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비서님. 정말 연애경력 3회 맞아요? 3초 아니에요? 친구도 못할 뻔 했잖아요!”
지훈은 출근하자마자 도철에게 따져 물었다. 지훈은 본인이 어설픈 것도 한몫 했다는 건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모든 걸 도철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아잇 저도 모르게 더 사귀었으면 더 사귀었지 세 번은 확실해요.”
도철은 자신 있게 대답했지만 사실 그의 연애경력은 형편없는 것이었다. 연애경력 3회. 그것은 중학생 때 3달, 대학생 때 반 년, 서른 넘어 간 클럽에서 번호 딴 여자랑 4달 만난 것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나마 실제 데이트 횟수를 세어 보면 총 100번도 안될 것이었다. 진지하게 사랑한 횟수로 따지자면 도철은 아직도 모태솔로다. 그러니 도철의 조언은 순 엉터리일 수밖에. 그의 조언들은 전부 어디서 주워들은 것들이었다. 엉터리 조언에 지훈의 어설픈 연기까지 합쳐지니 대재앙은 예견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분위기 완전 엉망인데 어쩔 거예요. 여자들이 나쁜 남자 좋아하는 거 확실해요? 내 생각엔 그게 최악인데.”
“그...간혹 착한 남자만 좋아하는 여자도 있긴 있...”
도철이 슬쩍 말을 바꾸자 지훈은 태어난 이래 가장 무서운 표정으로 도철을 째려봤다. 도철은 지훈의 매서운 눈길을 피해 말을 돌렸다.
“테스토스테론 뿜뿜하는 힘자랑은 어떠세요? 요즘 야시장 가면 기왓장 격파 이벤트 같은 거 하던데. 기왓장 20장정도 깨면 여자들이 막 멋있다고 난리일걸요.”
“테스토스테론은 내가 더 많겠지만 힘은 여주가 더 세요. 내가 기왓장 20장을 깨면 여주는 그 기왓장 밑에 시멘트바닥까지 뚫을 걸요.”
“전무님이 좋아하는 여자라니까 분명 아름다운 분이시겠지만...그건 괴물 아닌가요?”
지훈은 태어난 이래 두 번째로 무서운 표정으로 도철을 째려봤다. 다른 남자가 여주 욕을 하는 건 싫었다.
“농담입니다 전무님.”
“이제 어떻게 하면 되는 지나 알려줘요. 일이 이 지경인데 애프터서비스는 해줘야죠.”
도철은 골똘히 생각하다가 박수 한 번을 짝 소리 나게 치고 검지를 치켜들었다.
“선물 공세.”
“선물 공세?”
“아무리 부자여도 여자들은 선물에 약한 법이에요. 가방이나 구두나 옷 같은 거.”
“여주는 가방을 잘 안 가지고 다녔던 거 같은데...구두도 안 신고. 옷은...좀 못...아니 특이한...”
“여자가 가방이랑 구두가 없다구요? 정말 특이한 분이네. 설마 싫어서 안 가지고 다니는 건 아니겠죠.”
“글쎄 취향 같은 건 잘...”
“그럼 무난하게 꽃바구니로 시작하죠. 미안했다고 하면서 꽃바구니 배달시키세요. 관계가 좀 회복되면 취향을 알아낼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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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얘는 점심을 언제 먹는 거야. 왜 이렇게 안 내려와.”
솔희는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고 호텔 로비에 앉아 지훈이 내려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지훈을 꼬시려면 슬슬 사전 조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지훈이 밥을 먹는 동안 옆에서 지켜보며 때를 노리려는 수작이었지만 지훈은 도철과 지하에 있는 호텔 직원식당에서 이미 밥을 먹은 후였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솔희는 혹시나 자신과 밤을 보냈던 남자들과 마주칠까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위에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 쪽을 계속 흘끗댔다.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나고 있었다.
“메인 꽃은 뭘로 하는 게 좋을까요?”
