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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용과 소녀
작가 : 이저녁
작품등록일 : 2018.11.2

우연히 용의 동굴을 발견한 소녀, 용은 소녀를 죽이기 않는 대신 조건을 제시하는데...

 
약속
작성일 : 18-11-04 00:41     조회 : 203     추천 : 0     분량 : 7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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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라, 다녀올게.”

 

 식탁에 멍하니 앉은 딸을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갈색 머리카락을 두건 안에 집어넣은 한 여인이 문을 열고 집을 나갔다. 소녀는 머리카락을 꼬며 건성으로 인사했다. 식탁 위에는 도토리 반죽으로 만든 빵과 묽은 야채수프가 모락모락 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어머니가 나가고 소녀는 식탁 앞에 앉았으나 전혀 식욕이 생기지 않았다. 오늘이 바로 약속한 그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소녀는 벌써 심장 고동이 커지는 걸 느끼며 억지로 빵 한 조각을 떼어내 수프에 찍어 먹었다. 떨떠름한 도토리 냄새에 소녀는 인상을 구겼다.

 

 

 용은 소녀를 종으로 삼겠다고 말했다.

 

 “조, 종이요…? 노예… 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다. 하지만 걱정할 거 없다. 그리 힘든 일은 시키지 않을 테니. 그냥 늙은 노인의 심부름꾼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면 편할 것이다.”

 

 용이 꼬리를 쓱 치웠다. 거대한 뱀과 같은 꼬리가 바닥을 쓸며 기분 나쁠 정도로 부드럽게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꼬리 끝에 달린 외날검 같은 가시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바닥에 하얀 포물선을 그렸다. 꼬리가 지나간 자리에는 돌무더기만 쌓여있을 뿐 출구는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소녀가 조금은 진정된 눈빛으로 용을 올려다보았다. 용이 여전히 손톱에서 빛을 내고 있어 그녀는 눈을 조금 찡그렸다. 용이 빛을 줄이며 말했다.

 

 “눈이 부신가보구나... 아무튼, 명심해라, 네 목숨은 내게 달려있다.”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넌 말주변이 좋은 아이는 아닌가 보구나…”

 

 “죄송합니다… 용님… 부디 무례를 용서해주세요… 그럼 전 지금부터 뭘 하면 될까요…”

 

 “일단은 네 어미에게 돌아가라, 그리고 오늘 일은 절대 누구에게도 알려선 안 된다. 만에 하나 인간 놈들의 병사가 한 놈이라도 이 동굴 주위에 얼씬거린다면, 네가 사는 마을을 통째로 구워버리겠다.”

 

 “네, 알겠습니다…”

 

 소녀는 용과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체력이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용의 말에 대답하면서도 속으론 그저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피로와 고통 때문인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도통 생각나지 않았다. 머릿속엔 그저 나무와 바위와 발밑에 깔린 낙엽 더미 등의 이미지만 선뜻선뜻 떠올랐다 사라졌다.

 

 고블린들에게 쫓기느라 지치고 다친 다리는 금방이라도 근육이 뭉칠 것 같았고, 놈에게 맞은 상처는 아직도 욱신거렸다. 용의 포효와 채찍질에 놀란 가슴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지금까지도 진정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용이 고개를 쳐들고 빛을 조금씩 거두기 시작하자, 겨우 긴장이 풀린 소녀는 밭은기침을 해대며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머리가 어질어질했고 눈이 핑그르르 돌며 갑자기 졸음이 쏟아졌다. 돌바닥에서 한기가 올라왔지만, 눈꺼풀은 추라도 매단 듯 무거워 도저히 눈을 뜰 수 없었다. 스스륵 눈이 절로 감겼다.

 

 괴물들이라곤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숲에서 별안간 등장한 고블린들에게 쫓기고, 겨우 도망쳐 들어간 동굴은 사실 동화나 전설 속에서나 들어봤던 용의 보금자리였다. 무사하게 집으로 돌아가 이 모든 일을 사실대로 말해도 오히려 어머니에게 머리를 쥐어박힐 것 같아 소녀는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도 자신이 지독한 악몽을 꾸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누군가가 귀에 대고 이건 정말 꿈이라고 속삭이기 시작했다. 의식이 점점 흐려졌고, 온갖 잡상이 무의식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

 

