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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위험한 투자가
작가 : 새라새
작품등록일 : 2018.11.7

기적의 투자가라고 불리운 여자의 모든 것을 건 사랑의 한판승!

알코올 중독자로 생을 마감한 루비가 신의 손을 가진 투자가로 돌아왔다.
12년 전으로 회귀한 루비는 증시의 폭락과 화려한 부활을 꿰뚫고 있다.
그녀는 금융가에서 '미래를 아는 소녀'라 불리며 베일에 싸인 어둠의 여왕이 되었다.
어느덧 사랑하는 K와 재회한 루비.
그를 낭떠러지로 떠밀었던 비참한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4화. 투자자 아카데미(1)
작성일 : 18-11-09 15:25     조회 : 258     추천 : 0     분량 : 5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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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여비서가 알려준 주소는 월스트리트에 위치한 대형 카페 건물의 3층에 위치한 간판 없는 사무실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약속시간보다 10분 일찍 도착했다.

 안내 데스크의 직원에게 이름을 대자 안쪽의 회의실로 안내해주었다.

 

 실내는 적당히 아늑했다.

 푸른빛이 도는 유리창은 내부를 볼 수 없도록 코팅처리가 되어 있었다.

 발이 푹 파묻히다시피 하는 두터운 회색 카펫이 발소리를 차단하고 있었다.

 오크목을 댄 벽은 평범해보였지만 아마도 방음 처리가 완벽하게 되어 있으리라.

 

 열 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긴 테이블의 양편에는 연령대가 다양한 대여섯 명의 남녀가 앉아 있었다.

 분위기는 각자 달랐지만 모두들 고급스러운 옷차림에 세련된 몸가짐을 하고 있었다.

 뉴욕의 전문직 여피들 혹은 상류층 집안 출신들일 것이다.

 나는 맨 끝자리에 앉았다.

 나는 실제 나이 스무 살보다 더 어려보이는 편이었고, 청바지에 면 셔츠를 입은 캐쥬얼한 차림이었다.

 나 외에도 젊은 참석자가 있었지만 그들은 적어도 이십대 후반은 되어 보였다.

 호기심 어린 눈빛들이 나를 슬쩍 스쳐지나갔다.

 예의범절에 어긋나지 않는 교묘한 탐색이었다. 아무도 굳이 말을 걸어오지는 않았다.

 서너 명의 남녀가 더 들어오고 마지막으로 밝은 파란색 슈트를 입은 금발머리 남자가 들어오면서 문을 닫았다.

 

 그가 상석으로 가서 인사말을 건네는 것으로 정규 레슨이 시작되었다.

 

 아서 해리슨은 자산운용사의 전략분석가이자 투자자 아카데미의 강사였다.

 세미나 첫날이었으므로 잠깐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앞쪽에 앉은 얼굴이 길쭉하고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중년남자가 먼저 소개를 했다.

 매컬로우 교수는 나도 이름을 들어본 적 있는 유명한 철학교수였다.

 사회적 심리와 유행에 대한 통찰력 넘치는 그의 저서는 비문학 분야의 스테디셀러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는 무뚝뚝한 얼굴은 태어날 때부터 지금의 모습과 똑같으면서 크기만 축소판인 아기로 태어났을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유행과는 무관한 진회색 헤링본 양복은 새로 지어 입은 것 같기도 했고 수십 년은 지난 옷 같기도 했다.

 단조로운 목소리는 고저가 거의 없었지만, 유명한 교수답게 자연스러운 위엄과 주의를 모으는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그의 오른편에 앉은 모건과 켈리 부부는 건축업을 하는 중년 남자와 여성 방송인이었다.

 본업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둔 후 문외한이었던 금융투자 분야를 새로 배운다는 것에 약간 들떠 있는 듯했다. 이들은 자산운용사의 VIP고객이었다.

 스물아홉 살의 진 레이놀즈는 대학원생이었고 그의 옆에 앉은 동갑내기 남자친구는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가수였다.

 둘 사이의 친밀한 표정으로 보아 연인 사이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별로 어울리지 않는 커플이었다.

 갈색머리에 수수한 외모인 진은 눈빛이 영특했고 수업에도 열심이었지만 한쪽 귀에만 피어싱 귀걸이를 한 제이슨은 외모가 매우 핸섬했고 앉은 자세부터 불량스러워 보였다.

 

 내 차례가 되자 나는 이름을 댄 후 휴학 중인 대학생이라고 짧게 말했다.

 나이 어린 동양인인데다 알려진 이름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 이상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없었다.

