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집 문이 열린다. 동이 트지도 않은 새벽녘.
말끔한 정장 차림새의 빵대리가 들어온다. 볼에 큰 반창고를 하나 붙이고 있다.
카운터에 기대어 졸고 있던 여자제빵사가 게슴츠레 눈을 뜬다.
빵대리는 꾸벅 인사를 하고 빵가게 안을 둘러본다.
쿵 소리가 난다. 놀란 빵대리가 소리나는 쪽을 보면,
카운터에 머리를 박고 자는 여자제빵사.
'24시 빵집이라더니..'
빵대리가 충무당에 처음 빵배달을 하러 온 날이다.
빵대리는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힌 종이를 꺼내 핀다.
윤비서가 수필로 적어준 쪽지다.
' 치아바타(고기얹어진거), 애플파이 2개, 치즈 녹인거 완전 네모난거, 크루아상, 생크림슈크림빵...'
빵대리는 윤비서가 그리 비서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빵대리는 트레이와 집게를 들고 혼자 뿐인 빵집을 빙글 빙글 돈다.
트레이 위에 쪽지의 요구사항대로 빵이 올려진다.
빵대리는 조심스럽게 카운터 위에 빵 트레이를 올려둔다. 그러곤 옆에 있는 아이스크림 냉장고를 일부러 소리나게 연다.
여자제빵사가 다시 눈을 뜬다.
턱을 괴고 앉아 계산기를 탁탁 두드리는 여자제빵사.
빵대리는 트레이 옆에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더 얹는다.
졸린 눈으로 올려다보는 여자제빵사, 빵대리는 미소를 짓고 사장님 카드를 건낸다.
빵대리가 빵집을 나선다.
뒤를 돌아 올려다보는 간판, 현판이다. 당..무..충?
'당무충? 이상한 이름이네.'
빵대리는 걷는다.
이런 골목길에 빵집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조용한 동네라 새소리가 들린다.
빵대리는 집으로 바로 돌아가지않고 평소 다니지않던 길로 빙 돌아간다.
" 이 길 맞아?"
빵대리가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한입 베어 물며 허공에 물어본다.
" 그렇지. 그렇지"
어느새 채제공이 옆에 와 같이 걷고 있다.
" 같은 동네라니, 세상 참 좁아?"
" 다 세상이치가 있는 법이니라, 천력이 내려오고 지력이 올라오고, 풍수를 무시할 수 없는게다."
빵대리의 눈 앞에 희고 높은 돌벽이 보인다.
" 뭐 이거. 회장님이야? 젊은 남자라며. 재벌 3세같은건가?"
" 강은로라는구만."
채제공이 대문 옆에 적힌 명패를 읽는다.
" 아, 또 강씨야? 싫다. 싫어."
" 어쩔거야."
" 어쩌긴 뭘 어째요. 이 새벽에 찾아와서. 거 댁이 가지고 계신 귀이중한 책 좀 사고 싶은데요. 이럽니까?"
" 안될건 또 뭔가."
" 안돼 안돼. 비지니스의 기본을 모르셔. 부탁은 무조건, 점심먹은 직후, 배부르고 나른해서 기분 좋을 때, 그 때 하는거죠."
" 쯧쯧. 어디서 사술만 늘어서는.."
" 그런 강직하고 올바른 위인께서, 네? 비망록? 거래를 이런 식으로 돌려하십니까. 네?"
" 에헴. 거. 어허. 늦겠구나. 어서 집으로 가자."
" 어휴. 네."
빵대리는 빵주머니에서 빵을 하나 꺼내든다.
" 이거나 드세요. 댁 손녀손녀딸이 제일 많이 산 빵입니다."
채제공이 빵을 받는다. 생크림슈크림빵이다.
" 뭔데 이게."
" 생크림슈크림빵, 생슈크림빵."
" 그래, 오늘 네 기운이 사사로우니, 돈 관리, 여자 관리 잘하거라. 가보마."
" 돈이야 뭐.. 여자 관리요? 여 여자?"
빵대리는 채제공을 쳐다본다.
채제공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 여자?"
빵대리는 아이스크림을 깨문다.
윤비서가 비서실에 있다.
손목시계를 보며 데스크에 손가락을 튕긴다.
데스크 위에 반짝이는 불빛, 모니터에는 엘레베이터 내부의 빵대리 모습이 보인다.
윤비서는 살짝 미소를 띄우고 엘레베이터를 열어준다.
띵,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고 빵대리가 나온다.
" 일찍 오셨네요. 예상보다."
" 새벽이라 길이 뻥뻥 뚫려있더라구요. 예상보다."
" 좋아요. 오늘은 불안해서 저도 출근했지만 "
윤비서는 데스크 위에 카드키를 하나 올려둔다.
