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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N의 밤
작가 : MrNerd
작품등록일 : 2016.8.22

격리된 구역, 생존자, 그리고 좀비

 
<1부 : 낙조> - 7장 : 저울
작성일 : 16-09-09 12:07     조회 : 449     추천 : 2     분량 : 7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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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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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 시동이 꺼짐과 동시에 그는 자동적으로 눈을 떴다.

 

 깨우기도 전에 그가 일어난 것을 보고 당황한 기사의 눈에 두려움이 스쳤다. 하지만 그는 웃으며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평소라면 오락용 및 해고 통지 겸 즉각 사형에 취했겠지만 지금은 그의 기분이 제법 괜찮은 편에 속했다. 운전기사 하나 목매달아 죽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해결된 것이다.

 

 빈재는 운전기사가 문을 열어주려는 것도 만류한 채 자신이 직접 문을 열고서 차에서 내렸다. 그가 아스팔트 위로 발을 올리자 검정 츄리닝에 감싸인 뱃살이 그대로 꿀렁거렸다. 8월 5일 운석이 떨어진 이후 체중이 전보다도 늘었다. 매일 먹고 살 걱정을 해야 했던 예전을 생각하면 재밌는 노릇이었다. 운석이 떨어지고 나서 세상은 오히려 먹고 살기 편하게 되었다. 이전보다 훨씬 더.

 

 차문이 다시 닫혔을 때 남자 둘이 그에게 다가왔다. 둘 다 검은 옷에 손에는 자동소총이 쥐어져 있었다.

 

 “어디냐?”

 

 그가 하품과 기지개를 동시에 하며 물었다. 덥수룩한 수염에 회색 털이 듬성듬성 보이기 시작한 남자가 조용히 자신의 뒤쪽을 가리켰다. 짙은 회색 연기가 그곳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안내해.”

 

 빈재의 말에 이번엔 젊은 쪽(이긴 해도 앞서 남자보다 조금 더 젊을 뿐이었다)이 그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남자를 따라가자 얼마 안 있어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 주위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박스와 자동차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그가 온 것을 발견한 누군가가 소리치자 잠시 웅성거리더니 곧 길이 생겨났다. 사람들이 좀 전까지 모여 있던 중앙에는, 무릎을 꿇고 있는 한 무리의 실루엣이 불길을 배경으로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안녕들 하세요?”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포로는 총 네 명이었다. 남자 셋에 여자 하나. 스스로를 ‘적가면’이라고 이름붙인 일당답게 네 명 모두 얼굴에 피를 칠한 흔적이 있었다. 그러나 원래는 얼굴 전체를 덮고 있어야 할 핏자국은 지금, 그슬린 데다 검댕이 묻어 꽤나 흐릿해져 있었다. 무엇보다 그들의 얼굴에는 패배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어, 피를 덕지덕지 칠해도 더 이상 붉은빛이 제 색을 내지 못할 것 같았다.

 

 “여기 혹시 책임자가-”

 

 “지도자.”

 

 갈라진 목소리가 불쑥 그의 말을 고쳤다. 네 명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노인이었다. 노인은 잠시 기다리다가 모두가 자신에게 주목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지도자가 맞는 표현이오.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은 피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이고 나와 같은 사람들은 그러한 가르침과 인간 사이의 매개자가 되어 어디로 강할 지를 지도해주는 거니까.”

 

 “댁이 정한 겁니까?”

 

 “아니, 난 계승했을 뿐이지. 이 위대한 가르침을 내려준 진정한 선구자는-”

 

 “아, 됐어요. 관심 없으니까.”빈재는 고개를 저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사이비 종교의 가르침 따위는 관심 없다.

 

 “아무튼 댁이 지도자?”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뜻 보기에도 불쾌해하는 기색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말을 잘라내서가 아니라 자신의 교리가 제대로 전파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일단 제가 여기에 왜 온지는 아세요?”

 

 “아니 모르지. 다만 당신이 우릴 배신한 건 알고 있소.”

 

 “배신?”

 

 그는 껌딱지를 늘리듯 그 말을 길게 내뱉었다. 그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라면 정말 훌륭하다. 이렇게 눈물 나오게 웃기게 하다니.

