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후 아스트리드 왕성에서는 대관식이 열리고, 프린 공작은 네트레시아의 국왕으로 올랐다. 프린 국왕은 보위에 오르자 가장 먼저 플로나 북벽의 방어를 강건히 하라는 왕명을 내렸다. 롤스이스트와 브리스톨의 각 영주들은 북쪽 야만인의 침략을 방비하기 위하여 번갈아가면서 플로나의 북벽을 방비하여야 하는 의무를 받았다. 그리고 플로나의 에슐리 모나츠가 야만인의 손에 무참히 살해되었다는 점을 고려하여 프린왕은 플로나의 자치정부를 없애고 에르윈 백작을 새로운 플로나의 통치자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프린이 플로나에 고립되었을 때 정예기사단을 이끌고 프린을 구조하러 온 에르윈의 아들 프레드릭에게 남작의 작위와 마르테스 영지를 내어 주었다.
어려울 때 프린을 배신한 로베르트 백작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그의 영지인 슈브렌은 롤스이스트의 헥터 남작에게 주었다. 그리고 준석에게도 기사의 작위를 주고 아이린의 고향이었던 메링거 영지를 봉토하였다. 준석은 완강히 거절하였지만 프린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지난 국왕 반은 남쪽 바다의 에라르 섬에 유배하였다. 에르윈 백작을 비롯한 많은 귀족들이 반을 살려두어서는 안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지만 단지 무능함이 죄였던 사촌동생을 프린은 차마 죽일 수는 없었다.
준석은 해가 저문 이후 아스트리드의 북쪽에 있는 로한 언덕에 올랐다. 그곳에서는 아스트리드의 온 시내가 내다보였고, 밤하늘에는 무수한 별이 빈틈없이 박혀 있었다. 발더그린은 죽었지만 준석은 아직 네트레시아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직 그에게 주어진 숙명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준석은 하늘에 뜬 반달을 바라보았다. 사경을 헤맬 때 꾸었던 꿈에서 본 달의 여신이 아직 그의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었다.
- 여기 올라와 있었군요.
익숙한 목소리가 준석의 등 뒤로 들려왔다. 메이의 목소리였다.
- 무슨 생각하고 있었나요?
메이가 준석의 옆에 나란히 앉으며 물었다.
-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를 생각하고 있었어.
- 그건 베르나르가 모두 알려준 거 아닌가요. 굳이 이렇게 궁상맞게 여기서 생각에 잠겨있을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준석이 씁쓸하게 웃었다.
-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될 지가 전혀 생각나지 않잖아.
- 그런 어려운 문제가 혼자서 고민한다고 과연 생각이 날까요?
- 그런가.
메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 아마도 가르시아로 가야겠죠?
- 가르시아라. 이제 이곳도 겨우 익숙해졌는데 또 다른 세상으로 가야 한다는 건가?
- 혼자서 고민하지 말고 드미트리나 에블린에게 물어보세요.
- 그래. 그래야겠지? 그런데 그 사람들이 과연 나를 도와줄까.
- 감히 메링거의 영주 제이슨경의 부탁인데 외면하기야 하겠어요?
메이는 자기가 말해놓고도 우습다는 듯이 깔깔 웃어댔다. 메이가 웃는 모습을 보니 준석의 얼굴에도 미소가 비쳤다. 얼마 만에 들어보는 메이의 웃음소리인지 까마득하여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 그래. 나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겠지.
- 자기의 영지에 한번쯤은 들러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 아. 영지. 내게 영지가 생겼지. 국왕에게 봉토 받은 메링거 영지는 이제 준석의 것이 되었다. 준석은 예전에 아이린의 흔적을 찾아 그 영지에 갔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올리브 나무 사이로 보였던 시원하게 펼쳐진 바닷가가 떠올랐다. 준석은 불현듯 바다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이 세상에 올 때에는 봄이었는데, 지금은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이 되었다. 준석은 가을 바다가 너무도 보고 싶었다.
- 같이 갈래?
메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 좋아요. 저도 동쪽 바닷가가 보고 싶긴 하거든요.
*** ‘이계의 방문자‘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