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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유니콘의 뿔
작가 : 앙졸라이트
작품등록일 : 2018.1.20

남방 최고의 국가 카프래이스....그들의 성곽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도로 강대한 공격에 맞서 무너지는 순간, 한 자루의 창날이 그들을 구원하고자 나섰다. 유니콘의 뿔을 찾아야만, 이들의 도시는 구원될 수 있을 것이다.

 
004-멸망
작성일 : 18-01-22 11:30     조회 : 225     추천 : 0     분량 : 1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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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말 위에 탄 채 성문 앞에 서서 성문이 박살나기만을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거대한 코끼리 앞에서, 궁수들마저 발사를 중지하고 성벽 아래로 숨어버렸다. 어차피 화살 따위로는 저 코끼리의 피부를 뚫을 수도 없었고, 모든 시민들이 이미 거의 다 대피해가는 상황에서, 차라리 성 안으로 적을 불러들이는 게 현명할 듯싶었다. 나는 특별히 준비한 거대한 낫을 들고 곧 무너질 듯한 성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바로 다음 순간, 성문이 박살이 났다.

 

 "뿌우우우우!"

 

  덩치 때문에 코의 끝부분만 성 안으로 겨우 휘두르는 코끼리를 보는 순간, 내 용기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미 손에 낫을 쥔 이상,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었다.

 

 "발사 준비! 발사 준비!"

 

  코끼리가 머리로 쳐서 거의 무너질 위기에 처한 성벽에서 내려오며 궁병들이 고래고래 소리쳤다. 나는 손을 들어 그들을 저지했다. 내가 코끼리에게 접근하려던 차에 저들이 화살을 쏜다면 어떤 우스은 꼴이 날 지는 뻔했다.

 

 "베어르는?"

 

 내가 지나가던 리드라를 붙잡고 물었다. 리드라는 우물쭈물 대답했다.

 

 "폐하께서 민간인 호송대의 지휘를 맡기신 걸로..."

 

 "아, 그랬지."

 

  너무 경황이 없었던 나머지 내가 그런 건의를 드렸던 것조차 잊고 말았다. 나는 이리저리 성 안을 헤집는 코끼리 코를 보며 심란해졌다. 위를 바라보니 코끼리가 힘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성벽이 곧 무너질 참이었다.

 

 "뿔까지 달린 거대한 곤봉을 상대해야 한다니..."

 

 "어떻게 상대하실 겁니까?"

 

 "....잘라내야지."

 

  나는 리드라의 질문에 그렇게 답한 뒤 코끼리 코를 향해 돌격했다. 은빛섬광이 코끼리를 두려워하지 않은 건 놀라운 일이었지만, 아틀라 산의 들소의 눈마저 견뎌낸 내 애마가 단지 덩치가 크다는 이유로 코끼리를 두려워한다는 그것 또한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내 계산은 그리 명확하지는 않았다. 코끼리는 코에 상처를 입으면 잘리면 미쳐 날뛰게 되어있었다. 코끼리가 만일 미쳐 날뛰게 된다면 굳이 힘들게 성을 부수는 방향으로 미쳐 날뛰지 않고 적군을 향해 그 광기를 표출해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코끼리를 상대할 때의 상책은 코끼리에게 목표물 자체를 혼동시키는 일이었지만, 그건 평원에서 진을 쳤을 때나 시도해볼 법 했지, 지금 같은 상황에서 시도하기는 힘들었다. 게다가, 이 코끼리가 등장하는 모습을 보건데 마법의 영향으로 목표물은 확실히 카프래이스로 고정하고 돌진해오는 것 같았다. 웬만한 충격, 가장 민감한 부위인 코를 건드리는 것 이상의 충격을 주지 않는 이상 녀석을 혼란시키는 건 불가능했다.

 

 "으아악!"

 

  이렇게 비장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돌격해도, 웬만한 코끼리 코의 세배 이상의 두께, 그것도 거대한 뿔 때문에 체감 상으로는 일곱 배 이상의 무게감을 자랑하는 코가 나를 향해 날아오는 상황에서는 외마디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저 코를 보고 나서 다시 내 낫을 바라보니 낫이 너무 연약하게 보이기도 했다. 이걸로 저 코를 자르는 게 가능한지 조차 의심이 갔다. 그나마 코끼리가 몸으로 성문을 막고 있어서 어떤 적도 성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 다행이었다.

