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에 까만 브라가 시스루된 흰 블라우스를 입은 그녀에게서 향수 냄새가 훅 하니 퍼져나왔다. 하완은 겨우 한 잔을 마셨을 뿐인데도 알딸딸한 기분이었다. 술 먹고 공부를 하는 거나 과외한 적은 많기 때문에 크게 문제가 될 건 없다고 믿는 그였다. 물론 그것도 좀 더 어릴 적 이야기지만.
"어디 와인이지? 볼륨이 좋네요."
"네? 볼륨이요?"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몸매를 훑었다. 이렇게 술 마시면 도발적으로 변하는 남자였나 싶어 구미가 더 당겼다.
"아니, 그 볼륨 말고요. 와인이 입안에서 느껴지는 볼륨감 맛이요."
"아, 네에..."
그녀는 무식함이 탄로나 한껏 민망해졌다.
"와인 좀 아시나봐요?"
"아니요. 아는 척 한 번 해봤어요. 무게감이니 목 넘김이니 그런 말들 애주가들이 잘 쓰잖아요. 그럼 왠지 있어보일까 싶어서."
"쳇, 하완씨는 이미 있는데 뭘 더 있어보이려고 해요?"
"있긴 뭐가요? 여자친구도 없는데."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만들 수 있잖아요."
"뭐, 그렇긴 하지만."
슬쩍 겸손하다가도 이렇게 탈겸손해버리는 그였다.
"마지막 연애는 언제에요?"
"몇년 됐어요."
"샘은 남자친구 없으세요?"
"네."
"마음만 먹으면 만들 수 있잖아요? 샘 정도면."
"뭐, 그렇긴 하지만."
그와 똑같이 대꾸해버리는 그녀의 말투에 그는 웃어버렸다. 그러자 그의 볼에 보조개가 피었다. 그걸 본 그녀는 굉장히 신기해하며 물었다.
"우와, 나 남자 보조개 가까이에서 본 건 처음이에요. 한번 만져봐도 되요?"
"에?"
"마음 같아선 포크로 폭 찍어보고 싶은데..."
그러자 하완은 기겁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미 그녀는 포크를 들고 있었다.
"아니, 한다는 건 아니고 손가락만 넣어보면 안 되요? 깊이가 궁금해서요."
"에?"
정말이지 괴짜 같은 여자였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근사한 와인도 먹여준데다 기분도 썩 좋은 편이라 그는 허락했다. 정말 이런 요구를 들어준 건 난생 처음이었다. 누가 자기 몸에 손 대는 건 끔찍히도 싫어하는 그였기에.
"네, 뭐...해보세요."
"우와? 진짜요? 당연 무안 주면서 거절할 줄 알았는데 웬일?"
"아니, 뭐 내가 언제 무안을 준 적 있다고..."
그렇게 중얼거리는 도중 그녀의 손가락이 쑥 하고 그의 얼굴로 들어왔다.
"말 그만하고 웃어봐요."
씨익.
억지 춘향 같은 웃음으로 그가 응수했다. 웃는 거야 근육의 움직임일 뿐이니 마음에 없어도 언제든 남발할 수 있는 표정 운동 아니겠는가.
"아! 아야!"
그녀의 검지 손톱에 붙은 큐빅이 그의 얼굴을 할퀴고 말았다. 깊이 조절이 안 된 그녀가 너무 깊이 보조개를 찌른 것이었다.
"으하핫, 꽤 깊네요."
"아...아팠다구요."
"에이, 뭐가 아파요. 엄살은..."
"샘, 손톱!"
"남자가 뭐 그리 약한 척은, 알았어요. 미안해요. 자, 미안하니까 짠 한 번 해요."
그러더니 능청스럽게 술잔을 내미는 그녀였다. 얼굴을 긁힌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그가 꿀꺽 와인을 넘겼다. 오늘따라 술이 술술 넘어갔다. 오랜만에 쉬다 마셔서 그런가 이렇게 술에 흡수되는 기분 녹녹하니 괜찮았다.