“클래식 이즈 더 베스트. 장미죠.”
지하에서 올라온 지훈과 도철은 여주에게 보낼 꽃을 고르러 1층에 있는 플라워 샵으로 가는 중이었다. 솔희는 주린 배를 움켜잡고 두리번대다 지훈을 발견했고 조용히 뒤를 밟았다.
“여주가 장미를 좋아하려나. 별로 로맨틱한 성격은 아닌데.”
“여자는 무조건 장미예요. 빨간색 장미가 평타는 쳐요.”
지훈과 도철은 솔희가 따라오는 줄도 모르고 정보를 줄줄 흘리며 플라워 샵으로 들어갔다. 솔희는 덩달아 샵 안으로 들어가 꽃을 사러 온 손님인 척 서있었다.
“좀 급한데 오늘 퇴근시간 전까지 꽃 배달 될까요? 회사로 보낼 거라.”
“네. 가능합니다.”
“꽃 추천 좀 부탁드려요.”
지훈은 솔희를 발견하지 못하고 꽃에만 정신이 팔려있었다.
솔희는 ‘오늘’, ‘퇴근시간’, ‘회사’ 라는 단어를 듣고 후다닥 플라워 샵을 빠져나왔다.
‘아까 여주 어쩌고 하더니 오늘 퇴근시간 전 회사로 보낸다면 JUNE식품으로 꽃 배달이 간 다는 뜻이다!’
솔희는 호텔 밖으로 나가 택시를 잡고 JUNE식품 본사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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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씨 화장실 가고 싶은데 배달은 언제 오는 거야.”
솔희는 점심도 먹지 못하고 쭉 JUNE식품 본사 정문 앞에서 꽃 배달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훈이 보낸 꽃 배달이 오면 여주에게 가기 전 가로채기 위함이었다. 배고픔과 추위, 방광과의 사투가 한참인 그때 드디어 퀵 배달 오토바이가 솔희 눈에 띄었다. 퀵 배달 기사는 꽃바구니를 들고 뛰어오고 있었다.
“저기요! 꽃 배달!”
솔희는 동동거리던 발을 멈추고 여유로운 모델 걸음으로 퀵 배달 기사에게 다가갔다.
“왜요?”
“그 꽃 여기 사장 김여주한테 온 거죠? 제가 김여주예요. 저 주시면 돼요.”
솔희는 꽃바구니에 손을 뻗었지만 기사는 꺼림칙한 표정으로 꽃바구니를 쥐고 넘기지 않았다.
“사장실로 배달하라고 돼 있는데...진짜 사장 맞아요?”
“제가 사장 맞아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인 거 안 보여요? 애인이 꽃을 보냈다는데 빨리 받고 싶어서 마중 나온 거예요. 빨리 줘요. 들어가게.”
기사는 뭔가 찜찜했지만 솔희의 옷차림을 보니 확실히 명품은 맞는 것 같았다. 설마 비싼 명품 두른 사람이 꽃 도둑은 아니겠지. 기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저하는 손길로 솔희에게 꽃을 넘겨주었다.
“여기 싸인요.”
솔희는 여주의 싸인을 몰랐기 때문에 정직하게 한글로 ‘김여주’라고 적었다. 배달 기사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계속 흘끗대자 솔희는 회사 건물로 들어가는 척을 했다. 회사 로비에 살짝 발만 들여놓은 솔희는 배달 기사가 떠난 것을 확인하고 다시 밖으로 나와 꽃바구니 속 메모를 읽었다.
“여주야 그땐 내가 미안해 우리 화해하자? 싸웠나? 뭐 아무튼. 바라던 로맨틱한 화해는 없을 거야.”
솔희는 지훈이 쓴 메모를 끝까지 읽지도 않고 쭉쭉 찢어 땅에 버렸다. 그리곤 지훈이 한 송이 한 송이 소중히 골라 만든 꽃바구니에 코를 박아 향기를 맡으며 JUNE식품 본사 앞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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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퇴근했어? 나 지금 가도 될까?