 잠들기 직전, 소녀는 뭔가 이상함을 느껴 절로 눈이 번쩍 뜨였다. 무릎이 전혀 아프지 않았고 입안에 감돌던 피 냄새도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고블린에게 맞아 멍이 든 팔뚝과 얼굴도 아프지 않았다. 다친 부위를 더듬어봤으나, 고통은커녕 다친 적도 없었다는 듯 말짱했고 피부는 생기를 찾고 다시 불그스름해져 있었다. 심지어 깊은 잠이라도 자고 일어난 것처럼 개운하기까지 했다. 소녀는 주변을 돌아보았으나, 여전히 어두운 동굴 안이었다. 거대하고 붉은 용의 몸뚱이도 희미해지는 빛 속에서 천천히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래, 이젠 좀 기운을 차리겠지…”

 

 소녀가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뒤에는 그녀의 머리통보다도 두세 배는 훨씬 큰 용의 거대한 눈알이 떡하니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세로모양 눈동자가 좌우로 움직이며 소녀의 상태를 살폈다.

 

 “치유 마법을 기억하고 있어 다행이군. 이 정도면 혹시 있을지 모를 네 어미의 추궁을 어느 정도 막을 순 있겠지… 어린 인간아, 이제 네 발로 돌아갈 수 있겠느냐…”

 

 “가, 감사합니다…”

 

 “그래, 다시 이곳에 올 땐 네 손 한가득 책과 음식이 있어야 할 것이니라…”

 

 “…네?”

 

 “내가 내리는 첫 번째 명령이다. 일주일 뒤에 책과 음식을 가지고 이곳으로 돌아와라.”

 

 “채, 책이라면…”

 

 “뭐든 좋다. 이족보행 하는 털 없는 놈들의 역사가 담긴 것이면 뭐가 됐든 가져와라…”

 

 “그, 그치만…”

 

 용이 눈을 껌뻑였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 그리고 행여나 이대로 도망칠 생각일랑 접어두는 게 좋을 거다. 조금 전 치유 마법과 동시에 네게 낙인을 하나 찍어놓았다… 그게 있는 한 네가 어디로 도망가든지 상관없이 난 이 세상 끝까지 너를 쫓아갈 수 있느니라… 어리석은 선택으로 너와 네 어미의 목숨을 헛되이 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네, 알겠습니다…”

 

 “좋다, 그럼 이제 돌아가라, 저쪽 끝에 마을 방향으로 난 작은 구멍이 하나 있다. 너 정도라면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용이 손을 들어 빛을 밝혔다. 그 끝에는 정말 작은 구멍이 하나 나 있었다. 소녀는 머뭇머뭇하면서도 조금씩 출구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요, 용님… 살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 그리고 상처를 치료해주신 것도…”

 

 출구에 도착한 소녀가 뒤돌아서서 용에게 감사인사를 전했으나, 어느새 빛은 사라져 있었고 동굴 안은 다시 어둠에 잠겨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용 역시 아무 말이 없었다. 다만 규칙적으로 들리는 길고 느린 용의 숨소리가 바람 소리처럼 희미하게 들리고 있었다. 소녀는 동굴 밖을 나갈 때까지 제발 용이 변심하여 자신을 잡아먹지 않기를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동굴 밖을 나왔을 땐 이미 늦은 오후였다. 해가 중천을 지나 한결 부드러워진 색으로 서산 바로 위에 떠있었다. 반대편 산마루 너머는 이미 희미하게 남색으로 물들어 밤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렸다. 소녀는 언제나 붉어지기 직전의 해를 바라보며 어머니를 기다리곤 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지금쯤 어머니가 돌아와 있을지도 몰랐다. 늦지 않기 위해 소녀는 집을 향해 정신없이 내달렸다. 멀쩡해진 다리는 지칠 줄을 몰랐다. 다시 땀방울이 뚝뚝 흐르고 옷이 땀에 절었지만, 소녀는 그저 살아남았다는 기쁨과 안도감에 눈물을 흘리며, 그리고 어머니의 품에 안길 생각만을 하며 집에 도착할 때까지 미친 듯이 달렸다.

 

 집에 도착했을 때, 소녀의 어머니는 이미 집에 돌아와 시장에서 사온 빵을 자르고 있었다. 낡은 냄비에서는 묽은 야채수프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고, 식탁 위에는 은화가 가득 담긴 주머니가 올려져 있었다. 그날의 벌이는 꽤 괜찮았던 모양인지 자신이 훔쳐 먹었던 훈제 고기 한 덩이도 은화 주머니 옆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소녀는 그것마저도 너무 기뻤다.

