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나감과 동시에 딱 좋은 타이밍으로 시종장이 들어왔다.
“데리고 왔습니다.”
세이나가 시종장에게 따로 명령을 내려서 시종장은 어떤 시녀를 데리고 들어왔다.
그 시녀는 세이나가 처음 몰래 들어왔을 때 옆에서 계속 함께 했던 시녀였다.
특히나 그 시녀는 들어오자마자 기사들의 보호아래에서 여유롭게 앉아 있는 낮이 익은 세이나의 얼굴을 알아보자마자 얼굴이 놀람에서 파랗게 질렸다.
누가 설명을 해주지 않아도 눈치로 알 수 있는 상황, 게다가 오늘 있었던 일들은 벌써 궁 안에 가득 퍼졌으며, 많은 말들이 오고갔기 때문에 자신의 눈앞에 있는 세이나의 현재 위치가 어떤 것인지도 쉽게 파악했다.
처음에 세이나가 갑자기 옷가지만 놓고 사라진 것에 드물지만 궁에 적응을 못하고 나가는 시녀들이 있기도 했었고, 처음으로 마음이 맞는 친구가 생겼다고 기뻐했었기 때문에 실망과 아쉬움이 가득 찼었지만 나가서도 잘되기를 마음으로 빌어주고 있었다.
그런 세이나가 그녀의 눈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기사들 때문만이 아닌, 세이나가 현궁의 실질적인 주인이라는 증거도 세이나의 이마에 대놓고 있으니, 자신이 불려온 이유가 현궁의 주인을 열심히 부려먹은 것에 대함이라 지례짐작하고 겁을 잔뜩 집어 먹고 있었다.
“내가 오늘 갑자기 사라져서 힘들었지?”
오래 알고 지낸 친구를 오랜만에 본 것처럼 세이나는 자리에 일어나 반갑게 다가와서 시녀의 두 손을 마주 잡고 위 아래로 붕붕 흔들었다.
“그...그게...저...”
자신을 경계하듯 보고 있는 기사들의 분위기도 분위기지만 세이나의 행동에도 몹시 당황스러웠다.
“내 이름은 이미 알지? 세이나라고 편하게 불러줘. 히데아 선.배.”
짓궂게 일부러 선배를 붙이자 히데아라 불린 시녀는 눈이 뱅글뱅글 돌아갔다.
“시종장.”
“예. 대현자님.”
히데아의 한쪽 손을 잡고 이번에는 앞뒤로 흔들며 세이나는 진지하게 시종장을 불렀다.
“히데아를 내 직속 시녀로 둘 테니 그리 알고, 그 뒤에 둘 아이들은 히데아에게 맡길 거야.”
“알겠습니다.”
“...네에에에에에?”
히데아에게 세이나의 말은 폭탄발언이었다.
직속 시녀, 게다가 인사를 자신에게 맡긴다는 것은 즉 시녀장이 된다는 뜻이었기 때문에 심하게 놀라 심장이 벌렁거리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자신은 제일 밑에서 단순한 일들을 하는 말단 시녀였을 뿐인데 갑자기 시녀장이라고 하니 몸도 마음도 따라가질 못 할 수밖에 없었다.
시종장에게 간단한 차를 내오라 지시해 내 보낸 후, 그녀를 힐끔 거리며 론이 슥 다가왔다.
“세이나님.”
론과 기사들이 신경 쓰는 부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세이나는 간단히 그녀를 소개해줬다.
“히데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 그러니까 내가 믿을 수 있다고 판단한 사람을 옆에 두는 거니까. 앞으로 자주 볼 테고, 얼굴 익혀둬. 아! 그리고 시녀라고 함부로 하지 말고. 겨우 몇일이었지만 내 선배였거든.”
론은 이거 또 재밌는데? 하는 표정으로 빙글거렸다.
“선배?”
“아하하, 실은 현궁에 잠입하려고 신입시녀인척 했어. 그때 신세졌었거든. 내가 옆에서 시녀들을 봤을 때, 히데아는 잡음도 없고, 입도 무겁고, 천사고, 그리고 무척 성실하더라고. 응.. 성실해.. 많이 성실해.. 누구보다 부지런해.... 부지런하지.... 그럼...”
