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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그림자를 끌어안는 방법
작가 : 채영요
작품등록일 : 2018.9.13

이 세상의 끝에 외로이 자리한 나라, 영령(影靈)국. 그림자에서 태어난 태초신 무영이 창조한 이 세계에는 그림자가 없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앞에 나타난 인간, 미루가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어쩌면 무영이 수천 년간 찾아 헤맸던 사람이 바로 저 조그만 여인일지도 모른다. 감정이라곤 모르는 무영과 감정이 풍부하다 못해 흘러 넘치는 미루의 만남. 몽환적인 신들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사랑 이야기 속으로 초대합니다.

 
1장. 가자.
작성일 : 18-09-13 00:19     조회 : 253     추천 : 0     분량 : 7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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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종일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더니, 이렇게 구름이 말끔히 걷히려고 그랬나 보다.

 새카맣게 개인 밤하늘에 촘촘히 박힌 별과 둥근 달이 희부옇게 빛났다.

 그런 하늘을 올려다보는 미루의 두 눈에 달빛이 한가득 들어찼다.

 한참을 목이 빠져라 창 너머의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미루는 창틀에 팔을 얹고 몸을 기댔다.

 언제까지고 밤하늘 감상을 계속할 심산이었다.

 그때 미루의 뒤에서 밭은기침과 함께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루야, 고뿔 들겠다. 그만 자자꾸나.”

 “네, 할머니.”

 미루는 곧장 창문을 닫고 이부자리로 파고들었다.

 “할머니, 안녕히 주무세요.”

 미루가 꾸물꾸물 할머니를 끌어안으며 애교스럽게 인사하자, 할머니도 미소를 지으며 미루를 꼭 마주 안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의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고르게 변했다.

 하지만 미루는 여전히 잠들 수 없었다.

 닫힌 창틈으로도 비집고 들어오는 흰 달빛 때문이었다.

 바늘처럼 길고 가늘게 바닥에 내리꽂히는 달빛을 바라보다, 미루는 결국 자리에서 살금살금 일어나 다시 창을 열었다.

 미루의 얼굴 전체로 은가루가 부서지듯 흰빛이 내렸다.

 머리 위로 곧장 떨어질 듯, 선명하고 가까이 매달린 달.

 “아아, 예쁘다.”

 미루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욕심이 생겼다. 더 가까이,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다.

 오늘은 저 달을 넓은 하늘을 배경으로 온 마음에 담아놓지 않으면 잠들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윽고 미루가 마음을 굳혔다.

 얼마 후, 긴 겉옷을 머리에 둘러쓴 인영 하나가 뒷마당으로 톡 튀어나왔다.

 잰걸음으로 뒷산으로 향하는 사람은 미루였다.

 “할머니, 미안해요. 금방 올게요.”

 미루는 밤이라 할지라도 달이 밝을 때는 조심해야 한다고 당부했던 할머니를 향해 속삭였다.

 야트막한 산이라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미루는 산꼭대기 공터의 짧게 자란 잔디에 누워, 둥글게 늘어선 나무 위로 달을 바라볼 참이었다.

 그러나 미루는 공터에 발을 들이자마자 멈칫하고 말았다.

 분명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공터에는 장신의 남자 하나가 유령처럼 조용히 서 있었다.

 순간 미루의 기척을 느꼈는지, 남자가 고개를 돌려 미루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미루가 짧은 숨을 들이쉬었다.

 눈처럼 하얗게 빛나는 은발을 길게 늘어뜨린 아름다운 남자였다.

 창백한 얼굴에서 유독 눈에 띄는 회녹색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

 그 기려한 자태에 넋을 놓은 것도 잠시, 미루는 울상을 지었다.

 ‘어쩌지, 일 나겠는데.’

 미루는 머리 위에 덮은 옷을 더 끌어당겨 얼굴을 가리며 뒤로 물러섰다.

