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트라는 말에 지유의 얼굴은 속절없이 붉어졌다.
모두 자신과 라티안스가 좋은 관계라는 걸 알고 있는 것이 엄마에게 연애를 들킨 심정 같았다.
부끄러워서 어디 숨고 싶고, 되도록 물어봐 주지 않았으면 하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클리프의 말대로 기분전환을 하는 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럴게요. 그럼 전 라티안스 씨에게 갈 테니 클리프 씨도 좋은 시간 보내세요.”
“네, 그러겠습니다.”
지유는 라티안스를 찾기 위해 방에서 나와 성안을 걸어 다녔다.
아직 어디가 어딘지 잘 몰라 막 돌아다니는 게 조금 꺼려졌지만, 이렇게 된 거 성을 구경하며 라티안스를 찾아보자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복도를 걸으며 지유는 벽에 걸려 있는 그림들이나 장식된 화분을 눈에 담았다.
하나 같이 전부 귀중한 것들로 만들어져서 성이라기보단 박물관 같은 느낌이 났다.
“칼립이 성을 이렇게 꾸며놓은 걸까?”
“그건 아니야. 원래부터 성은 이런 느낌이었어.”
“라티안스 씨! 어디에서 온 거예요?”
“클리프가 말해줬어. 그대가 나를 찾아서 성을 돌아다니고 있을 거라고.”
“그래서 절 찾아오신 거예요?”
“나에겐 그대를 찾는 일은 쉬운 일이니까. 그래서, 무슨 일로 나를 찾은 거야?”
“그게……. 오늘 엄마를 보고 왔거든요.”
“그래? 인사는 잘 했고?”
“잘한 것인지 잘 모르겠어요. 결국, 마지막엔 거의 도망쳐왔거든요.”
“그대의 어머니에겐 죄송한 짓을 했군.”
“저도 똑같은 마음이에요. 엄마를 보고 온건 좋은데…. 마음이 좋지가 않아서.”
“그래, 그렇겠군.”
“그래서 기분 전환을 하려고…. 그……. 데이트 신청을 하려고 하는데요…….”
“나에게?”
“네…….”
지유가 얼굴이 빨개져서 겨우 고개를 끄덕이자 라티안스는 웃으면서 지유의 손을 잡았다.
라티안스의 손가락은 자연스럽게 지유의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었고 깍지를 끼자 낯간지러워지는 기분이었다.
지유가 어떻게든 빨개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얼굴을 바닥으로 푹 내리자 라티안스는 깍지 낀 손을 자연스럽게 들어 지유의 손등에 입 맞췄다.
낯선 감각에 지유가 화들짝 놀라 얼굴을 들자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라티안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야 날 제대로 봐주는군.”
“그렇게 보시면 부끄러워요….”
“또 고개 숙이면 손등에 키스해달라는 의미로 알아듣겠어.”
“그런 의미 아니라는 거 아시잖아요!”
“알지만 난 그대의 얼굴을 보고 싶으니까. 조금은 괜찮잖아?”
그렇게 말하곤 지유의 손등에 입 맞추는 라티안스는 영락없는 악동이었다.
결국, 지유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라티안스와 눈을 마주쳐야만 했다.
지유가 고개를 들자 라티안스는 그제야 만족했는지 더 손등에 입 맞추지 않았다.
“데이트라고 했지?”
“네? 네, 그랬죠.”
“데이트라고 하기엔 좀 뭐하지만, 성 구경할래? 그대도 이 성에 지리를 외워둬야 하니까.”
“좋아요. 저도 혼자 구경하기엔 길 잃을까 봐 무서웠거든요.”
“그럼 같이 구경하지.”
라티안스는 지유의 손을 잡은 채로 천천히 걸어갔다.
자신에게 걸음을 맞춰준 덕에 지유는 어렵지 않게 라티안스를 따라갈 수 있었다.
지유는 그의 옆에서 따라 걸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고 보니 이 성이 원래부터 이런 느낌이라고 했죠? 본 거예요?”
“아니, 직접 보지는 않고 그림으로 봤지.”
“그림으로 봤을 때도 이런 느낌이었나요?”
“비슷하긴 해도 직접 보니까 감회가 새로워.”
“근데 왜 성을 그림으로 본 거예요?”
“언젠가 내가 올 곳인데 내가 지리를 몰라선 안 되잖아? 그래서 베일리가 그려줬지.”
“그렇구나…….”
지유는 처음 듣는 라티안스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 흥미가 들었다.
사소한 것 하나라도 더 알고 싶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어땠는지, 좋아하는 음식은 뭔지, 좋아하는 색깔은 뭔지.
지유는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 더 듣고 싶어져서 그의 손을 살짝 잡아당겼다.
“있죠, 라티안스 씨의 어린 시절은 어땠어요?”
“궁금해졌어?”
“네. 이야기해주시면 안되나요?”
“못 해줄 것도 없지. 그런데 그렇게 특별한 건 없어. 뱀파이어 로드는 3년 만에 성인으로 자라나거든.”
“그렇게 빨리요…?”
“뱀파이어잖아. 어쨌든 난 어릴 때 요정의 둥지에서 있었어.”
“거기가 어딘데요?”
