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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3023년: 두번째 판게아
작가 : 윤그루
작품등록일 : 2018.11.2

100년전, 세상은 망했다. 지구 대재앙이 일어나 지구상의 모든 걸 집어삼켰고, 동물과 식물과 무생물을 한낱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그런데도 인간은 그 속에서도 살아남더라. 살아남아서, 그나마 지구에 남은 그 작은 땅덩어리에 다섯 나라를 짓고, 또 다시 사회를 시작하더라. 그런데 오늘, 3023년, 그 다섯 나라 중 우리나라가 망했다. 나라가 망하는거야 딱히 상관없다만, 그것 때문에 다쳐서는 안되는 아이가 죽게 생겼다. 그래서 싸워야겠다. 이 끝이 어떻게 날지는 모르겠다만, 일단은 이대로 흘러가게 두지는 못하겠다.

 
#1. 혼자 사는 인생 (2)
작성일 : 18-11-04 14:16     조회 : 278     추천 : 0     분량 : 8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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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속의 대화는 영어로 이루어지는 대화입니다ㅎ

 

 복도는 하루 남은 판게아절을 맞아 온갖 장식으로 가득하다.

 판게아절은 5개국이 판게아에서 새로운 시대를 선포한 날이자 새해가 시작되는 날으로, 판게아에서 가장 중요한 기념일이다. 특히 올해의 판게아절은 판게아 시대가 시작 된지 딱 100주년이 되는 날이라 그 어느 때보다도 축제 열기가 대단했는데, 덕분에 복도가 정신없기 짝이 없었다.

 복도 여기저기에서는 LED 볼들이 날아다니며 ‘100th Pangaea Day(100번째 판게아 데이)’를 필기체로 공중에 새겼고, 창문에서는 판게아절에 관한 색색의 홀로그램들이 번쩍였다. 판게아절은 내일인데도 분위기만 봐서는 벌써 축제일 같다.

 그러나 축제고 뭐고, 쓸데없이 현란한 이 장식들은 안 그래도 지끈거리는 내 머리를 더 아프게 할 뿐이다. 나는 길을 방해하는 LED 볼들을 쳐내며 씁쓸하게 걸음을 옮긴다. 활기차기만 한 이 분위기가 원망스럽다. 남들에게 오늘은 판게아절을 준비하는 설레는 날일지 몰라도, 나에게 오늘은 1년 중 가장 슬픈 날이니까. 그런 내 마음과는 정 반대인 이런 장식들을 보고 있자면, 매번 이 넓은 세상에 나 혼자 동 떨어져있는 기분이 든다.

 얼마 가지도 않았는데 곧 수업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었나. 교실 문들이 하나 둘씩 열리더니, 학생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대독과 다시 마주치고 싶지는 않기에,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빠른 걸음으로 다음 수업 교실로 향한다.

 그때 뒤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누군가가 내 팔을 붙잡는다. 욕을 날릴 준비를 하며 홱 돌아 보았지만, 그 순간 표정이 누그러진다. 나를 잡은 손의 주인은 다름이 아닌 유진이다.

 “해일아, 괜찮아? 기분 많이 상해 보이던데…”

 유진이를 보자 한껏 일그러져있던 입가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나의 작은 천사다. 세상에서 가장 맑은, 나만의 작은 천사.

 가짜 표정들로만 가득한 이 거짓 세상에서, 유진이만큼은 언제나 가면 없이 그 순수한 맨 얼굴로 사람을 대한다. 모두가 내게 인상을 찌푸릴 때, 아무런 가식 없이 환하게 웃어준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 현존하는, 내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두 사람 중 하나다.

 나는 걱정스럽게 눈망울을 끔벅이는 유진이를 향해 씩 웃어 보인다. “뭐야, 오늘은 대들었다고 안 혼내네?”

 “오늘은 내가 봐도 대독이 너무 심했어! 물론 수업시간에 잔 거는 잘못한 거긴 하지만, 그래도 사배자 전형이랑 부모님 얘기까지 할 필요는 없었잖아? 진짜 내가 벌떡 일어나서 뭐라고 막 해주고 싶었다니까!”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그렇게 씩씩대는 게 귀여워서 나는 유진이의 머리를 장난스럽게 헝클인다.

 “그나마 내일 판게아절 축제 끝나면 방학이니까 다행이다. 당분간은 좀 조용히 살 수 있겠네.”

 “이번 방학에도 그냥 기숙사에 남으려고?” 유진이가 묻는다.

 “그래야지. 방학 내내 센터에서 지내는 것 보단 기숙사가 차라리 낫잖아?”

