안 좋아 보여요, 나랑 같이 병원에 가 봐요.”

 

 “아니,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는 내가 잘 알아. 네가 그 개자식과 놀아났던 끔찍했던 밤 이후에, 난 거의 먹지도 자지도 못했으니까.”

 

 아서가 입은 옷은 지저분해보였고 머리카락은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었다.

 

 “아서··· 이러지 말고 매컬로우 교수님과 함께 상의해 봐요. 제이슨이 경찰에 신고한다고 했어요. 이러다간 당신, 범죄자가 될 거예요. 그 전에 우리, 같이 해결할 방법을 찾아봐요. 지금이라면 모든 걸 돌이킬 수 있어요.”

 

 나는 그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말했다.

 하지만 몇 번인가 눈을 껌벅이던 그는 마침내 슬프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오랫동안 생각해봤어. 하지만 루비, 아무리 생각해봐도 너를 가질 방법은 단 하나 뿐이었어.”

 

 “······”

 

 "네가 딴 남자의 것이 되는걸 보느니··· 다른 건 다 무시하는 게 나아. 난 살아도 죽은 것만 못한 지옥으로 떨어질 테니까."

 

 비명이 터져 나오는 것을 가까스로 눌러 삼켰다.

 광기어린 그의 모습은 과거의 나와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그의 비뚤어진 욕망과 좌절이 내 것인 양 생생하게 느껴졌다.

 

 나는 어떻게든 그가 제정신을 차리도록 도와서, 자신이 한 짓을 뉘우치고 새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교수님은 걱정 마, 루비. 내가 건드린 계좌는 네 것 하나 뿐이야. 네 계좌는 회사에 운용을 일임했으니 위험 자산을 거래하다보면 손실을 볼 수도 있는 거잖아, 안 그래?”

 

 시간을 끌며 그를 설득해야했다.

 기회를 봐서 경찰에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었다.

 나는 롱아일랜드 캐피털에서 논쟁을 하던 때처럼 이성적인 어조로 또렷이 말했다.

 

 “운용자의 독단적인 판단으로 거액의 손실을 입으면 그 책임을 져야 해요··· 당신은 나나 제이슨, 매컬로우 교수님과 아무것도 상의를 하지 않았잖아요.”

 

 “그래. 내가 만일 롱아일랜드캐피털의 직원이면 책임을 져야겠지. 하지만 난 사표를 냈는걸. 부사장의 권한으로 이미 사표를 수리했어.”

 

 “······”

 

 “소송을 걸겠다고, 루비? 소송을 걸어봤자 시간이 많이 걸려.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우리 돈은 안전한 곳에 맡겨두었고, 타고 갈 배도 이미 수배해놨어. 루비, 넌 아무 걱정 안 해도 돼. 나한테 그냥 다 맡겨둬.”

 

 배라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머리가 아찔해지며 현기증이 밀려왔다.

 나를 납치하겠다는 건가? 배로?

 그렇다면 끝장이었다.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했지만 그를 설득하는 것은··· 더이상 불가능해 보였다.

 

 뚫어져라 나를 보는 광기어린 그의 눈빛 앞에서 부들부들 몸이 떨려오는 것을 숨길 수가 없었다.

 나는 핸드폰으로 구조를 요청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가 한발 더 빨랐다.

 

 그는 내 가방을 빼앗고 배터리를 빼서 멀리 던져버렸다.

 나는 바닥에 던져진 핸드폰을 들고 거실 유리창을 향해 힘껏 던졌다.

 

 둔탁한 소리가 났지만 두터운 강화유리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아서가 다시 내 팔을 잡아 비틀었다.

 

 절망감이 엄습해오는 속에서 나는 어떻게든 그를 제지하려고 애썼다.

 

 “루비, 허튼 짓 하지 마. 모든 게 다 널 위해서 라니까.”

 

 아서가 나를 끌어안고 입술을 비볐다. 역겨운 그의 체취를 맡지 않으려고 도리질을 했다. 이를 악물고 몸을 비트는 나에게서 흐느낌이 새어나왔다.

 

 “울지 마. 같이 이곳을 떠나자. 너도 기억하지? 그 아름답던 제주도의 별장으로 함께 가는 거야. 너는 바닷가를 걷는 걸 좋아했잖아. 이곳은 다 잊어버려. 내가 너를 위해 다 집안을 다 꾸며놨어. 너를 꼭 행복하게 해줄게.”

 

 아서가 주머니에서 하얀 손수건을 꺼내어 내 코와 입을 막았다.

 얼룩진 손수건에서 코를 찌르는 냄새가 강하게 풍겨왔다.

 창밖으로 어렴풋이 차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너도··· 알잖아···”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내 몸에서는 점차 힘이 빠져 나갔다.

 서서히 의식이 희미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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