" 내일부터는 혼자오셔서 문여시면 됩니다. 대리님 카드에 여기 층 출입만 늘려놓은거에요. 받으시고."
빵대리는 카드키를 주워든다.
" 주의하실 점은 일 1회만 허용됩니다. 출입카드, 새벽 5시를 기점으로 갱신되니까 실수하지마세요. 혹시라도 문제생기면,"
윤비서는 데스크 위에 명함을 하나 올려둔다.
" 제 연락처로 연락하시면 됩니다. 그건 오늘 빵?"
윤비서는 빵주머니를 가르킨다.
빵대리는 데스크 위에 명함을 집어들고 그 위치에 빵주머니를 올린다.
윤비서는 빵주머니를 열어 살핀다.
" 뭐 이정도도 잔심부름도 못할만큼 멍청하다곤 생각하지않지만."
윤비서는 탕비실로 들어가더니 은색 쟁반과 우유가 담긴 잔을 가지고 나온다.
" 우유는 새벽이면 배달오고, 쟁반은 선반 위에서 두번째꺼 꺼내쓰시면 됩니다. 배치는 이렇게."
윤비서는 일회용 비닐장갑을 끼고, 빵주머니에 빵을 하나씩 꺼내 쟁반 위에 담는다.
흰 그릇 위에도 빵을 담는다.
" 이 구성 외워두세요. 데워야할 빵은 그릇, 차게먹는 빵은 쟁반. 아니다. 이건 메모해드릴테니까 오후에 메일 확인해보세요. 따라오세요."
윤비서는 흰 그릇만을 들고 탕비실로 들어간다. 빵대리도 따라간다.
고급 오븐이 있다.
윤비서는 비닐장갑을 벗어 버리고 방열장갑을 낀다. 그리고 오븐에 그릇을 넣는다.
" 예열된 오븐에 데우시면됩니다. 쉽죠?"
윤비서는 방열장갑을 벗고 빵대리에게 건낸다.
" 데워지면 가지고 나오세요."
" 몇 분이나.."
" 오늘 빵구성으로는... 3분 뒤에 꺼내세요."
윤비서는 탕비실을 나간다.
잠시후, 빵대리가 방열장갑을 끼고 그릇을 들고 비서실로 온다.
그릇을 쟁반 위에 올려두는 빵대리.
윤비서는 고개를 까딱여 따라오라는 신호를 보내고 사장실 문 앞으로 간다.
" 사장님, 아침식사 하시겠습니까?"
틱, 사장실 문의 잠금장치가 풀린다.
지수는 소파에 걸터 앉아 신문을 보고있다.
신문 위로 지수가 눈을 빼꼼 내밀고 본다.
" 사장님이 계신 테이블 앞에 놓으시면 됩니다."
윤비서가 빵대리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 말한다.
빵대리는 조심스럽게 소파테이블에 쟁반을 놓는다.
" 그럼 전 이만.."
빵대리는 고개 숙여 인사한다.
" 편안한 식사되십시오."
윤비서도 인사한다.
빵대리는 한고개 넘겼다는 생각으로 윤비서를 따라 사장실 문을 나선다.
" 잠깐만"
지수의 목소리다. 약간 잠겨있다.
" 흠흠 "
지수는 헛기침을 두번한다.
" 윤비서는 일보고, 빵대리는 잠깐 와봐요."
윤비서는 고개를 꾸벅하고 사장실문을 닫는다.
빵대리는 쭈뼛쭈뼛하며 서있다.
지수는 신문을 탁 쳐서 접고 일어나 사장 업무용 책상에 가 앉는다.
지수는 빵대리를 보고 눈짓한다.
빵대리가 책상 앞까지 온다.
" 왜 불렀는지 알죠?"
빵대리는 전혀 짐작되는 바가 없다.
지수는 의자 손받이에 팔꿈치를 괴고 손으로 턱을 받친다.
" 모르겠어요?"
" 네, 잘..."
" 모르신다라."
지수는 의자를 뒤로 살짝 빼더니 키보드에 무언가를 파바박친다.
지수는 턱을 들어 맞은 편을 가르킨다.
빵대리가 맞을 편을 본다. 커다란 스크린에 무언가의 내역서가 적혀있다.
" 저게 뭔지."
" 읽어봐요."
지수의 카드사용내역서다. 이번달만 4700만원을 썼다. 아직 이번달 첫주인데..
" 카드 사용내역서네요.. 사천 칠백... 역시 재벌.."
" 금액말고, 제일 밑에 적힌거 봐요."
맨 아랫칸, 충무당이 적혀있다.
'당무충이 아니라 충무당이구나.'
