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군이 백이 있다고 치지, 그리고 내 편에는 삼십 명도 채 되지 않는 병사가 있고, 가지고 있는 무구나 방어구도 적군과 다르게 신통치 않아. 어찌 할 텐가?”
뜬금없이 나오는 황제의 질문에 자신을 시험하려는 의도는 바로 눈치 챘지만, 대답하는 것이 맞겠지 라며 질문의 부족한 부분을 짚었다.
“조금 더 자세히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 병력으로만 놓고 본다면, 지는 것이 확률이 더 할 테죠. 하지만 지형이나 지물이 어떠한지, 수성인지 평지인지에서도 바뀌는 수는 무척 많습니다.”
이번에는 상당히 많이 놀랐다.
보통 이렇게 물어보면 이깁니다나 집니다라고 나올 텐데 케리프는 오히려 반대로 더 자세히 하고 싶다며 물어왔고, 그렇게 하면서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의 변수가 있다 대답을 했다.
그리고 자신의 질문이 너무 뜬금이 없으며 제대로 된 문제는 아닌 것을 인정하고, 가만히 자신의 문제를 받을 준비를 하는 그의 자세와 확답이 아닌 수를 이야기하는 그에게 감탄을 하면서 문득 세이나가 케리프에 대해 한번 언급했었던 말이 떠올랐다.
‘진짜 천재는 제가 아니고 케리프씨죠. 특히 여러 가지를 놓고 계산하는 판단력을 따지면 제가 물어볼 정도일걸요?’
“허 허허. 하하하 그렇군. 내가 너무 말도 안 되는 문제를 내었군. 내 사과하지.”
더 물어봐 무엇 하겠는가, 물론 자신의 질문에 전부 대답은 하겠지만 왠지 시간낭비라 판단이 섰다.
이미 그가 말하는 방식에서 인재라는 느낌이 왔다.
에바의 문제는 아직도 조금 괘씸하지만 그가 개인적으로 탐이 나는 것도 사실이니, 이제는 자신이 못을 박아버려 나무판 째로 들고 가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자신이 사람 보는 눈은 있다고 믿기도 했었고, 세이나의 신용도 한몫하여 딸을 가져갔다는 질투에 인재를 보지 못하고 버리면 군주로서 실격이라 짐짓 고개를 주억이며 납득한다.
“그래. 우리 에바를 어찌 생각하나?”
케리프는 뜬금없는 질문에 진지하게 말을 이었는데 갑자기 또 다짜고짜 질문의 요지가 바뀌어버려서 무척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그에게서 나오는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없다.
에바는 그의 옆에서 케리프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던 황제의 분위기가 부드럽게 바뀌어 살짝 안도를 하다가 제 아버지가 갑자기 자신을 들먹이는 질문에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바동댔다.
“아 아바마마.”
하지만 한편으로 자신의 어리광을 다 받아주는 케리프가 실은 자신을 어찌 생각하는지도 궁금했던 지라 그에게 시선을 두다가 고개를 푹 숙이고, 다시 힐끔 눈동자만 굴려 그를 관찰한다.
케리프는 그렇지 않아도 내심 긴장하고 있었는데, 황제의 질문에 그제서야 그가 왜 이 곳에 와서 자신과 대면하고 있는지의 진짜 이유를 다시 한 번 상기했다.
정확한 것은 잘 모르겠지만, 에바황녀가 자신을 좋아해주는 감정과 연관이 되어 있음에 말을 잘 골라해야했다.
자신의 뒷배에 세이나가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무섭게 들이닥친 황제의 앞에서 말을 잘 못했다가는 목이 날아 갈수 있다는 확률은 무시하지 못하니, 제 목숨이 아까워서라도 뱉을 말에 신중을 기하자 다시금 다짐한다.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것도 있고, 포장하는 능력도 없지만 그렇다고 에바황녀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도 않고 상처를 주고 싶지도 않다.
말을 어떻게 고를까 고민하면서 귀여운 여동생 같다고 말을 했다가는 저 순수하고 감정에 솔직하게 자신을 봐주는 에바황녀가 상처를 받을 것 같고, 오늘 처음 본 하늘의 지존인 황제는 자신의 딸을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하는 인물임에 틀림이 없으니, 황제가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의 목을 칠지도 모르지 않는가, 아직 황제라는 인물이 어떤 분인지 이 잠깐으로 전부 파악할 수 없어 입을 떼기가 힘들었다.
어찌 말을 해야할지 고민이 되다 못해 이제는 앞이 캄캄해져 머리에 떠오르는 바이안과 세이나가 무척 보고 싶었다.
‘살려주십시오. 엘라이어님. 세이아나님.’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들은 하늘위에서 뒹굴고 있을 테고, 자신 스스로가 이 상황을 타파해야하는데.
생각과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케리프는 잔을 들어 차를 입에 머금으며 향을 깊게 들이마셨다.
“에바 황녀님은 분명 어여쁘시고, 무척 귀여우신 분이십니다. 곱슬거리는 긴 금발이 하늘에 떠 지상을 굽이 내려다보는 태양보다도 빛나시고 고우시죠.”
