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댄스 연습은 내가 걱정했던 것보다는 그런대로 할 만했다. 좀 쉬면서 하면 얼마든지 따라 할 수 있었다. 나도 이렇게 잘 버텨주는 내 심장이 기특했다.
가끔식 가슴이 뻐근할 정도면 병원에서 비상약으로 준 심근수축강화제를 남몰래 삼켰다. 그럴 때면 가빠진 호흡이 잠시 뒤 정상으로 돌아오며 남들처럼 똑같이 연습할 수 있었다.
내 심장이 갑자기 튼튼해진걸까? 하지만 그건 아니였다. 주치의는 내가 조금만 더 건강해지면 인공판막을 넣어주는 심장판막치환 수술을 하자고 했다. 비록 가슴에 흉터는 남겠지만 난 어서 빨리 그 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아이들도 내가 재즈 댄스 공연 연습에 참가한 것을 신기해 했다. 그도 그럴것이 열살이 다 되어 학교란 곳에 입학하고 난 뒤에 난 단 한번도 몸을 쓰는 활동에 참가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댄스 공연에 참가하게 된 것은 오로지 선영이 때문이였다. 그녀가 아니였다면 난 아프다는 진단서를 제출하고 집에서 책이나 읽고 있었을 것이다.
외부에서 초빙되어 온 재즈댄스 강사는 우리에게 파드브레니 그루브니 하는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춤 동작들을 가르쳤다. 난 마음처럼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자칭 룸바의 제왕이라던 맹기남은 나보다 상황이 더 심각했다. 기남이가 웨이브 할 때마다 뼈가 우두둑 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하지만 기남이 덕분에 내가 덜 주목을 끌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좀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즈 댄스 지원을 한 우리는 스트레칭과 기본동작, 작품안무 해서 모두 하루에 세시간 이상씩 무더운 여름날의 체육관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속옷까지 다 젖도록 연습했다
.
선영이는 타고난 춤꾼 같았다. 아마도 전에 연예인을 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생각할 정도였다. 남들이 버벅거리는 웨이브나 턴도 마치 선행수업이라도 받고 온 것처럼 척척 해냈다. 그녀에 비하면 나머지는 모두 나무토막 이였다.
난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 계속해서 연습했다. 밥먹을때도 동영상을 보았고 잘때도 머리속에서 동작 하나씩을 떠올렸다.
외부강사로 온 선생은 우리들 하나하나를 꼼꼼히 지도해줬다. 통나무1호는 당연히 맹기남이였고 2호는 어떤 여자얘 였다. 난 통나무와 인간계 사이의 중간쯤 이였다.
“아! 젠장 더러워서 못해먹겠다”
통나무 1호의 영광을 차지한 맹기남이 쉬는 시간에 내 옆에 와서 털썩 주저 앉았다. 나는 쉬는 시간에도 선영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을 맹기남이 슬쩍 보더니 내 시선이 꽂히고 있는 쪽을 따라가 선영이를 찾아 냈다.
“쟤냐?”
“뭘?”
슬쩍 넘겨짚는 맹기남에게 난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니가 좋아하는 얘가? 짜식…큭큭”
맹기남은 뭐든지 지가 믿고 싶은 대로 믿어 버리는 습관이 있었다. 하지만 대개 그의 짐작이 맞았다.
“아서라. 별로 평판이 안좋다더라”
기남이가 툭 던진 한마디가 난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응? 그게 무슨…”
“엄청 깍쟁이에다가 얘들 가려서 사귄다러라. 별로 있는 집 얘처럼 보이지도 않는데…”
난 별로 그의 말이 신뢰가 가지 않았다. 나의 <에스메랄다> 그녀가 그럴리가 없었다. 그보다는 그에게 먼저 묻고 싶은 말이 있었다.
“너…혹시 에릭 방하고는 말 좀 해봤냐?”
“응? 에릭?”
“뒷자리에 앉은 파란 눈 에릭 말이야. 왜 그런 얘가 우리학교에 다니는 거지? 국적이 어디야?”
“나도 에릭은 잘 몰라. 알아보려고 해도 잘 아는 사람이 없더라구. 내가 심지어 우리 아버지한테도 물어봤다니까.”
“그래서 뭐라고 하셔?”
“그런 거 알아볼라면 한참 걸린데. 나보고 공부나 열심히 하래.”
“그래…아무리 니네 아버지가 신문사에 다니지만 쉽지 않겠지…”
난 그냥 그에 대해서 알아보기를 쉽게 포기했다.
“뭐…대충 집이 도곡동 팬트하우스에 혼자 산다는거랑 미국인이라는거 정도…”
“혼자 산다구? 그 넓은 집에?”
“응. 전에 교무실 갔다가 에릭이 선생한테 얘기하는 걸 얼핏 들었지. 부모님이 미국에 계셔서 혼자 지낸데.”
“부모님은 뭐하시는 분인데?”
“나도 몰라. 자식아. 그런 거 알려면 우리 아버지한테 직접 부탁해보든지…
그나저나 너 요새는 민변구가 안 괴롭히냐?”