 건축가와 방송인 부부가 진과 제이슨에게 부모님은 잘 계시냐고 친근하게 묻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유명 인사의 자녀들인 것 같았다.

 

 활달한 표정의 금발머리 강사 아서가 참석자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주고 강의를 시작했다.

 푸른색 바탕에 가느다란 줄무늬가 들어간 슈트는 런던의 고급 양복점에서 맞춘 듯, 몸에 꼭 맞는 부분과 낙낙한 부분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밝고 명랑한 표정은 어두운 기억이라곤 하나도 없어보였다.

 

 '저런 남자는 고액 연봉자로 일하면서 교양 있는 부인을 만나서 귀여운 아이들을 줄줄이 낳겠지.'

 

 누가 보더라도 기분 좋아지는 인상이었다.

 

 여비서 샬롯의 심술이었던지 아니면 배려였던지 아카데미는 일 년 이상 수료한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중급자 코스였다.

 초급자 과정에서 나를 제외한 다른 참석자들은 주식투자에 대한 기본적인 이론을 배운 후, 이미 수십 번의 모의투자를 거쳤다고 했다.

 개인차는 있지만 상당한 수익률을 올렸던 모양이었다.

 중급자 과정은 파생금융상품 투자와 해외투자 위주의 커리큘럼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중년 부부는 연신 질문을 해댔고 철학 교수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꼼짝없이 앉아있었다.

 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수업을 들었지만 제이슨은 지루한 듯 하품을 참으며 눈을 끔벅거렸다.

 

 나는 주식투자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전공이 경제학인데다 경제면 기사를 읽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대략의 내용은 어렵지 않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옵션거래를 이용하면 상대적으로 적은 증거금만으로도 수십 배에 달하는 레버리지 투자를 일으킬 수 있다는 내용이 퍽 흥미로웠다.

 

 나는 다이어리를 펴들고 기억해야할 경제 이슈들을 필기하는 동시에, 간간이 떠오르는 투자 아이디어들을 부지런히 메모했다.

 

 아서는 유능한 애널리스트였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금융시스템과 연방정부의 주택채권보증에 대한 신뢰가 지나쳤다.

 당장 거액을 투자할 곳을 찾는 켈리 부인에게 그는 부동산 담보 채권을 대량 사들일 것을 추천했다.

 

 하긴 이 때는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B급 주택채권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파동이라는 이름으로 세계 경제에 엄청난 재앙을 몰고 왔다.

 미국 정부가 보증을 서주는 주택채권이 위험하리라고는 거의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실제로 그 때문에 오랜 역사를 가진 유서 깊은 투자은행이 파산하게 된다.

 

 하지만 나는 이들과 아무런 친분이 없었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설명하기도 마땅치 않았다.

 유인물을 보는 척하며 침묵을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

 

 수업이 끝나자 나는 아서에게 다음 시간까지 읽고 참석할 수 있도록 도움이 될 만한 책의 리스트를 부탁했다.

 내가 주식투자 경험도, 이론을 배운 적도 없으며 더욱이 그는 추천하는 책들 중 하나도 내가 읽은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나자 그는 적잖이 놀란 표정이었다.

 

 “난생 처음 배우는데도 어떻게 내 말을 다 이해하죠? 오늘 참석한 사람들 중에 제일 빨리 이해한다고 봤는데. 나이도 아직 젊고··· 부모님이 투자가이신가요?”

 

 책 몇 권의 제목을 휘갈겨 쓴 메모지를 내밀며 그가 말했다.

 앞으로 12년 동안 벌어질 경제상황을 이미 겪었기 때문에 대충 알아들을 수 있었다는 얘기는 도저히 할 수 없었다.

 누가 믿어 주겠는가.

 나조차도 이것이 꿈이 아닌지, 때때로 의심이 들 지경인데.

 

 그렇지만 내가 의심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사실이 있었다.

 나와 K는 서로 사랑했고, 그는 나의 모든 것이었지만 결국 내가 그를 파멸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평소에 관심이 있었는데 그동안은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었어요.”

 

 그의 푸른 눈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반짝 빛났다.

 

 “책 추천 감사합니다.”

 

 나는 아서의 관심을 매몰차게 싹둑 자르고 일어났다.

 

 앞으로 갈 길이 태산이었다.

 강의실을 나서는 대로 곧장 서점에 들러서 책을 구입한 후 다음 날부터 도서관에 가서 하루 종일 읽을 예정이었다.

 자퇴가 아니라 휴학계를 냈기 때문에 아직 학생증을 가지고 있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이 시간엔 서점이 문을 닫았을 거예요. 제 책을 빌려드리죠.”