“요정들이 사는 곳. 칼립이 날 죽이려고 들었거든. 그래서 그를 피하고자 숨은 곳이 요정의 둥지야.”
어렸을 때부터 라티안스는 칼립의 위험을 피해 살아야 했구나.
자신으로써는 상상할 수 없는 위험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죽을 위험을 겪다니.
지유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그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듣고 싶다고 말했으니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야 했다.
“그곳에서 3년간 지냈어. 나올 때도 꽤 고생했지.”
“나올 때도 위험했나요…?”
“그랬지. 주변에 온통 칼립의 군대들이 가득 있었어. 클리프나 브리지트, 요정의 군대가 아니었으면 나오지도 못했을 거야.”
“…힘들었겠네요.”
“힘들었지. 그러던 와중에 지유를 만난 거야. 물론 처음 목적은 인간의 피를 마시기 위해서였지만.”
라티안스의 말에 지유는 새삼스럽게 라티안스와 자신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처음엔 정말 놀랐었지. 갑자기 전혀 다른 세상으로 오게 되고….
1주일만 자신을 도와달라는 말에 그래, 1주일이면 괜찮겠지. 하고 수락했었다.
그러다 그를 사랑하게 돼서 1주일이라는 제약은 사라졌다.
“지금 생각하니까 엄청 옛날이야기 같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둘은 웃으면서 성안을 돌아다녔다. 성은 큰 만큼 여러 가지 방이 있었다.
난생처음 보는 책이 가득한 서재와 성안에 있는 작은 온실.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접객용 방. 처음 왔을 때 들어갔던 옷이 잔뜩 있는 드레스룸까지.
성안을 다 둘러보자 점심시간이 다 됐다. 지유는 허기가 지자 라티안스를 바라봤다.
“배고프지 않나요?”
“배고프군. 식사하러 갈까?”
“네!”
“점심은 성안이 아닌 밖에서 먹지. 샤티도 자유 시간을 가지고 있을 테니까.”
“막 성 밖으로 나가도 괜찮나요?”
“로브가 있잖아. 괜찮아.”
“아, 그렇네요. 그럼 로브 챙기고 나가요.”
지유는 오랜만에 라티안스와 단둘이 외출을 한다는 사실에 들떠서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둘은 드레스룸 옷걸이에 걸려있는 로브를 뒤집어썼다.
여기 있는 옷들 중에 가장 싸구려고 볼품없는 옷이지만 지유는 이 로브가 가장 마음이 편했다.
이 로브를 쓰면 자신이 누군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고, 그 누구의 눈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
지유가 로브를 뒤집어쓰자 라티안스도 로브를 쓰고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먹고 싶은 거 있어?”
“음…. 뱀파이어들만 먹는 음식 없어요?”
“뱀파이어들만 먹는 거라……. 피?”
“그런 거 말고요!”
“농담이야. 뱀파이어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먹는 걸 먹으니까. 그리 틀린 건 없을 거야.”
“그러면…. 한식 말고 다른 나라 음식 먹어요.”
“한식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
지유와 라티안스는 두 손을 꼭 잡은 채로 성의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아무도 라티안스와 지유가 빠져나온 걸 보지 못한 것을 확인하고 두 사람은 마을로 향했다.
마을은 언제 나와 다름없이 평화롭고, 시끌벅적했다.
바로 얼마 전까지 칼립이 뱀파이어 세계를 지배했던 것이 전부 거짓말 같을 정도였다.
“마을이 평소보다 더 활기찬 것 같아요.”
“아무래도 폭정이 끝났으니 그렇겠지.”
“다들 일단 한시름 놓은 걸까요?”
“다 끝난 건 아니지만…. 마음 놓고 살 수는 있게 됐으니까.”
라티안스의 말에 여전히 칼립은 도주 중이라는 것을 깨닫고 지유는 작게 신음했다.
도대체 뱀파이어 로드의 자리가 무엇이라고 그렇게까지 아등바등해가며 다시 찾으려고 하는 걸까.
단순히 높은 자리에 있고 싶은 권력욕이라기엔 칼립은 그 정도가 심했다.
“칼립은 어째서 뱀파이어 로드 자리를 그렇게 지키고 싶어 했을까요?”
“내 예상이지만…. 오기와 자존심, 열등감을 메꾸기 위한 것 아니었을까?”
“칼립이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고요? 전혀 그렇게 보이진 않던데…….”
“그 속은 누구도 모르는 거야. 칼립은 로드가 되기 전까지 뱀파이어 로드의 그림자로 살아왔다고 하니까.”
누군가가 누군가의 그림자로 사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분명 자신을 깎아내리고, 자신의 존재를 죽이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칼립은 로드의 자리에 앉는 것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고 싶은 것이었을까.
답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칼립만이 알고 있겠지.
지유는 평온한 마을을 바라보며 라티안스의 손을 꼭 쥐었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평온했으면 좋겠어요.”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그리고 그 곁엔 항상 그대가 있을 거고.”
라티안스의 말에 지유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지유는 더 밝은 목소리로 어서 점심을 먹자며 라티안스를 이끌었다.
언뜻 보면 어디에나 흔하게 있는, 사랑스럽기만 한 연인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