시적인 느낌의 말의 시작이 퍽 나쁘지는 않은지, 황제는 자신의 딸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기분이 좋아 보인다.
그것을 확인 한 뒤에 다시 조심히 말을 골랐다.
“하나를 생각하실 때는 그것에 집중하시며 열심히 이시기도 하시고,”
‘저를 노려보시면서 꾸준히 따라다니셨죠. 그땐 미움 받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다른 이들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수줍어 하시는 모습도 무척 순수하셨습니다.”
‘황녀님은 숨으신다고 숨으셨겠지만, 기둥 뒤에서도 풀숲에서도 다 보이셨습니다. 그땐 무서웠는데...’
“그러한 모습 뒤에 때론 결단력과 행동력을 보이시는 대담함도 가지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지금도 이해는 되지 않지만, 그때 제 볼 상당히 아팠습니다. 하루가 지나도 얼얼함이 남아있더군요.’
“그 외에도 더 있지만, 황녀님은 뵐 때마다 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시는 분이시라 생각합니다.”
거짓말은 없다. 속으로 생각하는 내용의 말을 잘 골라 그녀와 만났을 때 느꼈던 느낌을 솔직하게 대답했고, 다행히도 황제는 만족한 듯 보여 어찌어찌 무사히 넘어 갔구나 작게 안도했다.
황제는 그가 자신의 딸을 이성으로 보지는 않지만 호감만은 확실히 있다 판단했다.
좋은 게 좋은 거, 호감도 좋아하는 것이니 이번엔 그가 쐐기를 박을 차례였다.
케리프가 자신에 대해서 하나씩 말을 할 때마다 얼굴이 붉어졌다가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손으로 제 치마를 잡고 꼬물대는 에바를 한번 확인 한 뒤에 황제는 근엄하게 그의 말에 결론을 내었다.
“내 딸이 좋다는 거군.”
“네.”
황제의 툭 뱉는 말에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자신의 대답에 움칫 몸을 경직시켰다.
반사적으로 대답을 해버리고 굳은 케리프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황제는 제 무릎을 탁하고 쳤다.
“사내라면 책임을 져야지. 결혼하게.”
“...예?”
“아니, 약혼부터 겠군. 허허허”
황제는 올커니 낚였구나. 월척이로구나. 라면서 있는 힘껏 낚시 줄을 잡아당겼다.
평온했던 케리프가 어벙한 표정을 짓자 그것이 퍽 유쾌해졌다.
“내 딸이 그대가 좋아 저지른 실수 일지도 모르나, 그대와 사랑을 나누었다 그래 말을 했었지. 비록 자네는 몰랐을 지언정 위에서는 이미 자네와 딸의 결혼은 정해져있다네. 자네도 사내라면 한 여인의 마음을 가져갔으니, 책임을 져야 타당하지 않은가?”
케리프는 황제의 요상한 논리에 당황하면서 사랑을 나누었다는 표현에 얼굴이 붉게 타오르기 시작하더니 뻥하고 터질 정도로 난리가 났다.
“하 하오나, 소 소인은.”
“어허. 하늘의 법도이고, 황족의 법이니 무를 수 없다고 해도?”
“그...”
황제는 있지도 않은 법을 들먹이며, 케리프의 말을 뚝 잘랐고, 케리프는 입만 벙긋거리는 생선의 주둥이를 열심히 묘사중이다.
“설마, 지금 와서 내 딸이 부족하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
슬쩍 마력을 방출해 그에게 압박을 주며 노려봐 주니, 케리프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간다.
“아닙니다.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소 소인은 지상인 입니다. 가진 것 이라고는 없고, 특별한 것도 없사옵니다.”
“왜 없는가? 없으면 만들면 되는 것이네. 이미 천공의 땅에 자네가 가질 직책도 마련되어 있으니 몸만 오면 되네.”
“......”
직책이 없으면 만들면 된다.
황제의 머리에 이미 그에게 딱 맞는 직업이 팟 하고 떠올랐으니, 얼마나 좋은가. 오늘 그의 직업과 거취는 그렇게 정해져버렸다.
하얘졌다가 창백해지는 제 피부색을 느끼며 영혼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면서 포복자세로 기어 육체에서 떠나가려 할 때, 자신의 소매를 잡고 꼬물꼬물 만지작거리고 있는 에바의 인기척에 내려다 보다 그녀와 눈이 맞았다.
“에헤헤..”
“......”
자신이 생각해도 일중독인 사람처럼 늘 일에만 파묻혀 살기만 했지, 여성을 볼 시간도 여유도 없다 생각했었다.
일전에 황녀와 같이 내려왔던 기사들이 올라가기 전에 친해져 그들이 어깨를 도닥이며 조언을 해주었던 말도 석상도 이런 석상이 없다며 좀 즐겨보라 할 정도로 누가 보더라도 여성과 인연이 없는 그다.
