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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위험한 투자가
작가 : 새라새
작품등록일 : 2018.11.7

기적의 투자가라고 불리운 여자의 모든 것을 건 사랑의 한판승!

알코올 중독자로 생을 마감한 루비가 신의 손을 가진 투자가로 돌아왔다.
12년 전으로 회귀한 루비는 증시의 폭락과 화려한 부활을 꿰뚫고 있다.
그녀는 금융가에서 '미래를 아는 소녀'라 불리며 베일에 싸인 어둠의 여왕이 되었다.
어느덧 사랑하는 K와 재회한 루비.
그를 낭떠러지로 떠밀었던 비참한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7화. 매컬로우 교수
작성일 : 18-11-09 15:29     조회 : 271     추천 : 0     분량 : 5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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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퉁퉁 부은 눈을 가라앉히느라 오전 내내 얼굴에 얼음주머니에 얹은 채 침대에 누워있었다.

 손가락 하나 꼼짝하기 싫었다.

 다시 눈을 뜨고 하루를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눈물이 가득 차올라 흐릿하게 볼 수밖에 없었던 K의 놀란 얼굴만 머릿속 가득 떠오를 뿐이었다.

 그를 모른척 지나쳐야 했던 내 신세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정오가 지나서야 겨우 몸을 일으킨 후 컴퓨터를 켰다.

 투자자 아카데미의 과제 레포트를 제출하기 위해 모의투자로 옵션을 사고 팔았다.

 기계적인 행위였다.

 수수료만 소진되었을 뿐 잔고는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며칠 전 매수했던 첨단정보통신 기술주는 계속해서 고공행진 중이었다. 나는 잠시 모니터 화면을 쳐다보았다.

 어떻게든 기운을 차리고 아서가 빌려준 책을 읽으려고 했지만 도저히 내용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기분전환을 하려고 대학 로고가 있는 진빨강 후드 티에 진바지를 걸치고 산책을 나갔다.

 차가 견인되고 없었기 때문에 나는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의 공원으로 향했다.

 

 키 큰 버드나무들이 잔디밭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운 것을 나는 한참동안 쳐다보고 있었다.

 공기 중에는 새로 깎은 잔디의 쌉싸름한 풀 냄새가 떠돌았다.

 푸른빛이 도는 검은 깃털이 반짝이는 통통한 까치 서너 마리가 한가롭게 풀밭 위를 뛰어다녔다. 변함없는 자연의 무심함이 내 마음을 가라앉게 해 주었다.

 슬슬 발이 아파올 무렵 앉을만한 벤치를 찾다가, 멀찌감치 다가오는 낯익은 사람의 실루엣을 발견했다.

 덩치 큰 골든 리트리버의 줄을 잡고 천천히 걷고 있는 구부정한 중년 남자는 분명 맥컬로우 교수였다.

 나는 한 손을 들어 그에게 인사했다.

 그러나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그는 바로 앞까지 걸어와서야 나를 알아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아, 루비 양.”

 그가 모자를 벗으며 어눌하게 인사를 했다.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나와 마주친 것이 멋쩍은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이내 그는 소탈한 미소를 지었다.

 “이 근처에 사나요? 한 번도 못 본 듯 하오만.”

  “그렇게 깊은 생각에 잠겨 계시는데 제가 보이기나 했겠어요?”

 나는 웃었다.

 그에게는 본능적인 호감이 느껴졌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꽤 감이 좋은 편이었다.

 “실은 당신 생각을 하고 있었다오.”

 맥컬로우 교수가 인자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별 말 없이도 사이좋게 근처의 노천카페로 발걸음을 옮겼다.

 

 16.

 “내가 투자자 아카데미에 간 건 두 가지 목적 때문이에요.”

 나무 그늘 아래 노천 테이블에 앉아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매컬로우 교수가 입을 열었다.

 그동안 나는 교수의 늙은 개 몰리와 장난을 쳤다.

 영리하고 순한 개였다.

 내 손등을 핥다가도 가끔 사려 깊은 눈길로 주인을 보는 개와 주인 사이에는 오랜 우정과 신뢰가 느껴졌다.

 

 “하나는 물론 선물옵션거래를 하기 위한 자격을 취득하기 위한 거지요. 그렇지만 또 하나는 나와 같이 일해 볼 사람을 물색하기 위해서였어요. 난 개인 자격으로 소규모 자산운용사를 운영해보려고 한다오.”