맹기남은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응…그 날 이후로 잠잠해졌어.”
“흠…너 지금 내가 하는 말 듣고 너무 열 받아 하지는 마라…”
“무슨 말?”
난 기남이 이렇게 말을 꺼내자 좀 불안했다. 대체 무슨 말일까? 맹기남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민변구 그 세키. 알다사피 그 세키 아버지가 유명한 조폭이잖아. 여기 학교도 이사장이 부탁한 일들을 뒤처리해주고 들어온 거라는데 그건 알고 있지?”
“응”
난 자세한 얘기까지는 몰랐지만 일단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키가 꼭 사배자 같은 만만한 얘들만 골라서 괴롭히고 다니거든. 근데 내가 전에 화장실칸에서 싸고 있었을 땐데 민변구가 차동팔하고 신영귀랑 같이 담배 피러 들어오더라구. 그러면서 18 18 하면서 지들끼리 막 욕을 하는거야.”
“그런데?”
“싸다가 말고 참으면서 가만히 들어봤지. 근데 민변구가 니 얘기를 하는거야.”
“내 얘기를?”
“응. 그 때가 6월 수능모의고사 전이였거든. 누가 널 좀 슬쩍 건드려 보라고 했다는 거야.”
“누가? 왜 날 건드려봐?”
난 맹기남의 말에 깜짝 놀랐다.
“에릭 말이야. 에릭 방이 자기한테 널 건드려 보라구 시켰다구 민변구가 툴툴 거리더라구.”
“에릭이 민변구한테 날 건드려 보라구 시켰다구?”
“응. 그러면서 민변구가 차동팔하고 신영귀한테 그 따위 심장 세키 별로 갖고 놀아도 재미도 없고 건들기도 귀찮다고 하더라구”
나는 머리가 띵해지면서 한참 동안 그 상황을 해석해야만 했다. 에릭이 민변구를 시켜 날 건들라고 했다고? 그럼 그 날 소각장에서 내가 당하는 것을 지켜보던게 우연히 그런게 아니고 일부러 다 처음부터 계획했다는 건가? 난 머리속이 혼란스러웠다.
“근데 그걸 왜 지금에서야 얘기해?”
“짜식아. 어차피 이미 다 벌어진 일이잖아. 안다고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너 에릭하고 민변구가 한다는데 니가 피할 재주가 있어?
그리고 에릭이 직접 한 말도 아니고 민변구 그 세키는 원래 구라를 잘 치는 놈이기도 하고”
에릭이 도대체 왜 나를? V4의 수장, 학교내 최강 포식자, 에릭의 눈에는 내가 하찮은 벌레 정도로 보일텐데. 내가 무슨 건드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난 또 다시 그가 소각장에서 날 보고 한 말이 떠올랐다.
<너 나한테 그 심장 좀 줘라>
그냥 장난으로 넘기기에도 섬뜩한 말이였다. 어느 누가 장난으로 남의 심장을 달라고 한단 말인가? 더구나 내 심장은 판막이 고장난 심장인데…
난 기남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에릭 같은 학교의 최강 포식자가 나 보잘 것 없는 따위에 흥미를 가질리가 없었다.
에릭이 민변구한테 나를 건들어 보라고 시켰다구? 틀림없이 민변구 이 악마 같은 놈이 질투심에 에릭을 깎아 내리고 자기 잘못을 에릭한테 덮어 씌우려는 사기를 치는 거 겠지…암만 봐도 그 네명 중에 에릭이 제일 잘 나가니까 말이야…
난 나름대로 민변구에 대한 정보 분석을 끝냈다.
“하여튼 조심해. 민변구 그 놈 완전히 미친놈이니까. 근데 에릭도 가만히 보면 참 이상한 놈이야. 왜 혼자 한국에 와서 이 학교를 다니는지…”
“기남아. 나 부탁이 있어”
“응 뭔데? 웬만하면 하지마…”
“에릭에 대해서 니네 아버지한테 좀 물어봐줘. 좀 시간이 걸리더라도 괜찮아.”
“왜? 내가 한 말 때문에?”
“아니야. 그것보다도 좀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 제발.
부모님이 누군지. 왜 한국에 왔는지. 그전에는 뭐를 했는지..좌우간 알 수 있는 건 모두…내가 나중에 크게 한턱 쏠게”
“몰라. 아버지한테 한번 물어는 봐줄게. 괜한 기대는 하지 마라.”
“고맙다. 꼭 좀 물어봐줘”
나 역시 에릭이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것 만큼이나 그에 대해 알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초식동물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포식자가 나타날 지를 알아야만 재빨리 숨을 수 있었기 때문에.
“한가지만 더”
“또 뭔데? 한번에 너무 털어먹을라는거 아니야?”
“저기…이미 너도 눈치 깠으니 말인데 저기…선영이에 대해서도 좀 알려 줄 수 있어?”
기왕 들통난 거 맹기남이 아는 것을 전부 알려 줬으면 하고 바랬다. 그녀를 알아야 그녀한테 접근할 수 있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