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눈부신 햇살은 지금이 아침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똑똑, 안의 상황을 확인하기 위한 노크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소년은 따스한 이불에 몸을 둘둘만 채 아직도 꿈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안에서 아무런 반응도 들려오지 않자 어떻게든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크소리는 점점 커져간다. 똑똑에서 쿵쿵, 어느새 쾅쾅으로 바뀌어버린 그것은 이미 문을 두드린다기보다는 문을 부숴버리려는 듯 하다.
“야! 서현! 문 안 열어?!”
끼익 삐걱, 거칠게 흔들리는 문이 살려달라는 듯이 비명을 내지른다.
행복한 꿈속을 헤매이던 소년은 그제서야 게슴츠레 눈을 떴다.
“으응... 뭐야아...?”
소년이 눈을 뜬 순간, 들려오던 소음은 거짓말처럼 멈췄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갈팡질팡하던 소년은 그것들을 꿈이라 치부하며 다시 눈을 감는다. 주위를 둘러싼 고요함에 저절로 편안한 미소가 지어진다. 안타깝게도 소년은 깨닫지 못했다. 그것은 편안한 고요함 따위가 아니다. 그것은 분명 폭풍이 몰아치기 전의 그것이었다.
콰앙, 거대한 충격과 함께 겨우 버티고 있던 문이 보기 좋게 박살나며 사방으로 흩어진다.
“으아악?!”
기분 좋게 꿈속을 헤매이던 소년은 엄청난 비명과 함께 꿈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그런 소년을 맞이하는 것은 무시무시한 현실이었다.
주변에는 방금 전까지 문이었을 거라 짐작되는 파편들이 사방에 널브러져있다. 그렇다면 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무엇이 있을까, 비몽사몽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소년의 표정이 두려움으로 물든다.
“설마...”
소년의 눈동자가 서둘러 시계를 찾는다. 그제서야 시간을 확인한 소년의 눈동자가 시곗바늘처럼 세차게 흔들린다.
드디어 사태를 깨달은 소년은 입을 벌린 채 돌처럼 굳었다.
“이 자식이... 아직도 자고 있었냐!!”
문을 박살내버린 소녀는 이글거리는 분노를 불태우며 소년을 향해 다가온다.
“라, 라이시나?!”
소년은 다가오는 소녀를 바라보며 두려움에 바르르 몸을 떤다. 소년은 차마 도망칠 생각은 하지 못한 채 자신을 보호하려는 듯이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 모습에 결국 소녀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렇게 이불이 좋다면 아주 그냥 이불이랑 같이 영원히 재워주마!!”
“으아아악!!”
소년의 애처로운 비명 소리가 아련하게 건물에 울려 퍼진다.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비명 소리에 사쿠라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혀가 얼얼할 정도로 뜨거운 차를 홀짝였다.
잠시 후, 닫혀있던 문이 난폭하게 열리며 예상했던 모습의 두 사람이 방으로 들어온다. 한껏 멋을 낸 라이시나를 바라보며 사쿠라는 세상 구경에 들떠있었던 것이 서현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다를 머금은 듯한 푸른 머리카락, 그 아래로 펄럭이는 새하얀 원피스는 마치 이 소녀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소녀와 어울렸다. 마치 이 세계의 존재가 아니라고 느껴질 정도의 아름다움이었다. 뭐, 실제로 그녀는 이 세계의 존재가 아니었지만 말이다.
라이시나는 아직도 화가 안 풀린 것인지 이마를 잔뜩 찌푸린 채로 서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앙증맞은 모습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사쿠라는 서둘러 차를 마시는 척 비어있는 찻잔을 들어 미소를 가린다.
그 뒤로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는 소년의 모습이 보인다. 사실 소년보다는 소녀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모습이다. 여자로 오해 받는 것이 싫다면 어깨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을 잘라버리면 될 텐데 어째서인지 그것 만큼은 한사코 거부하고 있었다.
“꽤나 늦었네요”
“이잇! 사쿠라!! 이 녀석 방금 전까지 침대에서 자빠져 자고 있었다고! 누구는 새벽부터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얼마나 바빴는데...!!”
“그렇다고 문짝을 부수는 사람이 어디있어요?!”
“자자 거기까지 하고 이것부터 받아요”
사쿠라는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달래며 미리 준비해두었던 자그마한 봉투를 건넸다.
조율자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태어난 서현과 이 세계의 존재가 아닌 라이시나, 그런 두 사람을 위해 준비한 물건이다.
“이건.. 저번에 말했던 그거야?”
“네”
“에- 그러니까 이것만 있으면 나도 이제 여기저기 돌아다닐 수 있다는 거지?”
손에 쥐어진 자그마한 봉투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동자가 기대로 가득 차 반짝인다. 사쿠라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한 경우만 아니라면 아마 문제없을 거에요”
“드디어-!”
봉투 속에는 두 사람의 신분증과 여권, 가디언즈의 소속을 나타내는 증표 등이 들어있었다. 드디어 두 사람이 이 세계의 주민으로서 사회에 인정을 받은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은 힘들었지만 해맑게 웃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니 충분히 보상 받은 기분이 들었다.
“흠흠.. 그건 그렇고 아래에서 사호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서둘러 내려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은데”
기뻐하던 두 사람의 움직임이 얼어붙는다. 시계는 야속하게도 이미 약속했던 시간을 훌쩍 지나있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두 사람이 사쿠라를 향해 구원의 눈빛을 보내보지만 사쿠라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두 사람의 등을 떠 밀었다.
“두 시간 쯤 전부터 내려가 있었으니.. 으음...”
“으앗?! 그럼 가볼게요!!”
“으아아!! 사쿠라 선물 고마워!”
“그럼 두 사람 다 조심해서 갔다와요”
잔인한 미소를 짓고 있는 사쿠라를 뒤로 한 채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꽉 붙잡고 서둘러 달려나간다.
다급하게 계단을 내려가던 두 사람은 건물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한 대의 차를 발견했다. 과연 언제부터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누군가와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조용히 침을 꼴깍 삼켰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차에서 그녀가 걸어 나온다.
“사호누나...”
“저기.. 아키라? 그러니까 늦은 건 전부 이 꼬맹이 때문이라니까? 이 녀석이 늦잠을 자는 바람에...”
서로를 의지하던 손은 어느새 서로를 가리키며 필사적으로 자신들의 무죄를 변호하고 있었다.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키라 사호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자그마한 메모장이었다.
-이미 늦었으니 어서 차에나 타시죠 ^^
쪽지를 받아 든 두 사람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다. 화났다. 평소 잘 쓰지 않는 이모티콘까지 그려 넣은 것을 보면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른 것이 분명했다.
두 사람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 없이 서둘러 차에 올라탔다. 두 사람이 차에 타는 것을 확인한 사호는 어딘가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도 운전석에 앉았다.
두 사람을 실은 차는 빠른 속도로 건물을 빠져나간다. 잠시 후, 건물의 그림자가 일렁이며 새까만 스포츠카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에서 빠져나온 스포츠카는 서현들이 타고 있는 차를 조용히 뒤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