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보았던 건 가느다랗게 떨리는 영주의 속눈썹이었다.
"........"
긴 시간이 걸릴 것 같았던 그 감촉은 생각보다 일찍 내게 도달했다.
처음이었지,
아마 처음이 맞을 거다.
영주가 내게 먼저 입을 맞댄 건.
손영주가 내 입술을 대는 것에서 끝내지 않은 건 아마 내가 그와 한 입맞춤 중에서
결코 잊지 못할 순간으로 손에 꼽힐 것이다.
영주가 입을 벌렸을 때 나는 망설일 틈도 없이 내 혀를 내어 그의 혀를 옭아맸다.
뜨거운 체온이 맞닿아 질척거리는 소리를 만들어 낸 건 꽤나 외설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쯤 몰아붙이면 떨어질만 한데 손영주는 내 양 어깨에 힘주어 올린 두 손으로 버티기라도 하듯
오기를 부렸다.
그 오기 참 마음에 든다.
나 또한 보란듯 그의 팔뚝을 부여잡고 고개를 틀었다.
아 영주야 넌 도대체.
나는 그를 언제부터 시작한 걸까.
매 순간을 되뇌어봐도 명확하게 나오지 않는 그 대답에 난 너를 곱씹는 날이 많아진다.
연민으로 시작했던 것 같다.
끈 떨어진 신세로 낯선 땅에 두 발 붙인 그의 처량함에 측은함이 들었다.
그 측은지심의 감정이 다른 쪽으로 크기를 키울 수 있다는 사실은 모른 체 나는 마음 놓고
그를 안쓰러워하고 또 안타까워했으며 아낌없이 챙겨주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웃음이 좋았다.
하얀 그 웃음이 번질 때면 네 주위도 맑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휘어지는 눈꼬리 예쁘게 올라가는 입꼬리, 또 웃는 얼굴 사이로 간간이 들려오는 그 흩어지는
웃음소리마저도 내 심장을 간질였다.
너를 측은히 여기는 그 마음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는데,
여전히 난 너를 보고 있었고 너를 생각하며 네 손을 잡고 있었다.
이젠 이렇게 손끝만 스쳐도 힘든데.
이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면,
"......!"
아니라면,
영주야.
난 답이 없는 감정을 끌어안고 너를 대해야 하는 걸까,
"...으븝-"
결국 영주가 내 어깨를 툭툭 거리고 치고 떨어져 나간 건 정말 죽기 일보 직전의
숨이 다했기 때문이다.
오래 버텼다.
"으하-"
정신이 아득한지 영주는 바깥공기를 들이마시기에 여념이 없었고
그러다 보니 어지러웠던지 눈을 감고 고개를 천장 쪽으로 뻗었다.
후-
심호흡을 해내는 그의 모습에 또 한 번 내 이성이 끊어진 건 그의
가느다랗고 흰 목선이 시야 가득 들어왔기 때문이라는 변명을 해보자면-
아, 그렇다는 거지.
결국 난 그의 목선에 내 입술을 옮겨 묻었고 깊숙이 그의 살결을 빨아들였다.
미각을 잃을 것 같은 그 감촉에 난 좀처럼 그를 놓아주지 못하고 있었고
영주는 속수무책으로 뻗은 고개를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살결이 빨갛게 부어오를 만큼 물고 있다가 떨어뜨린 내 입술에 영주가 그제야 깊은 숨을 내뱉는다.
흔적이 남은 그의 목 부근을 엄지손가락으로 꾸욱 눌렀더니 기침을 한다.
그와 이마를 맞대고 부딪친 콧잔등에 서로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거라면,"
"......."
"언제든지. 말 안 하고 해도 돼."
MT가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고작 이틀 떨어지는 그 시간이 아쉬워 나는 당장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영주에 대한 애틋함을 여과 없이 나누었다.
-
"밥 잘 먹고, 배고프면 시켜 먹고. 카탈로그는-"
"냉장고에 있는 거 벌써,"
여섯 번째 이야기하십니다.
영주의 말에 크흠- 소리를 내며 멋쩍은 얼굴을 하고 있다가 금세 또 눈에 들어온
가스레인지에 잔소리가 리셋되었다.
"뭐 끓여먹고 밸브 꼭 잠그고,"
"그건 일곱 번째입니다."
옷도 내 옷 편하게 막 가져다 입고 그래,
자꾸 다 늘어난 티셔츠를 입기에 그리 말하니 영주가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 갓난 아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조금 서툴러도 저 곧 성인이 됩니다."
"성인이 되어도 걱정될 것 같지 말입니다."