 

 “내가 배신했다고? 내가? 아, 진짜 미쳐버리겠네.”

 

 정말 눈물이 쏟아진다는 양, 그는 눈두덩일 어루만진 채 계속해서 웃었다. 노인이 대체 뭐냐고 소리 지를 때까지 웃음은 멈출 줄 몰랐다. 마침내 노인이 고함을 지르고 그는 힘겹다는 듯 한참동안 숨을 고른 뒤에 말을 이었다.

 

 “아, 죄송해요. 너무 웃겨서 참을 수가 있어야죠. 제가 배신했다니. 당신들에게 무기랑 가끔 먹을 것까지 판 건 저희들이에요. 이해해요? 당신들은 제 고객이라는 뜻이에요. 저희는 그냥 평범한 장사꾼이고. 그런데 장사꾼이 고객을 배신한다니……. 아무리 자유롭게 사신데도 조금 논리적으로 얘기하셨으면 좋겠네요.”

 

 “개소리!”

 

 노인이 소리쳤다.

 

 “물건 안 사면 우릴 쓸어버리겠다고 협박했잖아! 그리고 실제로 이렇게 만들고!”

 

 “제가요? 그런 소리를 했다고요?”그는 처음 듣는다는 듯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전 물건을 안 사면 별로 안 좋을 거라고만 했죠. 무기나 먹을 게 없으면 힘든 건 당신들이잖아요? 전 쓸어버리겠다고 ‘직접’ 말한 적 따위 없어요. 그리고 제가 이렇게 한 건 물건을 안 사서가 아니죠.”

 

 그가 과장스럽게 손을 벌렸다.

 

 “저희는 분명 경고 드렸습니다. 자칭 사냥꾼은 저희 먹이니까 건들지 말라고. 근데 기어코 잡겠다고 설쳐대시던데요?”

 

 “하지만 피의 인도가 말하길-”

 

 헛소리. 그는 손을 들어 가볍게 그 말을 끊었다.

 

 “그 말은 저희가 그만큼 만만해 보였다는 뜻 아니신가요?”

 

 “저희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어요. 프라이버시라는 게-”

 

 “프라이드요.”

 

 누군가가 작은 소리로 그의 말을 고쳐주었다.

 

 “그래, 고맙다. 아무튼 프라이드가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들을 공격했던 거에요. 마음이 아프지만 잘못을 했으니 벌을 받아야죠.”

 

 빈재의 손이 노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뭐 사랑의 매라고 생각하세요.”

 

 그의 손이 떨어지자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전보다 두 배는 커진 듯한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의 눈동자를 들여다본 그는 다음에 듣게 될 말이 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이 대목에서라면 항상 똑같은 대사다.

 

 “제, 제발 살려주세요.”

 

 역시. 그는 다시 한 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왜 그러세요. 벌준다고 했지, 죽인다고는 안 했어요. 먼저 계산부터 해봐야죠.”

 

 그는 츄리닝 주머니에서 계산기를 꺼내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흔히들 많이 하는 착각이 죽음이란 게 되게 좋은 벌인지 안다는 거에요. 근데 장사꾼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또 그게 아니거든요. 이익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뭐하러 죽여요. 또 손해가 메워지는 것도 아니고.”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건조한 리듬을 만들어낸다.

 

 “그러니 손해를 메우고 제대로 된 벌을 주려면 최대한 상대가 살아있도록 하는 게 좋아요. 무턱대고 죽이는 것보다 살아있는 상태에서 계산해서 벌을 찾는 겁니다. 물론 계산이 불가능하다면…….”

 

 자판 두들기는 것이 멈췄다. 침묵이 기다렸다는 듯 꾸역꾸역 들어왔지만 참다못한 노인은 신음을 흘렸다.

 

 “뭐, 뭘하려고…….”

 

 “죽는 거죠.”

 

 빈재가 눈을 힐끔 올려보였다.