 아무리 달이 너무 보고 싶었다 해도, 이렇게나 밝은데 외출을 감행한 제 잘못이다.

 ‘할머니 말 들을걸!’

 할 수 없이 저 남자가 자신을 더 자세히 보기 전에 이 자리를 벗어나야만 했다.

 미루가 조심스럽게 한 발짝씩 뒷걸음질을 치는데, 날카로운 시선이 집요하게 미루를 따라왔다.

 미루는 그 눈길이 온전히 자신에게 닿지 않았기를 빌며, 왔던 길을 되돌아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미루의 치맛자락 끝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무영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 발견한 모양이었다.

 잠시 제자리에 서서 무언가를 생각한 무영이 순간, 홀연히 사라졌다.

 

 ***

 

 그늘 밑에서 살아간다 하여, 영령(影靈)국이라 불리는 나라.

 이 세상의 끝에 외로이 자리한 나라라 했다.

 태초에 그림자에서 태어난 두 신이 창조한 나라였다.

 때문에 영령국의 모든 것에는 그림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림자에서 태어난 신의 손으로 만들어낸 세상이니, 그 안에 그림자가 존재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미루는, 태어날 때부터 그림자를 지니고 있었다.

 나무에도, 꽃에도, 개에게도, 건축물에도, 그 어떤 것에도 그림자가 없는데 미루만 홀로.

 영령국 사람들에게는 ‘그림자’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그러니 미루는 요사스럽고 부정한 것을 달고 태어난 아이로 보일 수밖에.

 그렇기에 미루는 할머니와 단둘이, 다른 사람들과는 멀리 떨어진 작은 집에서 숨어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미루지만, 날이 흐려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캄캄한 밤이면, 할머니와 손을 잡고 집 주변을 산책하곤 했다.

 그런데 이렇게 딱 한 번, 할머니 몰래 외출을 했다가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미루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산 밑을 향해 달렸다.

 얼른 가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할머니 옆에 누워서 자고 싶었다.

 그러나 미루의 작은 바람은 너무나 허무하게 무너졌다.

 “헉!”

 미루는 집 담벼락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미끄러지듯 자리에 멈춰 섰다.

 방금 전에 공터에 서 있었던 바로 그 남자였다.

 “어, 어떻게…….”

 분명 내가 도망칠 때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는데.

 그러다 미루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그, 그림자!

 미루는 우왕좌왕 어디든 숨을 자리를 찾았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이미 남자는 휘영청 뜬 보름달 밑, 길게 늘어진 미루의 그림자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떡해, 어쩌면 좋아!’

 미루는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았다.

 “제, 제발, 제발 비밀로 해 주세요. 네? 뭐든 하겠습니다. 오늘 저를 봤다는 걸, 제 그림자를 봤다는 걸…….”

 그때 미루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온몸에 휘감듯 은빛의 머리칼을 늘어뜨리고 미루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저 남자.

 그의 발밑에도 그림자가 있었다.

 미루가 어안이 벙벙해 넋을 놓고 있는데, 남자가 성큼 미루를 향해 다가왔다.

 “뭐든 하겠다고?”

 붉은 입술이 열리며 매력적인 저음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

 

 미루가 무어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남자가 미루의 허리를 휘어잡았다.

 깜짝 놀란 미루의 눈이 동그랗게 뜨이자마자 몸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꺄악!”

 미루는 반사적으로 남자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자연스레 남자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게 되었다.

 살짝 벌어진 앞섶에 미루의 코가 먼저 와 닿고, 숨결이 뒤따라오자 남자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치켜 올라갔다.

 하지만 겁에 질린 미루가 그걸 알아챌 리 없었다.

 “아, 안 돼! 무서워요, 내려 주세요! 할머니, 흑흑, 할머니이…….”

 급기야 미루는 눈을 꼭 감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무영은 눈물이 번져 반들거리는 미루의 작은 두 뺨을 바라보았다.

 왠지 내키지 않았다.