" 충무당, 아, 이 카드, 근데 사천 칠백을 쓰신거에요?"
" 그건 신경끄고, 얼마에요 저거."
" 만 칠천 오백원.. 이라고 적혀있는데요."
" 그렇죠. 만 칠천 오백원."
" 그게 무슨 문제이신지.. 제가 안썼습니다 사천 칠백?"
" 그건 내가 쓴거고, 만 칠천 오백원."
" 네 오늘 빵사고, 사장님이 이 카드 쓰라고 어제 주셨는데."
" 고기가득 치아바타 이천원, 임실치즈 크림번 천오백원 두개, 초코설탕범벅 천원 두개, 생크림슈크림빵 천오백원 세개, 동글동글 마쉬멜로빵 삼백원 열개. 찹쌀빵 오백원 "
" 네?"
" 다 합치면 만 오천원이죠. 쿠폰 받아왔어요? 윤비서가 어제 쿠폰북은 안줬다고 했으니 쿠폰은 안 썼을거고.어쨌건 이천 오백원은 어디서 나온걸까?"
" 아 그거."
' 채제공이 먹은 빵, 내가 먹은 바닐라 아이스크림.'
" 그거?"
" 제가..먹은거 같은데요."
" 왜요?"
" 그.. 빵집에 가니까. 빵이.. 보이고.."
" 그럼 따로 계산하셨어야죠. 빵대리님 저한테 빵 맡겨둔거 있으세요?"
" 그건 아니지만.."
지수는 책상 위로 팔을 올린다.
손목 위에 꽃처럼 펴진 하얗고 작은 손.
지수는 빵대리를 올려다본다.
빵대리는 뭔가 싶어서 보다가 허겁지겁 재킷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낸다.
지갑 안을 살피는 빵대리.
빵대리는 조심스럽게 만원짜리를 꺼내어 내민다.
" 그...제가 잔돈이 없..."
지수는 만원을 휙 낚아챈다.
책상 서랍 맨 윗칸을 드르륵 열더니, 기계식 비밀번호를 꾹꾹 누른다.
팅, 맑은 철소리를 내며 열리는건, 가게에서나 쓸 법한 수제금고다.
지수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만원권을 만원칸에 넣고 오천원권과 천원짜리 두장, 오백원 동전 하나를 꺼낸다.
아직 갈곳을 찾지 못한 빵대리의 손에 칠 천 오백원을 쥐어준다.
" 앞으로 이런 불편한 상황 없었으면 하네요. 대리님."
드르륵, 쾅. 지수의 책상서랍이 닫힌다.
지수는 일어나서 식사가 차려진 소파에 앉는다.
빵대리는 손에 거머쥔 돈을 꾸깃꾸깃 지갑에 넣는다.
열어본 적 없는 동전 주머니 지퍼도 열어 오백원을 넣는다.
" 저... 그럼 들어가보겠습니다."
빵대리는 꾸벅 인사한다.
지수는 대꾸도 없이 펄럭, 신문을 테이블 위에 펼쳐놓고 고기가득 치아비타를 입에 넣는다.
빵대리는 사장실을 나간다.
윤비서가 입 안 가득 빵을 머금고 빵대리를 본다.
윤비서는 빵대리에게 빵 하나를 건낸다.
생크림슈크림빵, 빵대리는 빵을 받아든다.
윤비서는 입 속 빵을 씹어삼킨다.
" 드세요. 좋은 하루 되세요."
빵대리는 엘레베이터 쪽으로 향하다가 뒤 돌아본다.
" 몇년째세요?"
" 뭘 말씀이시죠?"
" 채사장님 비서요."
" 오년? 그 정도 됐어요."
" 원래 늘 저러셔요?"
" 뭐가 저러신진 모르겠지만, 처음 뵐 때랑 똑같으시죠."
" 고생많으셨겠네요. 가보겠습니다."
윤비서는 미소만 짓는다.
엘리베이터에 타는 빵대리.
채제공이 나타난다.
" 조금.. 괴팍하다했지?"
" 조금이 아니네요. 할아버님 손녀손녀님."
" 걔가 고생을 많이 해서 그래. 니가 이해해."
" 전혀요. 아무렇지도 않은데요. 생각외로 깔끔하고 좋네요."
" 또 또, 너 먹는걸로 뭐라하면 그렇게 꿍해지는거. 어?"
" 음, 전혀요. 이제 안그럽니다."
" 비망록도 없고, 내 알려주마."
" 알려주신다구요?"
" 우리 손녀에게 한 이야기, 우리 손녀가 겪은 일, 너라도. 인신주왕인 너니까 알려주는거다. 어디가서 떠들 생각일랑 말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