 “그래도… 그냥 나랑 같이 우리 집에서 지내면 안돼? 기숙사에 혼자 있으면 외롭잖아. 우리 엄마가 허락도 해줬단 말이야.”

 “됐어. 너희 가족한테 민폐 끼치고 싶지는 않아. 그리고 기숙사에 있는 것도 나름 재미있어. 혼자서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고.”

 그 말에 유진이는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째려본다. “치! 어떻게 단 한 번을 내 부탁을 안 들어주냐? 진짜 치사하다, 치사해. 우리가 중1 때 만나서 벌써 고1이 됐는데, 어떻게 그 7번의 방학 중에서 단 한 번도 내 말을 안 들을 수가 있냐고! 진짜 미워! 흥!”

 유진이는 혀를 삐죽 내밀어 보이고는 계단을 향해 먼저 쪼르르 달려간다. 그 모습이 마치 다람쥐 같아 나도 픽 웃는다.

 “야, 그렇다고 삐지냐?”

 오랜만에 기분 좋게 웃으며 유진이의 뒤를 따라 다음 교실이 있는 위층을 향해 달린다.

 그러나 계단을 다 올라가기도 전에 그 즐거움은 끝나버리고 만다. 또 다른 누군가가 내 팔을 잡아 멈춰 세웠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유진이가 잡을 때와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기분 나쁜 느낌, 아니, 더러운 느낌이다.

 그 더러운 손은 내 손목의 단추를 푸르더니 와이셔츠 소매를 팔뚝까지 걷어 올린다. 팔뚝의 중간부위에 단단히 둘러진 굵은 철제 팔찌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 팔찌 가운데에 박힌 푸른 구슬 아래로는, 흉측하게 긴 상처 하나가 구슬의 푸른빛과 겹쳐져 일렁인다.

 “[봐봐, 이 팔찌! 강해일 맞잖아! 얘는 뒷모습만 봐도 내가 딱 알 수 있다니까!]”

 소매를 도로 뺏어 내리며 뒤를 돌아본다. 그곳엔 스티븐이 자기 양아치 친구들과 함께 낄낄대고 있다.

 스티븐은 메리니아인이다. 스티븐 말고도 우리 학교에는 외국인들이 꽤 많다. 판게아 전체에서 공부 좀 한다 하는 학생은 모두 우리 학교로 몰려왔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소통에 문제가 있지는 않았다. 입학 시험에 한아린어와 영어 시험이 있어서, 합격한 학생들은 모두 한아린어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줄 알았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고.

 내가 무시하고 그냥 가려 하자, 스티븐이 내 손목을 더 세게 억누른다.

 “[어이, 인사는 해야 될 거 아니야, 섀니. 아까 나 발표할 때 그렇게 졸아 놓고, 나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섀니, 한아린인을 욕하는 말이다.

 판게아에선 인종이 두 가지로 나뉜다. 세나리아인(Senarian)과 울랜인(Wollanian). 단순히 말하자면 황인종과 황인종이 아닌 이들이다.

 그러나 사실 판게아에서 ‘세나리아인’이란 단어를 실제로 쓰는 이는 별로 없다. 대신 언젠가부터 모두들 황인종들을 ‘한아린인’이라고 통칭하고 있었다. 한아린이 단일민족 국가라 거의 황인종들로만 구성되어 있기도 하고, 어쨌든 다른 나라에 사는 황인종들도 극히 드물어서, 판게아의 황인종들, 즉, 세나리아인들은 모두 한아린인이라고 생각해도 딱히 문제가 없었으니 말이다.

 이런 한아린인들은 오래 전부터 울랜인들의 차별과 경멸의 대상이었는데, 그 이유인 즉슨 ‘남’이 한아린인이기 때문이다. 지구 대재앙 시절, 나라들에게 나누어진 구조 잠수함 ‘이모르’들을 거의 모두 폭파시키면서 최악의 테러를 일으킨 ‘남’. 이 ‘남’이란 남자가 한아린인이라는 이유로 울랜인들은 오랜 기간 동안 한아린인들을 증오해온 것이다.

 사실 이는 항상 내게 잘 이해가 되지 않았던 부분이다. 한아린도 ‘남’에 의해서 이모르를 폭파당한 피해자들 중 하나인데, 왜 ‘남’의 테러를 한아린의 잘못으로 몰아가는지.

 뭐, 그러나 내가 뭐라고 생각하든과는 상관없이, 이런 울랜인들의 한아린인들에 대한 극심한 증오는 세나리아인들 전체에 대한 증오로 번질만큼 점점 더 거세지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니 울랜인인 스티븐이 한아린인인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거 놔라. 오늘은 너랑 실랑이 할 기분 아니니까.]” 내가 말한다.

