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는 팔짱을 끼고 다리도 꼰다.
" 실수요."
" 실수죠. 일단 소개해준다는 의미를 잘못 이해하셨더라구요. 애초에 그 분은 사람이 아니거든요."
" 거기까지 하시죠. 그 쪽이 정상이 아닌건 아는데, 가만보면 이상한 말하는걸 즐기시는거같네요. 회사사람들 이야기 들어보면 또라이는 아니라던데, 유독 저한테만 그러시는거죠?"
"두번째는 바지사장이 아니라는 점이죠. 누군가의 대리로 대형엔터테인먼트 씨이오를 할 순 없잖아요?"
"아.. 그렇네요...제가 미처 그 점까지 생각하진 못하고.. 회장님을 변태라고 오해했었군요. 죄송해요. 변태스토커로 오해해서.."
"이해해준다니 다행이네요. 서로 오해도 풀고, 돈독한 사이가 되보죠. 차라리씨가 말했듯이 투자자와 투자처 관계로요."
"그런 줄도 모르고.. 회장님이.. 회장님을 그런식으로 오해해서.. 회장님께서 얼마나 힘드셨을지.."
차라리가 고개를 숙이고 울먹거리기 시작한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은로는 어깨를 추켜 올린다.
"차,차라리씨? 그정도로 심각하진 않았는데.. 차라리씨? 전 괜찮습니다?"
"아니에요.. 강회장님.. 전 정말 멍청하고.. 머저리에.. 둔한 년인가봐요.. 회장님..다 제 잘못이에요."
차라리는 울기 시작한다.
은로는 바지주머니와 셔츠 가슴주머니를 뒤적인다.
지니고 있는 신물은 없다.
"차라리씨? 차라리씨? 그 괜찮은데.."
은로는 책상으로 달려간다.
손수건이 있지만, 이건 신물이다.
책상 창가에 놓인 티슈통을 들고 회의석으로 되돌아간다.
은로는 차라리의 옆자리에 앉아 티슈통을 안고 티슈를 뽑아든다.
"차.차라라씨 울지말고 이 휴지 이거 받으세요."
"흐윽..흑 감사합니다."
차라리는 은로가 건낸 티슈를 받아든다.
"여기.."
차라리가 썼던 티슈를 다시 은로에게 되돌려준다.
'버리라는건가?'
여배우니까 그럴 수 있다.
은로는 차라리가 되돌려준 티슈를 받아든다.
손에 닿는 촉감, 부드러운 티슈가 아니다.
A4용지의 질감.
은로가 종이를 받아들자
여배우의 울음소리가 뚝 멈춘다.
여배우는 고개를 돌려 은로를 올려다본다.
"아니시라구요?"
여배우의 목소리 톤이 낮게 깔려
은로의 고막을 친다.
이내 은로는 여배우가 건낸 종이의 정체를 깨닫는다.
'젠장.'
여배우의 개인메신저내용을 카피한 복사본이다.
여배우가 일어서서 은로를 내려다본다.
"아? 아니시라구요? 네?"
"어..그 차라리씨 이게 어떻게 된거냐면"
"차라리차라리 제 이름 좀 그만부르시죠?"
"그 설명을 해야하는데 그게 아주 긴 이야기라서 이게 어떻게 된거냐면."
"설명이요? 아, 설명 좋죠. 도대체 어떤 연예기획사 사장이 소속배우 개인메신저까지 훔쳐읽으시고, 얼마나 고귀한 명분과 숭고한 이유가 있는지 꼭 한 번 들어보고 싶네요?"
"일단, 진정하고 앉아서 이야기를"
은로가 손을 뻗어 차라리의 손목을 잡으려한다.
찰싹, 차라리는 은로의 손을 쳐버린다.
차라리는 더럽다는 듯 은로의 손을 쳐낸 손을 외투에 쓱쓱 닦아버린다.
"무슨이유, 무슨근거. 하나도 안궁금합니다. 피차 서로 얼굴 붉히지말고 이쯤하시죠? 그쪽 뒷배경이 뭐 얼마나 대단한진 모르겠지만, 그 쪽도 알다시피 제 뒷배경도 그렇게 호락호락하진않거든요? 전면전 붙어 볼 생각이면 그래보시던가. 아~ 그렇지. 사람이 아니라면서요? 흥미롭네. 어떤 개새끼를 끌고 오실지."
차라리는 긴 다리를 성큼성큼 걸어서 문 쪽으로 향한다.
"저기 이거!"
차라리가 뒤로 천천히 돌아본다.
