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중앙 회의장은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 채워졌다.
커다란 중앙 회의장을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순식간에 모일 수 있었던 이유는, 민환이 10분 전에 미리 소집하여 다휘에 대한 것들을 입단속 시켰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다휘는 ‘모두가 단결력이 좋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꽉 채워진 회의장의 가장 앞줄에 간부들과 함께 앉은 다휘는 정말 자신이 여기에 있어도 되냐며 몇 번이고 은호에게 물었다.
은호는 그런 다휘의 손을 꼭 잡고, 몇 번이고 괜찮다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장내의 모두는 조용히 해주세요.”
민환은 올 사람이 다 온 것을 확인하자, 회의장의 문을 걸어 잠그고 마이크에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회의장 구석까지도 잘 전달되었고, 곧 웅성임이 줄어들었다.
“긴급회의 소집이기 때문에, 정식회의는 내일 오전에 정상적으로 진행하겠습니다. 오늘은 급한 것만 정합시다.” 민환이 말했다.
그는 짧은 숨을 뱉고서 말을 이어갔다.
“어제 오후, 정보부 책임자이자 8인의 안개로 조직의 간부였던 현 휘원은 안타깝게도 영면에 들었습니다. 그의 일가족을 포함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장내의 모두는·· 그들의 명복을 비며 애도합시다.”
민환의 말에 모두가 준비해 온 듯 하얗고 작은 국화 모양의 뱃지를 자신의 양복 주머니에 달았다.
모두의 같은 행동에 다휘가 자신도 해야 하나 싶어서 주위를 둘러봤다.
그런 그녀를 눈치 챈 은호는 다휘의 손을 잡고 고개를 저으면서, 다휘에게 작게 속삭였다.
“우리 조직의 의식이니까, 너는 하지 않아도 괜찮아.”
“응···.”
다휘는 은호의 말에 작게 대답했다.
민환은 눈을 감고 잠시 시간을 가진 후, 다시 말을 시작했다.
“하여, 정보부 책임자 자리가 공석이 되었기 때문에 하루 빨리 자리를 채워서 일에 지장이 없도록 하려 합니다. 보스와 8인의 안개가 그 자리에 적합하다고 판단을 내린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을 호명할 테니, 자리에서 일어서 주십시오.”
민환의 말에 대부분의 이들이 누가 후보에 오를 것인지, 수군거렸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의견이 단 한 명으로 통일되는 듯 했다.
“로이드 실버스.” 민환은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세 번째 줄쯤에서 밝고 단정한 금발의 남자가 일어났다.
그의 자켓 포켓에도 국화 뱃지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불려서 떨떠름한 표정이라기보다는 그러려니, 하고 당연하다는 듯이 서 있었다.
“그는 휘원이 살아있을 때도 휘원을 도와 일을 착실하게 처리하고 개인 임무도 수행한 공로를 인정하여, 네가 정보부 책임자가 되어줄 것을 권한다.”
민환의 연이은 설명에 모두의 시선이 로이드를 향했다.
그는 여전히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아무 감정이 담기지 않은 표정으로 고민을 하는 듯 고개를 천천히 갸우뚱 거리더니, 이내 손을 들고 민환에게 발언권을 얻었다.
“하지요, 뭐.”
“·· 간단해서 좋군. 만약 거절했다면, 회의가 더 길어졌을 테지. 넌 회의 끝나고 남도록 하고, 다른 이들은 해산한다. 각자 일로 돌아가.”
이내 짧아진 민환의 말투에 너나 할 것 없이 간부들과 다휘, 그리고 새로운 간부가 될 로이드를 제외한 모두가 웅성이며 재빠르게 중앙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모두가 간부의 한 마디에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체계를 이해하지 못한 다휘는 혼자 당황해하고 있었고, 다른 이들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연호의 주변으로 모여 갔다.
다휘도 은호의 손에 이끌려 연호가 앉아있던 테이블로 향했다.
자리에 앉아 있는 연호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테이블을 빙 둘러 서 있었다.
연호는 팔을 내밀어 다휘의 손을 살짝 잡았다.
다휘가 동그랗게 눈을 뜨고 그를 향해 몇 번 깜빡이자, 그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일단 다휘. 여기는 처음 보지? 로이드 실버스라고 해. 8년 전에, blood bones 본부에서 이쪽으로 발령 나서 왔어. 이래 뵈도 한국말은 수준급이니까. 로이드, 이쪽 휘원이 동생 현 다휘야.”
연호는 다휘와 로이드를 번갈아보며 서로를 소개시켜줬다.
다휘는 자신보다 키가 큰 로이드를 올려다보며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
로이드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인사를 받고서, 연호를 향해 몸을 돌렸다.
“끝인가요?” 어딘가 멍한 시선과 잘 어울리는 중저음의 탁한 목소리였다.
잘못 들으면 자다가 이제 막 깬 것 같았다. 그의 물음에 연호는 익숙한 듯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래. 그럼 정보부 책임자로 첫 번째 임무를 줄게.” 연호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로이드는 그의 가끔씩 막무가내로 나가는 성격을 떠올리며 어쩐지 불안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내 연호와 눈을 마주치며 긍정의 사인을 보냈다.
“다휘의 정보를 조직 기밀 정보로 올리고, 정보부 책임자로써 우리랑 함께 다휘를 보호하도록 노력해줘.”
“·· 예?”
“자, 그럼 우리도 해산. 각자 일 합시다. 로빈 형이랑 은호랑 담이 형은 나 따라오자.”