 

 내 생각을 꿰뚫어본 듯 아서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투자자 아카데미는 직장인들도 참석할 수 있도록 저녁 시간에 열렸기 때문에 시계는 벌써 열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낭패한 기분으로 그를 따라 강의실을 나섰다.

 아서는 아래층의 카페에 나를 남겨두고 근처 사무실로 책을 가지러 갔다.

 오래지 않아 그는 큼직한 쇼핑백에 책을 잔뜩 싸들고 나타났다.

 

 아서는 내가 일어날 틈을 주지 않고, 자리에 앉자마자 뜨거운 홍차와 치즈 케익을 주문하더니 대뜸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는 영국 태생이었고 런던의 투자은행에 근무하다가 미국의 자산운용사에 스카웃되었다고 했다.

 밤낮이 따로 없는 외환 딜러 노릇에 넌더리가 나서 회사를 그만두고 친구들과 개인투자회사를 차리려고 했는데 회사에서도 붙잡고 자본금도 아직 부족한 터라 아쉬운 대로 시간 여유가 있는 투자자 아카데미를 맡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유럽에서 십대 시절을 보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반색을 하며 기뻐했다.

 

 “저도 스위스에서 휴가를 보낸 적이 여러 번이죠. 아직도 미국의 돈 많은 사람들에게는 적응이 안돼요. 참, 아카데미엔 왜 왔나요? 그쪽도 부자인 부모님이 계신가요?”

 

 나는 부모님과는 관계없이 내 힘으로 돈을 벌고 싶다고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내친 김에 부동산 담보 채권이 반드시 안전한 것은 아니며 앞으로는 첨단 기술을 활용하는 정보통신분야의 투자가 유망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는 내 말에 크게 구미가 당기는 표정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그냥 미소로 얼버무렸다.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무언의 암시를 알아들었는지, 그는 화제를 바꾸었다.

 

 가져온 책의 목차를 보여주면서 초급과정에서 내가 숙지했어야 할 기본적인 이론과 매매 기법, 그리고 모의투자방법에 대해 상세히 알려주었다.

 다 읽은 책이니 돌려줄 필요가 없다는 말과 책만 줄기차게 읽지 말고 모의 투자를 병행하면서 하라는 충고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의 호의에 감사하며 나는 그와 작별했다.

 

 10.

 집에 돌아오자 침실의 어두운 창으로 하얀 상현달이 보였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나자 몸이 따뜻해졌다.

 나는 사각거리는 하얀 면 잠옷을 옷장 서랍에서 꺼내어 갈아입고 나서 불을 끄고 창가에 잠깐 앉아있었다.

 서늘한 기운을 품고 있지만 차갑게 느껴지지는 않는 늦여름의 밤공기가 기분 좋았다.

 

 K는 지금 뉴욕 어딘가의 호텔에 있을 것이다.

 글로벌 광고를 제작하기 위한 열흘간의 미국 출장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기 전 날 뉴욕의 거리를 혼자 걸으려다가 우연히 나를 만났으니까.

 닷새 후 나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영 만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까만 밤하늘에 드문드문 별이 빛났다.

 K도 저 밤하늘을 보고 있을까. 별을 본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

 아니, K는 밤하늘 같은 건 보고 있지 않을 것이다.

 아마 밤늦게까지 업무에 관련된 사람들과 어울리며 술을 마시거나, 일찍 일을 마치고 혼자 호텔방에 있다면 가지고 온 책을 읽고 있겠지.

 어쩌면 잠들기 전 수첩에 간단한 메모를 적고 있을 지도 모른다.

 

 나는 어둠 속에서 하얗게 빛나는 내 하이글로시 책상 위에 쌓여있는 두툼한 책 더미를 보았다.

 가벼운 손때가 묻어 있는 책들은 군데군데 밑줄이 쳐져 있었고 메모가 적인 곳도 있었다.

 내 방에 침입해온 책들은 이곳이 원래부터 제 자리였다는 듯 당연한 기색이었다.

 

 내일은 책꽂이를 사야 하겠네, 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침대에 기어들어가 푹신한 이불에 뺨을 댔다.

 늘상 불면증에 시달렸던 예전과 달리, 몸이 노곤해지면서 눈이 절로 감겼다.

 앞으로 다시는 K에게 안길 일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밤마다 나는 베개와 이불에 코를 묻고서 K의 체취를 떠올리리라.

 

 황금빛 햇살처럼 환하게 웃는 K의 얼굴을 꿈결처럼 의식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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