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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사장님이 보고 있다!
작가 : 카렌
작품등록일 : 2017.12.9

시각장애인 사장님께 경제 신문을 읽어주는 개인비서 한지현.
"여자 나이는 크리스마스 케이크야. 25살 넘어가면 안 필린 다니깐."
남성우월주의자 할머니는 마음대로 그녀의 배우자 모집 광고를 신문에 내버린다. 꼼짝없이 할머니가 소개하는 사람과 결혼해야 했던 지현. 평소에는 단 한 차례도 사적인 대화를 나눈 적 없었던 사장님이 신문에 실린 광고를 봤다면서 지현에게 청혼한다.
"이 배우자 모집 광고에 내가 지원하고 싶습니다.“
사장님, 정말 진심이십니까?
habilis21@naver.com

 
사장님이 보고 있다! 11화
작성일 : 17-12-18 21:05     조회 : 221     추천 : 0     분량 : 8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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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내가 지금 사장님이랑 키스하고 있다니

 

 

 

  '……사장님이 보고 있다!‘

 

 놀랄 새도 없이, 꿈인지 생시인지 확인할 새도 없이 사장님은 다시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흐음.“

 

 입에서 저절로 신음이 터져 나올 만큼 깊고 섹시한 키스였다.

 

  '내가 지금 사장님이랑 키스하고 있다니!‘

 

 사장님과의 키스는 그야말로 버라이어티했다. 부드럽게 윗입술로 지현의 아랫입술을 누르는 다정한 키스에서부터 새가 입을 맞추듯이 쪽쪽 하고 입술을 맞대는 사랑스러운 키스까지. 그리고 이제 우빈은 그녀에게 뜨겁고 끈적끈적한 키스를 퍼붓고 있었다. 지현은 눈앞이 하얘졌다.

 

  '잠깐 근데 중요한 건 이게 아니잖아. 아까 사장님이 날 보고 있었다고!‘

 

 이렇게 생각한 것도 잠시, 우빈이 더욱 거칠게 혀로 지현을 몰아붙이자 이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흐음!“

 

 거칠게 안으로 파고드는 우빈의 움직임에 지현의 눈앞에 불꽃같은 섬광이 터졌다.

 

 잠시 입술이 떨어진 찰나에, 지현이 한숨을 내쉬듯 중얼거렸다.

 

  "사장님, 지금 절 보고 계신 거예요?“

 

 대답하는 대신 맹수같이 눈동자를 번뜩인 우빈은 입술로 그녀의 말을 막았다. 잡아먹을 듯이 덮쳐오는 우빈의 입술에 지현의 몸은 묘한 흥분감과 두려움에 떨리고 있었다.

 

  '잠깐 지금 키스할 때가…… 하아.‘

 

 중요한 건 이게 아니건만 닿기만 했는데도 녹아버릴 것 같은 키스에 지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키스는 내가 아무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려는 전략이 아닐까?

 

 그녀의 허리에 감겨 있던 그의 손이 성급하게 움직이며 아래로 내려갔다.

 

 아, 위험하다, 위험해. 이대로 가다가는…….

 

  "사, 사장님!"

 

 입술을 뗀 지현이 침을 꼴깍 삼키며 그와 눈을 마주쳤다. 햇빛 아래에서 반짝이는 그의 선명한 눈동자는 분명히 자신을 보고 있었다.

 

  "왜 갑자기 저한테 키스를…….“

 

  "비밀로 해줘요.“

 

  "뭘요?“

 

  "내가 앞이 보인다는 거.“

 

 자신을 향해 생긋 미소 짓는 우빈을 보고 정신이 나간 지현은 얼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빈이 그녀의 허리에 감고 있던 팔에 스르르 힘을 풀자, 지현은 그를 밀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저택으로 뛰어간 지현은 개인 사무실로 오자마자 문을 걸어 잠그고 바닥에 주저 앉았다.

 

  "엄마야.“

 

 말도 안 돼. 지금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어!

