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서↔
아... 어둡다. 춥고, 아프다. 진짜 허무하게 죽었네. 내 부모 죽인 새끼한테 꼭 복수해주고 싶었는데....
투둑, 툭. 어라, 비? 뭐야, 나 안 죽었어? 아! 더럽게 아프네. 어...? 내 팔, 내 왼팔 어디 갔어? 아, 으. 아. 파, 팔...
젠장, 이제 팔 불구로 살아야 되는 거야? 천하의 이규서가? 쓸모없네, 정말.
사미화는... 내가 죽은 줄 알고 있을까? 죽은 줄 아니까 날 이렇게 뒀겠지? 아니면 벌써 모가지가 날아갔겠지. 이렇게라도 살아있음에 감사해야 되나. 구차하네, 정말. 비 맞은 쥐새끼처럼 질질 짜기나 하고.
사미화, 그 년 반드시 내가 죽여!
여긴 어디야! 아욱, 죽겠다. 옆에 보이던 산이구나. 도로에서 여기까지 날아온 거야? 족히 20m는 넘겠네.
와, 나 진짜 괴물인가 봐. 아니면 벌써 죽고도 남았을 텐데. 팔은...출혈이 없는 거 보니까, 문드러졌네. 아주 녹아내렸어.
화상 자국 때문에 흉하겠어.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지. 얼굴은 괜찮나? 알 수가 없네. 아, 이규서 인생에 이렇게 오점이 남다니. 이게 다 그 사미화 개년 때문이라고!!! 일단 몸 좀 추스르고... 기회를 다시 잡는 거야. 그땐 내가 이겨. 다시는 안 도망친다고!
일단...여기서 벗어나자. 더럽고, 춥고, 기분 나빠.
집으로 가야 되나. 일단...갈 데도 없고. 가보기라도 할까.
☆구미화☆
이규서를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일이 꼬였네요. 걔가 워낙 사이코라서 사고를 치긴 할 것 같았는데 이정도 규모로 칠 줄은 몰랐어요.
삐익
아...정말 받기 싫은 핫라인이 울리네요.
“네, 구미화입니다.”
-구미화 씨, 예전 같지가 않네? 은퇴할 때가 된 건가?
“아뇨, 한창입니다. 변수가 좀 있었을 뿐이죠.”
-우리가 커버해주는 것에도 한계라는 게 있어요, 구미화 씨.
“네,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일단, 당분간 조용히 있으라는 윗분들의 말씀을 전합니다.
“네...알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이만.
콰직
“아아아악! 이 새끼들이 가만히 있으니까 사람을 아주 우습게 보는구나.”
저는 늘 의구심이 있었죠. 무슨 짓을 저질러도 다 덮을 수 있는 내 뒷배경들은 도대체 누굴까.
사실 뭐, 저도 그들이 주는 일들을 처리하면서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요. 확실한 증거라는 게 없단 말이죠.
그 때! 바로 이 의문의 메일이 도착했다는 겁니다. 그리고...그 메일에 첨부된 자료들이 그들이 누군지 확실히 알려주고 있더라고요.
어쨌든 지금은 얌전히 있을 때죠. 어설프게 덤벼봐야 제 죽음은 신문에 기사 한 줄 거리도 안 될 테니까요.
↔이규서↔
정리가 하나도 안 돼 있네. 주인집 아줌마는 그때 이후로 안 온 건가?
우웅 -
응? 뭐야, 핸드폰 진동인데. 어디 있지? 아, 바지 주머니에 있네. 와 - 잘못하면 박살 날 뻔했네. 액정도...강화유리만 깨지고 화면은 다행히 살아있네. 화면은 보이니까. 일단 보자.
메일? 이 메일 주소 처음 보는데. 누구지? 첨부파일도 있네.
사미화인가? 설마, 내가 살아있는 걸 알고?
<신상정보
이윤(부) - 50세/남/클론 연구원 / 현재 C타입 클론 ‘이규서’ 예의 주시 중.
김설(모) - 47세/여/클론 연구원 / 현재 C타입 클론 ‘이규서’ 클론 실험 중. >
이규서? 뭐? 나잖아. 클론? 연구원? 이게 다 무슨 말이야?
<이규서 - 21세/여/주입형 클론 / 주입의 부작용으로 자아 분열 증세 보임.>
뭐? 나까지 있다고? 자아 분열... 주입형? 주입형 클론이 뭐야? 메일 보낸 놈은 대체... 뭐하는 놈이야? 설마, 이거 보낸 놈이 연관 있는 거 아니야? 내 부모가 왜 죽었는지. 누가 죽였는지, 알고 있는 거 아니냐고.
아, 몰라. 젠장, 일단 사미화부터 신경 쓰자. 클론인지 뭔지는 나중에 캐물으면 되겠지. 결국, 사미화 이 년 짓인 것 같으니까.
아! 이한, 이한부터 확인하자. 병원비는 제대로 내줬으려나. 괜히 내가 찍혀가지고 이한한테 해코지 하는 건 아니겠지?
-뚜르르 뚜르르
-네, 간호사실입니다.
