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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공포물
경성크툴루
작가 : 최믹하
작품등록일 : 2017.11.17

경성에서 일어나는 수상한 일들, 괴력난신 소녀와 유학파 탐정사무소 소장님이 진실을 파헤쳐갑니다.

 
스토커의 죽음 (2)
작성일 : 17-12-27 23:41     조회 : 652     추천 : 0     분량 : 9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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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자, 그럼 시작해볼까, 설마 의리왕 다복님이 이야기만 듣고 홀랑 의리를 저버리진 않겠지요~?”

 “수작 부리지 말구 얼른 이야기나 시작하시유.”

 

 준 상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싹싹한 애교를 이렇게 매몰차게 끊어버릴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나는 부러 더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뭐, 음.”

 “시무룩하시구먼유.”

 “아냐.”

 

 준 상은 엄청 시무룩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중학교 시절이니까, 지금으로부터 꽤 오래 전 이야기지. 10년 전쯤 되었어.”

 “중학교면… 보통학교랑 비슷한 거유?”

 “아, 내지는 조선이랑 학교 편제가 다르지. 참. 소학교 다음이 중학교야. 소학교가 보통학교랑 비슷한 거고.”

 “어렵구먼유.”

 “미안. 내지인이라.”

 

 아주 갑작스럽고, 여러가지가 섞인 것 같은 사과였다. 준 상은 뭔가 더 말하는 대신 약간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나중에 조선과 일본의 학교 편제에 대해 소장님에게 물어보니, 준 상이 그런 표정을 지은 것도 이해는 갔다. 조선과 일본의 학교 편제가 다른 것은, 조선인들이 일본 교육기관에서 고등교육을 받는 것을 어렵게 하려는 의도라고 했다. 그래서 소장님도 고등학교를 다니기 위해 중학교부터 들어가 중학교 졸업장을, 고등학교 입학 자격을 얻었어야 했던 시절이라고.

 물론, 그런 걸 알 도리가 없는 당시의 나는 ‘저 인간이 왜 저러나’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헬렌이랑 시즈카짱은 고등학교 진학 자격을 얻으려고 중학교에 전학해서 5학년을 다니고 있던 중이었어. 나는 그 때 고등학생이었지.”

 “소장님보다 연상이었슈?”

 “내가 너무 젊어보여서 몰랐구나?”

 

 헛된 수작과 이어지는 무시.

 

 “다복짱은 별로 인정해주지 않지만, 어쨌든 당시에 나는 동네에서 꽤 유명인이었어.”

 “괴짜?”

 “놀랍게도, 잘생긴 괴짜였지.”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슈, 알았슈. 그만 해도 돼유. 준 상이 잘 생겼다고 말하라는 거지유?”

 “아냐, 아까까지는 장난이었지만, 이건 그냥 사실 이야기야.”

 

 살짝 손을 저으며 말하는 준 상의 표정이, 이번에는 여태처럼 장난치는 것이 아니라 좀 쑥스러운 표정이었다. 진심인 듯 싶다.

 

 “나는… 혹시 내가 이상해 보일까 봐, 남들과 다르다는 것이 들통날까 봐 어릴 적부터 열심히 씻고, 잘 꾸미고, 열심히 웃기도 했으니까…

 게다가 나는 다른 사람의 마음 속 소리가 들릴 때도 있었고… 그런 사람들에게는 상냥하게, 듣고 싶거나 필요한 이야기를 해주기도 했고. 사람이 이상한 행동만 하다가, 갑자기 속마음을 읽는 것처럼 상냥하게 행동하면 ‘이상해보이지만 사실은 좋은 사람’ 같은 평가를 얻게 되거든.

 뭐, 실제로 좀 상냥하기도 하고.”

 

 상대의 마음을 읽는다는 건, 원하지 않아도 강제로 상대에게 공감하게 되는 거잖아. 준 상은 작게 덧붙였다. 나는 살짝 준 상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준 상은 난처한 듯 웃고 있었다.

 

 준 상은 철부지처럼 굴 때가 대부분이지만, 사실은 상냥한 사람이다. 방금은 자신에 대한 평가를 약간 소장님처럼 자조적으로 내린 감이 있지만. 하지만 준 상이 왜 이렇게까지 상냥해졌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본 적은 없다. 이런 거였나.