 

  "사장님이, 사장님이…….“

 

 지현은 조금 전까지 자신의 입술에 키스하던 우빈을 떠올리며 얼굴을 붉혔다. 아직 그와 했던 키스의 촉감이 입술에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지현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우빈의 야수 같았던 눈동자를 떠올렸다.

 

 

 

 ***

 

 

 

 다음 날 아침,

 

 출근하기 위해 화장실 세면대 앞에 선 지현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출근하기 싫다.“

 

 추운 겨울날 따뜻한 이불 속에서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은 마음은 여느 때와 똑같았지만, 오늘은 정말 미치도록 출근하고 싶지 않은 날이었다.

 

  "정말 미치겠네.“

 

 내가 사장님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하냐고.

 

 밤새 고민하며 뒤척인 지현의 피부는 푸석푸석해져 있었고 다크서클이 턱밑까지 내려와 있었다.

 

  "일단 화장부터 하자.“

 

 미지근한 물로 세수한 지현은 파우치 안에 있는 화장품을 꺼내 화장을 했다. 메이크업 베이스에 파우더까지 바르니 그나마 봐줄 만한 얼굴이 되었다. 지현은 아이라이너와 립스틱까지 꼼꼼히 발랐다.

 

  "오늘 그냥 연차 쓸까?“

 

 화장까지 했지만, 지현은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오늘은 유독 출근하기 싫은 날이었다.

 

  “이게 다 사장님 때문이야.”

 

 지현은 밤새 격정적이었던 사장님과의 키스를 떠올리며 한숨도 자지 못했다.

 

  "왜 난 사장님이 시각장애인이 아니라는 것보다, 사장님이 나한테 키스한 게 더 충격적인 걸까.“

 

 억지로 옷을 챙겨 입은 지현은 칼바람에 몸을 보호하기 위해 두꺼운 롱패딩을 챙겨입고 밖으로 나갔다. 승용차에 탑승한 지현은 라디오를 켜고 차를 출발시켰다.

 

  "어머, 오늘 도로에 차들이 엄청 많네!“

 

 평소 같으면 꽉 막힌 도로를 보고 짜증을 냈을 테지만, 조금이라도 한남동 저택에 늦게 도착하고 싶었던 오늘은 교통체증마저도 반가웠다. 지현은 신호를 기다리면서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사장님은 그동안 시각장애인인 척 연기를 했던 거구나.”

 

 지현은 AK 그룹 연수원에서 자신이 사장님의 개인 비서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동료들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ㅡ 어머, 지현 씨, 사장님 개인 비서로 임명된 거야?

 

  ㅡ 네, 근데 사장님 개인 비서인데 왜 회사로 출근 안 하고 한남동에 있는 저택으로 출근하는지 모르겠네요.

 

  ㅡ 지현 씨, 이거 되게 유명한 얘기인데 몰랐어? 사장님이 1년 전부터 앞이 안 보이셔서 회사가 아니라 한남동 저택에서 일하시잖아.

 

  ㅡ 어머, 정말요?

 

  ㅡ 그래. 근데 지현 씨 들어가기 전에 각오 좀 해야 할 거야.

 

  ㅡ 왜요?

 

  ㅡ 사장님 성격 장난 아닌 거로 유명하거든. 개인 비서로 들어갔다가 삼 개월도 못 버티고 나온 사람이 엄청 많아.

 

  ㅡ 저, 정말요?

 

  ㅡ 그래, 사장님 활동 보조인도 한 달에 한 번꼴로 갈아치운다고 하더라고.

 

 뒤늦게 생각해보니 조각나 있던 퍼즐이 하나하나 맞춰졌다.

 

 사장님이 개인 비서와 활동 보조인을 일정한 시기마다 갈아치웠던 건, 어쩌면 원래는 시각장애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하긴 나도 3개월이 지나면서부터 사장님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었지.‘

 

 처음 3개월간은 일을 배우기도 바빠서 지현은 사장님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장님의 행동이 보통 사람들과 다름없다고 느꼈던 건 3개월쯤 지나 일에 익숙해지고 나서였다.

