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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무협물
풍운협(風雲俠)
작가 : 오월성
작품등록일 : 2016.3.30

결국 선택의 문제였다. 우리의 목적은 같았다.
녀석은 선(善)을 선택했고, 나는 악(惡)을 선택했다.

 
회색의 남자
작성일 : 16-03-30 12:01     조회 : 671     추천 : 1     분량 : 5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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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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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동풍이 물비린내를 몰고서 협곡 안쪽으로 불어 왔다. 멀지 않은 곳에 물가가 있다는 의미였다. 협곡에 들어선 바람이 칼날처럼 치솟은 절벽에 부딪쳐 울었다. 그때마다 물비린내가 허공에서 뒤엉키며 진해졌고, 물가에서 불어온 바람을 헤치며 협곡을 질러가는 남자의 걸음도 빨라졌다.

 

 남자는 전신이 잿빛 일색(一色)이었다. 물비린내를 쫓아가면서 그는 거대한 먹빛 강을 떠올렸다. 흑수(黑水)를 향해 부채꼴로 치달리는 지형도 기억해 냈다. 흑수는 야수(野獸)들의 땅이라 불리는 이곳 외역(嵬域)과 중원(中原)의 끝자락을 연결하는 물길 가운데 하나였다. 과거 그는 흑수의 물길을 따라 외역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제 그 물길을 거슬러 중원으로 돌아가려는 중이었다.

 

 그동안 강산이 한 번 변했다. 남자도 변했다. 얼굴선이 마치 여인의 그것처럼 갸름하고 유려하던 열다섯 살 소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잔인하고 야만스러운 외역에서의 십여 년, 그는 거칠고 강인한 사내로 변했다.

 

 남자는 그에게 수라(修羅)가 되는 방법을 가르쳐준 노인에게서 물려받은 검은색 단창을 등에 메고 있었다. 자루의 길이는 칠 척(尺) 사 촌(寸)으로 군문에서 사용하는 일반적인 단창보다 짧았다. 그의 신장보다는 일 척 남짓 길었다. 창날은 달려 있지 않았다. 창날은 자루와 분리되어 그의 오른쪽 허벅지에 단단히 고정된 가죽 칼집에 꽂혀 있었다. 왼쪽 허리춤에는 초승달 형태의 도(刀)를 찼다. 도는 칼날과 손잡이가 일체였고, 특이하게도 손잡이에 구멍이 나 있었다.

 

 남자는 빠른 속도로 걸었다. 하지만 그의 움직임에는 소리가 없었다. 그는 빠르고 조용하게 걸었다.

 

 허공중에 물기가 느껴지기 시작할 무렵, 오른쪽으로 급격하게 휘돌아가는 길목이 나타났다. 거의 직각으로 꺾여 있어서 언뜻 막다른 길 같았다.

 

 그러나 저 길목을 지나면 협곡은 점차로 넓어지기 시작할 것이며, 그 길을 따라 조금만 더 가면 시야가 갑자기 트이면서 이편에서 저편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강이 펼쳐질 것임을 남자는 기억해낼 수 있었다.

 

 남자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대체로 일직선에 가까운 협로(峽路)가 눈에 들어왔다. 협로 저 너머에서 죽는 순간까지 사승(師承)의 예를 거부했던 노인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영면하시길, 나의 두 번째 스승이여.’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남자에게 노인이 손을 흔들어주는 듯싶었다. 그리고 그 환영 같은 모습을 산산이 부서뜨리며 나타나는 그림자들. 남자의 회색 눈동자가 수축했다.

 

 두두두―!

 

 절벽을 평지처럼 달리며 맹렬한 속도로 짓쳐오는 그림자들은 다름 아닌 외역의 야수들이었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나 포악하고 잔인한 야수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 남자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지나쳐온 천릿길을 온통 피로 물들이게 만든 자들이기도 했다.

 

  야수들은 수면을 후려치는 강풍에 치솟은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들이 질러대는 괴성은 먹구름이 토해내는 우레 소리처럼 협곡을 떨쳐 울렸다.

 

 남자는 오른손을 어깨 뒤로 넘겨 단창을 잡았다. 야수들과의 싸움은 외역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차피 넘어야 할 관문이었다. 그리고 흑수가 멀지 않았으니 이번이 외역을 벗어나기 위해 치르는 마지막 전투일 것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죽을 수는 없지. 그는 무섭게 집중했다.

