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우는 결국 다리에 힘이 풀려 허물어지듯이 쓰러졌다.
“이런 망할!”
저 글귀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제 막 시작하는 자에게 전하는 말이었다.
다시 말해, 이곳은 고작 ‘시작점’일 뿐인 것. 방금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긴 신우에게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진정한 이승에서 겪을 인생은……. 당신이 이미 겪은 삶보다 모든 면에서 더 가혹하고 잔인합니다. 경쟁에서 도태되면 그저 가난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노예가 되거나 죽는 거죠. 게다가 사악한 존재들도 가득하답니다. 희망은 느끼지도 못할 만큼요. 아마 당신이 상상해온 지옥과 꽤 닮은 모습일 겁니다.”
헤르메스의 말이었다.
이때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신우는 확실히 깨닫는다.
왜 예전 삶을 고작 튜토리얼이라고 했는지.
악마가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당연한 세상.
괴물이 인간을 사냥하는 것이 마땅한 세상.
먹이사슬이 뒤집히고 약육강식이 완벽하게 자리 잡은 세상.
모든 인류가 어둠 속에서 쥐처럼 살아야 하는 세상.
이곳이 우리가 살아야 할 진짜 세상이었다…….
* * *
‘이제 시작이라니…….’
암담함이 몰려왔다.
앞으로 어떤 잔혹한 세상이 펼쳐질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신우는 심호흡하며, 암담함을 떨치려고 애썼다.
문득, 사내 버스에서 죽을 때 느꼈던 감정들이 떠올랐다.
극도의 허무함과 억울함.
사고로 죽는 인간 중에 억울하지 않은 자가 누가 있을까?
신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채업자에게 폭행을 당할 때도, 공장에서 괴롭힘을 당할 때도, 가난에 찌들어 집주인에게 시달리거나 쫓겨날 때도 신우는 오직 ‘겜블’만 생각했다. 그가 꿈꿀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으니까. 중학교도 졸업 못 한 데다 ‘살인마의 종자’라는 편견까지 달라붙어 있던
신우에게는 반전을 꾀할 다른 방법이 없었다. 마카오에 가서 겜블에 성공하면 인생을 반전시킬 수 있다는 희망이 그의 삶을 지탱해준 유일한 기둥이었다. 아마 겜블조차 없었으면 도저히 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겜블을 시도도 못 해 보고 죽었다.
‘그래. 어쨌든 두 번째 기회를 얻은 거잖아…….’
신우는 최대한 긍정적인 측면만 생각하며 자신을 다독였다.
‘일단 확인부터 해보자.’
있는 힘껏 주먹을 땅에 찧어보았다.
주먹 따위 박살 나도 상관없다는 기세로.
콰앙!
“역시!”
왼 주먹은 멀쩡했고, 땅만 주먹 크기만큼 움푹 들어갔다.
“이건 도대체?”
그제야 왼손에 은은한 빛이 나는 것을 발견했다.
아주 옅어서 자세히 봐야 겨우 보였지만, 분명 푸르스름한 빛이 났다.
‘아! 오라! 그게 이거구나.’
오라 – 왼손(미약)
헤르메스를 만났을 때 보았던 글귀.
신우는 잠깐 그때를 떠올리다 다시 왼손을 살폈다. 어느새 빛이 사라지고 없었다.
‘항상 발휘되는 건 아닌가? 어디 한 번!’
신우는 당장이라도 돌벽을 부술 것처럼 주먹을 쥐며 집중했다.
그러자 다시 빛이 났다.
‘좋아. 원리는 파악했어. 그런데 왜 하필 왼손이지. 난 오른손잡이인데. 어? 그러고 보니…….’
왼손에 있던 방사선 피폭 흔적이 사라지고 없었다.
“붉은 얼룩이 사라졌잖아!”
그동안 사채업자나, 공장 직원들에게 맞아 생긴 흉터들도 보이지 않았다.
‘흠……. 건강한 상태로 다시 태어난 건가? 뭐 나쁠 건 없지. 좋아. 이건 일단 됐고.’
다음은 ‘특수능력’이란 단어가 생각났다.
‘헤르메스는 분명 특수능력이 진짜 중요한 거라고 했는데?’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그의 망막에 직접 새겨지듯이 글귀가 나타났다.
[특수능력]
1. 겜블 – 특정 조건을 달성하면 활성화됩니다.
2. 배신의 씨앗 – 특정 조건을 달성하면 활성화됩니다.
3. 살인마의 핏줄 – 특정 조건을 달성하면 활성화됩니다.
4. 폐기물 처리 능력 – 특정 조건을 달성하면 활성화됩니다.
5. 방사선 활용 능력 – 특정 조건을 달성하면 활성화됩니다.
‘특정 조건이라…….’
신우는 글귀를 꼼꼼히 살폈다.
각 특수능력 옆에는 공격력, 방어력, 효율성, 희소성 등 다양한 수치도 같이 표시되었는데, 겜블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모든 수치가 MAX에 가까웠다.