은로가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키와 카드뭉치를 들고있다.
"타워팰리스랑 람보르기니, 이거. 이거 그냥 차.. 그냥 그쪽이 계속 가져도 되요. 황사장이 당부했는데 잊고있었네요. 하..하."
차라리는 짧은 한숨과 찡그린 미간을 은로에게 보여주고
문을 열고 나가버린다.
-
늦은 오후, 창 밖으로 노을이 진다.
은로는 회장실 바닥에 누워 천장을 보고있다.
삑, "회장님 윤애인 매니저님 오셨습니다."
비서의 인터폰이다.
은로는 그저 천장을 보고있다.
삑, "회장님? 계세요?"
"들어와요!"
은로는 성질을 내듯 큰 목소리를 낸다.
철컹, 회장실 문이 열린다.
큰 덩치의 애인이 들어온다.
평소와 다르게 깔끔한 정장차림이다.
애인은 회장실로 들어서자마자
크게 인사했지만, 고개를 들고보니 방 안은 텅 비어있다.
애인은 고개를 좌우로 돌려 은로를 찾지만 보이질않는다.
문 밖에서 분명히 목소리를 들었으니 없을리는 없는데.
"하아..."
긴 한숨소리가 창가에서 들린다.
애인은 성큼성큼 걸어간다.
회의석 소파를 지나쳐 창가 쪽으로 향하자
바닥에 누워있는 은로가 보인다.
"회장님 부르셨습니까."
애인은 느와르영화의 조폭 행동대장 흉내라도 내는 듯
구십도로 허리를 꺽어 바닥에 인사한다.
은로는 애인을 힐끔보고 다시 창문으로 시선을 돌린다.
"하아.."
"다, 들었습니다. 회장님."
"하아아."
"언니가 재벌들, 높으신 분들, 한 자리하신 분들에 대한 편견이 좀 심하세요. 이해하십시오."
"하아아아.."
"그래도... 이번 건은 그냥 넘어가기 힘드실 것 같습니다. 회장님."
은로는 팔꿈치로 얼굴을 가린다.
"뭐라고 하시던가요. 그 분이."
"세상 더 없는 비난과 욕설입니다. 변태, 사이코, 스토커와 유사한 모든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그건 뭐.. 그 밖에는요?"
"뭐 당연한 수순이겠지만, 계약파기도 염두해두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또 그 밖에는?"
"그 밖이요?"
"뭐 학교동창이라던가. 옛날이야기라던가. 바람?"
"그런 이야기는 없으셨습니다."
은로는 애인을 올려다보다가 몸을 일으켜앉는다.
"윤애인씨, 저랑 윤애인씨가 몇 번째로 만나는거죠?"
"여의도, 한남동 그리고 지금해서 총 세 번입니다."
"그 세 번 중에 오늘이 제일 낫네요. 위협적이지도 않고, 직위관계 명확해. 좋아."
"감사합니다."
"하...이게 아닌데. 뭐 그래도."
은로는 미소를 가득 담은 표정으로 일어선다.
불룩한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카드키와 차키를 꺼낸다.
손에 든 물건을 윤매니저에게 보여주며 흔든다.
"잘했어요. 윤매니저님. 훌륭해. 재능있어 아주."
"담당 배우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했던 점이 이롭게 작용했습니다."
"좋아요. 예상보다 수월하게 풀려가네요."
"저.. 회장님에 대한 언니의 호감도가 급격히 떨어진것같은데.."
"호감? 괜찮아요. 더 떨어질 뭐 그런것도 없고, 원래 이런 사이였거든."
"원래요?"
"아, 윤매니저는 모르는구나. 걔랑 나랑 학교동창이야. 살던 동네도 같고."
"네?"
"뭐, 차일 피일 알 일이고, 일단, 이거."
은로가 윤매니저에게 차키를 내민다.
윤매니저가 양손으로 받아든다.
"이건 반납할 필요 없었는데, 과했네. 윤매니저가 강경대응해서 돌려받은걸로 하세요. 그게 능력도 있어보이고, 듬직해보이고, 좋으니까."
"네... 근데 진짜 같은.."
"아, 그렇다니깐."
"이상하네요. 칠층에서 말은 다르던데."
"칠층?"
"그.. 회사 정보부입니다. 회장님 주식매매 때 한참 조사한다고 떠들썩했거든요. 회장님 정체를 몰라서 난리도 아니였는데."
"아 그거. 인간계에서는 힘들지. 찾기."
"역시..."