 마음 같아서는 날 잡은 팔을 그대로 꺾어버리고 싶지만, 애써 참는다. 분하지만 이 애랑 만큼은 엮이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그러나 역시 이렇게 말로만 해서는 스티븐이 들어먹을 리가 없다. 그는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 웃으며 내 팔을 잡아 끌더니, 내 허리에 그 더러운 손을 감는다. 그러곤 비웃음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유심히 들여다본다.

 “[아무리 봐도 정말 울랜인 같이 생겼단 말야. 섀니 주제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말이었기 때문에 나는 눈동자를 한 번 굴린다. 스티븐의 말대로 나는 부모님이 모두 한아린인인데도 울랜인처럼 생겼다. 한아린인치고는 유난히 짙은 쌍꺼풀과 이국적인 이목구비 때문에, 나를 처음 보는 이들은 대부분 내가 울랜인인지 한아린인인지 헷갈려하였다.

 “[이거 놓으라고 했다.]”

 “[심지어 꽤 이쁘게 생겼단 말이야! 야, 너 진짜 우리 아빠 후원자 할 생각 없냐? 응? 내가 잘해줄게.]” 그가 낄낄대며 말한다.

 나는 이를 부득 갈며 그의 손을 뿌리친다.

 “[할만큼 했으면 이제 그만 가라, 제발.]”

 “[왜, 싫어?]” 그가 아쉽다는 듯 침울한 표정을 짓는다. “[아! 그럼 백유진을 데려가야 되나? 좀 덜 예쁘긴 해도 그런대로 순둥순둥하니-]”

 마지막 글자 대신 탁한 컥 소리가 문장을 마무리한다. 나는 결국 낚아채고 만 스티븐의 멱살을 잡아 당겨 그의 머리를 내 눈높이까지 내린다.

 “[말 조심해.]”

 스티븐은 순간 조금 당황한 듯 하지만, 이내 다시 여유로움을 되찾는다. “[어허.. 너 나한테 이러면 안 될 텐데? 내가 그 여자 불러도 괜찮겠어? 이번에 부르면 진짜 마지막인 거 너도 알잖아.]”

 “[이게-]”

 협박에 말리지 않으려 손아귀에 더 힘을 쥐어보지만, 흔들리는 동공은 어쩔 수 없다. 이 애와의 싸움에서 내가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 스티븐도 그걸 알기에 굳이 내 손을 떼어내려 하지 않고 그저 피식 웃어 보인다.

 “[역시 그 여자는 무섭나 봐?]”

 결국 보다 못한 유진이가 나서서 나를 말린다. “해일아, 이제 그만 가자. 쟤랑 아무리 실랑이해봤자 너만 손해잖아. 응?”

 분하다. 분하지만, 나는 떨리는 숨을 내뱉으며 스티븐의 셔츠 카라를 놓는다. 억울하게도 딱 여기까지가 사회배려자가 국회의원 아들을 건드릴 수 있는 한계이다.

 “그래, 그만 가자.”

 유진이를 챙겨 구경하는 아이들을 헤치고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뭐야, 그냥 이렇게 가는 거야?]”

 스티븐이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들리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꿋꿋이 계단을 오른다. 문제는 스티븐 역시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 빈정댄다는 거다.

 “[벌써 가면 어떡해? 나 아직 진짜 하고 싶은 얘기도 못 했는데. 나 오늘 너 꼭 위로해주고 싶었단 말이야. 오늘 너한테 슬픈 날이잖아.]”

 그 한마디가 내 뒷덜미를 잡아 세운다. 발걸음을 멈추고 뭔가에 이끌린 듯 그를 향해 다시 뒤를 돌아본다. 스티븐의 얼굴에는 비열한 웃음이 자리잡고 있다.

 “[오늘이잖아, 그치?]” 그가 걱정스럽단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7년 전, 니 아빠 사형당한 날.]”

 그 말과 함께 내 이성의 끈이 끊어진다.

 소리를 지르며 스티븐의 멱살을 잡아 그의 머리를 계단 난간에 박는다. 청명한 금속 소리와 함께 스티븐의 얼굴이 난간의 쇠 파이프에 짓눌린다.

 당황한 그의 패거리들이 뛰쳐나와 나를 억지로 스티븐에게서 떼어낸다. 나는 양팔이 붙잡히면서도 씩씩대며 여전히 스티븐 쪽을 노려본다.

