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그는 차였다. 자존심도 상하고, 딱히 어떻게 이 기분을 풀어야할지 모르겠는 그였다.
"아...이럴 수가...마음에 둔 사람이있다고? 돈 많고, 많은 배운 사람이 좋다고?"
그때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다름 아닌 하완이었다.
"진짜 걔한테 관심이 있어서 그랬단 말이야?"
그러고보니 하완을 가르칠 때의 그녀의 눈빛은 더 열의가 있었다. 게다가 그의 등에 가슴을 기대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전에 자신의 바이크에서 내릴 때도 허둥대며 근처에서 타고 왔노라고 묻지도 않는 변명을 늘어놓지 않았는가. 파랑은 괜시리 분했다. 이때까지 공들이고 퍼주었던 건 자신인데 아무 노력고 하지 않은 하완이 그녀를 낚아채게 될 거라 생각하니 억울했다. 사랑이란 건 노력과 무관하게 첫 눈에 반할 수도 있고, 조건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지만 그런 진실들이 들리지 않았다. 눈에 무언가가 단단히 씌었으므로.
"돈? 학력? 쳇, 그래봐야 어차피 나랑 같은 학원에 다니고 미용일을 하게 될 거잖아. 안 그래? 걔가 나랑 뭐가 그렇게 다른데? 성격도 뻣뻣하니 이상하더만...고등학생이나 좋아하..."
말하고보니 그제야 생각이 났다. 하완은 시아와 썸을 타고 있는 중 아니었던가. 그가 보기엔 최소한 그래 보였다.
"나한테도 전에 옥상에서 걔가 그랬잖아. 자긴 로사샘한테 관심 없다고. 안 그래? 그래, 걔 취향은 분명 아니랬어."
혼자 중얼거리다보니 이 상황이 어느 정도 가르마 타지는 기분이었다. 타인에게 잘못을 전가하고, 회피하고, 미뤄버리면 마음이 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어! 게다가 난 학원을 계속 나가야하는 한단 말이야. 난 오늘을 결단코 내 인생에서 스킵할 수 없다고!"
그렇게 다시 한 번 결심을 다지며 벌떡 일어나 그곳을 떠났다.
***
이번 주는 학원에서 연결해준 미용 실습이 있었다. 유아 발레단 공연에 학원생들이 메이크업과 헤어를 해주러 가게 되었다. 린과 시아가 메이크업 박스와 헤어 소품 등을 한보따리 들고 버스에 올랐다.
"오늘 실습은 학원생 전체가 다 가는 건가?"
"어, 선생님들은 빼고."
"윽, 떨린다. 별로 할 줄 아는 것도 없는데 선생님도 없으면..."
"큰 공연도 아니고 애들 학예회 같은 거라잖아."
"그래도 걔들 부모들이나 친구들도 많이 올 것 아냐. 나 학원생들 말고 다른 사람한테 하는 거 처음이야. 무지 떨린다. 막 이상하게 그리면 어떡하지?"
"에이...그래도 연습 많이 했잖아. 뭘 떠냐?"
"하완 오빠도 그리로 바로 온다던데..."
그 이름만 들어도 징글징글한 시아였다.
"과외 없대?"
"일부러 미뤘대. 기대하는 눈치더라니까."
"헐...기대까지."
"진짜 이 일을 좋아하는 것 같아. 화장할 때 얼마나 진지한지 몰라. 나중에 바디페인팅도 하고 싶대."
"바디페인팅? 그거 야하잖아..."
"예술이라고 해라."
"헐...아말고 딴 마음 있어서 그런 거 아냐? 혹시 여자 벗은 몸을 좋아하단던가..."
"야, 여자 벗은 몸 안 좋아하는 남자가 어딨냐? 뭐, 설마 그렇겠어? 전에 들어보니까 벽화도 관심있어 하던데?"
"벽화? 그거 미국 슬럼가에서 벽에 욕 써넣고 야한 그림 그림 그려놓고 그런 거?"
"야, 넌...그런 거만 떠올리냐? 뭐라더라? 그, 그...아, 그래피티!"
"굳이 뭐 영어를 쓰고 그래...암튼 참 취미생활은 빈티지하시구만. 이고 다니는 브레인에 비해..."
"그러니까. 완전 반전남이야. 나중에 늙어서는 하와이나 남태평양 섬에 가서 타투하며 살고 싶다던데?"
"얼씨구? 늙어서 돋보기 끼고 하시게?"
"그래도 뭔가 있어보이지 않니?"