연호는 로이드가 반문을 했음에도, 그를 완전히 무시하고 앞장서서 중앙 회의실의 출입구를 향해 걸었다.
남은 이들이 연호의 뒤를 따라 회의실을 나가면서 몇몇이 각자 로이드를 향해 한 마디씩 던졌다.
“보스 성격 하루 이틀인가? 이제 같은 간부로써 잘 해봐요, 로이드 님.” 은호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하이힐의 또각또각 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어차피 며칠 전부터 휘원 형님이 휴가라 형이 대신하고 있었잖아. 하던 일 계속 해.” 사석에서 로이드에게 편하게 얘기하는 민환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고 지나갔다.
“형!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키가 큰 우목은 그를 향해 엄지를 들어 보이며 씩 미소를 지었다.
“열심히 해, 열심히.” 도담은 로이드를 스쳐지나가며, 그를 힐끗 바라봤다.
시린 두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쳤지만, 로이드는 이내 고개를 숙였다.
로이드는 어쩐지 앞날이 두려워지는 것 같았다.
결혼식을 앞두고 휴가를 미리 신청하여 며칠 전부터 자리를 비우고 있던 휘원의 덕분에, 그의 대부분의 업무를 떠맡아 처리하던 로이드는 이 소식이 좋은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 * *
연호를 따라 나선 세 사람은 그의 집무실에 모였다.
다휘는 자신이 이제 뭘 해야 할 지 방황하자, 은호는 진탁에게 다휘의 손을 쥐어주었다.
진탁은 그렇게 다휘를 데리고 어딘가로 향했고, 그 뒤를 은국이 따랐다.
* * *
한편, 연호의 집무실은 향긋한 커피 원두 냄새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은 은호는 따뜻한 커피 향을 맡으며 기분 좋은 미소를 띠었다.
“향 좋네요. 이번 출장에서 사온 건가 봐요?” 은호가 말했다.
그녀의 시선은 원두를 갈고 있는 로빈의 뒷모습을 향했다.
“응. 도담 형 선물이야. 원두에 환장하잖아?” 로빈이 대답했다.
도담은 기분이 좋은 티를 내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내심 기뻐하고 있었다.
그의 씰룩거리는 입 꼬리가 그 증거였다.
“이런 거 사오지 말라니까. 요샌 인터넷으로 시키면 되잖아.” 도담이 바닥의 카펫을 뚫어져라 보며, 새침한 어조로 말했다.
그의 말에 연호는 킥킥거렸다.
“하여튼, 담이 형은 솔직하지 못하다니까. 나도 커피 좋아하는데, 제 건 없어요?
도담을 향해 웃음을 내비친 연호가 로빈을 향해 물었다.
로빈은 네 개의 에스프레소 커피 잔에 진한 향의 커피를 따라냈다. 트레이에 커피들을 들고 그는 소파에 앉아 있는 이들을 향했다.
“연호는 지난번에 사다줬잖아. 다음에 또 출장 가면 사다줄게. 다들 마셔봐.”
로빈이 양 팔을 벌려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활짝 웃었다.
막무가내에 항상 들떠있는 성격이지만, 그의 화려하고도 고상한 외모는 그가 입만 다물면 ‘도련님’처럼 보이게 했다.
호록거리는 소리를 내며 도담은 커피를 한 모금 입 안에 물었다.
특이한 향이 그의 감각을 자극했고, 도담은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 좀 달아.”
“어, 어어?”
도담의 한 마디에 로빈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어렸다.
아주 쓰고도 고소한 맛의 커피를 즐기는 도담을 위해 특별히 공수해 온 원두인데, 그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지 않았다.
반면에 마찬가지로 에스프레소를 즐기는 연호와 은호는 기분이 좋은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도담의 표정과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이건 쟤나 줘라. 내 취향은 아니군.” 도담은 결국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로빈은 침울한 표정으로 그를 짠하게 바라봤다.
“아, 도담 혀엉!”
“큰 건 조용히 하고, 작은 건 얘기나 시작해.”
로빈의 칭얼댐이 시작할 전조가 보이자, 도담은 쓰고 있던 중절모를 벗어 테이블 위로 올리며 말했다.
항상 관리를 하는 듯 매끈한 이마와 그의 암흑처럼 검고도 날카로운 눈이 드러났다.
“··· 뭐? 설마 큰 건 키 큰 로빈 형이고, 작은 건 나야?”
키가 꽤 큰 편인데도 다른 모두의 키가 너무 커서,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는 것이 콤플렉스인 연호가 발끈하여 도담을 째려보았다.
예민해있는 연호에 상반되는 여유로운 모습의 도담은 “해 볼 테면, 해 봐.” 라고 말하며 씩 위험한 미소를 지었다.
“자, 세 분 모두 그만하시고요. 우리 다휘에 대한 이야기나 시작해요.”
항상 세 사람의 신경전을 무마시키는 은호가 이번에도 나섰다.
그녀의 차분한 목소리에 모두가 자리에 앉았다.
“·· 일단 로빈 형은 다휘 일을 정확히 모르니까, 우리 입장에서 처음부터 설명 해 드릴게요.”
연호의 긴 설명이 시작되었다. 은호는 간혹 그를 도와 당시 다휘의 심정을 이야기했다.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장난 끼 가득했던 로빈의 표정은 점차 굳어갔다.
로빈이 내린 커피가 점차 식을 때 쯤 연호의 이야기는 끝자락에 달했고, 누군가가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