 

  '근데 사장님은 3개월이 지났는데도 왜 날 자르지 않은 거지?‘

 

 지현은 코피까지 흘려가며 열심히 일한 자신의 노력을 사장님께 인정받았다고 생각했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지현은 자신의 입술을 만지며 사장님과 했던 키스를 다시 떠올렸다.

 

  '사장님과 어제 했던 키스는…….‘

 

  - 그뤠잇! 정말 좋았습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소리에 움찔한 지현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그래도 주변 사람들한테 시각장애인이라고 거짓말을 한 건…….‘

 

  - 스튜핏! 이건 정말 바보 같은 짓이죠.

 

 두 손으로 운전대를 잡은 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차를 타고 한남동 저택으로 가는 내내 지현의 머릿속은 온통 우빈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래,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자.‘

 

 주차장에 차를 세운 지현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기로 했다.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한번 해보는 거야.‘

 

 차에서 내린 지현은 정문으로 들어오는 우빈의 리무진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하필 여기서 만날 줄이야. 아직 마음의 준비도 못 했는데!

 

 리무진에서 내리는 사장님을 못 본 척 지나칠 수 없었던 지현은 허리를 숙이고 그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누구십니까?“

 

 활동 보조인의 안내를 받으면서 허공을 주시하는 우빈을 보고 지현은 아랫입술만 잘근 깨물었다.

 

  "사장님의 개인 비서 한지현 씨입니다.“

 

 지현 대신 옆에 있던 활동 보조인이 그에게 말했다.

 

  "아, 그래요. 한지현 씨였군요. 오늘 정말 춥군요. 감기 안 걸리게 조심해요.“

 

 분명히 두꺼운 패딩을 입은 자신이 보이면서 안 보이는 척하는 우빈이 지현은 너무나도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정말 앙큼하고 음흉하다.‘

 

 그동안 감쪽같이 우빈에게 속았던 반년이란 세월이 떠오른 지현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 사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차에 핸드폰을 놓고 왔네요.“

 

  "그렇습니까?“

 

  "네, 다시 차로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어떡하죠?“

 

 우빈이 타고 온 리무진은 이미 주차장으로 출발한 뒤였다.

 

  "그럼 한 비서가 대신 날 집무실로 안내하면 되겠네요.“

 

 우빈의 말에 지현은 한쪽 눈썹을 위로 추켜 울렸다.

 

 무슨 꿍꿍이길래 나한테 부탁을 하는 거야?

 

  "한 비서님, 죄송하지만 부탁드립니다.“

 

 활동 보조인이 그녀에게 정중하게 부탁하자, 지현은 내키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이고 우빈의 팔짱을 끼었다.

 

  "자, 그럼 갑시다.“

 

 그와 팔짱을 끼고 나란히 걸으면서 지현은 가늘게 눈을 뜨고 우빈을 노려보았다.

 

  "사장님, 정말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우빈은 지현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우, 웃어? 지금 이게 웃기세요?

 

 등골이 서늘해진 지현이 우빈에게 낀 팔짱을 풀려고 하자 그가 덥석 그녀의 손목을 쥐었다.

 

  "내가 앞이 보인다는 사실은 한 비서만 아는 거니까 계속 날 안내해줘요.“

 

 우빈의 말에 지현은 어쩔 수 없이 두 손으로 그의 팔을 붙잡았다.

 

  "사장님, 왜 사람들한테 거짓말을 하시는 거예요?“

 

  "내가 왜 그러는지 이유가 궁금합니까?“

 

  "네.“

 

 지현이 짧게 대답하자 우빈은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건지 살짝 미간을 좁혔다.

 

  "난 지현 씨가 다른 걸 궁금해할 줄 알았는데.“

 

  "다른 거 뭘요?“

 

  "왜 내가 지현 씨한테 키스했는지는 궁금하진 않은 겁니까?“

 

 키스 얘기가 나오자 지현은 아무 말 없이 정면만 주시하고 빠르게 앞으로 걸어갔다.