 

 그녀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가쁜 숨을 내쉬며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어머니는 자신의 딸이 문을 열고 들어온 소리를 듣고서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묵묵히 빵을 썰고만 있을 뿐이었다. 처음에는 처음에는 왜 저러는지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한 걸음 한 걸음 어머니에게 다가갈수록 계속된 무시에 소녀는 점점 더 화가 나기 시작했다.

 

 자신은 겨우 죽을 고비를 넘기고 힘겹게 집에 돌아왔건만, 어머니란 사람은 속 편하게 도시에 나가 돈만 잔뜩 벌고 왔다고 생각했다.

 

 소녀는 굳은 목소리로 ‘엄마’ 라고 한 번 불어보았지만, 전혀 대답이 없었다.

 

 소녀는 더욱 성이 나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설마 오늘 아침 멋대로 훈제 고기를 훔쳐 먹어서 이제는 아예 딸 취급도 하지 않을 생각인가 싶었다. 어머니는 여전히 무딘 칼로 빵을 썰고 있었다. 어찌나 세게 썰어댔는지 도마 위에는 빵부스러기가 마치 톱밥처럼 풀풀 날리며 바닥에 떨어지고 있었다.

 

 기쁨에 겨워 정신없이 달려온 소녀는 이제 너무 분하고 억울해서 서럽게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코 소리 내어 울지는 않았다.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았고, 질끈 깨문 입술 사이로 맑은 콧물이 흘러들어와도 개의치 않았다. 그저 어머니의 무심한 뒷모습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꼭 어머니에게 되갚아 줄 거라고 모진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멍청한 짓을 저질러 결국 어머니에게 버림받고야 말았다는 생각에 너무 슬퍼서 가슴이 아려왔다.

 

 그녀의 어머니는 자신의 딸이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 없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그제야 천천히 뒤돌아 자신의 딸을 바라보았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된 얼굴로 울고 있는 아이를 보자, 어머니는 칼을 도마 위에 내려놓고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소녀는 놀라고 말았다. 어머니의 눈에도 눈물이 고여 있었던 것이다. 이슬처럼 맺힌 그 투명한 눈물에, 소녀의 가슴속 응어리진 분노와 원망이 눈 녹듯 사라졌다.

 

 “엄마!”

 

 소녀는 곧장 달려가 어머니에게 안겨들어 펑펑 울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말없이 딸을 안아 주었다. 딸아이의 옷에는 피 냄새와 땀 냄새, 그리고 지린내가 한데 뒤섞여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따져 묻지도 않았다. 다만 저녁을 미루고 따뜻한 물로 아이를 씻겨 줬을 뿐이었다.

 

 

 소녀가 나중에 들은 바로는, 어머니는 몇 시간이 지나도 딸이 돌아오지 않자, 처음에는 이웃들과 소녀의 친구네 집에 가서 행방을 물었다고 했다. 그러나 본 사람이 아무도 없자 어머니는 곧바로 마을 자경단에 신고했다고 한다.

 

 자경단은 바로 수색에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경단원 한 명이 도토리나무 숲 인근에서 소녀의 두건을 발견했다. 자경단원들은 그 두건이 로라의 두건임을 어머니에게 확인했고, 자경대장을 선두로 한 수색조가 도토리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거기서 일정한 방향으로 떨어진 도토리와 나물들, 그리고 그 흔적이 끝나는 지점에 떨어진 소녀의 바구니를 발견했다.

 

 자경단은 그녀가 무엇인가에 쫓기고 있었다고 판단했다. 쫓는 존재가 무엇인지는 바닥에 가득한 낙엽 때문에 결국 알아내지 못했다고 했다. 자경단은 수색을 계속했고, 성에 있는 기사단 역시 소식을 듣고 다음날부터 병력을 파견해 수색을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동네 어르신들에 의하면 자경대장과 마을순찰 담당인 백부장은 괴물의 소행일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었던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날이 지기 전에 비록 더러운 복장이었지만 멀쩡하게 집으로 돌아왔고,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물론 소녀는 처음 며칠간은 이리저리 불려다니며 혼나느라 바빴다. 가장 먼저 그녀의 어머니가 다음 날 아침, 시장에 나가지도 않고 그녀를 혼냈다. 평소와는 달리 눈물까지 글썽이며 혼을 내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소녀 역시 마음이 약해져서 감히 대들 생각도 하지 못하고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그 뒤로는 마을 이장님과 자경대장, 그리고 백부장에게 불려 가 조사를 받아야 했다. 심하게 혼나지는 않았으나, 그 대신 다음부턴 절대 혼자서 숲에 들어가지 말라는 잔소리를 한참이나 들어야만 했다.