 원래는 곧장 이 작은 여자아이를 데리고 자신의 성으로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할머니를 애타게 찾는 울음 섞인 소리를 듣자마자 그럴 마음이 사라졌다.

 어쨌거나 무영에게 필요한 사람인 것은 확실하나, 이렇게 억지로 데려가 버린다면 무영에게 좋을 일 하나 없었다.

 무영은 하늘에서 내려와 미루를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내일 다시 오겠다.”

 미루는 발이 땅을 디디는 느낌에 꾹 감았던 눈을 가늘게 떴다.

 언제 누가 있었냐는 듯, 미루의 앞에는 먼지 한 톨 날리지 않고 있었다.

 

 ***

 

 그로부터 한 달 후.

 무영을 처음 만났던 밤과 마찬가지로 머리 위에 환한 보름달이 걸려 있었다.

 미루는 그 날과 같이 뒷산의 꼭대기를 향하고 있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미루의 안색이 창백하고 발걸음이 다급하다는 거였다.

 미루는 지금, 도망을 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할머니가 했던 말이 귓가에 윙윙 울렸다.

 ‘미루야, 약속하거라. 무슨 일이 있어도 할미가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약속해. 지금 당장 너는 이 집을 버리고 나가야 한다. 너를 잡으려고 왕궁에서 사람들이 왔다.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안 돼. 서둘러서 뒷산 꼭대기로 올라가야 한다. 알겠느냐? 이 할미를 신경 써서는 안 된다. 무영 님이 오실 게다. 할미가, 전부 상세히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미루는 아랫입술을 꾹 다물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할머니는, 무영 님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도대체 언제부터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 미루가 고민을 할 틈도 없었다.

 “잡아라!”

 “저기, 위쪽이다!”

 어떻게 알았는지, 벌써 미루를 뒤쫓는 사람들이 가까이 와 있었다.

 “할머니, 할머니.”

 미루는 사색이 되어 할머니를 찾으며 무작정 위를 향했다.

 그러나 미루가 단련된 군병들의 걸음걸이를 이길 수는 없었다.

 미루가 뒤를 돌아볼 새도 없이, 거대한 자루가 미루의 머리 위를 와락 덮쳤다.

 

 ***

 

 미루가 눈을 가늘게 떴다.

 눅진하고 큼큼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미루가 뺨을 대고 쓰러져 있는 바닥도 축축하고 거칠었다.

 몸을 일으키자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조금 정신을 차리고 나자 주변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기가 어디지?’

 어두컴컴하고 좁은 공간에, 쇠창살이 높이 가로막고 있고 그 밖에는 사람 여럿이 곧게 서 있었다.

 ‘감옥이다!’

 미루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할머니가 언젠가 얘기해주었던 감옥과 똑같은 광경이었다.

 미루는 자리에서 비척비척 일어나 창살에 가까이 다가갔다.

 미루에게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사람 하나에게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저기요, 여기가 어디죠? 아니, 감옥인 건 알지만……. 제가 왜 여기 있는 겁니까?”

 “…….”

 그러나 딱딱한 자세로 서 있는 남자는 미루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아무 말이 없었다.

 미루는 창살에 좀 더 바짝 붙었다.

 “저희 할머니는요? 할머니는 어디로 간 거예요? 저는 아무 잘못도 한 적 없습니다. 옥에 갇힐만한 일은 저지른 적 없습니다.”

 “에잇, 시끄러워. 사특한 것.”

 그제야 날카로운 대답이 돌아왔다.

 미루는 그 적대적인 반응에 놀라 뒷걸음질 쳐 물러났다.

 그러고 보니, 미루 하나를 가둔 감옥 하나를 지키기에는 너무 많은 인원이었다.

 게다가 그들 모두는 왠지 불안해하기도 하고 무서워하기도 하는 듯 미루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미루는 감옥의 끝까지 물러나, 구석에 붙어 몸을 웅크렸다.