"아냐. 오늘 쉬는 날인데 나온거죠? 들어가서 쉬어요. 이번 건, 수첩에 적어둘께요. 내가 기억력이 약해서. 적어둔건 기록남으니까. 언젠간 득이 될거야."
"예 회장님. 자괴감 그만 쌓으시고 털고 일어나세요."
"일어나있는데?"
"감정적으로 말이죠."
"아 그렇지. 오늘까지만 괴로워해보려고."
"힘내십쇼. 가보겠습니다."
"좋아 좋아 윤매니저."
윤매니저가 구십도로 허리를 꺽어 인사하고 나간다.
문이 닫히자 은로는 흡족한 미소를 짓는다.
"옛날에 태어났으면. 나라를 호령했을 인재야. 좋아 좋아."
은로는 손가락에 열쇠고리를 걸어 빙글빙글 돌린다.
"어이! 어이 조심조심!"
인부의 굵은 음성이 동네를 가득채운다.
높다란 담장, 아이비와 장미덩쿨이 빼곡히 자라있다.
커다란 철제 대문이 활짝 열려 대형이사차량이 들어선다.
그 옆에도 줄지어선 이사차량이 두대나 더 있다.
동네아주머니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사작업을 구경한다.
"신회장님 이사가셨어? 이게 무슨 난리래."
"어휴 그르게요. 사전통보도 없이 이렇게.. 동네시끄럽게 말이지."
"어머어머 두분 못들으셨어요? 그 있잖아요. 신회장님 막내딸. 막내딸이 그 뭐더라, 어디 멀리 살다가 다시 본가로 들어온다지 뭐에요."
"그 희멀겋고 키 큰 걔?"
"걘 시집도 안갔데? 나이가 몇인데 다시 엄마치마폭으로 쏙 들어와?"
아줌마 무리 뒤로
썬글라스를 낀 여자가 불쑥 끼어든다.
"어머 이모님들 잘 지내셨어요. 호호호."
"으응?"
아줌마들이 뒤를 돌아본다.
후광이 번쩍하고 비치는 여자, 차라리다.
그 옆의 윤매니저가 굳은 표정으로 내려다보고있다.
"어 응 어이구 이제 여기로 완전히 이사오나벼?"
"네~ 이사일정을 급하게 잡아서 죄송해요~. 또 이때아니면 언제 부모님이랑 추억만들고 지내겠어요."
"아이고 곱기도 해라. 넌 십년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하는게 없다 얘."
"그러게요 형님, 티비에서 맨날 보니까 딴데 이사간줄도 몰랐네 어서와요."
"이모님들도 어떻게 하나도 안 변하셨어요. 이거 배우 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여기 다 계셨네. "
"얘 말하는거 좀 봐 호호호호. 어떻게 신회장님은 좀 괜찮으시고?"
"어유~ 그럼요. 아버지야 늘 쌩쌩하시죠."
아줌마 하나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신회장님이 벌써 호전되셨어?"
"무슨.. 아버지 어디 아프셔요?"
"그.."
옆의 아주머니가 옆구리를 콕 찌른다.
이사차량 옆의 골목길을 들어오는 검은색 세단.
"에구에구 입이 방정이지. 이사 잘하구. 다음에 또 봐."
"그래그래 이거 얘들이 학원마칠때가.."
아줌마무리가 총총 걸음으로 자리를 뜬다.
검은 차량은 서서히 진입해 차라리의 바로 옆까지 온다.
내려가는 자동차 창문, 젊은 남자가 운전석에 앉아있다.
"아가씨, 벌써 오셨습니까."
"김비서님?"
차라리가 반갑게 차 쪽으로 향한다.
뒷문이 벌컥 열리고 신회장이 내린다.
차라리와 신회장.
서로 멈춰서서 바라본다.
신회장은 입술을 움찔거린다.
차라리도 미간을 찌푸린다.
둘의 묘한 긴장감에 이사로 분주하던 인부들과 지나가던 행인도
숨을 죽이며 지켜본다.
침묵을 깬건 신회장이였다.
신회장은 천천히 걸어 차를 빙둘러간다.
차라리와 가까워진 신회장.
그는 얼굴을 펴며 방끗 웃는다.
신회장의 웃음에 화답하듯 차라리도 밝게 미소짓는다.
"아빠아아!"
경망스럽게 높은 목소리로 신회장에게 풀썩 뛰어 안기는 차라리.
"하하하 애비가 들어오랄땐 귓등으로만 듣더니, 이제야 오냐."
신회장을 차라리의 등을 크게 치며 안아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