신우는 헤르메스가 ‘겜블’을 보고 특히 더 호들갑 떨었던 것을 기억했다. 더 자세히 알고 싶다고 생각하자, 곧바로 세부 내용이 표시되었다.
[특수능력 – 겜블 LV1]
하위 스킬
1. 모 아니면 도 [패시브 스킬] – 스킬을 하나 이상 얻으면 활성화됩니다.
‘스킬?’
신우는 한숨을 쉬었다. 지금은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신우도 어렸을 때 친구 집에 놀러 가서 게임을 여러 번 해보았기에 이 글귀의 뜻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는 있었으나, 정작 ‘스킬’을 어떻게 얻고 써야 하는지는 감이 오지 않았다.
‘희망이 없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다시 출구에 적힌 글을 보았다.
이번에는 ‘겜블’이 진짜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시작부터 이 모양이니, 이 세상도 ‘희망’이란 것이 꼭 필요해 보이긴 했다. 어찌 됐든 이번만큼은 허무하게 죽기 싫었다.
‘악착같이 살아주지!’
신우는 길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걸음을 옮겼다.
* * *
“제기랄……. 더럽게 징그럽네!”
신우는 벌레 형태를 띤 괴물들과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사람 얼굴은 우습게 뒤덮을 만한 크기였으며, 생김새는 바퀴벌레 비슷한 것, 무당벌레 비슷한 것, 쥐며느리 비슷한 것 등 다양했다.
하나하나는 약했지만, 갑자기 땅에서 튀어나와 공격하는 기습은 매우 위협적이었다.
“크윽!”
달려드는 바퀴벌레 하나를 터트리는 사이, 쥐며느리가 왼쪽 다리에 붙었다.
동시에 무당벌레 두 마리가 얼굴로 달려들었다.
‘제길!’
급히 왼 주먹을 날렸다.
오른손은 나머지 한 마리를 막기 위해 뻗었다. 왼 주먹에 맞은 무당벌레 한 마리는 그대로 터지며 조각났지만, 오른손으로 막은 무당벌레는 거칠게 저항했다.
‘벌레 새끼 힘이 뭐 이리 강해!’
으드득.
오라가 없는 오른손이 순식간에 망가지기 시작했다. 손톱이 뽑히고 손가락이 부서졌다. 왼쪽 다리에서도 찢어지는 통증이 몰려 왔다.
“이 새끼들이!”
재빨리 다리에 붙은 쥐며느리를 왼손으로 잡아떼 무당벌레 쪽으로 던졌다.
두 마리가 서로 부딪치는 순간, 왼 주먹을 휘둘러 휩쓸었다.
퍼버벅!
두 마리가 사이좋게 같이 폭사했다!
‘빌어먹을! 이 세상은 안전장치 같은 게 전혀 없는 건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벌써 다섯 번의 전투를 치른 신우였다.
‘고작 100m 거리였는데…….’
신우는 짜증 섞인 얼굴로 옆을 바라봤다.
“오, 또 이기셨네요?”
“비리비리한 게 금방 죽을 줄 알았더니, 의외네.”
“흥! 그래 봤자 곧 죽을걸?”
“어머, 그런 말 하면 못써!”
네 명의 요정.
그들은 반투명한 날개를 펄럭이며, 신우 옆에 펼쳐진 드넓은 강 위에 떠 있었다.
갓난아이와 비슷한 크기의 몸체를 지닌 그들은 자신들을 ‘요정’이라고 소개한 후, 계속 재잘재잘 떠들며, 신우가 벌레 괴물들과 싸우는 것을 지켜봤다.
그것도 아주 즐겁게, 재미있는 영화라도 보듯이…….
‘악취미로군.’
두 요정은 귀여운 소년, 두 요정은 예쁘장한 소녀 모습이었다.
모두 알록달록한 옷을 입었고, 신우 왼손처럼 온몸에서 은은한 빛을 내뿜었다. 덕분에 눈에 잘 띄었다. 그래서 첫 목적지로 택한 것이다. 오는 도중 벌레 괴물들의 습격을 받았으나, 긴장한 채 움직인 덕분에 잘 막아냈다.
그런데 강 근처 진흙땅에 도착했을 때는 다 왔다는 생각 때문에 방심해버린 것. 기습을 당해 오른손과 왼쪽 다리에 상처를 입고 말았다.
신우는 상처를 돌보다가 개미굴에서 다쳤던 오른팔과 등을 살폈다.
이미 어느 정도 아문 상태였다.
‘거짓말은 아니었군.’
요정들은 신우가 벌레 괴물의 습격에 허우적댈 때, 이것저것을 알려줬다, 기보다는 자기들끼리 떠들었다. 이 세상은 인간들이 살던 세상보다, 상처가 빨리 낫는다고. 그러니 안심하고 마음껏 싸우라고.
‘그나마 다행인가.’