“저기, 거기 이한 환자 입원해있죠?”
-누구시죠? 보호자이신가요?
“아뇨. 서울마포경찰서 이...이형철 형사입니다. 보호자 이규서가 현재 사망...한 거 아시죠? 관련해서 혹시, 이한 환자를 만나볼 수 있을까 해서요.”
이형철이 진짜 있는지 없는지 알게 뭐야!
-아...죄송합니다.
“네? 못 만난다는 말씀이십니까?”
- 환자분, 사망하셨습니다.
뭐? 사망? 에이 씨x. 병원비 얼마나 한다고 애를 죽게 놔둬! 이 사미화 나쁜 년아!
아, 사미화. 고마워. 이제 두려울 것도. 잃을 것도. 아무것도 없네. 이제 너만 죽이면 되는 거지? 내 마지막이 네가 되길, 가만히 죽어줘.
*************
한 달쯤 지났나. 이제 한 손으로 뭘 하는 것도 꽤나 익숙해졌네.
사미화 뒤를 쫒아 다니려고 하니깐 간이 쪼그라들다 못해 사라지는 것 같다. 어차피 내가 죽은 줄 알건데도...무서워.
하, 이 년은 어찌나 촉이 좋은지. 자칫 발만 헛디뎌도 바로 내 쪽을 쳐다본다니까? 무서워, 짐승의 촉이란.
없던 수염까지 날 것 같은데. 이제 슬슬 죽여야지?
주기적으로 가는 빌라가 있던데. 뭐, 애인이라도 있나? 문 열 때, 딱 때려죽이면 좋겠지? 뭐 애인 얼굴 보면서 죽는 것도 복이지! 애인도 같이 뒤따라 보내주면 되겠네. 와, 이규서! 진짜 천사다!
아아, 출발한다. 아이씨, 그 스쿠터는 너무 빠르잖아! 이 고물 스쿠터로 그거 뒤따라가기는 좀 힘들다고.
헉, 헉. 아, 힘들어. 이 년 나 알고 있는 거 아니야? 그래서 일부러 밟은 건가? 아이씨. 자, 그래. 천천히 복도 걸어가서 늘 그랬듯 201호 앞에 서야지. 그렇지. 그리고 도어락을 위로 올려.
그래,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어.
“밥은?”
그래, 그렇게 정신 팔려서 묻고 있을 때 죽여야지.
“몸은 괜찮고?”
바로, 지금이야!
붕 -
빠각!
악 -
아, 젠장. 사미화 이 년... 진짜 괴물이구나. 그 찰나의 순간에 내가 휘두른 렌치를 피해?
아! 아까워. 한방에 죽일 수 있었는데 어깨만 부셔놨네. 킥킥. 주저앉아 있는 모습이 아주 보기 좋다!
자, 이제 어쩌지? 바로 머리를 때려서 죽일까? 아니, 어차피 못 움직이는데 좀 더 재미를 볼까?
“이, 이규서?”
내가 살아있는 줄 몰랐나? 아까 속도를 겁나 밟길래 눈치챈 줄 알았는데? 에이, 뭔 상관이야.
“응, 오랜만. 나 너 죽이려고 고생 좀 했는데. 순순히 죽자. 팔도 하나 밖에 없어서 힘들어.”
“...누나?”
누나? 날 누나라고 부를 사람은 단 한 명뿐인데.
“이한?”
너... 죽었잖아? 사미화 때문에! 아니지, 제기랄. 내가 미친 듯이 패서 죽었지.
“네가 왜 여기 있어? 너...죽었잖아?”
“내가? 나 안 죽었어!”
“야, 사미화. 말해봐. 내가 분명 병원에 갔을 때는...”
“그야, 손을 써놓은 거죠. 멍청하긴. 이한은 사망한 것으로 처리하고 새로운 신분을 줬어요. 그러는 게 이한이 살아가기에 더 좋은 방법 이였으니까. 어차피 없는 부모니까 쓰레기 같은 인간 보다는 멀쩡한 인간이 낫잖아?”
“이, 이 미친년이. 그렇다고 사망처리를 해!! 내가, 내가 얼마나!!!”
“누, 누나. 이모는 나쁜 사람 아니야. 죽, 죽이지 마.”
엥? 안 놔? 꼬맹이 자식이 걸리적거리네!
“하, 규서 양이 끔찍하게 아끼는 애를, 때려서 죽일 뻔한 애를 살려주고, 치료해주고, 보살펴주기까지 했는데, 돌아오는 게 겨우 이거네요?”
아...제기랄.
“이한, 미안... 그땐, 정말 미안했다.”
땡그랑 -
렌치가 바닥에 떨어져 청명한 소리를 냈다. 아, 손에서 놓아본 적 없던 렌치를 지금, 이렇게 떨어뜨려보네. 참 별일이야, 이규서. 스스로도 내가 괴물인 줄 알았는데, 슬픈 감정이란 게. 죄책감이란 게 남아있긴 했었나봐. 나도 사람이었나 봐.
“그리고 사미화. 나한테 김현아가 얼없살이라고 뻥친거랑, 유조차에 나 갖다 박은 거는 그 어깨뼈 박살낸 거로 퉁치자. 쳇.”