여주-집 도착하려면 조금 남았어. 한 10분 있다가 와.
지훈-꽃은 받았어?
여주-뭔 꽃?
지훈-회사로 꽃 배달 안 갔어?
여주-안 왔는데?
“뭐야 이거. 그럼 내 꽃은 누가 가져간 거야.”
지훈은 꽃을 받지 못했다는 여주의 답장을 보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다 벌떡 일어나 1층 플라워 샵으로 향했다.
“꽃다발 빨리 최대한 예쁜 걸로! 여기 있는 것 중에 예쁜 건 다 담아요!”
플라워 샵 직원은 패닉에 빠진 지훈 때문에 덩달아 조급해져 허둥대며 꽃을 골랐다. 예쁜 꽃을 노리는 경쟁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별로 급할 것도 없었는데 말이다.
지훈이 꽃다발을 들고 호텔을 빠져나가 택시를 잡던 그때 차를 타고 퇴근 중이던 박인수 사장은 지훈을 발견하고 혀를 찼다.
“쯧쯧쯧 저 모자란 놈...아직도 로맨스 영화 찍는 중이네. 잠은 어디서 자는지 원.”
지훈을 바라보는 박인수 사장의 시선엔 한심함이 50%, 답답함이 30%, 애잔함이 19%, 애정이 1%정도 담겨 있었다. 아무리 엄해도 아버지는 아버지니까. 그러나 박인수 사장 옆에 앉아 있던 상훈은 꽃다발을 든 지훈을 보고 짜증 100%로 인상을 찌푸렸다. 꽃다발 주인이야 뻔했으니 방해꾼인 상훈 입장에서는 신경질이 날 수밖에 없었다.
**
“여주야 나야.”
삐익 하는 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리고 지훈은 꽃다발을 등 뒤에 숨긴 채 집안으로 들어갔다.
“어제 미안했어!”
지훈은 여주를 보자마자 꽃부터 내밀었다. 너무 격하게 내미는 바람에 튀어나온 꽃이 여주의 얼굴을 찌른 것도 몰랐다.
“아윽 꽃은 좋은데 꽃으로 코를 쑤시는 건 좀.”
“아아 미안!”
여주는 꽃다발을 받아 거실 탁자에 올려놓았다. 딱히 웃어주지는 않았지만 내심 꽃 선물을 받으니 기분이 좋았다.
“오글거리게 꽃까지 사왔으니 어제 일은 없던 걸로 치자.”
여주는 괜히 다른 곳을 쳐다보며 말했다.
“원래 친구 싸움은 칼로 물 베기래.”
지훈은 여주의 기분이 풀린 것 같아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거 부부일 걸 아마.”
여주는 지훈의 말실수가 웃겨 피식 웃었다. 두 사람이 같이 웃으니 왠지 모르게 거실이 따듯해지는 느낌이었다.
**
“아버지. 이제 지훈이 들어오라고 하시는 게 어때요?”
상훈은 인수와 저녁식사를 하며 넌지시 물었다.
“네가 지훈이 걱정을 다 해?”
“그럼요. 제 동생인데. 친구도 없는 녀석이 어디서 지내는 지 걱정되잖아요. 이제 들어오라고 하세요.”
상훈은 언제나 그렇듯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사실은 지훈이 여주와 한 집에 있는 것이 신경 쓰였을 뿐이었다.
“제 발로 나갔으니 제 발로 들어와야지. 내가 레드카펫이라도 깔아놓고 기다려야 되냐?”
인수는 내심 지훈이 돌아오길 기다리면서도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는 자존심이 굉장히 센 사람이었다. 상훈과 지훈이 미취학 아동이었을 때도 게임 한 번 져준 적이 없을 정도이니 지훈에게 들어오라고 먼저 말을 꺼낼 리가 없었다.