 

 노인은 억하고 숨을 삼켰다. 까마득한 예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봤다면 뱀 같은 눈이라며 진저리를 칠 게 분명했다. 언제나 옳았던 어머니의 지혜.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그것이 틀렸다고 그는 생각했다. 뱀의 눈은 소름끼칠지언정 그 속에 자연을 품고 있다. 그러나 저건, 저 눈에는…….

 

 “농담이에요. 어지간해서는 죽는 일 없으니 걱정 마요. 자, 이제 저희가 입은 피해입니다.”

 

 그는 웃으며 계산기의 화면을 노인 쪽으로 돌렸다. 때가 끼고 금이 가있는 화면에, 숫자가 담담히 서 있었다. 노인이 조심스레 숫자를 세었다. 도대체 어떤 식으로 계산하면 튀어나오는 숫자인지는 몰라도 천문한적인 숫자였다.

 

 “대체 이게…….”

 

 노인은 행여나 뭐에 찔릴까 조심하는 것처럼 빈재를 보았다.

 

 “아, 좀 이해하기 힘드시죠? 괜찮아요, 계산은 저희가 알아서 할 테니. 일단 갖고 계셨던 물자들은 저희가 가져갈 겁니다. 직접 골라주실 필요는 없어요. 음식이든 무기든 필요해보이면 저희 애들이 알아서 챙길 거구요.”

 

 “그럼 저희는 뭘 먹으라는 거-”

 

 “지금 제가 거래를 하고 있는 걸까요? 자선을 하고 있는 걸까요?”

 

 빈재가 누렇게 변한 이를 드러냈다. 노인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아까 보여준 손해를 갚을 능력이 되신다면 다 겨자가진 않죠. 근데 되요? 손해 갚을 능력?”

 

 웃음기가 건조하게 섞여있는 말투였다. 가시가 섞인 그 말투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쨌건 일단 살고 싶겠지.

 

 “그럼 더 이상 군말 하지 마세요. 흠, 그리고 또… 아, 당신 부하들 이게 끝이죠?”

 

 그가 포로 셋을 가리켰다. 약속이라도 한 듯 세 명 모두 움찔했다.

 

 “죄송합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뭐 상관없어요. 어차피 스무 명도 못 넘었으니까 나머진 다 죽었든가 했겠죠. 세 명 다 상태는 어떻죠?”

 

 “상태라뇨?”

 

 “몸 상태 말입니다. 어디 아프거나 한 데 없어요?”

 

 “예, 예. 모두 건강합니다.”

 

 “영양 상태는? 영양실조 같은 건 없죠?”

 

 노인은 의아해하면서도 대답했다.

 

 “아, 예.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애들이라 특별히 더 챙겼습니다. 아마 튼튼할 거에요.”

 

 “잘 됐네요. 요새 건장한 장기 찾는 고객이 많아서요?”

 

 “네?”

 

 “건강한 장기요.”

 

 그것도 모르냐는 투로 그가 말했다.

 

 “A구역에서 그걸 원하는 손님들이 많거든요. 세상이 이 꼴이어도 살 사람은 살아야죠. 특히 저희는 남들보다 조금 더 싼 가격에 제공하고 있어서 인기가 좋아요. 영감님도 필요하면 말해요, 하나 구해줄 테니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포로들이 반응했다. 여자는 히스테리가 잔뜩 담긴 비명을 질렀고 남자 둘은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그에게로 뛰어왔다.

 

 그러나 그 전에 검은 옷들이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후드티를 입은 녀석이 개머리판으로 여자의 머리를 후려쳤다. 뛰어오던 남자 둘은 다리와 배를 맞고 바닥에 쓰러졌다.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됐다.

 

 “조심들 해. 흠 나서 좋을 것 없다.”

 

 ‘예’하고 이어지는 짤막한 대답.

 

 “자, 그럼 영감님은 어떻게 하면 될까요? 늙어서 딱히 살 사람은 없을 거고…….”

 

 빈재가 물건을 어디다 둘지 골똘히 궁리하는 표정으로 노인을 내려다봤다.

 

 “그래도 노인은 공경하라고들 하니까… 일단 영감님은 저희 지하실에 가면 되겠네요. 거기서 어떻게 쓸지 생각해보죠.”

 

 “자, 잠깐만.”