 스티븐은 볼이 붉게 부어 오른 채 다시 몸을 일으킨다. 그가 부딪힌 곳을 어루만지며 바닥에 침을 뱉는데, 침 대신 피가 바닥에 일그러진 원을 그린다. 그걸 보는 스티븐의 표정 역시 보기 싫게 일그러진다.

 “[이게..]”

 그가 홱 돌아서며 내 명치를 걷어찬다. 팔을 붙잡힌 터라 피하지도 못하고 그 고통을 고스란히 전해 받는다. 나는 신음을 내뱉으며 휘청이지만, 그럴수록 스티븐의 패거리들이 나를 꽉 붙든다. 어지러운 시야 사이로 스티븐의 발이 내 복부를 향해 다시 날아온다.

 “[이게!]”

 퍽.

 “[오냐오냐 해주니까!]”

 퍽.

 “[지 분수를 모르지?]”

 퍽.

 마지막 강타와 함께 정신이 혼미해지며 다리가 완전히 풀려버린다. 내가 종이 인형마냥 날 잡은 팔들에 매달려 당글거리자, 그제서야 스티븐의 패거리는 내가 그대로 풀썩 쓰러지게 둔다.

 그건 그들에게 큰 실수였다.

 팔이 자유로워지자마자 내 왼쪽에 선 놈의 종아리 위쪽을 손날로 가볍게 친다. 타격감만큼이나 가볍게 아이가 쿵 주저 앉는다.

 순간 놀란 나머지 한 아이가 재빠른 반사 신경으로 내게 옆차기를 날린다. 완벽한 폼의 훌륭한 발차기인데, 아쉬운 점은 이곳이 계단이란 것을 잊었다는 거다.

 내 쪽으로 쭉 뻗어진 발을 잡아 그대로 치켜 올려 버린다. 다리가 감당할 수 있는 각도 이상으로 찢어져 버리자, 아이가 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리며 소리를 지른다.

 “[야, 놔! 이거 놓으라고!]”

 뭐, 원한다면.

 잡은 발을 가져다 계단 아래쪽으로 던져버린다. 중심을 잃으며 앞으로 기울어지던 아이는, 일전에 내가 주저앉힌 아이까지 데리고서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져 사라져준다. 친절하게시리.

 그 순간 옆쪽에서 스티븐이 갑자기 튀어나오더니 내 목을 움켜쥐고서 그대로 벽으로 밀어붙인다. 엄청난 통증이 뒤통수에 덮쳐온다.

 “[어후, 군인 딸이라고 또 쌈 하나는 잘하네.]” 그가 손아귀에 힘을 주며 말한다. “[너네 아빠도 그렇게 발악하다가 끌려갔다는 거 같던데. 명령 불복종이라 그랬었나?]”

 어금니를 우득 갈며 있는 힘껏 내 목덜미를 쥔 손을 세게 문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스티븐이 괴성과 함께 뒤로 물러나자, 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 그의 명치를 걷어찬다. 스티븐은 잠시 휘청이지만, 내 힘으로 그를 완벽히 무너뜨리기는 아직 부족하다.

 금세 중심을 되찾은 스티븐은 다시 내 멱살을 잡아끌더니, 내가 그랬던것처럼 내 얼굴을 난간에 짓누른다.

 “[심지어 내가 어제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거 너가 증언한 거라면서? 니 아빠가 그런 거 맞다고.]”

 머리가 핑 돈다. 누군가가 내 머리를 가는 바늘로 관통한 것 마냥.

 나는 흔들리는 목소리를 억누르며 스티븐을 향해 눈을 치켜뜬다. “[아니야..]”

 “[아니기는, 내가 어제 확실히 들었는데? 너가 증언했고, 그게 확실한 증거가 됐다고. 에휴, 너도 아빠가 얼마나 싫었으면 그런 짓을 했니?]”

 수십개의 바늘이 또 다시 내 머리를 헤집고 지나간다. 엉키고 엉킨 고통이 내 머릿속을 뜨겁게 달궈간다. “[아니라고..]”

 “[뭐, 어쨌든 목적 달성 한 거니까 축하해줘야 되나? 축하해, 강해일. 너가 해냈어. 너가 죽인 거야, 니 아빠.]”

 싹둑.

 순간 내 머릿속에 얽혀 있던 모든 고통이 잘려나간다. 그리고 그와 함께 공허함만 남는다. 알 수 없는 공허함. 그 공허함 가운데에서 스티븐의 마지막 한 마디가 메아리친다.

 너가 죽인 거야, 너가 죽인 거야, 내가 죽인 거야, 우리 아빠.

 “그래, 내가 죽인 거지.”

 “[뭐?]”

