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휴, 어쩌다 이렇게 되신 거예요? 뭐, 아무튼 다행입니다. 칼이 꽤 큰 혈관을 건드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심각하진 않고, 한 2 주에서 3 주 정도면 다 나을 겁니다. 대신 그때까지 무리한 왼팔 사용은 금지입니다. 아시겠습니까? 2 주 뒤에 꼭 실밥 빼러 오세요. 그리고 그거, 왠만하면 그냥 남자친구한테 차 태워달라고 하세요. 면허를 따고 차를 모시던가요.”
의사가 혀를 차며 말했다. 연화는 삐질거리며 현우의 눈총을 피했고, 현우는 그런 그녀를 보며 머리를 짚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현우가 허리를 꾸벅 숙이고 인사하자, 의사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른 환자를 진찰하기 위해 걸어갔다. 현우가 고개를 돌려 연화를 노려봤다.
“칼에 찔린 거야 그 빌어먹을 놈 잘못이니 됐고, 나한테 전화를 걸다니 뭐하자는 짓이야? 구급차를 불러야지! 만약 네가 당장 수혈이 필요한 상태면 어떡할 뻔했어? 너 진짜 잘못하면 죽을 뻔했어, 알아?”
“그래도...구급차는 날 최우선으로 오진 않으니까. 그리고 너는 이 대학병원 근처에서 일하니까 샛길로 요리조리 오고 가는게 더 빠를 줄 알았지.”
현우는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하는듯 보였지만 한숨을 내쉬며 연화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 미안해. 네 잘못은 아니지. 너도 경찰이긴 하지만 많이 놀랐을 거고. 그 상황에서 생각 한 것 치고는 아주 나쁜 판단은 아니었어. 근데, 니가 하지 말하고는 했지만 그래도 어머님은 불렀어. 아무리 그래도 이런 걸 부모님께 숨기는 건 아닌 것 같더라.”
이번엔 연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가 전화하지 말라고 했잖아...엄마가 걱정 많이 하실 텐데...나랑 달리 우리 어머니는 겁쟁이란거 알고 있잖아. 심리상담사 답지 않네.”
“마음이 편하게만 해주는 건 내 일이 아니야. 일이 잘못되도 극복할 수 있게 도와주는게 내 일이지. 애초에 잠깐, 나 교수님 한테 왕창 깨질 각오하고 튀어나온 거거든? 지금은 상담사가 아니라 그냥 일반인이야.”
나이가 들어 주름이 꽤 많이 생긴, 젊었을 적에 상당히 힘든 시간을 보낸 듯한 오십대 후반처럼 보이는 여성이 응급실로 뛰쳐들어왔다. 연화의 어머니. 현우가 손을 흔들며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오십대 후반 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속도로 순식간에 뛰어와 그녀의 딸을 살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어, 엄마. 괜찮아요. 놀라긴 했지만...그래도 경찰훈련때 실컷 두들겨 맞은 것보다는 훨씬 덜 아파요. 꿰메는 것도 이미 끝났고, 그냥 몇 주 약 먹으면서 쉬면 된대요.”
그래도 연화의 어머니는 흐느낌을 멈추지 않았다. 연화는 한숨을 쉬면 부드럽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진짜 괜찮다니까. 아, 아! 아윽...붕대 감은 곳은 만지지 마세요...”
“미, 미안해, 연화야. 많이 아프니?”
“으으, 괜찮아요. 그냥 다친 데는 만지지 마세요...”
현우가 시계를 바라보며 일어났다. 벌써 밤 열두 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일단 오늘은 늦었으니 들어가시죠. 태워다 드리겠습니다.”
“아, 고마워.”
“네가 이런데 그냥 놔두고 가면 쓰나. 기다려, 차 몰고 문 앞으로 올 테니까.”
“응. 엄마, 저희도 문 쪽으로 가죠.”
