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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위험한 투자가
작가 : 새라새
작품등록일 : 2018.11.7

기적의 투자가라고 불리운 여자의 모든 것을 건 사랑의 한판승!

알코올 중독자로 생을 마감한 루비가 신의 손을 가진 투자가로 돌아왔다.
12년 전으로 회귀한 루비는 증시의 폭락과 화려한 부활을 꿰뚫고 있다.
그녀는 금융가에서 '미래를 아는 소녀'라 불리며 베일에 싸인 어둠의 여왕이 되었다.
어느덧 사랑하는 K와 재회한 루비.
그를 낭떠러지로 떠밀었던 비참한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3화. 실행
작성일 : 18-11-09 15:24     조회 : 264     추천 : 0     분량 : 5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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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더 이상 학교에 나가지 않기로 했다.

 강의실에서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당장 배워야 할 것들은 명확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알려줄 사람을 찾아야 했다.

 나는 벽시계를 쳐다보았다.

 

 오전 8시.

 그레타는 아직 잠들어있을 시간이었다.

 일단 그녀의 여비서에게 전화하여 점심 무렵에 집으로 찾아가겠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옷장을 열어보고 검은 면셔츠에 블랙진을 골랐다. 크로스백을 메고 머리에는 검정 캡모자를 눌러 쓴 후 후 집을 나섰다.

 차를 몰고 학교로 가서 자퇴수속을 밟을 작정이었다.

 

 자퇴 수속은 예상보다 복잡했다.

 먼저 자퇴하려고 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문서로 작성해야 했고, 그 후에 지도교수와 약속시간을 잡은 후 면담을 거쳐야 했다.

 그냥 무단결석으로 해결해버릴까, 하고 나는 잠시 생각했다.

 교무과에 근무하는 푸근한 인상의 중년 여직원이 왜 학교를 그만두려고 하느냐고 물었다.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대답했다.

 여직원은 돈은 나중에라도 벌 수 있지만 배움은 때가 있는 거라고 자상한 어조로 타일렀다.

 나는 찡그리려다가 그녀의 다갈색 눈동자에서 따뜻한 마음 씀씀이가 느껴져서 그만 어색하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직원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다며, 정 마음이 굳어졌으면 일단 휴학계를 내라고 권했다.

 그 편이 절차가 간편했기 때문에 나는 기꺼이 휴학계를 써 냈다.

 인사를 하고 가려는 나에게 친절한 여직원이 다양한 장학금 종류와 신청 방법을 소개하는 두툼한 서류봉투를 건넸다. 나는 다시 한 번 감사 인사를 했다.

 

 8.

 그레타의 저택까지는 차로 두시간정도 걸렸다.

 도중에 차를 세우고 꽃가게에 들렀다.

 정오의 햇빛을 받아 더욱 환하게 빛나는 노란색 백합 한 다발을 샀다.

 세련된 은발의 플로리스트가 꽃다발에 폭넓은 자줏빛 리본을 빙 둘러서 화려하게 묶어주었다.

 

 응접실에서 나를 맞은 그레타는 예상대로 밤늦게까지 파티를 즐긴 후 숙취에 시달리는 표정이었다.

 이마를 누르던 찌푸린 표정이 내가 내민 황금빛 백합 꽃다발을 보더니 약간 부드러워졌다.

 

 “네가 웬 바람이야? 여기를 다 찾아오고.”

 

 희고 길쭉한 손을 내밀어 꽃다발을 받은 후 향기를 맡는 그레타의 얼굴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화장 가운의 앞여밈 사이로 아름답게 부풀어 오른 젖가슴이 보였다.

 올해 초 둘째 아이를 출산한 그레타의 얼굴에는 스위스 기숙학교의 여왕으로 군림하던 시절의 예리함은 살짝 빛이 바래고, 자조의 빛과 엷은 수심이 이마에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기품과 몸에서 흘러넘치는 자부심은 여전했다.

 그녀는 스페인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그냥 보고 싶어서요. 딴 이유가 있겠어요?”

 

 그레타가 픽 웃었다.

 그렇지만 눈에 띄게 누그러진 다정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그래. 넘어가 줄게. 첫 번째 이유는 내가 보고 싶어서.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뭐가 필요해서지?”

 

 나는 그레타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았다.

 

 가시 돋은 장미꽃처럼 도도하고 아름다운 그레타는 이제 이십대 중반의 한창 나이였다.