 

 "장군님, 물러나세..요... 이- 일단 무울러나서 생각을..."

 

  리드라가 다시 혼란 상태에 빠진 것 같았다. 나는 저 병사는 공황장애만 조금 고치면 훌륭한 군인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뭐, 공황상태에 빠지는 것도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은 아니었다.

 

 "적당한 타이밍에 잘 물러났어, 은빛섬광. 하지만 난 저 빙빙 거리는 코를 잘라내야 한단 말이야."

 

 "히히히힝!"

 

 내 말은 동의할 수 없다는 눈치였다. 하지만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맞아 마치 피톤을 상대하는 것 같지? 하지만 걱정마 적어도 저 코는 독은 내뿜지 않으니까."

 

  말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듯 나를 흘겨보더니 결심을 굳힌 듯 다시 코끼리에게 돌진했다. 나는 욕심을 부리지 않기로 했다. 끝의 부분, 끝의 뿔 달린 부분만 조금 잘라내면 되는 거였다. 왜 이렇게 자주 동물에 의해 목숨에 위협을 받는 건지 의문스러웠지만, 어쩌면 그게 내 운명인지도 몰랐다.

 

 "으랴앗!"

 

  평생 내질러 본 적 없는 이상한 괴성을 내지르며 낫을 휘두르는 순간, 기분나쁜 손맛이 느껴졌다. 낫이 어딘가에 깊숙이 파고 들어갈 때, 나는 끝까지 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손에 힘을 주었고, 낫은 더욱 깊숙이, 더더욱 깊숙이 파고 들어가... 반대편으로 튀어나왔다. 확실히 내가 무언가를 베어낸 것이 틀림없었다.

 

 "뿌우우우우우우우우우!"

 

  귀를 찢을 듯한 괴성이 들렸다. 코끼리 코의 끝부분은 완전히 떨어져나가지는 않고 너덜너덜한 상태였지만, 민감한 부위를 공격당한 녀석은 고통에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코를 위로 강하게 올려쳤다. 순식간에 성문 위쪽의 성벽이 산산이 무너졌고, 그 잔해가 공중에 붕 떠올랐다 바닥으로 떨어졌다.

 

 "으아악!"

 

 "사, 살려줘!"

 

  아직까지는 교착상태일 뿐 인명피해는 없던 공방전에서, 첫 성벽이 무너져내림과 함께 무너지는 성벽에 맞아 죽는다는 형태로 이어질 카프래이스 군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결과적으로, 내 판단은 틀리지는 않았다. 한번 코를 위로 치켜 올림으로써 인명피해가 발생하긴 했지만, 코끼리는 이내 성 안으로 밀고 들어오려는 대신 맘껏 뛰어다니며 고통을 진정시킬 수 있는 후방으로 방향을 돌렸다. 검은 바위 형상들은 최대한 코끼리를 피하려는 모양새였지만, 그것들조차 미쳐 날뛰는 코끼리를 제어할 수는 없었다. 아마 지금까지 우리가 죽은 수의 절반 정도는 될 법한 수의 적들이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사라져갔다. 성 앞에서 날뛰는 코끼리 때문에 성벽이 무너졌음에도 적들은 쉽사리 다가오지 못했고, 그 사이 우리는 다시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다. 나는 남은 기병대로 진을 치고 프릭스턴이 쳐 놓은 방패 벽 뒤로 진영을 이동했다. 가장 우선적으로, 나는 낫을 내려놓고 내 창을 집어 들었다.

 

 "뿌우우우!"

 

  코끼리가 저 멀리 뛰어가 버림에 따라 코끼리가 지르는 괴성이 옅어졌다. 마음 한편으로는 안도했지만, 동시에 이것이 적들의 본격적 공격이 시작될 것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이제 뚫린 성벽을 막아줄 코끼리가 없었다.

 

 "발사!"