자신과 눈이 맞자 다시금 고개를 푹 숙인 그녀의 귀가 빨개진 것이 눈에 잡힌다.
황제의 직설적인 말 덕분이었을까, 자신을 순수하게 좋아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황녀를 처음으로 다른 시선인 한명의 여인으로서 바라보자 저 모습이 귀엽다 못해 예뻐 보인다.
그 생각과 동시에 화끈하고 열이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덮자, 고개를 획하고 급히 옆으로 돌려 한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지만 가려지지 않았다.
혼자만 좋아하는 것이 구원을 받지 못하는 힘든 외사랑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던 에바는 그도 자신을 좋아하고 있었다는 말과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는 그 진실에, 지금은 바이안 오라버니처럼 하늘을 날 수 있을 것 같을 정도로 다 가진 기분을 만끽했다.
에바와 케리프를 번갈아 보던 황제는 둘이 서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에 만족했고, 자신이 씩씩거리며 케리프를 혼내주러 내려왔다는 것은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지워버렸다.
지상인들이 입는 평복을 받아 갈아입은 황제는 케리프의 안내로 도시를 둘러봤다.
당연하게 케리프의 한쪽 팔엔 에바가 대롱대롱 매달려 함께했다.
“도시라서 크기는 하지만, 분위기는 카카리아와 무척 닮았군.”
세이나가 살던 곳이라서, 한번쯤은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던지라 내려온 김에 둘러보기 위해 케리프에게 부탁을 했고, 찬찬히 둘러보면서 예전의 카카리아와 비교했다.
“오? 에바님 언제 내려오셨어요?”
그때 에바를 아는 듯한 중년인이 가까이 다가오며 반갑게 아는 척 말을 걸자 에바도 반갑게 손을 흔든다.
“오늘요.”
중년인은 케리프의 팔에 매달려있는 에바의 모습에 의미심장하게 웃더니, 짓궂게 입을 떼었다.
“오~ 드디어 낚으셨네요.”
“에헴! 열심히 못질하면 안 박힐 못은 없는 거죠.”
승리의 브이를 그리며 어깨를 쫙 피니 케리프의 얼굴이 다시 달아올랐다.
지금 에바와 중년인의 대화로 미루어 짐작해 본바, 자신 빼고 도시주민들은 에바가 자신에게 열심히 못질하고 있었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고, 이미 자신은 대륙에서 장가는 글러먹어 있었던 것이었다.
“아직 한 낮인데, 설마 일 땡땡이치고 오늘도 딱!?”
손가락을 오므려 잔을 잡는 모양을 잡더니 딱 소리를 내며 입으로 기울이는 행동에 중년인은 긍정하며 같은 행동으로 대답을 해주었다.
황제는 에바가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편하게 어울리는 모습에 언제 저런 것을 배웠는지 퍽 자연스러워 웃음이 나왔다.
“벌써부터 세이나가 그립습니다. 그녀석이 사람을 까는 것으로 안주삼아 즐겼었는데, 쩝. 잘 있답니까?”
“언니 살쪘어요. 여기로.”
에바는 양 손을 살짝 오므려 가슴께의 방향에 놓으니 상대는 시원하게 웃어댔다.
“저 저..”
황제는 에바의 저렴한 행동에 순간적으로 머리에 피가 몰렸지만, 에바를 발견한 사람들이 우루루 나타나 반갑게 인사를 건네기 시작해 그대로 묻혀 졌다.
“어머어머 잘 됐다. 마침 애들 주려고 만들었는데. 에바님 이거 좋아하신 댔죠?”
아낙이 바구니에서 과자 한 봉지를 꺼내 건네주자 에바는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냉큼 받았다.
“고맙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 대륙에만 있다며 바이안이 가져와 주었던 추억의 과자였고, 자신의 최애 과자를 냠하고 바로 물었다.
그러다가 케리프와 자신의 사이를 자랑하고 싶어진 에바는 베시시 고른 치열을 자랑하면서 과자를 하나 들고 케리프의 입가에 가져갔다.
“케리프님. 아~”
“?!!”
케리프는 당황스러움도 잠시, 도시 사람들이 흥미롭게 보고 있는 가운데 사랑스러움을 가득 담고 초롱거리는 눈으로 올려다보는 에바의 기대를 차마 거절 하지 못하고 귀 끝을 빨갛게 물들이며 입에 물었다.
그러자마자 오오하는 소리가 합창으로 들려왔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 단 한명만은 속이 텁텁했다.
‘네 뒤에 애비 있다. 아비에게는 한 번도 아 해주지 않았는데... 크흡~ 자식새끼 다 키워도 소용없다더니. 어흑~ 황후, 보고 싶소.’
“세상에! 세상에! 언제 그리 된 거예요?”
“오늘부터 1일이예요. 물론 결혼도 따 왔죠.”
사람들에게 눈도장을 콱 찍어가며 아주 쐐기를 박아대는 에바 덕분에 케리프는 축하의 물결에 쓸려갔다.
황제가 알면 울지도 모르지만 지금 에바는 뒤에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진짜로 잊어버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