 그녀는 원하던 대로 결혼해서 마음껏 사치를 부리는데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지금보다 더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그녀를 액세서리 이상으로 여기지 않는 남편을 계속해서 경멸하기를 바랬다.

 

 뉴욕 사교계의 정숙한 귀부인으로 이름난 그레타는 실은 레즈비언이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여비서와 아이들을 위한 외국어와 음악 가정교사들은, 고르고 고른 그녀의 애첩들이었다.

 돈과 정력이 넘쳐서 아내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그레타의 남편은 자산운용사의 대표이자 월스트리트에서 널리 알려진 거물급 투자자였다.

 땅딸막한 체격에 각진 얼굴에는 불굴의 투지와 탐욕스러움이 흘렀다.

 그녀가 왜 그런 남자와 결혼했는지 이유는 뻔했지만 나는 그녀가 한시라도 빨리 이혼하기를 바랐다.

 내가 기억하는 미래의 그녀는 남편에게 배신당하고 불행한 최후를 맞았으므로.

 

 나와 그레타는 스위스의 여자 기숙학교를 함께 다닌 선후배 사이였다.

 화려한 미모와 지성으로 수많은 소녀 추종자들을 거느린 상급생 그레타가 밋밋한 어린애에 불과했던 나를 유혹했을 때 나는 수상쩍은 소문에도 불구하고 대뜸 그녀의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단순한 호기심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나는 겉보기에 그레타의 수많은 애인들 중 하나가 되었지만 실제로 우리가 공유했던 것은 단순한 우정의 선을 넘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내게 품은 것과 같은 감정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레타와의 인연은 예상했던 것보다 꽤 길게 이어졌다.

 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의 이름난 사업가와 결혼한 그레타가 다시 나를 찾았기 때문이었다.

 스위스 기숙학교의 졸업반이던 나에게 그레타는 미국으로 건너와 자신의 집에 머물면서 하고 싶은 일을 찾아보라고 권했다.

 나는 기꺼이 그 초대에 응했다.

 한동안 그레타와 함께 음악회에 가서 유명한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함께 즐기거나 쇼핑을 하고 뮤지컬을 관람했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서둘러 스튜디오를 구해서 그레타의 집을 나왔다.

 연일 나를 시끄러운 파티에 데려가서 남자를 소개해 주려는 것에도 지쳤고 그녀의 느끼한 남편과 마주치기도 싫었기 때문이다.

 그레타는 약간 실망한 듯 했다.

 하지만 굳이 돈 많은 남자를 찾아서 결혼하고 싶지 않으며, 그보다는 대학에 가고 싶다는 내 선택을 존중해주었다.

 

 “난 투자가가 되고 싶어요. 나를 지도해줄 사람을 찾고 있어요. 당신이 도와줄 수 있나요? 학교는 이미 그만뒀어요.”

 

 그레타의 입가에 만개한 꽃 같은 미소가 피어났다.

 무척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뭣 때문인지 물어보면 절대로 안 알려주겠지? 네 성격에 새삼 돈을 벌고 싶어서는 아닐 거고··· 궁금해 죽겠네.”

 

 “뭘 하려든 먼저 돈이 필요하다고 가르쳐준 건 당신이잖아요.”

 

 “그래. 무슨 속셈인진 모르겠지만 네가 이렇게 꽃까지 사들고 찾아왔는데 어떻게 널 이기겠니.

 투자가라··· 재미있는 생각을 해냈네.”

 

 그레타는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고 빙긋 웃었다.

 

 “내 남편에게 부탁하면 만사 제쳐두고 수락하겠지만 투자가가 되는 방법 대신에 딴 걸 가르치려 들겠지.”

 

 그레타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어떤 남자, 아니 하다못해 여자라도 너를 보면 그런 마음이 들 걸.

 차라리 아카데미 같은 데를 알아보는 게 낫겠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그레타가 전화기를 들고 비서를 불렀다.

 곧이어 나타난 조각 미인같은 금발의 여비서는 틀림없는 그레타의 취향이었다.

 

 “샬롯, 얘가 다닐만한 투자자 속성 아카데미를 알아봐줘.

 가능하면 당장 시작할 수 있는 곳으로. 누구냐고 물어보면 내 사촌동생이라고 알려주고.”

 

 여비서가 유리알처럼 차가운 눈동자로 나를 보며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자리를 떴다.

 

 그녀가 문을 닫고 나가자 그레타가 갑자기 내 어깨를 끌어당겼다.

 

 캡모자가 벗겨져 바닥에 떨어졌다.