“아버지만 허락 하시면 제가 들어오라고 할게요.”
상훈은 아버지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내심 아들들을 신경 써도 내색은 않는 사람이니 옆에서 살짝만 맞춰주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상훈이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혼이 나도 주눅이 들지 않았던 이유는 이렇게 발달된 눈치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생각을 다 읽고 있으니 그가 무섭지 않았던 것이다.
“네 마음대로 해.”
인수의 대답에 상훈은 속으로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상훈은 저녁식사가 끝나자마자 방으로 가 지훈에게 문자를 보냈다.
상훈-내일부턴 집으로 퇴근해. 아버지 허락 떨어졌어. 허락 떨어지고서도 안 들어오는 건 용서받지 못할 반항이란 거 알지?
지훈은 여주와 저녁을 먹던 중 상훈의 문자를 받았다. 지훈은 내심 아쉬웠다. 여주와 사이가 좋아지자마자 집으로 돌아가야 하다니.
“회사에서 온 문자야?”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진 지훈을 보며 여주가 물었다.
“내일부턴 집으로 퇴근하래. 아버지 화 풀리셨나봐.”
“잘 됐네. 근데 표정이 왜 그래?”
“그냥...아쉬워서.”
“뭐가?”
“너랑 같이 있으면서 즐거웠는데...”
“심심하면 연락해. 친구로서 같이 놀아줄 순 있으니까.”
“연락하면 만나줄 거야?”
“특별한 일 없으면 물론 만나지. 너무 자주는 말고.”
지훈은 여주의 말에 약간 기분이 풀려 배시시 웃었다. 친구로 선을 긋더라도 일단은 만남에 호의적이라는 게 지훈에겐 중요했다.
**
“동생이라면서 취미나 취향 같은 것도 몰라요?”
“어릴 때부터 별로 안 친한 형제였어.”
상훈과 솔희는 바에서 만나 긴급대책회의 비슷한 것을 하고 있었다.
“그럼 어떻게 꼬시라는 거예요? 스토킹이라도 하라구요?”
“꼬시는 건 네 전문인데 왜 나한테 물어? 지금까지 꼬신 남자들은 다 스토킹으로 꼬셨나?”
“보통 남자들은 내가 작업을 걸기도 전에 먼저 나한테 와서 말을 걸어요. 근데 그쪽 동생은 내가 대놓고 끼를 부려도 당최 안 넘어왔다니까요. 고자인지 정절을 지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집안에 고자는 없어. 네가 충분히 매력적이지 않으니까 안 넘어갔겠지.”
상훈은 비아냥거리며 비소를 짓고 양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지금 나를 모욕하는 거예요? 내가 매력적이지 않다는 게 말이 돼? 지금도 내 뒤에 남자들이 나 쳐다보는 거 다 느껴지는데.”
솔희는 버럭 화를 냈고 솔희 말대로 솔희를 흘끔거리던 남자들은 뜨끔하여 시선을 돌렸다.
“아니면 그놈의 성질머리를 알아보고 지훈이가 피하는 거 아냐? 떽떽대는 여자는 매력 없어.”
상훈은 여전히 잘난 체하듯 웃으며 솔희의 속을 긁었다. 솔희는 기가 찬다는 듯 허허 웃더니 반격을 시작했다.
“얼마나 여자들한테 눈웃음을 치고 다녔는지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여덟 살이나 어린 동생이랑 경쟁한다고 이렇게 뒤에서 계략이나 꾸미는 늙은 남자도 매력 없죠. 그래서 김여주인가 뭔가 그 여자가 당신한테 안 넘어온 거겠지.”
솔희는 따발총처럼 팩트폭격을 가했다. 내내 여유롭던 상훈의 얼굴에도 일순간 금이 갔다. 솔희나 상훈이나 이성을 사로잡는 데에는 묘한 자부심 같은 것이 있던 터라 그것을 건드리면 성질이 뻗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