***
“너네 반장님이 뭐라셔? 쉬라고 하시지?”
“응. 되게 미안해 하시더라. 이주 푹 쉬고 오라고 하시네. 망할 연쇄살인마는 나 쉬는 동안 잡아처넣을 거니까 너무 아쉬워하지 말라시던데. 아 그리고,”
‘그 구역 순찰 강화해서 옷을 검게 입은 놈은 죄다 조져놓으라고 전해 놨다. 거기 돌던 놈은 내가 간만에 기합 좀 잡았고.’
“...라고 하시네. 큭큭.”
연화가 웃으며 말했다. 물론 경찰인 이상 함부로 민간인을 공격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순찰도 강화해주고 말이라도 해주니 기분은 많이 나아졌다. 재수 없게 그 구역 순찰이었던 누군가는 어쩔 수 없겠지만. 현우도 안심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연화가 살짝 손을 뻗으려 하다가 그만뒀다. 하지만 안경 너머 그의 예리한 눈은 바로 알아챘다.
“...왜?”
“아냐, 잘 가. 내일 교수님이 적당히 화내길 빌게.”
그가 피식 웃으며 코트를 옷걸이에 걸고는 다시 그녀의 옆에 앉았다.
“안 가. 내가 너를 본 지 얼마나 오래 됐는데. 애초에 내가 누군지 잊었어? 상담사야, 상담사.”
연화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고, 현우는 부드럽게 웃으며 소파에 기댔다. 아직 그 집의 가구는 새 것 특유의 냄새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연화와 그녀의 어머니가 이 아파트로 이사한 것은 고작 2 년 정도밖에 되질 않았고, 거의 모든 가구는 이사할 때 새로 산 것들이었다.
“그, 그래도 부모님이 걱정하실 텐데.”
“하하하하하하.”
현우가 무미건조하게 웃었다.
“네가 칼에 찔렸는데 어머니랑 둘만 있는 집에 그냥 놔두고 왔다...라고 말씀드리면 우리 부모님이랑 현아 녀석이 날 죽이려 들 걸. 쓰레기라고.”
웃으며 말하긴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현우의 가족은 모두 연화를 엄청 마음에 들어했으니까. 심지어 처음 만났을 때 부모님이 잠깐 자리를 비우신 동안 여동생인 현아가 ‘오빠 따위가 이런 언니랑 사귄다고?’ 라고 대놓고 말했으니까. 심지어 현우의 어머니도 ‘미안하지만 이 애가 너한텐 조금 과분한 것 같구나, 아들아.’ 라고 말했다.
“뭐, 아무튼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뭐, 나보다 훨씬 싸움 잘하는 형사님 집에 나 하나 더 있다고 얼마나 더 안전해질지는 모르겠지만.”
“현우 너는 이렇게까지 늦게 있어도 괜찮니?”
“아, 못 들으셨군요. 오늘 밤은 여기서 자고 가려고요. 연화 상태를 봐서 더 머물 수도 있고요.”
“고맙구나. 아무리 그래도 여자 둘만 있는 집에 있기는 조금 불안해서 그랬는데...”
연화의 어머니가 주방에서 설거지를 마친 후 들어오며 말했다. 현우는 최대한 안심시키는 방향으로 대화를 이끌었고, 곧 그녀는 안심한 채 방으로 들어갔다. 만약 연화 혼자 집에 있었다면 분명 어머니는 밤새 뜬눈으로 연화 옆을 지키려고 하셨을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연화는 무엇보다도 소중한, 이제 육십을 바라보는 그녀에게 남은 유일무이한 혈육이자 가족이었으니까.
“그럼, 너도 들어가서 자. 난 거실에서 잘 테니까.”
현우가 그녀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고 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자.”
“너도. 무서우면 말하고.”
“됐어. 아무리 그래도 나, 깡 하나는 자신 있거든.”
그렇게 말하며 연화는 방문을 닫고 불을 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