 

 사실 지현이 오늘 사장님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고민했던 이유는 사장님과 한 키스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아냐, 안 좋았어. 그냥 내가 요즘 너무 많이 굶어서 좋다고 생각한 것뿐이야.’

 

 지현은 그와 키스하면서 설렜던 그 날의 감정을 애써 부정했다.

 

  "여기 집무실이에요. 굳이 방 안까지 데려다주지 않아도 사장님 혼자 들어가실 수 있으시죠?“

 

 지현은 복잡한 표정으로 도망치듯 2층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로 내려갔다.

 

 

 

 ***

 

 

 

 지현은 퇴근하자마자 은비가 근무하는 대학병원 근처 칵테일바를 찾았다.

 

  "은비야, 왜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는 걸까.“

 

 지현의 얼토당토않은 질문에 은비는 픽 웃으며 덤덤하게 대꾸했다.

 

  "뭐야. 언니는 거짓말 한 번도 안 해봤어? 왜 살면서 거짓말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처럼 물어.“

 

  "그래 그렇지. 살면서 거짓말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은 한 명도 없겠지.“

 

  "그럼 당연하지. 사실 나는 병원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거짓말을 더 많이 하게 된 것 같아.“

 

  "무슨 거짓말?“

 

  "사실 오늘 수술인 환자가 있는데 마취과 선생이 오늘 어디 가야 한다고 해서 결국 수술 미뤘잖아.“

 

  "그래?“

 

  "그때는 어쩔 수 없이 환자한테 거짓말을 하지. 일단 경과를 좀 더 지켜보고 수술을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에이, 뭐야.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다 어디 갔냐.“

 

  "다 환자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마취과 선생이 어디 가서 수술 미루겠다고 하면 환자가 우리 병원을 신뢰할 수 있겠어?“

 

  "그래, 나도 그 정도의 거짓말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시각장애인인 척 연기하며 1년 동안 사람들을 속여온 사장님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어째서, 무슨 연유 때문에 불편을 감수하고 앞이 안 보이는 척 연기를 하는 걸까?

 

  "언니, 근데 언니한테 명품을 다발로 사준 사장님이랑은 어떻게 됐어?"

 

  "으응? 아, 그게…….“

 

 잠시 머뭇거리며 망설이던 지현은 은비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나 사장님이랑 키스했다.“

 

  "꺄아악! 정말?“

 

  "응.“

 

  "그럼 언니랑 사장님이랑 둘이 정식으로 사귀는 거야? 역시 내 말이 맞았어. 분명히 사장님이 언니 좋아하는 것 같다고 내가 얘기했잖아.“

 

  "그러니까 키스는 했는데…….“

 

 시각장애인인 사장님이 날 보고 있었어.

 

 지현은 제일 중요한 뒷이야기를 털어놓지 못하고 아랫입술만 잘근 깨물었다.

 

  "근데 키스가 문제가 아니야.“

 

  "키스가 문제가 아니면?“

 

  “그게 말이야…….”

 

  ㅡ 비밀로 해줘요.

 

  ㅡ 뭘요?

 

  ㅡ 내가 앞이 보인다는 거.

 

 설핏 우빈이 했던 말을 떠올린 지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언니, 키스가 문제가 아니면 설마, 설마 이미 선을 넘어…….”

 

  “아니야, 아니야. 내가 잠깐 딴생각 좀 했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은비가 아, 하고 소리를 냈다.

 

  "아무리 AK 그룹의 사장님이라고 해도 시각장애인은 좀 많이 그렇지?“

 

  "아니야, 난 시각장애인이라도 사랑하면 얼마든지 결혼할 수 있다고 생각해.“

 

 은비의 질문에 지현은 단호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예전부터 장애는 불편한 거지 불행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지현은 결혼하는 데 있어서 몸이 불편한 건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럼 뭐가 문제야?“

 

  "사실 그게…… 음, 아니야, 아니야. 못 들은 거로 해.“

 

 장애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우빈이 다른 사람을 속이는 사람이라는 건 문제가 되었다.