 

  프릭스턴의 명령에 방패 벽 뒤에 숨어있던 궁수들이 화살을 쏴서 적들의 접근을 어느 정도 막아냈다. 하지만 애초에 숫자가 역부족이었고, 화살을 맞고도 멀쩡히 걸어오는 녀석도 반 이상이 넘었다. 방패 벽을 이루는 병사들은 정통 방식대로 날카로운 창날을 앞으로 세워서 적들을 막아보려 했지만, 그 방식으로 바위 군단을 막는 것은 인간을 막는 것보다도 훨씬 힘들었다.

 

 "그냥 바로 전투에 돌입하는게 좋겠네."

 

 어느 새 말을 타고 내 옆에 나타난 왕이 충고했다. 나는 왕의 조언을 받아들여 소리쳤다.

 

 "프릭스턴! 방패벽을 갈라!"

 

 "방패벽을 갈라라!"

 

  대략 비슷한 판단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 프릭스턴이 곧장 내 말을 받아들였다. 뒤에 있는 기병대가 곧장 돌격할 수 있도록 방패벽이 반으로 갈라졌고, 적과의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궁병들은 서둘러 뒤로 이동해 기병 진형 뒤로 숨었다. 궁병들이 모두 자신의 자리를 잡자, 나를 필두로 한 기병대가 앞으로 튀어나갔다. 베어르가 기병 전력의 반 이상을 데리고 간 터라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남은 병력이 보통 장교급 이상의 베테랑들이라 전투력 하나는 알아줄 만 했다.

 

 "어떻게든 막아내라! 어떻게든 적이 밀려드는 걸 막아야 한다!"

 

  내가 외쳤지만, 사실 별 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전장에서 지휘관이라면 무언가를 외쳐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다. 외치는 것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사기증진에 있어서는 더 큰 영향을 발휘했다. 하지만, 아무리 아무리 적을 쓰러뜨려도 검은 바위만이 우리를 둘러쌀 뿐 상황에 진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지금은, 부하들에게 무언가를 '보여주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끄악!"

 

 "으으윽!"

 

  적들은 비명을 지르지 않았기 때문에, 비명소리가 늘어난다는 것은 아군이 지쳐가고 있고, 그로 인해서 점점 쓰러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적들은 강하지는 않았다. 아, 적어도 적군 하나하나는 한명의 인간 병사보다 강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들에게는 무기가 없었고, 싸우는 방법도 묵직한 주먹으로 상대를 후려치는 방법으로 상당히 단순했다. 바위라고는 하지만 여러 개의 바위로 연결된 형태라서 그 사이를 잘만 찌르면 바로 가루가 되어 분해되는 터, 어떤 관점에서도 적 하나하나는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몇 시간의 격전이 이어지다보니 모두가 지쳐가기 시작했고, 나도 서서히 말에 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사실 육체적으로 힘든 것보다도, 정신적 부담이 육체에 내려앉은 것이 더 크다고 볼 수도 있었다. 적의 진영을 깨부수는 상황에서는, 몇 시간을 싸워도 몸이 피로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끝 없는 적을 의미없이 베어내는 행동은, 단 한 시간만으로도 엄청난 피로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프리오스, 뒤로 물러나게. 잠깐 교대를 해야겠어."

 

  왕의 명령이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바로 전 기병대에게 후퇴를 명령하고 뒤로 물러섰다. 불행히도, 나를 따라 퇴각할 수 있는 기병도 이백 명을 넘지 못했다.

 

 "발사!"

 

  우리가 뒤로 물러나는 순간, 우리가 모르는 사이 계단 위쪽 고지대를 점하고 있던 궁병들이 화살을 쏟아 부었다. 이번에는 다른 성벽 위에서 대기하던 병력들과 궁기병들까지 모조리 합류해서 조금 더 화력이 상승했고, 심지어는 활을 못 쏘는 병사들까지도 3분여 동안 속성 활쏘기 강의를 받은 뒤 투입되었기 때문에 적어도 우리가 잠시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틈은 마련해주었다. 하지만 곧 화살 수급에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성 내의 화살이 다 떨어진 건 아니었지만, 전투에 동원될 인력도 부족했던 터라 창고에서 여기까지 화살을 나를 사람이 부족해진 것이었다. 즉, 한 성 내에서도 보급 문제가 발생할 정도로 상황은 처참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지금 남은 병력이 얼마나 됩니까?"

 

 내 질문에 왕은 어께를 으쓱했다.

