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민후 오빠도 안 내려왔어?”
교복 차림으로 아침을 먹기 위해 자리에 앉은 설이가 비어 있는 두 자리를 보고 물었다.
할머니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어제 담임선생님이 전화했단다. 지 형은 지 때문에 학교까지 불려갔는데 정작 가야될 놈은 방에서 퍼질러 잠이나 자고 있고. 썩을 놈 같으니라고.”
“...그랬어?”
“왜 저러는지 알어? 설마 학교에서 왕따 같은 거 당하는 건 아니지?”
거친 말투로 툴툴대고 있었지만 할머니는 영도를 걱정하고 있었다. 할머니의 마음을 들여다본 설이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날 밤. 서늘한 말만 남겨두고 방으로 들어간 영도는 며칠 동안 학교에도 나오지 않은 채 자기만의 공간에 갇혀 버렸다.
민후가 문을 두들겨도, 할머니가 쫓아 올라가 욕지거리를 해대도 영도는 꼼짝을 하지 않았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적막한 집안 분위기를 깨보려고 오버해서 힘차게 인사한 설이가 문을 열고 나왔다.
대문 쪽으로 경쾌하게 향하던 발걸음이 잠시 멈춰섰다.
멱살을 잡고서라도 끌고 나와야 되는 거 아닐까.
잠시 설이는 2층 계단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리고 굳게 닫힌 영도의 방을 올려다 보았다.
하지만 금세 설이는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영도한테 지금의 설이는 그냥, 아랫집 사는 사람일뿐이었다. 멱살을 잡는 것도, 잔소리를 하는 것도, 억지로 끌고 나오는 것도 이상하고 낯선 관계.
설이는 용기를 내지 못하고 영도에게서 다시 등을 돌렸다.
**
“저거 저거. 요즘 수업시간에 집중 좀 하나 싶더니 또 멍 때리고 있네. 윤설!”
선생님의 호령에 빈 옆자리를 멍하니 보던 설이가 움찔하며 정신을 차렸다.
“네....?”
“자니? 눈 뜨고 자?”
반 아이들이 키득대는 소리가 들렸다.
“죄송합니다.”
선생님의 따가운 눈초리를 피하던 설이의 시선에 창가에 서있는 민후가 보였다.
민후는 설이와 눈이 마주치자 따사로운 미소를 지었다. 영도의 미소가 사람의 마음을 철렁이는 재주가 있다면, 민후의 미소는 사람을 껴안는 포근함이 있었다.
참, 저 오빠는 저 때부터 어른스러웠구나.
마침, 수업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설이는 교실 밖으로 나가 민후를 불렀다.
“오빠. 여긴 어쩐 일이에요?”
“학교 온 김에 너 좀 보고 가려고. 아까 나 때문에 혼난 건 아니지?”
설이는 웃으며 고개를 젓고, 잠시 민후의 표정을 살폈다.
“오늘 영도 때문에 학교 온 거죠? 무단결석이 너무 길어져서 그런 건가요?”
“그렇지 뭐.”
순간, 민후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일이 커졌구나. 설이는 직감했다.
“더 이상은 학교에서 봐줄 수가 없대. 그 전 학교에서는 사고는 쳐도 수업 빠진 적은 않았거든.”
“....”
“늘 사고 치던 애긴 했지만 요즘 같은 모습은 나도 처음 봐. 화가 나면 소리를 지르고, 누가 넘어뜨리면 일어나서 어떻게든 쫓아가는 애지. 저렇게..”
“넋 놓고 주저앉아 있을 애는 아니죠.”
설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민후의 말을 대신 받았다.
민후는 어른스러운 표정이 된 설이를 바라봤다.
할머니 앞에서는 어린 아이처럼 애교를 부리다가도 어쩔 때 보면 지금처럼 툭툭 속 깊은 말을 내뱉을 때가 있었다.
설이에게는 영도 이야기를 조금은 털어놓아도 될 것 같았다.
“어제 영도한테 화를 많이 냈어. 요즘 힘든 건 아는데 너무 한 거 아니냐고. 마음 정리 될 때까지 기다려주려고 했는데 학교에서 경고 전화까지 받으니까 나도 마음이 안 좋아서 언성을 좀 높이게 됐네.”
민후의 표정을 보니 박회장의 귀에 영도의 무단결석 이야기가 들어간 것 같았다.
박회장은 고집불통 영도보다 민후를 먼저 잡았을 것이다.
결혼생활 내내, 아들에 대한 불만을 며느리에게 대신 쏟아냈던 것처럼.
설이는 앞에 있는 민후의 인생이 가엽게 느껴져 어깨를 토닥여주고 싶어졌다.
한참 어린 학생이 보내는 위로의 눈빛에 민후는 씁쓸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영도에게 나보다 좋은 사람이 주변에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난 역량 부족인가봐.“
“무슨 소리에요. 오빠처럼 좋은 사람이 어디 있다고.”