 곧이어 장미향이 풍기는 부드러운 입술이 와 닿았다.

 충분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숨을 내쉬며 나는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출렁이는 짙은 포도색 눈동자가 나를 보았다.

 

 “당신은··· 내 유일한 가족이에요. 알고 있죠?”

 

 그레타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그러나 그녀는 곧 감정을 수습했다.

 

 “말도 이쁘게 하네. 인제 더 이상 건드리지 말라는 거지?”

 

 그녀의 손끝이 가볍게 내 뺨을 스쳤다.

 

 “부탁이 하나 더 있어요.”

 

 “얼마든지!”

 

 그레타는 눈을 질끈 감으며 두통이 이는 듯 이마를 눌렀다.

 

 “당신의 단골 디자이너, 앤디 레이놀즈를 한번 만나게 해 주세요.”

 

 짧은 침묵이 흘렀다.

 

 앤디 레이놀즈는 미국 패션계의 자존심이라 불리는 저명한 디자이너였다.

 그레타의 드레스룸에도 그의 작품들이 여러 벌 걸려 있었다.

 과거로 돌아오기 이전에 나는 앤디 레이놀즈의 뮤즈이자 모델이었다.

 

 스무 살의 나는 우연히 카페에서 만난 K에게 반해서 그를 찾아 무작정 서울로 건너갔지만 그는 나를 연인으로 대해주지 않았다.

 그의 주변을 맴도는 나를 광고모델로 한번 써주었을 뿐 철없는 어린아이로만 여겼다. 목적 없는 체류가 길어지자, 뉴욕으로 돌아가서 너 자신의 인생을 찾으라며 매몰차게 돌아서던 그였다.

 

 실연의 충격에 빠진 채 뉴욕으로 돌아온 나에게 그레타는 새 옷을 맞춰주겠다며 앤디의 별장으로 데려갔다.

 칠십대에 접어든 앤디 레이놀즈는 백발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온화한 분위기의 디자이너였다.

 

 아름다운 전원에 자리한 교외의 별장에 우리가 도착했을 때 앤디는 통유리 너머로 호수가 훤히 보이는 작업실에 앉아 있었다.

 그는 그레타가 하는 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하는 듯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나를 한번 보더니 스케치북을 들고 작업을 시작하여 파티용 드레스의 샘플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의 작업실을 나오자마자 앤디의 젊은 비서인 찰스가 전후 사정을 털어놓았다.

 앤디는 얼마 전에 외동딸을 사고로 잃은 후 줄곧 쇼크 상태에 빠져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가 대경실색했던 이유는 주변 사람들 모두 앤디가 다시는 디자인을 하지 못 할 줄 알고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시즌 동안 별장의 작업실에 나를 앉혀놓고 작업하면서 앤디는 패션쇼에 출품할 작품을 하나 둘 제작했다.

 늦게 얻은 외동딸을 사고로 잃고 실의에 빠져 있던 앤디는 나를 죽은 딸 대신으로 여기고 아낌없는 애정을 베풀어 주었다.

 부모와의 추억이 거의 없는데다가 K에게도 버림받은 직후였던 나는 그의 도움으로 부와 명성을 갖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와 함께한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는 내가 서울에 있을 때 뇌출혈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작별인사를 할 시간조차 없었다.

 

 동양인 뮤즈에게 반해 자신의 브랜드 ‘아나스타지’를 거저 넘겨주다시피 하였던 노 디자이너를 언론에서는 이기적인 딸에게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빨아 먹힌 발자크 소설의 주인공 고리오 영감에 비유하곤 했다.

 

 “무슨 일인데? 그 늙다리, 요즘은 이렇다 할 작품도 거의 안 나오는데.”

 

 “그냥··· 그 사람 옷이 마음에 들어서요. 한번 만나보고 싶을 뿐이에요. 급한 건 아니니까 천천히 기회가 되면요.”

 

 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청동으로 장식된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와 키스의 흔적이 남은 얼굴을 정돈했다.

 

 “그래, 알았어.”

 

 그레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녀의 눈길은 먼 곳을 향해 있었고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녀가 나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주었는지, 얼마나 아끼고 소중하게 여겼었는지 나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알았다.

 그리고 과거의 나는 그녀에게서 늘 받기만 하는 이기적인 여자아이였다.

 

 문이 열리고, 여비서가 메모를 가져왔다.

 오늘 밤부터 당장 시작할 수 있는 투자자 속성 아카데미의 이름과 주소였다.

 

 나는 짧게 감사를 표한 후 그레타의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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