 

 “잘생기고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괜찮은데, 거기다가 성적도 굉장히 좋은 학생이면, 인기인일 법 하지 않나?”

 “하이고, 성적도 좋았시유?”

 

 하기야 엘리트다. 총독부 도서과에서 일하는 내지인들은 죄다 제국대학 출신이라고 들었다. 준 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기본적으로 머리는 나쁘지 않은 편인데, 가끔 나만의 방법으로 부정행위도 저지르고 있었으니까. ‘보는’ 거 말야. 물론 그 당시엔 지금보다도 잘 안 되었지만.

 뭐, 죄책감은 없어. 왜냐면 초능력은 나만 가진 특별한 능력인 동시에, 페널티이기도 하니까. 남들보다 몇 배는 힘든 학창 시절이었어. 제어할 수 없는 능력과 능력만큼 난폭한 감정들이 폭발해서 몇 달 학교를 휴학하고 쉬었던 적도 있고.”

 “부정 행위라기에는 좀 묘하구먼유.”

 

 흐음. 준 상이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능력을 활용하는 것을 부정행위라고 해도 될까. 시험의 목적은 어떤 상황에서 가장 상위의 능력을 지닌 사람들을 골라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준 상은 능력이 있었던 셈이다. 사실 어떤 사람은 초능력처럼 기억력이나 사고력이 좋지만, 그건 그냥 머리가 좋다고 표현하잖아?

 

 “뭐,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마워.

 어쨌든 굉장히 눈에 띄고, 호감가는 유형의 괴짜였어, 나는.

 게다가 그 당시에는 어릴 적이니까, 또래의 이해할 수 없는 돌출행동들이 멋있어 보이는 시기였다고. 그런데 나는 돌출행동이 엄청 많았지. 사실은 그냥 이상행동이지만, 그 현상들을 어떻게든 내가 저질렀다고 대충 변명하다 보니 구제할 수 없는 괴짜가 되어버리는 거야.

 물론 후반부에는 헬렌의 이상한 변명들이 괴짜설을 엄청 부풀렸지만.”

 “만악의 근원이구먼유.”

 

 준 상은 작게 웃었다.

 

 “헬렌 변명만 들어보면 내가 진짜 이상한 사람이었다고. 뭐, 좀 유쾌하기도 했는데…

 그래서 뭐든 잘 하면서도 틈만 나면 돌출 행동을 마구마구 저질러대고, 어이없는 변명으로 모두를 웃게 하는 쥰에게 또래 친구들이 다들 사랑에 빠져버린 거지. 나중에는 팬클럽 비슷한 것까지 생겼어.”

 

 다시 잘난 척 하는 표정으로 변했다. 역시 아무래도 부끄러움과 잘난 척이 섞여 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들을 했길래.”

 “음… 분명히 문이 닫혀있었는데 갑자기 사라진다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비밀을 안다는 듯이 말한다든지. 마음 속을 읽는 것처럼 행동한다든지…”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순간이동을 하거나, 과거사를 읽거나, 마음 속을 읽는 것까지야 준 상 힘으로는 안 될 수도 있었겄지만은, 비밀을 까발리거나 마음 속 소리를 들었다는 티를 내는 건 그냥 준 상이 잘 참으면 되는 거 아니유?”

 

 준 상은 잠시 입만 벌린 채로 아무 말을 하지 못하다… 결국은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그, 그게 어떻게 맘대로 되냐!? 나는 그때 엄청 어린애였다고!”

 

 정곡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허어, 겉멋이 들었었구먼.”

 “시, 시끄러!!! 바보!! 이 애답지 않은 열다섯!!!”

 “이래서 귀한 집 샌님들은. 열 다섯이면 시집도 갈 나인디.”

 

 진심으로 부끄러워하는 걸 보면, 준 상이 그 당시에는 약간 겉멋이 들기도 했던 모양이다. 뭐,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철없는 학생들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

 물론 준 상이 목놓아 규탄한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애초에 경성에 올라오게 된 계기가 그해 흉작으로 꼼짝 없이 온 가족이 굶어 죽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고생의 깊이가 좀 다르다. 물론 준 상은 고생은 덜 했어도 세상 돌아가는데 필요한 지식을 많이 배웠겠지만.