녀석의 말투를 따라 하며 두 팔을 크게 벌리자 그가 입술을 장난스럽게 꾹 다물며 내 품에 안긴다.
보고 싶을 거야,
잘 다녀오십시오,
잘 있어-
무슨 일 있으면 전화드릴게요,
무슨 일 없어도 전화 줘.
기다리겠습니다.
좋아해, 영주야.
그 마지막 고백에 결국 영주는 붉어진 얼굴을 하고 미소를 지었다.
내 말 한마디에도 수채화 물들듯 번지는 붉은 홍조가 마냥 사랑스러울 뿐이다.
마지막으로 손을 잡았다 놓아주며 집을 나섰다.
그리고 그게 우리 집에서의 손영주와 마지막이었다.
-
손영주
내 걱정을 한 아름 들고 간 은호에게 돌아오면 이만큼 잘 지내고 있었다는 걸 알려주려고
그가 없는 첫날 청소와 빨래 그리고 아저씨가 없는 틈을 타 거실에서 편히 소설책을 읽고
또 간간이 티비 시청도 하면서 그렇게 나름의 꽉 찬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도 혹여나 은호에게 오는 연락을 놓칠까 싶어서 수시로 핸드폰을 확인하는 걸 잊지 않았다.
금방도 수건을 개놓고 오니까 문자 한 통이 도착해 있었다.
[우리 바비큐 먹어. 영주 저녁 먹었어?]
[사진]
바로 이어서 보낸 바베큐 사진을 클릭해서 보았다.
우리 형님 맛있는 것도 드시네-
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다 배가 부른 것 같아서 흐뭇한 표정으로 답장을 했다.
[저는 이제 먹으려구요, 형님 많이 많이 드세요.]
대화창을 나가지 않고 있었는지 금방 읽음 표시가 떴고 나는 그가 곧장 답장을 보낼 것 같아서
거실 한복판에 움직이지 않고 서서 기다렸다.
'응? 서신을 더 안 하시려나.'
금방 도착할 줄 알았던 답장이 감감무소식이기에 핸드폰을 도로 협탁 위에 내려놓으려고 보니
손에서 진동이 울린다.
것도 문자용 짧은 진동이 아니라 긴- 진동.
전화가 왔을 때 울리는 그 길이로 말이다.
[은호 형님]
답 안 하고 전화하는 걸로 봐서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불안한 마음을 안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여보세요- 를 끝내 다 말하기도 전에 '지금 몇 신데 밥을 안 먹어-' 하는 나보다 더 걱정 어린
목소리가 핸드폰 밖으로 새어 나온다.
"형님 무슨 일 있으신 거 아니죠?"
[네가 이 시간까지 밥을 안 먹은 게 '무슨 일' 이지.]
에이,
농담하지 마십시오- 툭툭 거려도 이미 해실거리며 올라가는 내 입꼬리는
아마 그가 보지 못했을 것이다.
거실 한 쪽에 붙어 있는 시계를 보니 어느덧 저녁 아홉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그가 한 소리 할 만하다.
이것저것 하다 보니까 배가 고픈 줄도 모르고 있었나 보다.
[얼른 뭐 먹어.]
"알겠습니다. 형님도 바베큐 얼른 드십시오. 다른 동무들이 뺏어 먹겠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필요 없는 걱정이야, 내 친구들은 술에 관심이 많아. 고기보다.]
역시 신문에서 보던 한국 대학 문화에 술이 빠지면 안 된다는 얘기가 아주 없는 이야긴 아닌가 보다.
그로 인해서 사건 사고도 많이 일어난다고 했는데,
"형님은 조금만 드십시오."
[난 안 먹을 거야.]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경운 형에게 물어보겠습니다."
걘 안 왔어- 뭐 집에 일 있다고.
그러며 제법 농담도 건넬 줄 안다며 피식 웃던 은호가 얼른 전화 끊고 뭐라도 먹으란다.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가 용케 알아들었는지 '끊을게-' 하고 얼마 뒤
통화를 종료헀다.
아직도 핸드폰에서 은호의 목소리가 나올 것만 같아서 끊긴 핸드폰을 쥐고 한동안 거실 한 가운데에 서 있었던 것 같다.
목소리만 들어도 간질간질 거리는 게.
배가 고픈 것보다는 그냥 은호의 걱정을 덜어주고 싶어서 뭐라도 먹어야겠다 느꼈다.
곡기를 때우러 부엌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삑 삐비빅-'
도어락 버튼이 눌리는 소리에 멈칫했다.
뭐, 뭐지?
분명 아저씨는 출장에서 아직 돌아오려면 이틀이나 남았고 은호일리는 더더욱 없을 텐데.