 

 조사를 받으며 소녀는 도토리나무 숲에 들어간 부분까지는 사실대로 말했다. 어머니에게 혼이 나서 화가 났고, 그래서 홧김에 혼자 숲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뒤로는 절대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고블린에게 쫓겼었다고 사실대로 말하면, 성에서 대규모 병력을 파견해 인근을 샅샅이 뒤질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용이 사는 동굴을 발견하는 건 시간문제고, 그 후의 일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소녀는 작은 토끼를 따라갔다고 거짓말을 했다. 왜 길을 잃었느냐고 질문했을 때는,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모르는 장소가 나왔다고 말했다. 그래서 한참을 헤매다가, 해가 기운 후에야 겨우 방향을 잡아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백부장은 아무런 의심 없이 소녀의 말을 믿어주었으나, 평생 한마을에서 살아온 이장과 자경대장은 달랐다.

 

 그들은 소녀가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적어도 일주일에 세네 번은 숲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었기에, 그녀가 그렇게 쉽게 길을 잃고 오랜 시간 헤맸다는 걸 미심쩍어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당사자가 그렇게 주장했고, 게다가 하루도 지나지 않아 돌아왔으니, 마을 사람들은 소녀의 실종을 단순한 헤프닝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마을 이장과 자경대장 역시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한 소녀를 보고 다른 생각을 하긴 어려웠다.

 

 소녀는 모든 조사가 끝나고 마을 어른들에게 돌아가며 훈계를 다 들은 후에야, 용이 자신에게 낙인을 새겼다고 말한 걸 기억해냈다. 그동안 정신이 없어서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없는 사이 옷을 벗어 온몸을 구석구석 살펴봤으나 낙인이라고 할 만한 건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용이 거짓말을 했을 것 같진 않았다. 그렇지 않다면 순순히 소녀를 보내주진 않았을 것이다. 고블린들을 때려죽이는 용의 모습을 떠올리면, 감히 거역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소녀는 그때부터 책과 음식을 모으기 시작했다. 음식은 예전처럼 찬장이나 창고에서 어머니가 숨겨놓은 식량을 슬쩍하면 됐지만, 책이 문제였다. 소녀의 집에는 책이 없었다. 어머니도 자신도 전혀 글을 읽을 줄 몰랐고, 무엇보다 도토리 쿠키나 빵으로 끼니를 때우는 가난한 집에서 그런 비싼 물건을 들일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마을 전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도 마을 이장님과 자경대장을 포함한 자경단원 몇 명, 그리고 마을 어르신 서너 명이 고작인 작은 마을이었다. 게다가 역사가 기록된 책이라니,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

 

 온 동네를 수소문하고 다닌 끝에 겨우 이장님에게서 책 몇 권을 빌릴 수 있었다. 이장님은 글도 읽을 줄 모르면서 무슨 책이냐고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으나, 소녀가 귀여운 손녀처럼 사정사정하며 매달리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책 두 권을 빌려주셨다. 하지만 책을 구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었다. 과연 용이 고작 책 두 권과 빈약한 식량에 만족하겠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소녀로서는 최선을 다해 구한 것이었다. 책을 빌려줄 집은 이제 없었고, 식량은 여기서 더 훔친다면 어머니에게 들킬지도 몰랐다. 부유한 상인의 자제면 모를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가 용돈을 받을 수도 없었다. 한 번은 어머니에게 돈을 준 주면 안 되겠느냐고 물어보았지만, 어머니는 콧방귀를 뀌며 딱 잘라 거절했다. 그래서 돈을 주고 책과 식량을 사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다.

 

 그날 이후 어머니는 며칠 동안이나 소녀를 시장에 같이 데리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소녀는 이런 형편을 최대한 불쌍하고 설득력 있게 전달하면, 용님이 다시 한 번 사정을 참작해주시지 않을까 천진한 생각을 하며 하루하루 엄습해오는 불안감을 달래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용이 있는 동굴로 돌아가기로 한 날이 온 것이다.

 

 오늘 어머니가 그녀를 집에 혼자 두고 외출한 것은 완벽한 우연이었다. 만약 오늘도 시장에 나가야 했다면, 소녀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어머니의 의심을 사고 말았을 것이다. 어머니는 소녀를 두고 나가면서도 불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소녀로서는 다른 길이 없었다.

 

 나가서 용을 다시 만나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을 사람들이 전부 죽임을 당할지도 몰랐다.

 

 소녀는 절대 그런 일만은 없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책 두 권과 식량을 가득 담은 가방을 어깨에 메고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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