 할머니가 가르쳐준 바에 의하면, 감옥은 남을 속이거나, 무언가를 훔치거나, 혹은 누군가에게 해를 입혔을 때 가는 곳이라 했다.

 미루는 맹세코 그런 일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할머니는 그럼, 미루를 잡으러 왕궁에서 사람이 올 것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던 것일까.

 무영 님을 어떻게 알고 있었던 것일까.

 무영 님이 오실 거라고 했는데, 내가 여기 잡혀 왔으니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일까.

 풀리지 않는 의문투성이였다.

 미루는 목에 메는 것을 참기 위해 소매에 얼굴을 파묻었다.

 “어이, 고개를 들어 봐!”

 그 자세 그대로 울음을 참던 미루는 순간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철창살 바로 앞의 병졸 몇 명이 히죽거리는 얼굴로 미루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것이 정말 요물이 맞단 말이야? 영 어리고 부실해 보이는데?”

 “그럼, 네 눈에는 저것의 발밑에 늘어진 시커먼 덩어리가 보이지 않아? 그리고 어떤 요물이 제가 요물인 척 위세를 부리고 있겠어?”

 “그런가?”

 “우리끼리 이럴 게 아니라, 힘을 발휘하나 안 하나 보면 되잖아.”

 마지막 말을 내뱉은 병졸이 별안간 돌멩이를 주워들더니 미루를 향해 던졌다.

 “앗.”

 미루가 팔을 들어 막자 요란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봤어? 저 요물이 힘이 다 빠져버렸나 본데?”

 “이번엔 내가 해 볼게.”

 너도나도 앞다투어 돌멩이를 던지기 시작했다.

 미루가 자리에서 일어나 피해도 집요하게 돌 세례가 따라왔다.

 대부분은 미루에게까지 닿지 못했지만, 몇 개의 돌멩이는 미루의 몸을 때리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옛다!”

 누군가 흩뿌린 모래는 정확하게 미루의 머리에 맞았다.

 미루는 간신히 손으로 얼굴만을 가렸다.

 “크하핫.”

 미루가 도망 다니는 것을 구경하는 병졸들이 왁자하게 웃어젖혔다.

 그때, 위에서부터 무언가 울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뭐야, 무슨 일이야!”

 미루를 지키던 병졸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우왕좌왕했다.

 미루도 소스라치게 몸을 떨며 벽에 더 바짝 붙었다.

 갑자기 지진이라도 난 걸까?

 그렇다면 여기 이렇게 갇힌 나는 어디로 도망가지도 못하고 이대로 죽게 되겠구나.

 미루는 두 팔로 머리를 단단히 감싸고 고개를 푹 숙였다.

 할머니가 없는 세상에서 홀로 살아가느니 이대로 죽어도 좋았다.

 다만…….

 ‘오늘 달 아래서 무영 님을 볼 수 있었더라면…….’

 미루 자신도 왜 이런 생각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무영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 아쉬웠다.

 그러나 미루의 예상대로 감옥의 천장이 무너지는 일은 없었다.

 쿵, 쿵, 쿵.

 천장을 울리던 소리가 점차로 커졌다.

 감옥 안의 병졸들이 손에 쥔 창을 꼭 다잡으며 긴장된 얼굴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어딜 보는 거지?”

 싸늘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으악!”

 “뭐, 뭐야…….”

 키가 길쭉하게 큰 남자 하나가 기척도 없이 나타나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무영은 병졸들의 머리 너머로 철창살 안의 미루를 넘겨보았다.

 머리는 온통 흐트러지고, 신도 신지 못한 발은 상처투성이였다.

 거기다 머리에는 모래를 뒤집어쓴 데다가 주위에는 크고 작은 돌덩이가 떨어져 있었다.

 무영의 눈이 차게 식었다.

 맨 앞을 지키고 선 군병이 그를 향해 창을 겨누었다.