문이 열리는 그 찰나의 순간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들어온 사람은,
"....아, 아저씨."
"마침 있었구나."
예상 밖으로 출장에서 일찍 돌아온 아저씨였다.
-
늘 감정적으로 내게 모질게 굴었던 아저씨가 웬일로 커피를 내러 거실 협탁 위에 올려놓고 앉았다.
물론 내 몫도 있었다.
그래서 나도 앉아야 했고.
은호가 커피를 마실 때 간혹 옆에서 한 모금 정도 뺏어다 마시긴 했어도
이렇게 내 몫으로 온전히 온 건 처음이라, 생각보다 달갑지 않은 그 맛에 인상을 쓰고 싶어졌다.
쓰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너를 처음부터 데리고 있을 생각은 없던 것,"
"........."
"잘 알고 있는 부분이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그냥 이 주제가 무겁고 불편할 뿐,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주다가 잠자리에 들겠다는 핑계로 방에 들어가야겠다.
"난 널 볼 때마다 내 아버지가 생각나서 그 죄책감이 견딜 수가 없구나."
"......제가 감히 헤아릴 수 없어요."
그건 인정했다.
내 평생을 살아내도 결코 잊어선 안 되는 그 일을,
다른 슬픔의 무게로 다가갔을 그 일을.
잊을 수도 헤아릴 수도 없었다.
아저씨가 내리 들고 있던 커피잔을 협탁 위에 내려놓았다.
당분간은 입에 댈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 보였다.
어떤 중요한 말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어렴풋이 짐작해보면 그랬다.
"그동안 은호 때문에 참았다. 그리고 지금 은호가 없을 때 이야기하는 걸 너무 원망하지 말아라."
"......."
"떠나 주겠니."
은호가 돌아오기 전에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은호 또한 보지 않을 생각이다. 나는.
아저씨의 눈빛은 간절했다.
-
생활할 수 있는 생활비와 보탬이 될만한 것들,
아침 사이에 다른 말없이 식탁에 그것들을 두고 간 걸 보고 나서야 실감이 났다.
내게 선택의 여지가 있긴 할까,
통장을 만지작거리다가 입술을 꼭 깨물었다.
'내가 곁에 있는 것이 당신에겐 끝없는 죄책감이었을까요,'
그리고 내가 숨을 쉬고 살아 있는 것이.
당신에게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의 괴로움이었을까요,
눈물이 떨어질 뻔한 걸 꾹 참고 그것들을 손에 쥐고 은호의 방으로 들어섰다.
-
[가을의 산이 얼마나 좋은지, 네 생각밖에 안 났어.]
꼭 보여주고 싶었어. 영주야.
하루의 끝에서 낯간지러운 목소리로 전화 통화를 하는 은호를 가만히 느꼈다.
목소리만 들어도 내가 좋아하는 그 얼굴이 떠올라서 말이다.
그냥 이러고 계속 형님의 말을, 그 다정한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저 형님,"
[응. 말해.]
침대 끄트머리 시트를 검지로 스윽 한 번 문지르고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리고 조금의 뜸을 들이다가 재차 '왜에-' 하고 물어오는 그에 마저 대답을 했다.
"내일 형님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마중 나가도 될까요?"
[내일? 내가 직접 집으로 가도 되는데,]
그냥요,
한시라도 빨리 뵙고 싶어서요-
또 답지 않은 나의 표현에 저쪽에선 크흠 하는 헛기침을 해댔다.
그래? 그럼 다섯시쯤 도착할 것 같은데-
하고 싫지 않은 티를 내는 형님에 웃음이 푸흐흐 나왔다.
[영주야 너 여기까지 오는 거 힘들면 내가 갈게. 금방 가.]
"아니요, 그냥 제가 보러 가고 싶어요."
잽싸게 말을 막는 나에 은호는 아주 다정한 목소리로 그럼 내일 학교에서 보자고 했다.
잘 자라는 전화가 이렇게도 아쉬울 줄 알았다면 조금 더 말을 건네볼걸,
핸드폰을 침대 맡에 두고 은호의 책상으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종이 한 장과 그가 좋아하는 볼펜을 꺼내 들었다.
"......"
[은호형님께,]
그 한마디를 쓰는 데만 한 시간이 걸렸다는걸,
그리고 도저히 참아지지 않는 눈물에 가슴이 이토록 저릴 줄은.
왜 헤어짐을 앞두고 깨닫는 감정은 더 깊게만 느껴질까,
조금 더 곰살맞게 굴 걸,
좋아한다는 말에 조금 더 웃어줄걸.
[...저 영주에요]
그렇게 밤이 다 넘어가도록 은호에게 마지막 편지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