 

 "자네는 맹렬히 싸웠지만, 그 정도의 전투력을 가진 전사를 자네뿐이었다네. 자네가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이미 2000여명이 전장에서 쓰러졌어."

 

 "....아직 만 명 정도는 더 동원할 수 있겠지요? 성 전체를 쥐어 짜내면 말입니다."

 

 "그래서 이미 5천명이 저 위에서 맹렬히 활을 쏴대고 있지 않나. 하지만 저들이 계단 위에서 아무리 맹렬히 화살을 쏴대도, 적들이 계단 위로 올라와 성 전체를 뒤덮는 건 시간문제야. 만 명? 이미 2천의 기병을 대피자들 보호를 목적으로 성 밖으로 내보냈네. 물론 그게 틀린 선택이라는 건 아냐. 그들이 여기 있어도 상황이 달라질 리는 없겠지. 그 이상의 병력을 동원하는 건 불가능하다네. 만 명이라는 건 카프래이스가 가장 융성할 때 보유했던 전체 병력의 수야. 그런데 비해서 우리는 적의 숫자를 가늠할 수가 없다네. 수만일지도 몰라. 수십만일지도 모르지. 아무래도 끝이 없는 걸로 봐서는 수백만일지도 모르네."

 

 "...."

 

 "만 명은 많은 숫자지. 그건 맞아. 하지만 난 그거에 만족할 수가 없었네. 북방의 황제는 수십만의 병력을 거느렸다는 소문까지 있고, 큰 전쟁에서는 십만의 병력을 동원한다는 소문도 있는데, 고작 일만을 이끌고, 수십 개 도시의 지배자도 아닌 고작 맹주 노릇을 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어."

 

  이 말을 어떻게 들어야 할 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지금 이 순간이 국왕과 신하로서의 예의가 필요한 순간은 아니라는 사실은 알아차렸다. 나라가 멸망해가는 순간, 왕은 나에게 한 명의 사람으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내가 느꼈던 공포였지. 프릭스턴을 보는 순간 든 공포. 북방의 황제가, 그리고 그 괴물들이, 우리를 집어삼킬지도 모른다는 공포였어. 세상엔 우리보다 강력한 존재가 많아, 프리오스. 레셈블에서 살아왔다면 그것을 알거라고 생각하네. 내가 마법사들을 보는 순간 든 공포를 이해하겠나? 우리보다 강력한 존재가 우리를 지배하려 들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태생적으로 우월한 존재가..."

 

 왕은 설명하기를 주저했다. 더 깊은 설명을 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아챈 듯 했다.

 

 "그래, 이 도시는 멸망할 거야. 그건 알고 있네. 그리고, 자네는 이곳을 탈출하겠지."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명령이니까."

 

 왕이 결의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이 나라는 여기서 멸망해서는 안 돼. 자네가 말한 시민들의 대피령에 내가 찬성한 것도 그 이유라네. 나는 결코 포기하지 않을 거야. 아니, 나는 포기하겠지. 나는, 내 역량으로는 이미 망해버린 이 도시를 되살릴 자신이 없네. 하지만 누가 이런 짓을 벌인 것이든, 왜 이렇게 된 것이든, 누군가가 이 문제를 해결하고, 내 뜻을 재건해주길 바란다네. 적어도, 이 카프래이스 만큼은 남아주기를... 그것이 내가 포기하지 않는 방법이지. 후계자를, 결정하는 것."

 

 "본인이 직접 살아나가시면 되지 않습니까?"

 

 내 말에 왕이 허탈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내 주름이 보이지 않나? 설사 내가 살아나가도 내 생전에 내 뜻을 이루지는 못할 게 확실하네. 그럴 바에는, 내 도시와 함께 몰락하는 게 낫지."

 

 나는 그의 뜻을 이해할 것도 같았지만, 동시에 이해할 수 없었다. 적어도, 내가 왕이라면 다른 선택을 할 것 같았다.

 

 "군말 말고 받게. 카프래이스의 보검이네. 왕의 상징이지. 이제부터 왕은 자네야."

 

 "네?"