 

 노인이 당황하며 소리쳤다. 애처로울 정도로 온 몸이 떨리고 있었다.

 

 “그게 무슨 뜻이지? 안 죽이겠다며?”

 

 “죽이진 않잖아요?”

 

 빈재는 어이없다는 식으로 대답했다. 말도 안 되는 걸로 불평을 하는 고객을 만난 것처럼.

 

 “죽는 거랑 다를 바 없잖아!”

 

 “아, 그것도 그렇네요. 제가 죽이진 않는다고 했으니까요. 근데요, 영감님.”

 

 그가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그 말투에 노인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자신이 물건을 살 수 밖에 없는 고객이란 것을.

 

 “제가 언제 약속이라도 했나요?”

 

 ***

 

 하늘이 그의 차만큼이나 검게 물들어갔다. 곧 있으면 차와 하늘이 구별되지 않을 것이다. 뒷좌석에 편하게 기대 음악을 들으며 그 광경을 그리자 절로 미소가 피었다. 사업을 시작했을 때부터 죽 생각해오던 광경이었다. 하루 일을 마치고 퇴근하는 성공한 사업가.

 

 문득 주머니에 넣은 손가락 끝에 플라스틱의 감촉이 느껴졌다. 꺼내드니 좀 전 노인 앞에서 꺼내 보인 낡은 계산기였다. 그는 감회에 젖어 그것을 만지작거렸다.

 

 하도 눌러 대서 자판은 대부분 지워져 있었고(3은 진즉에 빠졌다), 때가 낀 계기판 한 구석에는 작게 금이 가 있었다. 그러나 그 낡아빠진 것이 있었기에 그는 언제나 ‘사장’으로 있을 수 있었다. 그 날 이전에도 이후에도. 계산기는 모든 게 뒤틀린 그 광기의 분기를 잇는 유일한 매개체였다.

 

 돈을 벌고 싶었던 게 언제냐고 묻는다면(감히 누가 묻기나 한다면) 그는 아마 10살 여름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 이전에 돈은 그의 인생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그의 집이 너무 가난해 그가 직접 돈을 만져본 적도, 돈에 대한 개념을 배울 기회도 별로 없어서였다. 그는 용돈은커녕 심부를 값조차 받지 못했었다. 동네에 또래들이 죄다 그의 집과 비슷했던 것도 한몫했다. 비교를 할 대상이 없으니 그는 자연스레 세상 모든 사람이 그러고 사는 줄 알았다. 배곯는 일 없게 음식을 바라고, 술 취한 아버지께 맞지 않기를 바라고, 대충 그런 식으로.

 

 그 해 여름을 맞고 나서 그는 남들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됐다. 늦은 오후였다. 해는 서쪽으로 꽤나 저물어갔지만 아직도 공기가 후덥지근했다. 불안해하며 집에 도착했을 때 노을은 간신히 숨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전에 밥상머리에 늦게 왔다는 이유로 얻어맞은 걸 떠올리니 다시금 그 때 맞은 엉덩이가 시큰거리는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떠는 손으로 현관문을 열려는데, 불현 듯 낮은 소리가 그의 손을 막았다. 흐느껴 우는 소리였다. 누군가가 아니라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에 가까운, 기묘한 울음소리였다.

 

 기이한 풍경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 두려움과 부정, 그럼에도 확인해보고 싶은 변태적인 호기심이 차례로 잦아들었다. 그는 까치발을 들어, 있으나마나한 낮은 담벼락 너머를 살폈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 익숙한 마당 한 가운데에 아버지가 익숙하지 않은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다. 아니 쓰러진 게 아니라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것이었다. 아버지의 앞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무심히 서 있었다. 누군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남자가 아버지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걸 확연히 알 수 있었다. 그의 손에는 달랑 계산기 하나만 들려있었다.

 

 제발, 제발 부탁함세…….

 

 아버지가 흐느꼈다. 굵직한 목소리를 억지로 올린 것 같아 이상하게 들렸다. 애초에 아버지가 눈물을 보이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눈물을 보이면 미친 듯이 패던 아버지가 아니었던가. 조금이라도 신경에 거슬리면 세상 전체를 비틀어 버릴 것 같이 굴지 않았던가. 피로 범벅이 된 부지깽이. 그게 아버지의 형태였다. 그런데 이건 뭔가? 부러질 것 같지 않던 아버지가 대체 왜 저렇게 부서져 있는가?