 

 아서에게도 비슷한 목적을 들었으므로 나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이 업계에서는 흔한 일인 것 같았다.

 다만 안정된 지위와 명예를 갖고 있는 명망 높은 철학교수가 직접 자산운용사를 차리겠다는 것은 좀 의외였지만.

 

  "교수님이 돈을 벌어서 뭐하시게요?“

 

 되도록 가볍게 들리기를 바라며 농담조로 물었다.

 그는 맑고 진지한 눈으로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파트너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숨길 것도 없지요. 그닥 재미있는 얘기는 아니오만.“

 

 그가 늙은 개 몰리의 연갈색 털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의 옆모습에는 오래 묵은 쓸쓸함이 배어있었다.

 고저가 없는 단조로운 음성이 그의 길고 외로운 이야기를 시작했다.

 

 17.

 갓 스무 살이 되었을 무렵, 찰리 매컬로우 교수는 혼자서 꽤 오랫동안 아프리카 대륙을 여행했다.

 불의의 비행기 사고로 부모형제를 모두 잃은 직후였다.

 그날 따라 도저히 집에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 기억은 나이로비의 허름한 공항에 멍하니 서 있던 것이었다.

 갓 소년티를 벗은 어수룩한 청년에게 중고차를 매매하는 현지 브로커가 다가왔다.

 그 후 몇 달 동안 찰리는 고물 지프에 가벼운 텐트를 싣고 떠돌아다니며 혼자서 노숙에 가까운 생활을 이어갔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지평선 위로 눈부신 태양이 떠올랐고, 저녁이 되면 노을이 붉고 장엄하게 물드는 것을 보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끼니는 주로 건빵이나 통조림 류의 군용 비상식량 같은 것으로 때웠다.

 때때로 마을이 나오면 수중에 있는 것을 주고 야채나 과일을 얻을 때도 있었다.

 사람보다는 나무 위를 어슬렁거리는 표범과 눈이 마주치거나, 떼를 지어 다니는 초식동물 무리를 만나는 일이 더 많았다.

 그러다가 한 여자를 만났다.

 숲 속에서 혼자서 노래를 부르고 있던 아름답고 순수한 처녀였다.

 그와 아프리카 처녀는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의 눈 속을 들여다보면 그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문명과 동떨어진 원시 상태의 자연 속에서 조상들이 살던 모습대로 집을 짓고 식량을 구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자연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가는 그곳의 토착민 부족 사람들과도 정이 들었다.

 그곳은 에이즈가 창궐하는 지역이었다.

 그의 아내가 된 헤일리도, 태어난 지 겨우 두 해 만에 세상을 등진 딸 샤나도 모두 선천성 에이즈 감염자였다.

 처음에 그는 그가 정착한 마을의 부족민 대부분이 에이즈 보균자라는 점에 개의치 않았다.

 생과 사의 경계가 불분명해 보이던 시기였다.

 어째서 그의 가족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야 했는지, 어떤 이유로 그 혼자만 살아남았는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내의 부족 사람들은 에이즈 감염을 생로병사의 과정일 뿐 특별한 일로 여기지 않았다.

 청년 맥컬로우도 개의치 않았다. 초콜릿 빛 눈동자를 가진 귀여운 딸이 태어났을 때는 다시는 문명 세계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결심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행복한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내 헤일리와 어린 딸 샤나는 비가 온 후 가벼운 한기를 이기지 못하고 하룻밤도 채 지나지 않아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에이즈 보균자였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외부에서 침투한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력이 없었다.

 아내와 딸이 가버린 곳으로 그도 따라가고 싶었지만 그는 에이즈에 감염되지 않았다.

 아내의 친지들은 장례를 치른 후 헤일리의 여동생과 결혼하면 된다며 그를 위로했다.

 아내와 딸이 묻힌 곳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사흘이 지나자 그는 마을을 떠났다.

 결국 그곳도 그가 정착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는 아프리카의 구리 광산에서 일했다.

 광맥을 탐사하던 일은 수 년 후에 결실을 거두었다.

 하루아침에 그는 큰 부자가 되었지만 대신에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이유를 상실했다.

 미국으로 돌아와 이번에는 책 더미 속에 파묻혔다.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학위를 땄다.

 구리 광산에서 들어오는 돈은 대부분 아내와 딸이 묻힌 지역에 병원과 학교를 세우는데 소진되었다.

 주식 투자는 매컬로우에게 일종의 철학적인 소일거리였다.