 

 '후계자' 얘기를 꺼낼 때부터 대충 예상은 했지만, 난 그저 그가 나에게 '책임을 가지고 왕국을 보건해주길'바라는 유언을 남길 거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파격적으로 갑자기 왕권의 상징을 넘기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받게. 이 이상 대화가 길어지면 적들이 공격해올 거야."

 

  나는 그가 내민 검을 받아들었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검집에는 멋들어진 용 문양이 양각으로 조각되어 있었고, 오랜 세월을 내려왔다고 전해지면서도 전혀 녹슬지 않은 빛깔은 이 검이 과연 오래되기는 한건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했다. 나는 검을 뽑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검집만을 품 안에 넣은 채, 다른 검을 뽑아들고 나랑 함께 빠져나온 수십 명의 기병과 함께 적들을 향해 돌격하는 왕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별안간, 왕이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생각나는군. 검이 부담스러우면, 말이네,"

 

  그 순간, 검은 바위 병사 하나가 왕의 얼굴을 후려쳤고, 왕이 그 자리에서 낙마했다. 정신을 딴 곳에 팔았기 때문에 일어난 참사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그가 말 위에서 버티기에는 너무 노쇠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시...에..라..."

 

  왕이 이 말과 함께 말에서 떨어지자 다른 기병들이 바로 왕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자신들또한 전장에서 고립되어버린 상태인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때문에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내가 달려가 주변의 적들을 모두 물리쳤을 때는 이미 왕의 몰골은 처참해진 상태였다. 위대한 왕은 그렇게 쓰러졌다. 정말이지, 비범한 인물들의 최후는 그 비범함에 어울리지 않게 어이없는 경우가 많다.

 왕이 쓰러지자 더 볼 것도 없었다. 나는 은빛섬광을 자리에 세워두고 계단 위에서 궁병들을 지휘하던 프릭스턴을 찾아갔다.

 

 "폐하께서 서거하셨어."

 

 "알고 있지. 이 위에서는 저 아래에서보다 더 잘 보이니까."

 

 "그런 것 치고는 궁수들이 흐트러짐이 없군."

 

 "이미 모두 죽음을 각오했으니까. 이들은 군인이면서도 이 도시의 시민이야. 이미 도망간 자신의 가족들에게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칠 준비가 되어있지. 왕 또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그냥 그러려니 할 뿐이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프릭스턴의 눈에는 어느 정도 눈물이 맺혀있었다. 그가 왕과 어느 정도 친밀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착잡한 감정이 마음을 짓누르는 나로서도 어이가 없는 전쟁 상황 자체가 주는 압박감 때문인지 눈물을 흘릴 만큼의 슬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 중에서 말을 탈 줄 아는 자가 있나?"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프릭스턴은 성심성의껏 답하려고 했다.

 

 "저 아래에 기병들을 제외하고는 없을 거야. 기병들의 상황이 어려워지니까 말을 탈 줄 아는 궁기병들은 모조리 말에 태워서 아래로 내보냈거든."

 

  그러고 보니, 아래쪽에서 싸우는 기병의 수가 내가 데리고 빠져나온 수보다도 조금 더 많아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저런 자들이 아니었다.

 

 "최고의 기병이어야 해. 저들은 영 못미덥군."

 

 "또 다른 베어르를 기대하는 거라면, 기대를 접어. 그 자는 최고의 기병중 하나였어. 지적 능력과 전투력을 그렇게 골고루 갖춘 훌륭한 군인은 흔치 않아."

 

 "...너도 내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기병 대장이었지?"

 

 ---------------------------------------------------------------------

 

  나는 프릭스턴을 데리고 전차 보관실로 달려갔다. 베어르는 총 두 대의 전차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 중 하나는 이미 망가져서 거의 못쓰게 된 상태였지만, 아직 꺼내지 조차 않은 전차 한대가 더 남아있었다.

 

 "무슨 생각이지?"

 

 은빛섬광에다가 자신의 말까지 끌고 온 나를 보고 프릭스턴이 날카롭게 물었다.

 

 "본론부터 말하지. 난 살아나가야 해."

 

 ".....솔직히 나도 그러고 싶어."

 

 프릭스턴은 겉으로만 보기에는 그 소심함이 별로 드러내지 않는 남자였지만,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언제나 소극적이었다.

 

 "난 살아나가고 싶은 게 아니라, 살아나가야 하는 거야. 폐하께서 내게 대업을 맡겼어."