 

 “어쨌든, 내가 철이 없었던 만큼 또래 애들도 전부 철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 나이 때는 친구가 정말 중요하고, 친구가 좋아하는 사람을 같이 좋아하고… 갓 좋아하는 마음에 눈 뜬 아이들한테 눈에 확 들어오는 상징적 존재가 되었던 거지.

 진짜로, 진짜로 내가 의도한 바는 아냐. 사실 의도한다고 될 리도 없고.

 어쨌든 그래서 나는 인기가 좀 있었어. 그게 근처 여자 중학교나 여자 고등학교에서 괜히 유행처럼 일었던 모양이야. 실제로는 그냥 겉멋 들은 초능력자였지만. 그래도 그 친구들은 그런 걸 좋아할 나이었지.”

 

 준 상은 부끄럽게 웃었다.

 

 “아마 헬렌한테 나랑 다니면서 뭐가 제일 인상적이었냐고 물어보면, 교문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여자애들 무리었다고 말할 거야. 헬렌이 그걸 보면서 몇 번을 놀랐거든. 괜히 서서 내가 나오는 걸 기다리다가, 구경하고, 자기들끼리 웃고 수군거리고. 가끔, 아주 용기 있는 애는 나한테 선물도 주고 가고.

 근데 그 중에 한 명이… 약간 특별했어.

 다른 애들은 그냥 몇 번 나를 보러 왔었는데, 걔는… 좀 더 자주 왔어. 머리 색도 피부색도 옅어서, 갈색의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땋고, 안경을 쓰고 있는 키 작은 여자애였는데… 항상 내가 그 쪽을 바라보면 고개를 푹 숙여버렸지. 부끄러움이 많았나봐.

 그렇게 몇 번 보다 보니, 금방 눈에 익더라고.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앗, 걔가 오늘도 또 왔네? 하고 알아봤지. 걔도 그리고 내가 자기를 알아보는 걸 알아차린 것 같더라고.

 그러던 어느 날은 얼굴이 엄청 빨개져서, 귀까지 빨개져서, 말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여버린 채로 손수건을 주고 도망가더라고. 자수 시간에 만든 건지, 정성스럽게 테두리를 둘러가며 자수를 놓고 네 귀에는 벚꽃 잎을 수 놓은 손수건. 손수건에는 사쿠라라고 적혀 있었어.

 그렇게까지 긴장하고 부끄러워하니까, 그만 나까지… 부끄러워지더라고. 괜히. 도망가는 그 애 뒷모습을 보는데, 손수건을 잡은 손이 차갑더라고… 사실은 얼굴이 뜨거운 거였지. 그걸 본 헬렌이 그날 얼마나 나를 놀리던지… 보다 못한 시즈카짱이 바보 아내를 열심히 뜯어말렸지. 나빴다고, 진짜.”

 “소장님 남편 되시는 분은 점잖으신 분이었구먼.”

 “시즈카짱은 점잖다기보다는 숫기 없는 쪽이었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대충 비슷한 듯싶다.

 준 상은 그 때를 떠올리는 것처럼, 살짝 얼굴이 상기되어서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게 얼굴을 익히고 나니까, 생각보다 자주 주변에서 마주치기 시작했어.

 처음에는 등교하는 학생들 틈에서 그 애를 발견하기 시작했어. 평소라면 교복을 입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봐도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이려니, 했을 텐데. 아는 만큼 보이는 거지. 등교길에서 저만치 멀리서 가는 걔의 뒷모습을 알아보게 되는 거고, 어떻게 시선을 눈치챈 건지 문득 뒤를 돌아보다가 눈이 마주치고. 걔는 깜짝 놀라서 누군가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치맛자락을 꽉 붙잡고 달려가고. 얼굴이 정말 빨개지더라고. 뭐, 언제나처럼 푹 숙여버려서 빨개진 귀랑 목밖에 못 봤지만.

 그렇게 등교길에서 만나서, 우리 동네에 사나? 하고 생각할 쯤에는, 다른 곳에서도 만나게 되었어.