 

  '믿을 수 없는 사람이랑 어떻게 진실한 사랑을 할 수 있겠어.‘

 

 사랑의 기본베이스는 믿음이라고 생각했던 지현은 몸이 불편한 척 연기를 하며 사람들을 속이는 그를 믿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언니, 내 이름에 무슨 한자를 쓰는지 알아?“

 

  "무슨 한자를 쓰는데?“

 

  "숨길 은! 덮을 비! 내가 진짜 입이 무겁다고 대한민국에서 소문난 애거든. 언니가 왜 사장님과의 연애를 망설이는지 나한테 솔직하게 말해봐. 내가 죽을 때까지 비밀로 할게.“

 

  "정말 다른 사람한테 얘기 안 할 자신 있어?“

 

  "그럼, 내가 입에 한번 자크를 채우면 절대 벌리지 않는다고. 그러니까 빨리 나한테만 얘기해봐.“

 

 은비는 입에 자크 채우는 시늉을 하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비밀을 혼자 알고 있어야 했던 지현은 정말 은비에게만이라도 진실을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왠지 은비라면 사장님이 왜 사람들을 속이면서 연기를 하는 건지 명쾌하게 설명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야, 사장님이 비밀이랬어. 괴로워도 그냥 마음속에 품고 있을래.“

 

 은비는 살짝 눈을 가늘게 떴지만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어라, 마셔라 하면서 칵테일 서너 잔을 비운 지현은 점점 취기가 오르면서 입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사실 난 처음 사장님을 만났을 때부터 사장님이 멋있다고 생각했어. 진짜 잘생기고 능력도 많은데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무시 받는 거 보면 마음이 아팠지.“

 

  "흐음, 그래? 그럼 사귀면 되잖아.“

 

 잔뜩 취기가 오른 은비는 눈을 반쯤 감고 말했다.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학생일 때야 좋아하면 그냥 사귀었지만, 지금은 생각할 게 많단 말이야.“

 

  "음, 그건 나도 인정. 나이 먹을수록 진실한 사랑에 빠지기 힘들긴 하지.“

 

  "그래, 더군다나 사장님은 내 상사니까 직장 사람들 눈치도 보인단 말이야.“

 

  "근데 언니, 그러니까 더 잡아야 하는 거 아니야?“

 

  "뭐?“

 

  "언니 마음 충분히 이해해. 나이 먹으면 사랑 앞에서 더 망설여지고 머뭇거리게 되는 건 당연한 거니까“

 

  "…….“

 

  "그런데 난 그래서 더 잡아야 한다고 생각해. 이런 사람이 언제 다시 올 줄 어떻게 알아?“

 

 은비의 말에 지현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놓치고 후회하느니 나라면 그냥 한 번 해보고 후회하겠다.“

 

 고개를 끄덕인 지현은 잔에 남아있는 칵테일을 마저 목구멍으로 밀어 넘겼다.

 

 

 

 ***

 

 

 

 집으로 돌아가는 지현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은비와 한잔하면 골치 아픈 고민을 다 잊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머리만 더 복잡해졌다.

 

  '오늘도 잠 못 자고 뒤척이다가 새벽에 잘 것 같다.‘

 

 내일은 또 어떤 얼굴로 사장님을 대해야 하나.

 

  '진짜 사장님은 왜 나한테만 앞이 보인다는 사실을 털어놓은 걸까?‘

 

 차라리 끝까지 속여 줬으면 더 좋았을 텐데.

 

 지현은 생각보다 큰 비밀의 무게에 괴로워 몸부림치고 있었다.

 

  ㅡ 놓치고 후회하느니 나라면 그냥 한 번 해보고 후회하겠다.