 

 이 말을 하며 품 안의 왕의 검자루를 살짝 들어 올리는 순간, 프릭스턴이 눈을 크게 떴다.

 

 "그....그런다고 내가 너를 왕으로 모실 거라는 생각은 말도록....해.... 그... 뭐냐... 폐하의... 시신에서...."

 

 "뺏었을 수도 있다고? 높은 곳에서 봤으니 잘 봤다며? 내가 그런 짓을 하는 게 보였나?"

 

 ".... 아니 솔직히 폐하께서 돌격하기 직전에 네게 무언가를 건네주는 건 보았지. 설마 했는데, 폐하는 상상 이상으로 대담한 분이셨군.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대의를 위해 자신의 권위를 선뜻 속국 출신의 장수에게 건내줄 생각을 하다니. 그래, 그럼 내가 왕으로 모셔주기를 바라나?"

 

 "나라가 망해가는 순간에 왕으로 불리는 게 기분 좋을 거 같진 않군."

 

 내가 은빛섬광을 전차에 묶으며 말했다. 프릭스턴은 내 말의 의도를 서서히 깨달아가는 것 같았지만, 무척 의심스러운 표정이었다.

 

 "설마, 전차를 타고 탈출하겠다고?"

 

 "그런 샘이지."

 

 "미친 생각이야. 소위 말하는 '뒷문', 즉 비상통로에 뭘 기대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전차가 통과할 만한 높이는 못 돼. 기병도 말에서 내려서 이동해야 한다고."

 

 "아니, 그곳으로 가서는 안 돼. 시민들이 빠져나갈 때는 군대가 시선을 끌어줄 수 있었지만, 지금은 군대가 거의 전멸했을 거야. 괜히 그곳으로 빠져나가다간 우리가 되려 적들을 시민들에게 인도하는 꼴이 될 수도 있어. 우린 정문으로 탈출한다."

 

 프릭스턴이 다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래도 동의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살아나가고 싶다며?"

 

 "....인정할 수밖에 없군."

 

 프릭스턴은 자신에게 더 좋은 방법이 없음을 시인하고는, 자신의 말을 전차에 묶었다.

 

 "리드라를 데려오지. 아까도 계속 지켜봤는데, 말단 병사에 있는 게 아까운 인재였어. 평소에 봤을 때는 영 못미더웠는데, 활을 쥐면 사람이 변한단 말이지. 전차를 지키고 있어, 프리오스. 곧 돌아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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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와 프릭스턴이 창을 들고 말을 몰며, 리드라가 석궁을 든 채로 전차를 몰고 성의 정문 앞까지 달려갔을 때, 나는 적어도 모종의 전투가 진행되고 있기를 희망했다. 내 바람은 빗나가버렸다.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전투는 막바지, 즉 우리 편의 전멸로 다가가고 있었다. 몇몇 병사들은 완전히 포기하고 정문, 혹은 후문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이미 적들로 앞뒤가 막혀 버린 상태였다. 몇몇은 전차를 탄 우리를 보고 같이 올라타려 했지만, 우리도, 그 병사들도 서로에게 접근할 수가 없었다. 한 마디로, 완전히 패배한 상황이었다.

 

 "내가 리드라를 여기에 태운 것만 해도 기적이야."

 

 한결 수척해진 프릭스턴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지만 저희가 프리오스 장군님께 돌아왔을 때는 상황이 이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전차를 정비하는 데에 걸린 단 두 시간 만에 상황이 이 정도로 악화되었다는 건.... 두렵군요."

 

 "모든 걸 잊어. 우리는... 매정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우리라도 빠져나가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다. 리드라, 행운으로 알게. 자네는 자네의 그 훌륭한 활솜씨로 목숨을 구한 샘이야. 어디에건 특출난 재주만 있으면 보답을 받는 법이지."

 

 "정말 감사합니다."

 

 그가 부담스러운 듯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돌격하지."

 

 프릭스턴이 소심하게 제안했다. 나는 지금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때라고 여겼다.

 
작가의 말
 

 어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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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001-전차 2018 / 1 / 20 197 0 9354   
1 서문-프리오스의 회상 2018 / 1 / 20 352 0 5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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