 하루는 어머니랑 장을 보고 있는데, 채소 가게 앞에서 양파를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는 여자애가 귀까지 빨개져 있더라고. 채소를 고르고 있다가 내가 오는걸 먼저 본 거야. 그 다음에는 언제나처럼 슬금슬금 도망가려고 하는데, 어머니가 친구냐고 물어보더라고. 그래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망설이다가 그렇다고 말했더니, 기겁해서 꽝 하고 넘어지더라.

 그렇게 동네에서도 몇 번 얼굴을 마주했지.

 

 그러다가 하루는, 내가 아팠어.

 힘을 너무 과하게 쓸 일이 있어서… 며칠 앓아 누웠지. 그걸 어떻게 소문을 들었나 봐. 뭐, 그 학교 친구한테 물어보기라도 하면 되는 일이니까. 그래서 이번에는 엄청 용기를 내서 우리 집 문 앞에다가 간식을 놓고 가려고 했던 모양이야! 친구랑 손 잡고 와서. 친구는 눈썹도 짙고 머리숱도 아주 많은, 인상이 진한 애였어. 같이 몇 번 나를 보러 온 애야. 그런데 운도 나쁘게, 우리 어머니한테 들킨 거야.

 어머니는 쥰 친구냐고 물어보고, 우리 방으로 잠깐 들어와서 얼굴을 보고 가라고 말했대. 분명히 저번에 우리 사이에 흐르는 기류도 봤을 텐데! 뻔히 본 주제에 친구라고 묻다니, 능구렁이 같기는!? 헬렌이랑 시즈카짱이 왔을 때는 친구냐고 물어본 적 없다고!”

 “너무 친해져서 아니유?”

 “뭐, 그러려나?”

 

 준 상의 시선이 허공을 더듬었다. 물론 이제 와서 어머니의 진의를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잠시의회상 뒤 살짝 인상을 쓰고서는, 준 상은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너무 당혹스러운 일이었어. 방에서 끙끙 앓으면서 누워있다가, 땀범벅이 되어서 내 팬을 만나는 건 고역이었다고.

 하지만 그 애는 아무것도 신경 쓰이지 않는 것 같더라. 오히려 처음 보는 내 초췌한 모습에 기겁을 해서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가,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는데...

 평소에는 내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던 애인데, 날 정면으로 보고 있더라고. 진짜 내가 아픈 걸 보고 놀라고 걱정했던 모양이야. 그 애 얼굴이 새빨개지지 않은 건 그 날 처음 봤어. 항상 귀 끝까지 발개져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만 보고 있었는데. 그렇게 보니까 얼굴도 하얗고… 귀엽게 생겼더라고. 더군다나 나 때문에 그렇게 울상이 되어있는데... 미안하고, 또 고맙고.”

 “허어, 우쭐했구먼.”

 “아 진짜, 초 치지 마.”

 

 준 상은 나를 쏘아봤다. 나는 얼른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결국은 눈물이 그렁그렁해서는, 평소에는 상상도 못할 일을 한 거지. 나한테 말을 건 거야. 그 애목소리는 모기 날아다니는 소리 같았어. 아주 작고, 울 것 같아서 그런지 엄청 떨리고 있더라고. ‘괜찮아요?’ 하고 말하는데, 잘 안 들려서 몇 번이고 물어봤지.

 ‘괜찮아. 내일 쯤이면 다시 학교도 갈 수 있을 거고.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

 그렇게 말하니까, 뭐라고 대답을 하려다가… 결국은 이야기 못하고. 친구가 몇 번이고 옆구리를 찌르는데도, 고개를 못 들고 쩔쩔매다가 결국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나가버렸어. 아프긴 계속 아팠는데, 웃음이 나더라. 귀엽더라고.

 음, 귀엽지. 소심하고, 말도 잘 못하고, 그냥 먼발치에서 나를 보는 것 만으로도 얼굴이 빨개지는, 귀여운 여자애.”