 

 선두를 달리던 제1열의 야수들이 남자의 머리 위 절벽이 도착했다. 야수들은 한순간 방향을 틀더니 절벽을 박차며 바닥과 수직으로 쏘아져 왔다. 저마다 흰 코끼리의 엄니로 만든 검을 든 채였다. 칼날에 피를 먹인 검 수십 개가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는 모습은 마치 피비가 내리는 듯했다.

 

 남자는 기다렸다. 그러다 야수들이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단창을 휘둘렀다. 우우웅, 단창이 파공음을 내며 빗살처럼 허공을 갈랐다. 그와 동시에 그의 내부에서 폭발한 벽력(霹靂)의 힘이 단창을 매개로 발출되었다. 검고 희고 붉고 푸른 벼락이 얽혀들며 난맥상으로 솟구쳐 나갔다.

 

 쿵, 쿵쿵, 쿵쿵쿵!

 

 공중에서 절명한 제1열의 야수들이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순간 선두를 뒤따라 짓쳐오던 제2열의 야수들이 절벽에 몸을 고정시키고 짐승의 뼈로 만든 암기와 맹독을 바른 화살을 무더기로 뿌렸다.

 

 남자는 단창을 바람개비처럼 회전시켜 암기와 화살 공세를 걷어냈다. 그러는 사이 그의 머리 위 절벽을 지나쳐 나아간 제3열과 제4열의 야수들이 후방을 점했다. 그들이 내뿜는 살기가 등골을 파고들었다. 그는 즉시 반원을 그리며 돌아서는 동시에 오른쪽 허벅지의 가죽 칼집에서 창날을 빼내어 단창 자루와 연결시켰다.

 

 철컥, 쇠가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창날은 은빛으로 번쩍거렸다.

 

 단창을 늘어뜨린 채 남자는 두 다리를 엇갈려 나아갔다.

 

 파파팟!

 

 절벽에 매달린 야수들이 쏘아대는 암기와 화살이 그가 나아가는 궤적을 따라 박혔다. 후방을 점했던 야수들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남자는 단창을 짧게 잡고 휘둘렀다. 단창을 우측 하단으로부터 좌측 상단으로 그어 올리는 한 동작에 그에게 달려들던 야수들의 팔다리가 맥없이 잘려 나갔다. 핏물이 허공을 어지럽히는 가운데 그는 단창 자루를 길게 잡고 거두어들였다. 고무줄처럼 늘어난 단창 끝에서 창날은 뒤이어 달려든 야수들의 가슴과 복부와 허리를 갈랐다. 그리고 짓쳐나가 야수들에 섞였다. 일대다(一對多)의 난전(亂戰)이 시작되었다.

 

 웅웅웅!

 

 단창은 묵직한 파공음을 발하며 야수들 사이에서 종횡무진 했다. 은색 섬광이 번뜩일 때마다 야수들은 어김없이 쓰러졌다. 이윽고 남자의 단창 공격은 하나의 세(勢)를 이루어 휘몰아쳤고, 공세에 휘말린 야수들은 난장으로 얽히고설켜 피분수를 뿜으며 허물어졌다.

 

 야수들의 수는 터무니없었다. 무수히 베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야수들이 절벽을 타넘어 후방에 진을 쳤고, 공방의 간극이 생길 때마다 암기와 화살이 그를 노리며 쏟아졌다.

 

 “크아아!”

 

 야수 하나가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넘어 달려들었다. 남자는 야수의 가슴을 단창으로 찍었다. 끄윽 하며 숨 막히는 소리가 들렸다. 창날을 돌려 빼내려는데 창날이 빠지지 않았다. 가슴을 관통당한 야수가 단창 자루를 붙잡은 것이었다. 그 틈을 타 접근한 다른 야수들이 좌우에서 검을 찔러 넣었다.

 

 남자는 단창을 짧고 강하게 끊어 쳤다. 그러자 등 뒤로 창날이 완전히 삐어져 나왔다. 야수의 눈에서 생기가 꺼졌다. 그는 단창 자루를 놓고 왼쪽으로 비스듬히 내딛으며 야수의 등 뒤로 돌아갔다. 이어 자루에서 창날을 분리, 역수(逆手)로 잡고 재차 덤벼드는 야수들을 난도질했다.

 

 무너져 내리는 야수들의 뒤편으로 또 다른 야수들이 장벽처럼 늘어선 채 전진해 오는 모습이 보였다. 야수들은 전방에서도 몰려오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밀물처럼 밀려드는 그들의 기세는 무시무시했다. 잠시 후 협곡 가득 야수들이 들어찼다.

 

 “…….”

