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완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고는 통화를 끝냈다. 그리고 돌아서서 로사는 쾌재를 불렀다.
"그럼 그렇지. 역시 기회는 노력한 자의 것!"
그러면서 다시 컴팩트를 열고는 화장을 고쳤다.
"파랑 따위가 뭐람? 그래, 고등학생하고 사귀라지. 아, 이제 이 생활도 청산하자. 의사 사모님 소리 들어가며 나도 외제차 좀 몰면서 쇼핑다녀보자구. 아...그런데 어떻게 넘긴다?"
그렇게 혼자 장밋빛 환상에 젖어가고 있을무렵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하완이 도착했다. 도로변에서 창문을 열고는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핸드폰만 토닥이던 그녀가 그제야 그를 알아보고는 차로 뛰어갔다. 너무 높은 부츠 탓에 뛰는 폼이 영 조랑말 같은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완은 그 모습이 우스워 피식하고 웃어버렸다. 웃는 그의 얼굴을 본 그녀가 밝은 표정으로 조수석에 올랐다.
"와, 굉장히 일찍 왔네요? 난 그래도 꽤 걸릴 것 같아서 카페에라도 들어가 있을까 하던 차였는데..."
"근처였어요. 차 막힐 시간도 아니고. 저 밥 사주신다고요? 어디 잘 아는 데라도 있으세요?"
"네. 저쪽 모퉁이 돌아서 우회전이요."
"나 입이 좀 고급인데."
"고급이면 얼마나 고급일라구요? 혹시 술 좀 해요? 기분도 꿀꿀할텐데 술 한 잔 할래요?"
"기분이 꿀꿀한 건 맞지만 과외가 있어서요."
또 다른 스케줄이 있다는 말에 그녀는 김이 팍 샜다. 그렇다고 실망한 내색을 할 수는 없는 터였다. 아직 데이트라던가 그런 건 아니니.
"과외는 몇 개나 하는 거에요? 직업으로 전향한 거에요?"
"좋은 거 입고 좋은 거 먹고 좋은 차 타려면 유지비가 있어야죠. 그리고 이때껏 대학가려고 공부한 학원비며 책값이며 등록금이며...그런 거 뽑으려고 대학간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난 전부터 궁금했는데 듣자하니 하완씨는 의대 다닌다면서 왜 이걸 배워요? 취미로?"
"아니요. 나 이 일 할건데요?"
쿵.
로사는 머리 위로 망치 하나가 떨어진 기분이었다. 취미로 하는 일도 아니고 배우는 걸 좋아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이 일을 하기 위해 배운다니 그게 무슨 망언이란 말인가. 힘들 게 의대에 진학했으면 자고로 얌전히 공부해서 의사선생님 소리 들으며 아랫사람 부리고 살아야지. 어떻게 이걸 하기 위해 의대 타이틀로 고액과외를 하고 엉뚱한 데 돈과 노력을 쏟고 있단 말인가.
"아니, 그럼 너무 아깝잖아요. 어떻게 그래요?"
"뭐가 아까워요?"
"남들은 못 가서 안달이고 하고 싶어도 못 하는 일인데 그걸 마다하고 이걸 하겠다하니까요."
"샘."
그가 그녀를 정색하며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녀도 놀라 그를 마주 보았다.
"샘, 이렇게 화장하니까 굉장히 아름다우세요."
"에, 에?"
그녀는 그 순간 쓰러질 것처럼 정신이 혼미해졌다. 훈훈한 외모의 깔끔한 옷을 입고 훌륭한 차를 모는 남자가 석양빛을 받으며 그녀게 말했다. 바로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말을.
"이런 거잖아요. 화장이란 건 사람의 단점을 감추고 장점은 드러내고...그렇게 드라마틱한 변화를 줘서 아름답게 만들어주잖아요."
"엥?"
"그런 게 마음에 들어요. 도화지에 색을 입혀서 다르게 만들어주는 것. 전 그런 일을 할 때 기분이 좋아요. 아픈 사람 낫게 해주는 것 보다. 뭐, 내가 그렇게 낫게 해준 사람도 아직 없지만."
"그럼 내가 지금 화장발로 아름답다고 해준 거에요? 나, 참..."
폭풍 실망이었다. 하마터면 당장에 입을 맞춰버린 뻔 했다. 이건 그녀의 술주사인데 이렇게 불쑥 나오게 해버릴만큼 말로 취해버리게 하는 마성의 남자였다.
"뭐, 그렇게 생각할 정도는 아니고요. 뭐, 예쁘시죠. 누가 봐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게..."
다시금 기분이 좋아진 로사였다. 옆구리 찔러 절 받기나 어쨌든 받아냈으면 된 거 아닌가. 자기한테 그래도 호감이 없지는 않다는 말로 들리니 기회가 없는 건 아니었다. 아직 그가 자퇴를 한 건 아니니 어떻게든 만나게되면 꼬셔볼 일이 아닌가. 아직 어려서 이 바닥에 대해 뭘 몰라서 이런 객기를 부리는 것일 수도 있다.
"이쪽 일 쉽지 않아요. 까다로운 고객도 많고요. 내가 예쁘다고 생각해도 당사자가 아니라 하면 아닌 거구요. 얼마나 예민하고 디테일에 목숨 거는데요?"
"뭐, 아픈 사람의 예민함만하겠어요?"
"그리고 사회에 나가면 밑바닥부터 시작해야돼요."
"난 지금도 병원 가면 밑바닥이에요."
"이게 어디 그거랑 같아요?"
"다를 건 또 뭐람?"
"여기에요!"
마침 그녀가 알려준 그곳에 도착했다. 전에 파랑이 자신을 데리고 갔던 대포집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럭셔리한 곳이었다.
"오, 좋은데?"
"오늘 과외 다른 날로 좀 미루면 안 되요?"
"네? 진짜 달리게요?"
"허심탄회하게 내가 이 바닥 사정 좀 알려주려고요. 너무 모르고 아까운 인생 베팅하는 것 같아서..."
"일단 차는 대리 부르면 되고...술 먹고 과외하는 건 사실 안 해본 건 아니어서. 뭐, 들어가서 생각해볼게요. 그런데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에요? 비싸 보이는데?"
"저 여기 단골이에요."
안으로 들어가 으슥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가 늘 먹던 걸로 달라며 주문을 했다.
"이런 데는 교수님 회식 때 와보고 처음인데..."
"술 잘 해요? 주량이 어떻게 돼요?"
"한 병."
"소주?"
"아니요. 맥주."
"네에?"
맥주 한 병이 주량이라는 소리에 그녀는 놀랐다. 그러다 이내 마음을 가라앉혔다.
‘일이 이렇게 쉬워질 줄이야. 한 병이면 간다니...더 주문할 것도 없겠네. 돈 굳었다.’
"그것도 는 거에요. 처음에는 한 입만 대도 쓰러졌는데."
마침 주문한 음식과 술이 나왔다. 스테이크에 레드 와인이었다. 그녀가 건배를 제안했다.
"자, 건배하죠. 청춘을 위하여."
"넵."
하며 그가 고기와 함께 쭉 잔을 들이켰다. 그런데 확실히 아침부터 일을 하고 나온 터라 그런가 술이 온몸으로 바로 흡수되는 기분이었다. 하완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걸 본 로사가 덥다며 자신의 재킷을 벗었다. 쇼타임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