히데아를 앞에 두고 무한 칭찬을 하다가 세이나의 얼굴에 살짝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히데아와 함께 끝이 없는 잡일을 하며 고생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세이나의 얼굴에 그림자가 지는 것에 론은 그녀가 온갖 잡일을 하면서 고생하는 모습을 상상했더니 키득거리며 웃음이 나왔다.
“큭큭 알만하네.”
옆에서 놀림거리를 하나 찾았다는 듯이 빙글거리는 론의 정강이를 발로 까주고 다시 빙글 돌아 히데아를 보았다.
“정신없고, 바빠지겠지만 잘 부탁할게. 히데아”
“네..네.... 세이나님.”
대현자라 부르려다가 세이나의 가늘어지는 눈에 서둘러 이름으로 정정하자 세이나의 눈이 예쁘게 휘어진다.
그리고 자신을 사랑스럽게 보는 세이나 덕분에 얼굴에 홍조를 띄고 고개를 더더욱 수그렸다.
그리고 몇 분 지나지 않아서 기사들은 세이나가 왜 히데아를 거리낌 없이 옆에 두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순식간에 평정심을 찾은 히데아는 주변을 눈으로 탐색을 마친 후에 혼자서 척척 필요한 여러 일들을 빠르고 자연스럽게 해내고 있었다.
아직은 당일이라 히데아 달랑 혼자였는데도 불구하고 방안에 가득 널려서 조잡해 보이는 비싼 장식품들을 보기 싫어하는 세이나의 속을 금방 알아채더니 대신해서 순식간에 치워버렸고, 세이나가 다른 사람들이 옆에 있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듯 느껴지자, 시녀들이 들고 온 차와 다과를 냉큼 받고 물린 다음에 척척 차를 우리고 다과를 먹기 좋게 접시에 담아 바쳤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는지, 어느 순간에 구급함을 챙겨들고, 다친 상처를 돌보지 않고 세이나를 보좌하고 있는 기사들의 상처까지 돌보기 시작했다.
히데아는 특히나 바닥에 대충 널브러져 있는 론의 상처가 제일 커서 그를 집중적으로 돌봤다.
론은 히데아가 들어왔을 순간부터 날카롭게 그녀를 관찰했고, 짧은 기간에 세이나의 신임을 한 몸에 받은 그녀인지라 자신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을 쉽게 허락해줬다.
자신을 꾸민다던지 하는 것이 없는지, 머리는 부석거리고 눈을 많이 가리는 듯한 앞머리에 외모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은 거리가 상당히 가까워, 앞머리 사이에 숨어있는 눈이 언뜻 보인다.
빤히 바라보는 론의 시선이 히데아와 맞물렸지만, 찰나에 대화도 없었고, 알 수 없는 감상만이 론의 입에서 샜다.
“....흐음..”
세이나가 현궁의 주인으로 자리 잡고 이틀, 그 사이에 현궁의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집안 분위기는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하지만 겨우 이틀 만에 눈에 보일 정도로 크게 바뀌어져 있었다.
일단은 궁의 여기저기에 쓸데도 없이 화려한 장식들을 히데아의 지시 하에 모두 빼서 재물창고에 다 때려 박았고, 궁에서 일을 하는 이들의 대대적인 인사이동과 함께, 부정한 이들을 과감히 잘라내었다.
주인인척 했었던 돌은년의 헤프고 어리석음이 여기에서 잘 나왔다.
그리고 제일 크게 바뀐 것은 잠을 자고 치장하는 방에 임시지만 책상이 들어왔으며, 주인이 서류의 산에 파묻혀 있는 것이다.
“세이나님. 좀 쉬시면서 하라니까요.”
끙끙거리고 있는 세이나를 나무라던 히데아는 갑자기 자신을 와락 껴안고 얼굴을 부비작 대는 그녀의 행동에 작게 웃었다.