 자산운용사를 설립해 벌어들일 돈 또한 지금까지처럼 아프리카 지역에 병원과 학교를 세우기 위한 재원으로 사용될 것이었다.

 

 나는 매컬로우 교수에게 느꼈던 편안함의 정체를 이해했다.

 그 또한 지옥을 겪어본 인간이었다.

 지금까지도 삶은 그에게 지옥일지도 몰랐다.

 돈을 벌려는 그의 동기는 단지 괴로운 시간을 지우기 위한 것 뿐이었다. 그에 비하면 나는 차라리 행복한 사람이었다. 적어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닿을 수 없을 지언정 살아 숨쉬고 있으므로.

 

 신생 투자자문사의 자본은 매컬로우 교수가 책임지고, 아서는 그의 파트너로 일하기로 했다고 했다.

 그는 나에게도 같이 일해 볼 것을 권했다.

 아카데미 수료 기간이 끝날 때까지 시간을 갖고 생각해 보라고 했지만 나로서는 사실 마다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매컬로우 교수는 내가 어떤 종류의 예지력을 갖고 있다고 믿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힘인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면서 괴로운 일뿐 아니라 불가사의한 일도 진저리나도록 겪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나는 짐작했다.

 

 18.

 매컬로우 교수와 헤어지고 견인된 자동차를 찾으러 가는 동안, 잠시 하늘과 허공을 번갈아 응시했다.

 이곳 어딘가에 K가 있다는 것이, 같은 하늘 아래 숨 쉬고 살아있다는 것이 경이롭게 느껴졌다.

 그것은 실제로 기적이었다.

 다시는 K의 연인이 될 리도, 사랑한다고 말할 리도 없었지만 적어도 K는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었다.

 나를 보던 그의 깊은 눈빛을 떠올렸다.

 순수하던 표정과 해맑던 미소를 떠올렸다.

 내가 망쳐놓기 전의 온전한 그였다.

 나는 그의 숨결을 느낄 수가 있었다.

 가까이 갈 수 없더라도 같은 하늘 아래, 여전히 그가 숨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견인 차량보관소로 발길을 돌렸다.

 근무를 서고 있던 담당자에게 작은 목소리로 사과한 후, 과태료를 지불하고 자동차를 찾아서 스튜디오 방향으로 몰았다.

 도중에 차를 세우고 식료품점에 들렀다. 캔에 든 수프와 샐러드용 야채와 과일, 세 가지 종류의 치즈와 발사믹 식초를 샀다.

 문구점의 쇼윈도우를 지나가다가 눈에 띈 연두색 다이어리를 새로 구입했다.

 꽃가게 앞 노상에 내놓은 철 늦은 장미꽃도 손이 가는대로 한 묶음 샀다.

 집에 돌아와서 식료품을 가지런히 정리해 넣었다.

 장미꽃 다발은 꽃병에 꽂아 창가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모카포트로 에스프레소를 추출했다.

 치즈 샐러드와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이틀 동안 읽지 못한 신문과 책을 펴 들었다.

 방 안을 가득 채운 장미 향기가 스튜디오 안에 고여 있던 외로움을 몰아내 주었다.

 나는 창밖의 짙어진 어둠을 배경으로 하얗고 붉은 빛으로 피어오른 장미꽃을 보았다.

 만개한 꽃잎들은 무심하게도 아름다웠다.

 꽃들은 보아주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거나 얼마 후에는 시들고 말 것이라는 사실에는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매컬로우 교수는 이제는 지나간 세월을 원망하지 않는다고 했다.

 영영 만나지 못하고 엇갈려 지나쳤을지도 모를 아내와 딸을 짧은 시간만이라도 함께할 수 있었던 인연에 감사한다고.

 혼자 있어도 늘 그들의 존재를 느끼고 자신들이 이어져 있음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교외의 외딴 집에 늙은 개를 데리고 살면서 철학이론을 연구하고 강의를 하고, 월가의 탐욕스러운 돈을 날라다가 아프리카에 병원을 지을 궁리를 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금 K를 생각했다.

 건강해 보이던 K의 젊고 아름다운 안색을 떠올렸다.

 그는 젊고 재능 있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다. 아직 앞날이 창창했다.

 구김 하나 없던 그 얼굴이 언제까지나 행복하게 빛나기를 바랬다.

  '더 이상 욕심내지 말자.'

 나는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새 다이어리를 펼치고, 기억을 하나씩 더듬어가며 나는 찬찬히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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