아! 좀. 안 울기로 했잖아. 또 착한 이규서처럼 맘 약해지기라도 한 거야? 울지 마. 안 슬퍼. 오히려 기뻐해야지. 소중한 게 사실 손 안에 있었다는데.
“이규서양, 우리 할 말 많지 않아요? 게다가 유조차에는 댁이 혼자 갖다 박았잖아. 오히려 댁이 내 스쿠터 값을 물어내야 하는 상황 아닌가?”
“아, 됐고! 난 묻고 싶은 게 더 많거든? 지금도 당장 널 죽일 수도 있지만 참는 거야. 물어볼게 산더미니까.”
☆구미화☆
-네, 이사장님.
“이한이는 제가 거둘게요. 일단 사망처리해주세요.”
-저...아이들의 경우에는 그게 쉽지가 않아서요.
“그 쪽 영안실로 이한이 또래 아이의 시체가 배달됐을 거예요. 학대 받던 아이의 시체니...이한이랑 상태도 비슷할 거고요.”
-네...알겠습니다.
“그 배달한 친구한테 이한이를 넘겨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이 일은....”
-네, 당연히 비밀로 하겠습니다. 저도 무사하지 못 할 텐데요, 뭐.
“네, 감사합니다.”
이한이 잘 살아가려면, 제대로 된 과거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미 죽어 없어진 부모지만 이한의 성장과정에서 그의 발목을 잡을 일이 참 많이 생길 정도로 거지 같이 살아온 부모들이거든요.
↔이규서↔
아 - 역시, 날씨 좋은 날에는 공원인가. 햇살 좋네.
“이규서 양, 그렇게 일광욕이나 즐기고 있을 땐가요?”
아, 참나. 까칠하기는. 그깟 어깨 박살냈다고 그러는 거야? 난 팔이 날아갔는데? 영원히?
“아, 진짜 까칠하네. 그, 내가 메일 하나를 받았는데. 어쨌든 내 부모랑 내 신상정보가 담긴 내용이었어. 내가... 그 클론인가, 뭔가. 하는 그런 거더라? 내 부모도 알고 보니까 연구원이고. 내가 주입형 클론이라는데. 젠장, 그 실험 부작용 때문에 내가 이딴 거지같은 인격으로 나눠진 거야?”
“음, 뭐. 정확하진 않지만 대충 이해는 한 것 같네요. 그래서 그 인격을 다시 융합해야 돼요. 안 그러면 아마 점점 더 스스로를 통제하기 힘들어질 거예요. 다시 합쳐준다고 확신할 수는 없는데, 어쨌든 도와줄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어요.”
“그래, 너도 역시 나 한통속이었어. 빌어먹을 세상. 너, 진짜 또 뒤통수치면 죽여! 그땐 뼈 마디마디를 다 부셔 놓을 거야.”
“근데 이제는 진짜 반말하면 안 되지 않나? 나도 참아주고 있는 건데, 규서 양.”
아, 이 년 웃는 거 처음보네. 웃는 게 아닌 것 같아. 차가워. 그래, 알았어. 알았다고. 인격 융합인지, 뭔지. 그 착한 이규서만 좀 어떻게 할 수 있다면... 그깟 존대 따위, 해주지 뭐.
“아, 그리고 김현아랑 짜고 쳤더라...요? 진짜 죽을래...요?”
“규서 양, 그건 존대가 아니에요.”
“아이씨, 몰라. 어쨌든 자꾸 뒤통수칠래? 그래서 내 팔이 이 꼬락서니인 거 아니야!!”
“이번 기회에 화해나 하죠? 어차피 나랑 자주 볼 텐데. 현아도 이제 제 밑으로 왔으니...현아도 자주 보겠죠?”
“하...진짜, 넌 끔찍해. 사람이 아니야.”
“물론이죠, 규서 양도 그렇잖아요?”
알지, 아는데. 네가 말하니깐 좀 그렇다. 괴물이 괴물한테...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는 기분이랄까. 그냥, 좀 더러워. 김현아... 일단 전화라도 해볼까. 아, 다리라도 분질러놔야 화가 풀릴 것 같은데.
-뚜르르 뚜르르
- 어! 규서 언니! 살아있었네요! 와아, 역시 괴물!
“살아있었네요? 넌 지금 그딴 소리가 나오냐? 사미화랑 짜고 배신 때려놓고서 내가 반가워?”
- 아잇, 그러면 어떡해요! 저도 어쩔 수 없었다고요. 이모랑 언니랑 붙었을 때 누가 이길까를 따져봤는데...아무리 생각해봐도 언니는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별 수 없었어요! 헤헤.
“...만나면 어딘가 한 곳은 반드시 분질러 놓을 거야. 근데 이모? 왜 사미화가 네 이모야?”
- 뭐 따지고 보면 이모 비슷한 것 같던데요. 아무튼 미안해요! 잘못했어요. 헤헤. 그래도 살았으니깐 됐죠? 규서 언니는 살 줄 알았어요! 역시, 괴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