이런 세상에서 아물지 않은 상처를 주렁주렁 달고 다니다간 하루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 * *
개미굴에서 빠져나온 신우가 처음 본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광야였다.
족히 수백 킬로가 넘어 보이는 드넓은 광야. 시야를 막는 것이 거의 없었다. 어딜 가나 아파트만 더럽게 많고 다닥다닥 붙은 온갖 구조물이 시야를 방해하는 한국, 그것도 좁아터진 작은 동네에서만 평생을 살다가 죽은, 신우는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부서진 석벽만 남은 폐허가 군데군데 보였고, 호수와 초원, 숲과 늪지대도 있었다. 사람들도 수없이 많았다. 일부는 괴물들과 싸우고 있었고, 일부는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요정들이 있는 깨끗하고 맑은 강이 있었고, 그 반대편에는 마치 피가 펄펄 끓고 있는 것 같은 강도 있었다. 온통 붉은빛을 띤 강은 신우의 뇌리에 강하게 박혔지만, 무엇보다 강한 인상을 준 것은 강 너머에 있었다.
강 너머에는 보기만 해도 숨이 멎을 것 같은 음산한 분위기의 창흑빛 성이 있었고, 성문 앞에는 수십 미터가 넘는 거구의 괴물이 있었다.
개 형태의 몸체에 세 개의 머리와 뱀의 꼬리를 가진…….
케르베로스.
누구나 들어봤을 법한 이름. 지옥을 지키는 수문장.
신화에 조예가 깊은 신우 역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티폰과 에키드나의 자식, ‘키메라, 오르토스, 히드라’와 형제지간이며 각각의 머리에서 화염, 냉기, 맹독을 뿜어대는 괴물.
‘신화와 똑같을까?’
호기심이 들었지만, 감히 그쪽으로 갈 엄두는 나지 않았다.
자신을 묶은 거대한 쇠사슬을 끌고 어슬렁거리기만 해도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으니.
당연하게도 다른 사람들 역시 케르베로스보다는 요정 쪽에 훨씬 더 많이 몰려 있었다.
그래서 요정이 있는 강으로 움직인 것이다.
‘그런데 이딴 벌레 새끼들이 반길 줄이야.’
신우의 짜증 섞인 눈빛을 확인한 요정들이 돌아가며 말했다.
건방진 녀석부터, 그나마 친절해 보이는 녀석까지.
“한심해. 고작 벌레한테 고전하다니. 하여튼 약해 빠진 인간들은…….”
“그럼 못쓴다니까! 그래도 저 정도면 선방했잖아!”
“어서 와, 인간! 이곳은 지옥의 앞뜰이야.”
“이 강은 스틱스 강이고, 저 붉은색 강은 아케론 강입니다.”
“아……!”
신우는 익숙한 단어들을 들으며 예전 삶에서 인상 깊게 본 ‘지옥 상상도’ 하나를 떠올렸다.
원뿔을 뒤집어 놓은 형태에,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구조.
맨 위에 있는 시작 지점에는 ‘지옥의 앞뜰’과 ‘어두운 숲’이 있고, 아래로 1지옥부터 시작해 9지옥까지 있었다.
5지옥과 6지옥 사이에는 지옥 도시 ‘디스’가 있었고, 9지옥에는 천사였다가 지옥에 떨어진 ‘루시퍼’가 있었다.
9지옥 너머에는 죄의 정화를 담당하는 ‘연옥’이 원기둥 형태로 있었고, 일곱 가지 대죄를 뜻하는 일곱 둘레가 7층으로 나뉘어 있었다. 꼭대기에는 지상 낙원 에덴과 망각의 강 ‘레테’가 있었고, 레테를 지나면 ‘천국’에 도달할 수 있었다.
스틱스 강과 아케론 강 역시 지옥에 있는 5대 강 중 일부였다.
스틱스 강은 ‘맹세의 강’
그리스 로마 신화에 이런 내용이 있다.
올림포스 신이 티탄족과 전쟁을 벌일 때, 스틱스 강에 거주하던 네 요정이 신들을 도왔고, 제우스는 그 보답으로 ‘중대한 서약을 할 때는 스틱스 앞에서 해야 한다’고 공표했다. 그 후로, 신들은 맹세하는 의식을 치를 때마다 스틱스 강에 왔고 만약 이때 맹세한 것을 지키지 못하면 숨도 못 쉬고 1년 동안 누워 지내야 하는 징계를 받기도 했다.
아케론 강은 ‘비애의 강’
본격적인 지옥의 시작을 알리는 강으로 유명했다.
‘이럴 수가…….’
신우는 저 멀리 보이는 아케론 강과 케르베로스를 보았다.
아마 케르베로스가 지키는 저 성이 지옥의 궁전으로도 불리는 하데스의 궁전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헤르메스가 했던 말이 다시 생각났다.
“아마 당신이 상상해온 지옥과 꽤 닮은 모습일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