 알 수 없는 힘이 차오르면서 발로 스티븐의 정강이를 걷어찬다. 뚜렷한 뚝 소리가 들리며 스티븐이 땅으로 꺼진다.

 “내가 죽인 거라고, 우리 아빠.” 내가 몸을 일으키며 말한다. “그래서 너 하나쯤은 또 죽일 수 있어.”

 스티븐 쪽으로 손을 뻗는다. 내 손을 피하며 그가 한 발짝 뒤로 물러났지만, 내가 겨냥한 곳은 그가 아니다.

 난간 위로 손을 쓸어 느슨하게 박혀 있는 못을 하나 찾는다. 그러곤 주먹에 힘을 주어 그 못을 구멍에서 빼낸다. 뜨거운 피가 손가락에서 흘러내리는 게 느껴지지만, 딱히 신경이 쓰이진 않는다.

 스티븐이 일어나 보려 바닥을 짚지만, 내 발이 그런 그의 손을 차 다시 넘어뜨린다. 그러곤 주저 없이 그 위에 올라타 한 손으로 그의 목을 움켜쥔다. 다른 한 손에 쥐어진 못이 스티븐의 얼굴 위에서 살벌하게 빛난다.

 “[너.. 너 뭐하는 거야?]” 스티븐의 눈동자는 흔들리는 못을 따라 매섭게 요동친다.

 “[생각해보니까 억울해서. 난 이미 살인잔데, 내가 왜 계속 참고 있었는지.]” 요동치는 주먹과 함께 손에서 흐른 피가 투두둑 쏟아진다. 작은 핏방울들이 스티븐의 얼굴 위에 불규칙하게 맺힌다. “[살인자도 한 번만 되지, 두 번 되는 거 아니잖아?]”

 “[야.. 기.. 기다려! 너 생각 잘해! 너 나중에 내가 그 여-]”

 “[늦었어.]”

 이를 꽉 깨문 채 못을 든 손을 아래로 내리친다. 스티븐과 지켜보던 이들의 비명 소리가 복도를 가득 메운다.

 그러나 못이 스티븐의 살갗에 닿기 전에, 누군가의 손이 내 손목을 잡아챈다.

 손을 뿌리치려고 마저 못을 내리치려 했지만, 내 손목을 쥔 손은 나를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열이 오른 눈을 부라리며 이를 돌아본다.

 익숙한 얼굴이 나를 맞이한다. 한껏 흥분된 상태라 모든 게 색깔 뭉치들 마냥 흐릿하게 보였지만, 그가 누군지는 단번에 알아챌 수 있다.

 가을 하늘 아래 빛나는 논과 같은 어두운 금발 머리. 그리고 푸른 바다에 녹색 물감을 딱 한 방울 떨어뜨려놓은 듯한 저 알 수 없는 푸른빛 눈.

 카를이다. 유진이 외에, 내가 믿을 수 있는 다른 한 사람. 그리고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순간 내가 한 모든 행동들이 자각되며 온 세상이 멍해진다. 강해일 이 미친 놈. 지금 무슨 짓을 한거야?

 그런 나를 카를은 화난 표정으로 응시하며, 내 손에 들린 못을 빼앗고서 멀리 던져버린다. 찬란한 챙 소리와 함께 못이 바닥에 떨어진다.

 그 틈을 타 스티븐이 나를 향해 주먹을 날리지만, 그 전에 카를의 주먹이 그를 다시 넘어뜨린다.

 “[그대로 있어. 너도 잘한 건 없으니까.]”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리고 너, 너는 나 따라와.]”

 카를은 나를 일으키고서, 내 팔을 어디론가 잡아 끌기 시작한다. 내 걸음은 카를을 따라나서지만, 내 정신은 전혀 다른 곳에서 요동치고 있다.

 강해일 너 뭐한 거야. 지금 뭐한거냐고.

 마지막으로 스티븐을 한 번 돌아본다. 나를 맞이하는 그 매서운 눈빛을 보자마자, 엄청난 공포심이 나를 삼킨다.

 물론 스티븐에 대한 죄책감 때문은 아니다. 내 도덕성에 대한 충격같은 거는 더더욱 아니고.

 난 저 눈빛을 안다. 이미 두 번 본 적 있다. 그리고 저 눈빛과 내가 마주하게 된 이상, 오늘이 여기에서의 내 마지막 날이 될지도 모르겠다.

 얼떨떨하게 고개를 돌려 카를 쪽을 본다. 어지러운 시야 사이로 그의 금발 머리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그 선명함은 차오르는 눈물로 인해 금세 희미해진다.

 어떡해, 카를. 나 이번엔 진짜로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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