"하긴 의사 출신이 하면 손님은 많이 끌겠네. 병원균은 없을 테니. 피부병 생겨도 치료해줄 거 아니야? 애프터서비스 조로...그러고보면 참 머리 잘 쓰는 것 같네."
둘의 대화는 잠시 중단되었다. 그러는 동안 문득 시아는 린이 하완에 대해 꽤 많이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먼저 그를 알긴 했지만 이제는 그들이 더 친해진 듯 보였다.
"너, 만약에...아말고가 나중에 바디페인팅 모델 해달라고 하면...해줄 거냐?"
"뭐어? 야, 그런 건 생각해본 적 없는데? 그것도 몸매가 되야지."
"아, 어쨌든간 다이어트하고 몸 만들었다 치고."
"음...괜찮겠네?"
"헐...대박. 니네 부모님이 그런 사실을 알면 길길히 날뛰시겠다."
"뭐 어때? 그때 쯤이면 내 남자가 되어있을 텐데. 애인 사이에 그런 거 못 해주겠어?"
"아, 네네..."
시아는 기분이 싱숭생숭해졌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그들만의 친밀감에 서운함이 느껴졌다고 할까? 가장 친한 친구를 뺏긴 기분도 들고 아무튼 뭐라 딱히 말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너야말로 미술을 어떡게 하려고? 이제 수시도 준비해야잖아. 고3 됐는데..."
"안그래도 엄마가 요즘 의심을 부쩍해서 나도 고민이야. 내 인생 최대 위기가 하필 고3때 오다니. 나 커밍 아웃해버릴까?"
"헐...내가 다 무섭다. 니네 부모님 무섭잖아."
"근데 이거 재밌긴 재밌다. 이 길에 부담이 없어서 그런가? 맨날 하던 틀에 박힌 그림이 아니어서 그런가?"
"하라고 시키면 죽어도 하기 싫은 게 사람 마음이잖아. 하지 말라면 하고 싶고."
"오, 너 완전 어른 같어. 그런 말 하니까."
"나도 다 포기하고 미용하니까 뭐, 그런 생각이 드네. 포기한 것에 대해 미련도 들고. 막상 사회 나가려니 대학도 가고 싶고...학생 때는 그렇게 공부가 하기 싫더니 이렇게 진로를 180도로 바꾸니 공부가 좀 그리워지려고 해."
"그래서 사람은 간사하다고 하는 가뵤. 야, 그래도 나 과외해서 모의고사 좀 올랐나? 역시 사랑하는 사람이 가르쳐주니 안 할 수가 없네."
린의 자랑에 시아는 코웃음이 났다.
"얼씨구, 참 좋으시겠네요."
"이런 게 사랑의 힘이지. 파워 오브 러브!"
폭풍수다 속에 그들은 공연장에 도착했다. 학원생들이 삼삼오오 모여있었다. 마침 하완이 차를 몰고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한껏 웃으며 린이 그를 반겼다.
"오빠, 여기에요. 아이구, 무거워라."
린은 지금껏 거뜬히 메고 있던 메이크업 박스를 낑낑거리며 들기 시작했다.
"나도 무거워."
라고 툭 내뱉으며 그가 자신의 것을 들고는 그녀들을 쌩 지나쳐갔다. 시아는 린을 한심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너 지금 뭐했냐? 혹시 약한 척 한 거냐? 행여 저 피도 눈물도 없는 아말고가 니 걸 들어줄 거라 기대했던 거냐?"
"힝...오빠아..."
린이 애교를 부리며 파랑을 졸래졸래 따라갔다. 그 사이 파랑이 오토바이크를 타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그가 혼자 서있는 시아에게 가더니 퇴짜 맞은 어제의 사탕바구니를 들이밀었다. 그리고는 시크하게 대유행어를 던졌다.
"오다 주웠다."
"에?"
그는 오늘 아무나 처음 보는 여자에게 이 상처 바구니를 버리겠노라 결심했던 참이다.
"저, 저한테 주는 거에요?"
"아작아작 잘 씹어 먹어라."
그리고는 휙 안으로 들어갔다.
"엥?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이람?"
그렇게 어리바리한 표정으로 시아가 서있는 걸 하완이 뒤돌아서 보았다. 사실 그는 시아에게서 은근슬쩍 눈을 뗀 적이 없었으므로 파랑이 그녀에게 사탕을 주는 걸 처음부터 보았던 것이다.
‘헐...파랑 저 자식이 설마...유시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