"아후, 덥네. 여기. 안 더워요?"
로사가 블라우스의 단추 하나를 더 풀었다. 안그래도 하늘하늘한 블라우스에 속옷까지 비춰 야릇한 분위기가 연출중인데 단추까지 더 풀어버리니, 그는 눈 둘 데를 찾기 어려웠다. 정말 오랜만에 심장이 크게 뛰었다. 그 소리가 자신의 귀에까지 울렸다.
"아, 심계항진."
"네?"
"아니에요. 오랜만에 치사량이라 두근두근하네요."
"심장이 두근두근한다고요?"
그녀는 작전대로 되어가는 듯 해 흐뭇했다.
"일단 운전은 못 할 것 같고 과외는 좀 늦는다고 해야겠네요. 어, 귀 뒤에 뭐가 있는..."
그러면서 그가 그녀의 귀 옆을 가리켰다. 그녀가 양껏 교태를 부르며 머리를 한쪽으로 쓸어넘겼다.
"이거요? 타투에요."
"아, 난 뭐 묻은 줄 알고...잘 그렸네요. 좀 자세히 봐도 되요? 타투에도 관심이 좀 있어서요."
안그래도 진척이 없던 차인데 오래 전에 새긴 나비 한 마리가 이렇게 고맙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그녀는 학구적으로 접근하는 그에게 기꺼이 피사체가 되어주었다. 슬그머니 들릴 듯 말 듯 신음소리를 내보기도 하고 꼴깍 꼴깍 일부러 마른 침을 삼키며 목덜미 향수를 널리널리 퍼뜨렸다.
"움직이는 것 같네요. 근육의 움직임에 따라 배치를 잘 했네요."
"그렇게까지 생각해서 했을라고요."
"난 나중에 사람 몸의 움직임에 따라 달라지는 그림을 그리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네? 몸에요? 바디페인팅?"
"네, 인간의 몸 아름답잖아요. 특히 여자 몸은 더."
그렇게 말하는 그의 까만 눈이 그녀의 회색 머리칼 앞에서 멈췄다. 이때가 적기였다. 그녀는 자신의 레이더망으로 가장 가까이에 온 그의 입술에 고개를 돌려 입을 맞춰버렸다. 그렇게 자로 잰 듯 입술을 붙이기도 어려운 일이었을 터 그녀는 해내고야 만 것이다. 순간 그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 말인즉 싫지는 않은 것이었으며 그 역시 지금 고민을 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녀가 살짜기 기술을 얹어보았다. 그의 입술을 촉촉한 혀로 고양이처럼 살짝 핥아보았다. 그가 피하지 않았다. 미인계에 안 넘어가는 남자는 역시 이 세상에 없는 법이었다. 생각보다 그의 입술은 남자답지 않게 향긋했다. 분명 아까 먹은 와인하고는 다른 청량하고도 풋풋한 과일향이 풍겼다. 여름에 떠올릴 수 있는 그런 자연의 냄새였다. 성취감까지 더해져 팍팍 솟는 엔돌핀이 그녀는 온몸에서 느껴졌다. 이제 그의 입술을 열어봐도 될까 하는 찰나, 그가 먼저 입을 벌렸다.
그런데 그건 그녀가 원한 반응이 아니었다.
"저기...로사샘."
‘제발 말 따위 하지말란 말이야. 지금 이 순간 무슨 말이 필요해.’
그렇게 빌었지만 그는 다시 한 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지금은 그의 속삭임이 전혀 반갑지 않은 시기였다.
"저, 늦어서 이만 가볼게요."
‘이건 무슨 뜻이지? 설마 다녀와서 계속 이어가자는 그런 멍청한 발언은 아니겠...’
"미안해요. 오늘 린이네 집이라 미룰 수가 없네요. 나름 vip거든요."
그러더니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가 미련을 남길 거란 기대한 자신이 더없이 초라하고 창피해지는 순간이었다. 하완이 도망치듯 자리를 뜨자마자 그녀는 남은 와인 한 병을 단번에 털어 마셨다.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