“히데아아... 나 그냥 시녀 할까? 그냥 감자 깎을래에에~~”
세이나의 어리광이 싫지 않은지 히데아는 세이나의 등을 토닥여줬다.
“그러니까 쉬면서 하시라니까요. 아직 적응도 못하셨잖아요.”
“그치마안...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걸. 그 돌은년이 저지른 것만 처리해도 너무 많아아아. 설마 짧은 시간동안 저지른 것이 이정도 일줄 알았간? 그거만 아니면 안 힘들 텐데.”
히웅히웅하며 계속 어리광을 부리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시간이다.”
세이나의 말과 동시에 약을 들고 오는 시종에게서 약을 건네받고 그대로 아직도 잠들어 있는 바이안에게 다가갔다.
방에 책상이 들어온 이유도 바이안이 보이는 곳에서 모든 일을 할 것이라 명했기 때문이 컸다.
바이안의 병세가 중하기도 했고, 아무나 다룰 수 있는 문제도 아니라서, 약의 확인도 그녀가 직접 했다.
그리고 바이안에게 눈떴을 때 자신이 옆에 있을 것이라고 약속한 것도 컸으리라.
바이안이 누워있는 침대에 걸터앉자, 타이밍도 좋게 바이안의 손이 움찔 하더니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반.”
눈을 뜬 바이안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의 눈에 초점은 잡혀있지 않고 멍했다.
“반 오빠.”
바이안의 얼굴에 바짝 들이밀고 세이나는 엄지와 중지손가락의 마찰로 딱딱 소리를 내며 그를 다시 한 번 불렀다.
초점이 없던 눈동자는 천천히 자리를 잡았고, 약을 들고 자신에게 바싹 앉아 있는 세이나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누구게?”
장난스러운 그녀의 질문에 자연스럽게 호선이 그려졌다.
“세나”
목소리도 갈라지고 세는 듯한, 발음이었지만 또렷한 눈동자와 사람을 분간하는 모습에 약이 효과가 있구나 하며 옆에 대기하고 있는 하일들을 시켜 천천히 침대에 일으켜 앉혔다.
“아~~~”
일언반구도 없이 약그릇을 입에 들이밀자 퍽 자연스럽게 입을 연다.
뇸뇸거리며 쓴 약을 다 마시자 다시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줬다.
얼굴과 손 외에는 움직일 생각이 없는 자신의 몸을 확인하며 쓴 표정을 짓는 바이안에게 상태 확인 차 질문을 했다.
“있었던 일 기억나? 끊어진 기억은 있어?”
힘겨운 고갯짓으로 대답을 대신하던 바이안은 이불 밖으로 삐죽 나온 손을 꼼질 거렸다.
“응?”
“손...”
‘아, 이놈의 대형견..’
간절하게 보는 바이안의 모습에 귀와 꼬리가 또 나타났다.
“손...”
“손 잡아달라고?”
그리고는 손을 잡아주자 표정이 절로 펴진다.
“계속...”
“계속 잡아달라는 말씀인가요? 네이~”
약해져서인지 독이 아직 영향을 끼치고 있었던지, 9년 전의 세나와 함께 있는 착각이 지금의 자신과 혼동이 와서 감히 하지 못하는 어리광을 그녀에게 보였다.
애교 부리듯 하는 바이안이 귀엽다고 생각을 하며 세이나는 왼손을 잡아주고, 히데아를 흘끔 보자 눈치 챈 히데아는 책상에 있는 서류를 조금씩 침대 옆에 놓아주었다.
“켄경. 황제폐하와 황후마마께 반 깨어났다고 전해주겠어?”
“네. 다녀오겠습니다.”
세이나의 체온을 손으로 느끼며 혼동이 조금씩 사라져가면서 보이는 바이안의 시선 주변에 있는 기사들은 그도 잘 아는 이들이었다.
같은 팀이었던 자신의 동료들이었다.
현제 세이나의 메인을 보좌하는 기사들은 그들이 전반적으로 도맡아서 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주변을 이리 둘러봐도 저리 둘러봐도 손잡고 누워있는 자신을 향하는 시선이 짓궂었다.