 

 점점 옥죄어 오는 야수들을 잿빛 눈동자로 무심히 쳐다보며, 남자는 문득 하나 남은 동생과 헤어져야만 했던 십여 년 전 그날을 떠올렸다. 그날도 지금처럼 사방이 적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는 둘이었지만 지금은 혼자라는 것뿐.

 

 당시 동생은 겁에 질려 있었다. 동생을 안심시키기 위해 억지로라도 웃어야 했다. 형이 미소 짓자 동생도 미소 지었다. 동생이 미소 짓자 형도 미소 지었다. 첫 번째는 억지였다. 두 번째는 진짜였다. 돌이켜 보건대, 형으로서 무언가를 해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때처럼 웃어 보려는데 미소가 지어지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 전방에 장벽을 치고 있던 야수들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그 사이로 거대한 수사자가 걸어 나왔다. 수사자의 등에는 묘령의 소녀가 앉아 있었다. 얼마 전까지 외역을 지배했던 야수왕(野獸王)의 딸이었다.

 

 남자에게 야수왕은 세 번째 스승이자 원수였다. 두 번째 스승인 무명노인이 야수왕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이유는 남자였다. 야수왕은 남자의 자질과 잠재력을 탐냈다. 그래서 노인을 죽인 뒤 남자에게 강제로 야수의 무예를 가르쳤다. 그리고 얼마 전 남자의 손에 죽었다.

 

 야수왕은 죽어가면서 남자를 후계자로 정했다. 남자가 거부하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한 유언이었다. 예상대로 남자는 왕의 자리를 거부했고, 그로 인해 왕좌를 노리는 야수들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결국 여기까지 왔네?”

 

 회색의 남자를 바라보는 소녀의 눈빛은 뜨거웠다. 소녀의 까무잡잡한 얼굴은 티가 날 정도로 붉게 달아올랐고, 뱉어내는 숨결은 끈적끈적했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와 그녀의 눈빛이 얽혀들었다. 잠시 후 소녀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겠지. 그렇지, 표범머리?”

 

 소녀가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박제한 표범의 머리를 눌러 쓴 거한이 앞으로 나섰다. 땅을 푹푹 찍는 걸음걸이며 이를 바득바득 가는 태도에는 분노가 여실했다. 잉걸불 같은 눈빛으로 한동안 남자를 노려보던 표범머리는 이내 소녀에게 말했다.

 

 “놈을 죽여 그 피와 살을 먹겠다. 그리고 새로운 왕이 되어 그대를 가지겠다.”

 “호호호, 그 전에…….”

 

 소녀가 다시 남자를 바라보았다.

 

 “왜 나가려는 거지? 중원을 무너뜨리려고?”

 “이미 십 년 전에 무너진 세상이다.”

 “그럼 왜?”

 “그런 세상이 오래 가도록 두지 말자고 약속했다.”

 “누구한테?”

 

 남자는 대답 없이 돌아서서 이미 싸늘한 시체로 변해 버린 야수의 가슴에 박혀 있던 단창 자루를 뽑아 들었다. 남자의 커다란 등을 노려보는 소녀의 얼굴에 질투의 감정이 어렸다. 다시 돌아서는 남자에게 소녀가 말했다.

 

 “난 네 여자야. 네가 내 아비를 죽였을 때 그렇게 정해졌어. 가장 강한 야수만이 나를 가질 수 있으니까.”

 

 그 말이 표범머리를 자극했다. 표범머리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 강렬한 기운을 발산하며 남자에게 말했다.

 

 “야수는 야수들의 땅에서 살아야 한다. 이는 외역의 율법이자 중원과의 맹약이다. 고로 너의 육신은 물론 영혼마저도 외역을 벗어날 수 없을 터…….”

 

 표범머리는 말을 하다 말고 인상을 구겼다. 남자가 무심한 얼굴로 창날을 단창 자루에 연결하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그것의 의미는 명백했다.

 

 “네가 아무리 강하다한들 여기 있는 야수들 전부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나?”

 

 철컥, 하고 창날이 맞물렸다. 이어서 남자는 창날을 아래로 향하게 했다. 그 다음 왼쪽 허리춤에서 반월형 도를 풀어 단창 자루와 가로로 결합시켰다. 도 손잡이에 난 구멍이 단창 자루와 정확하게 맞물리면서 다시 한 번 철컥 하고 쇳소리가 울렸다.

 

 그렇게 거대한 낫[鎌]은 완성되었다.

 

 남자가 잿빛 눈동자를 들며 말했다.

 

 “전부 죽여서라도 길을 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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