 

 돈이라면 꼭 갚을 테니, 이 사람아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일 텐가.

 

 흐느끼는 아버지의 목소리.

 

 돈.

 

 감정이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몰려왔다. 돈. 그까짓 종잇조각 때문에 아버지가 저러고 있는 걸까? 겨우 그런 것 대문에. 그렇다면… 돈이 있다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두려움도 분노도 좌절도 아닌, 희열이 밀려왔다. 아주 깨끗한 깨달음의 희열.

 

 돈만 있다면 부실 수 있다. 돈만 있다면, 아버지를 부실 수 있다.

 

 그는 웃었다. 혹시라도 두 사람이 들을까 입을 막은 채 킬킬 거렸다. 아이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히스테릭한 웃음소리가 계속해서 새나왔다. 웃음으로 잔뜩 일그러진 그의 표정이 꼭 쥐새끼 같았다는 걸 그는 알지 못했다.

 

 그 때부터였던 것 같았다. 그는 아버지가 서랍장 깊숙이 박아놓은 계산기를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그가 주로 한 놀이는 계산기로 가격을 매기는 것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거라면 뭐든 해보았다. 요강, 구슬, 자전거, 자동차, 그릇, 벽돌. 가격이 정말 맞는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았다. 결국은 놀이일 뿐이니까. 다만 생각할 것도 없이 정확하게 가격을 내릴 수 있는 게 있었다. 바로 아버지의 가격이었다.

 

 돈이 있어야 부실 수 있다 생각한 아버지의 가격은, 의외로 매길 수가 없는 것이었다. 둘도 없이 소중해서가 아니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서지.

 

 “사장님, 다 왔습니다.”

 

 기사의 말에 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주변이 아까보다 어두워지긴 했지만 그의 아지트에 도착했단 걸 알 수 있었다. 산처럼 주변에 쌓아올려진 고철 더미들이 으스스한 실루엣을 뽐내고 있었다. 그 중심에 한 때는 그의 사무실이었던 컨테이너가 보였다.

 

 언제 내렸는지 기사가 문을 열어주었다.

 

 “아, 고마워. 오늘도 수고했어.”

 

 그가 차에서 내리자 기사는 문을 닫고 정중히 고개를 숙인다.

 

 “저, 내일은 언제쯤 차를 준비해둘까요?”

 

 답은 기사도 이미 알고 있다. 그저 형식상 하는 질문이다.

 

 “오늘 고생했는데 뭘. 내일은 오후 늦게 해. 사람이 쉬기도 행지. 자네는 다 좋은데 너무 성실해서 탈이야.”

 

 이 말은 평소처럼 같은 시간에 준비해 놓으라는 뜻이다. 다행스럽게도 기사는 그 의미를 알고 있다. 이전 기사가 출근 안 하고 쉬다가 평생 쉬는 것을 목격해서다. 그래서 그가 지금 이 일을 하고 있기도 하고.

 

 “하하, 아닙니다. 그럼 오늘 쉬시고 내일 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어여 들어가봐.”

 

 그는 기사가 사라지는 걸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갔다. 불을 켜자 알전구가 컨테이너 내부를 구석구석 비췄다. 때 낀 책상, 다 헤진 소파, 안테나 달린 싸구려 TV, 3년 전 신문. 모든 게 그날 이전 그대로다. 그의 성공을 더욱 음미하기 위해 일부러 보존시켜뒀다. 그 날 이후 여기까지 왔다. 별 거 없던 고물상 주인이 이렇게까지 성공했다.

 

 그는 흐뭇해하며 다시 계산기를 어루만졌다. 그를 성공으로 이끌어준 저울. 가격을 매길 수 없는 건 쓸모없는 것뿐이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그 어떤 것도 쓸모만 있다면 결국 돈으론 바꿀 수 있었다.

 

 저울 앞에선 모든 것이 평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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