“끄응..”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은 그들의 반응에 작게 신음을 터트림으로 불편함을 표현했지만 그런다고 동료들의 표정이 더하면 더했지 바뀌는 것은 아니다.
“이틀째 보고 있는데, 참 생소한 모습이네요.”
기사들과 다른 편한 복색을 갖춘 론이 침대 맡에 쪼그리고 앉아서 때는 이때다 하며 움직일 수 없는 바이안의 볼을 쿡쿡 찌르며 놀리면서 세이나에게 말을 걸었다.
“뭐가?”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세이나님이라니~ 세상에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우와~ 적응 안 돼.”
그렇게 말을 하면서 더 빠르게 바이안의 볼을 다다닥 찔러댔다.
“맞을 짓을 골라하는 것도 능력이다. 진짜. 나도 한다고 하면 제대로 하는 사람이거든?”
일하다가 말고 론과 투닥거리고 있을 때 밖에서 기사의 외침이 들린다.
“황제폐하와 황후마마께서 오셨습니다.”
“벌써?”
켄에게 둘을 불러달라고 지시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전령이 황궁에 도착 하고나서 이곳까지 서둘러 도착을 하여도 30분은 지나야 할 것이 자명함에도 10분도 채 안 되서 도착한 모습에 날아 왔구나하고 추측했다.
황제와 황후가 방안으로 들어오자 기사들과 히데아는 알아서 물러갔고, 방안에는 바이안과 세이나, 론 그리고 황제와 황후만이 남았다.
황제는 마력이 없는 황후를 소중히 품에 안아들고 호위 기사들이 따라나서기도 전에 마력을 풀로 개방해서 달려왔다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 짐짓 위엄가득 서있었지만, 옷가지와 머리가 바람에 날려 엉망이다.
“아가~”
황후는 누워서 눈을 뜨고 바라보고 있는 바이안을 보자마자 후다닥 달려오다가 멈칫했다.
자리에 일어나 서서 자신을 보고 있는 세이나를 발견한 황후는 바이안이 무사함에 안도하고 치마를 정리하고 자세를 정리했다.
“어머나 세상에. 미안해요. 내가 체통도 없이...”
그렇게 말을 하며 어색하게 서있는 세이나와 침대에 누워있는 바이안을 흘끔흘끔 번갈아 보고 있다.
“황후마마. 옛날처럼 대해주세요. 저는 그게 편해요.”
세이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황후는 눈물을 왈칵 쏟으며 쑥스럽게 서있는 세이나를 그대로 와락 껴안았다.
“아가~ 아가~ 어디에 있었니. 얼마나 힘들었어. 내가 그때 얼마나 억장이 무너졌었는지 아니?”
황후의 품에서 잊고 있었던 엄마의 냄새에 취했다.
그래서인지 자신도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조심히 안았다.
“죄송해요. 황후마마”
황후는 세이나가 부르는 자신의 호칭에 어깨를 잡고 그녀를 살짝 밀어내며 엄하게 말했다.
“황후마마라니! 나도 옛날처럼 불러줘야지.”
“아..음...이..이모?”
그제서야 만족스러운 미소가 나왔다.
“아니다 아니야. 이제 이모도 싫구나. 엄마지 엄마.”
황후의 단호한 말에 세이나는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세이나는 황급히 화제를 바꿨다.
“계속 서계시지 마시고 자리에 앉으세요.”
하지만 황후는 허리에 손을 얹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이모...으..어..엄마. 폐하.”
그제야 만족했다며 황후는 소파에 편하게 앉았지만 옆에 함께 있던 황제는 우울해졌다.
“나만... 폐하인가...”
자신도 아빠라고 불러주겠지 하며 내심 기대했던 황제는 그 기대가 확 사라지자 서운함이 가득 밀려왔다.
그런데 황제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이 한명 더 있었다.
“손... 손이... 계속 잡아 주...”
움직이지도 못하는 바이안은 침대와 떨어져있는 소파에 앉은 세이나를 그렁거리는 눈으로 간절히 볼 수밖에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바이안은 셋에게 완전히 잊혀지는 안타까움을 겪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