 

 그렇네.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조용한 여자애다. 참고로 나는 이런 여자애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 아니야. 듣다보니 딱 아사코상이잖아!? 이럴 수가, 머릿속 사쿠라의 상상도가 갑자기 급 미인으로 변경되어버리는데…

 어쨌든 준 상은 뭔가 깊은 표정으로 슬쩍 웃더니, 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 애는 나를 꾸준하게, 말 한 번 제대로 건네지 못하면서도 조용히 뒤에서 쫓아다녔고, 눈이 마주치면 도망가 버렸어. 하지만 나도 그 애가 그러는 게 싫지 않더라고.

 그 다음에는 그 애가 우리 학교 교문 앞에 서 있으면 내가 먼저 가서 말을 걸었어. 별 대단한 이야기를 한 건 아니고… 시험공부 이야기라든지, 학교에서 배운 것이라든지, 뭐 그런 사소한 거라도… 한두마디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된 거야.”

 

 학창시절의 달큼한 추억이다. 나는 살짝 눈살을 찡그렸다.

 

 “저, 근디유, 준 상, 시작할 때는 뭔가 죽느니 어쩌니 하지 않았시유?”

 “응, 슬슬 그 이야기 나올 참이야.”

 

 준 상도 전염된 것처럼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게 우리가 친구 비슷한 것이 된 참이야. 여전히 목소리가 작아서 대답은 듣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서로 얼굴 마주하고, 한 두 마디 정도 나누는 것이 하루 걸러 하루의 특별한 일과가 되었을 쯤에…

 친구 중에 와타나베라고 있었는데, 간혹 같이 노는 친구였어. 엄청 친한 사이는 아니고. 사실 보통 대부분의 사람과 그런 관계였지. 어쨌든 이야기를 하다가, 같이 교문까지 걷고 있을 때였어. 언제나처럼 교문 앞에 서 있던 그 애를 만나서 먼발치에서 손을 들어보이고, 와타나베한테 작별 인사를 하려던 참이었어…

 와타나베가 사쿠라를 알아보더라고. 우리 둘이 시선을 주고받는 걸 보고, 연애에 대한 동경 겸 찬탄의 휘파람 같은 걸 익살맞게 불더니 말을 덧붙이는 거야. ‘오~ 과연 준이야, 사쿠라 상이 그 멀리서 여기까지…’ 뭐 그런 이야기를 하고는, ‘그럼, 내일 봐.’ 하고는 가버렸지.

 

 평범한 말이었는데,

  뭔가… 뭔가 찜찜했어. 신발에 모래 한 알이 들어간 것처럼, 걸을 때마다 자꾸 발 끝에서 뭔가 걸리는 것처럼… 자꾸 마음 속에서 뭔가 걸리적거렸지.

 

 하지만 나는 그대로 와타나베랑 헤어져서, 사쿠라랑 인사하러 갔어.

 평소처럼 사소하기 그지없는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마음 속에서 그 굴러가던 모래알이 걸려버렸어. 모래알이 걸린 것 같은 작은 충동이었는데, 그 순간 저도 모르게 말했지.

 ‘그러고보니 사쿠라, 우리 동네 살았지? 어디쯤 살아?’

 

 사쿠라는 깜짝 놀라서 나를 바라보다가, 얼굴만 붉히고, 그대로 고개를 젓고는 허리를 꾸벅 숙이고 도망가버렸어. 나에게 말해주고 싶지 않다면, 뭐, 그것도 평소대로의 사쿠라니까 놀랍지는 않은데… 그래도, 그래도 이미 내 마음 속에는 모래알이 굴러다니고 있었단 말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유, 괜히 수상한디.”

 “그래. 맞아. 수상하지.

 결국 나도 다음날 와타나베를 붙잡고 물어봤어. 와타나베는 처음에 이게 무슨 일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하면서 다 순순히 이야기했지. 사쿠라는 자기 동네 친구라고. 부모님끼리는 친해서, 간혹 부부 모임 등을 하다가 만나곤 하는 사이라고.

 하지만 나는 와타나베와 동네 친구가 아냐. 그건 확실했지.

 저번에 마지막으로 같이 놀았을 때, 와타나베는 집이 멀어서 먼저 가보겠다고 자리를 떴단 말야… 우리 동네에서 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동네에서 살고 있다고 했던가.