 

  '그래도 난 사랑에서 가장 중요한 건 신뢰라고 생각해.‘

 

 우빈은 오늘도 경제 신문을 읽어달라는 핑계로 지현을 불렀지만, 그녀는 사장님의 호출을 거절했다.

 

  '사장님도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겠지만 내 연애 상대로서는 잘 모르겠어.‘

 

 원래 자신의 주된 업무는 사장님께 신문을 읽어주는 일이었다. 그런데 사장님의 눈이 보이는데 굳이 자신이 우빈의 곁에 있어야 하는지도 의문이었다.

 

  '진짜 그만둬야 하나.‘

 

 대나무 숲이라도 있으면 가서 소리라고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여러분! 권우빈 사장님 눈이 보인대요!

 

  "아, 모르겠다. 내일은 내일의 내가 알아서 잘 처신하겠지.“

 

 한숨을 내쉬며 지현은 빌라가 있는 골목길로 들어갔다.

 

  '어? 여기 가로등을 아직도 안 고쳤네. 언제 한번 민원 넣든가 해야지.‘

 

 귀신이 튀어나올 것 같은 골목길이 어서 끝나주기만을 바라며 지현은 하염없이 걸었다. 밝을 때는 별생각 없이 걸었는데 가로등이 꺼져있으니 늘 걷던 길도 낯설게 느껴졌다.

 

 열심히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뒤에서 웬 남자의 발소리가 들렸다.

 

 저벅저벅저벅.

 

 발소리에 뒷덜미가 서늘해지고 심장이 쫄깃해졌다. 은비에게 전화하려고 했지만, 그녀의 핸드폰 배터리가 다 되어서 꺼져있었다. 지현이 조금 더 빨리 걸음을 옮기자 뒤따라오는 남자도 더 빨리 걷기 시작했다.

 

 저벅저벅저벅저벅저벅저벅저벅.

 

 발걸음 소리가 점점 커질수록 지현의 어깨는 딱딱하게 굳어갔다. 점점 뒤에 있는 남자와 간격이 가까워지면서 지현의 눈가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어느 정도 가까워지니 골목길 남자는 더 가까워지지 않고 일정한 간격으로 거리를 유지했다. 찰나의 희망을 품었지만, 지현이 골목길에서 오른쪽으로 돌자 남자도 오른쪽으로 돌았다. 용기를 내어 뒤를 슬쩍 돌아보니 가로등이 꺼져있어서 얼굴은 잘 안 보였다. 뉴스에서 봤던 흉악 범죄 CCTV가 눈앞에서 생생하게 재생되었다.

 

 그냥 아무 집 현관문이나 두드릴까 고민하던 지현은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집을 향해 뛰어갔다.

 

  "꺄아아앆! 살려주세요!“

 

 그러자 뒤따라 오던 남자도 그녀가 달리는 방향으로 뛰어오기 시작했다. 뒤따라 온 골목길 남자에게 어깨를 붙잡힌 지현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지현 씨, 놀라지 말아요. 나입니다. 권우빈 입니다.“

 

 사, 사장님?

 

 아까보다 조금 환한 골목길에서 정신을 차린 지현이 뒤를 돌아보니 사장님이 서 있었다.

 

  "사장님, 사장님이 여긴 왜 있어요! 심장 떨어질 뻔했잖아요.“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심장을 가지고 노는 우빈에게 지현은 크게 소리쳤다.

 

  "그래서 내가 몇 번이나 불렀잖아요.“

 

  "언제요?“

 

  "아까요. 한 비서라고 불렀는데도 그냥 막 도망가길래 무슨 오해하는 것 같아서 더 빨리 뛰어왔습니다.“

 

 우빈은 오해를 풀려고 뛰었던 모양이었지만, 그 때문에 심장이 바닥에서 나뒹굴었던 지현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지현은 벽에 기댄 채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우빈에게 퉁명스럽게 물었다.

 

  "사장님 근데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

 

  "지현 씨한테 할 얘기가 있어서 왔습니다.“

 

  "할 얘기가 뭔데요?“

 

  "언제까지 나 피할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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