 무영의 한쪽 입꼬리가 삐딱하게 올라갔다.

 “나라면 그러지 않을 텐데.”

 “무, 무슨 소리냐. 누군지 밝혀라. 당장 신분과 이름을 밝히고 무릎을 꿇는다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무영의 눈동자가 한층 더 어둡게 가라앉았다.

 “가여운 영령국의 인간아. 명을 재촉하는구나.”

 “뭐? 모두 무기를 들어라! 속전속결로 이 침입자를 처리한다!”

 그때 그의 손에 들린 창이 빠져나갔다.

 삽시간에 빈손이 된 군병은 허공에 떠 자신을 향해 겨누어진 창을 멍한 눈길로 응시했다.

 무영의 냉랭한 눈에 조소가 맺혔다.

 “나라면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 말했을 텐데.”

 무영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창이 허공을 날아 군병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 모습에 다른 군병 하나가 고함을 질렀다.

 “다들 창을 들어라!”

 모든 병졸이 함성을 지르며 앞으로 돌격하는 차에, 겁에 질린 병졸 하나가 외치는 소리가 가련하게 울려 퍼졌다.

 “도망쳐, 살고 싶으면 그냥 도망치란 말야…….”

 미루는 눈을 크게 뜨고 쇠창살 밖을 주시했다.

 저 앞에서부터 병졸들이 종이 인형처럼 픽픽 쓰러지고 있었다.

 미루는 무언가에 홀린 듯 한 발짝, 한 발짝씩 창살 앞으로 다가갔다.

 빽빽이 늘어선 병졸들이 차례로 무너지고, 미루의 바로 앞을 가로막고 선 마지막 한 명밖에 남지 않았다.

 온몸을 벌벌 떨던 그가 갑자기 창살을 붙들더니 미루에게 소리를 질렀다.

 “너, 너 때문이다. 너처럼 불경스러운 것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하필 여기 있는 사람들이 모두 죽게 생겼단 말이다. 이건 전부…….”

 그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칼을 휘두르는 소리도, 사람을 때리는 마찰음도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눈 깜짝할 새 얼굴에서 핏기가 전부 가시더니 옆으로 맥없이 쓰러졌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그의 숨통을 막아버린 것 같았다.

 “감히 누구 앞에서 목소리를 높여 고성을 지르는 게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가 음산하게 돌벽을 울렸다.

 털썩, 소리를 마지막으로 감옥 안의 모든 소리가 멎었다.

 미루의 심장 소리만이 요란스레 쿵, 쿵 울리고 있었다.

 미루는 눈앞의 광경을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무영 님.”

 수십의 사람들이 쓰러진 틈에 홀로 서 있는 사람은 무영이었다.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미루는 그가 무영이라는 것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호롱불이 무영의 뒤에 걸려 있었기 때문에 얼굴에 그늘이 져 있었다.

 미루는 그 표정이 보이지 않는 얼굴을 보며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미루는 이제껏, 빛의 위치에 따라 그늘이 지는 얼굴은 제 것을 제외하고는 본 적이 없었다.

 “무영 님.”

 미루는 다시 한 번 무의미한 부름을 거듭했다.

 무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한 발짝 가까이 다가와 미루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흰 속눈썹 밑으로 회녹색의 구슬이 깜빡,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다.

 잠시 그렇게 미루의 얼굴을 살피던 무영이 몸을 돌림과 동시에 가볍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쩡, 소리와 함께 창살을 잠그고 매달려있던 자물쇠가 부서져 땅으로 떨어졌다.

 끼이이익.

 소름이 끼치는 쇳소리와 함께 문이 안으로 열렸다.

 깊은 정적이 흘렀다.

 침잠된 고요 속.

 무영의 시선이 미루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흔들림 없는 그 눈빛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 미루는 저도 모르게 앞으로 몇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감옥의 문턱 앞.

 미루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런 그녀를 향해 무영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가 속삭였다.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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