 내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하자, 와타나베는 뭔가 오해한 모양인지, ‘아냐, 나는 사쿠라랑은 친하지 않아. 사쿠라 상이 붙임성이 좋긴 하지만, 그런 사이는 아니라고.’ 라고 말하는 거야.

 붙임성이 좋다니, 무슨 소리야? 내 눈 앞에서는 한 마디도 한 적이 없다고. 하지만, 붙임성이 좋은 것이 아니고서야 그렇게 자주 나를 보러 그렇게 다양한 친구랑 올 수 있을 리가 없지. 당연히, 말 수가 적은 애가 친구가 많을 리는 없잖아?

 

 갑자기 뭔가 아주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어… 너무 많은 생각이 들다보니, 그냥 생각이 멈추고 머리가 하얘지는 느낌이었어.

 

 나는 간신히 와타나베에게 ‘아냐, 그런 문제가 아니라…’ 라고 대답했지.”

 

 준 상은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내가 딱딱하게 굳어진 표정으로 말을 더듬거리자, 와타나베는 뭔가 복잡한 상황에 얽혔다는 걸 눈치챘는지 머뭇거리다 급한 일이 생겼다며 도망가버렸어. 나는 도망가는 와타나베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었지.

 머릿속으로 형언할 수 없는 생각의 갈래들이 여러 길로 흘러가다가 서로 짜맞춰지고 있었어. 와타나베는 사쿠라가 우리 동네에 살지 않는다고 말했어. 하지만 우리는 동네에서 자주 만났지. 그렇게 친해진 거고. 그 애 친구들은 한 마디도 못하는 그 애를 보면서 웃었지. 하지만 그렇게 자주 만나는 동안 한 마디도 걸지 못할 정도로, 극도로 소심한 애였다면… 친구가 그렇게 많을 리가 없어.

 그렇다면, 뻔한 거잖아?”

 “뭐가 뻔해유?”

 

 “다… 전부 다.

 

 전부 다 우연이 아니었던 거야. 우리는 자연스럽게 친해지지 않았어. 그 애가 나와 친구가 되기 위해 보여주었던 모습들은 진짜가 아니었어.

 나랑 자주 마주친 건, 나를 말 그대로 쫓아다녔기 때문이야. 얼굴이 익어서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 애가 들어오기 시작한 게 아니야. 내가 가는 곳마다 그 애가 있었던 거야. 눈이 우연히 마주쳤던 게 아니야, 그 애가 나를 계속, 계속, 계속 보고 있었던 것 뿐이야…”

 

 벌써 오래 전 일인데도 불구하고, 그 이야기를 회고하는 준 상의 드러난 손목에 오르르 소름이 돋아 있었다.

 

 “나는 계속 그 애의 손 위에 있었어.

 자연스럽지 않아.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하나도 자연스러웠던 적 없어. 누군가와 친구가 되기 위해, 그 친구가 좋아하는 화젯거리를 찾아가는 것 이상의 행동부터는 ‘친구가 되려고 노력했다’ 라고 표현하지 않아. ‘접근했다’ 라고 표현하지.

 거짓말로, 자신을 꾸며가면서,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기 위해서, 수줍은 여자애인 척 했지. 동네 친구인 척도 했고. 어떤 친구를 사귀면서 나에게 보여줬던 모습들이 실은 진실이 아니었다는 모습을 깨닫는 순간, 당연히, 당연히 무섭지. 왜 나에게 접근한 걸까? 나에게서 뭘 얻으려고? 내 호감? 그러면, 그걸 얻은 후에는 어떻게 되는 거지?

 소름 끼쳤지.”

 

 
작가의 말
 

 허억. 천천히 쓰겠다고 하더니 진짜 천천히 썼습니다.

 다음에는 좀 더 빨리 다음 편을 가져오겠습니다.

 

 벌써 연말연시네요.

 저는 이번 주에 올해 과음 기록을 갱신했습니다.

 연시에는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안 드는데, 연말에는 좀... 듭니다. 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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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물고기의 눈(2) (2) 2017 / 11 / 18 876 1 7402   
1 물고기의 눈(1) (2) 2017 / 11 / 17 2416 2 12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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