“나도 내가 그런 사람일 줄 알았지. 근데 아니야. 꽉 막힌 영도 인생에 숨통을 뚫어주기엔 난 내 인생 살기도 벅찬 애더라고.”
민후와 이야기를 나눈 뒤부터는 더 수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수수께끼 같던 민후의 말에 대한 대답이 설이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사실, 다시 겪게 된 학교생활은 설이에게 쉽지 않았다. 공부가 힘들어서도, 오랜만에 만난 어린 친구들과의 교우 관계 때문도 아니었다.
심지어 어릴 땐 겪지 못했던 지형수의 괴롭힘도 그렇게 많이 힘들지는 않았다.
설이를 힘에 부치게 한 건 학교에서 문득문득 찾아오는 영도와의 추억 때문이었다.
영도와 설이의 관계는 첫사랑, 그 이상이었다.
친구이자 남매이자 어쩔 때는 엄마, 혹은 아빠가 되어주기도 했다.
고된 결혼생활에 덮여 잊고 있었던 지난 시간들이 학교 곳곳에서 불시에 튀어나오고는 했다.
질끈, 설이의 머리가 아파왔다.
이제야, 첫번째 열여덟의 영도와 지금의 영도가 왜 다른지 알 것 같았다.
지금의 박영도에게는 내가 없다.
지금의 나에게 박영도가 없듯이....
**
부스스 침대에서 일어난 영도의 시선에 설이의 핸드폰이 들어왔다.
배터리가 방전되어 있었다.
영도는 일어나 핸드폰을 충전기에 꽂으며 귀찮은 표정으로 중얼댔다.
왜 핸드폰 달란 소릴 안 해.
멋대로 뺏어 들고 나온 주제에 직접 돌려줘야 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영도는 미운 열여덟답게 괜히 툴툴대며 설이 탓을 했다.
핸드폰을 돌려주지 않았던 건, 사실 설이 얼굴을 보기가 미안해서였다.
며칠 동안 방에 틀어박혀 있으면서 설이 핸드폰을 몇 번 들춰 봤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할 게 없어서였다. 학교에도 가기 싫고 서울 애들 불러서 사고치며 정성스럽게 반항을 하기도 귀찮았다.
그러던 중, 아침마다 울리는 설이 핸드폰의 알람을 끄다가 사진첩을 보고 푹 빠지게 되었다.
설이가 치명적인 척, 귀여운 척 하며 찍은 사진이 웬만한 만화책보다 웃겼다.
그러다가 설이가 보낸 문자까지 손이 가게 되었다.
효진이, 효진이, 효진이...
온갖 잘난 척은 다 하더니 친구는 효진이 한 명 밖에 없는 듯 했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발신자가 있었다.
아빠.
할머니하고만 살아서 부모님이 돌아가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그렇게 생각하던 영도는 설이의 문자를 읽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빠 나 오늘 시험 망침 쏘리]
[급식 맛없어서 오자마자 라면 두 봉지 먹었어. 아빠가 좋아하는 할머니 김치까지 넣음 ㅋㅋ]
[살쪘나봐.. 뭘 했다고 계속 살이 찌지]
문자 내용은 일상적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은 설이가 아빠에게 보낸 문자만 있고 답장이 없었다.
문자를 넘겨보던 영도의 손이 어딘가에서 멈췄다.
[방금 별똥별 떨어졌어]
[아빠가 그랬잖아. 별똥별이 떨어지는 건 엄마가 나 보라고 손 흔드는 거라고]
[아까 본 별똥별은 엄마였어, 아빠였어?]
설이 핸드폰 탐색은 거기서 끝났다.
그렇게 닫아놓은 핸드폰은 며칠 동안 방치되어 조금 전 충전기에 꽂기 전까지 방전 상태로 놓여 있었다.
영도는 충전되어져 가는 설이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엄마에게 다시 버림받고 돌아오던 그 날. 민후에게 화를 내던 그 순간.
놀란 민후의 표정보다 영도의 마음에 걸린 건 그 옆에 있었던 설이의 눈빛이었다.
마치 내 아픔을 다 아는 것 같은 그 눈빛.
어쩌면 설이는 비슷한 상처를 가진 자신을 알아본 걸지도 모른다.
오늘은 꼭 갖다 줘야지.
생각하던 그때, 설이의 핸드폰에서 벨소리가 흘러 나왔다.
효진이었다.
잠깐 망설이던 사이 벨소리가 끊겼다.
영도의 마음을 읽은 듯, 벨소리가 끊기고 대신 문자가 틱 날아왔다.
[나야, 1층. 전화 받아.]
전화를 받자 설이 특유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핸드폰 팔아먹은 줄 알았네. 빌린 게 언젠데 아직도 안 갖다 줘?]
“이따 줄게.”
[이따는 무슨 이따. 나 지금 당장 필요하니까 핸드폰 들고 학교로 와.]
“....미쳤냐?”
[미치긴 누가 미쳤다고 그래. 너 나한테 통화료도 결국 안 준 거 알지? 양심이란 게 있으면 튀어 와라.]
수화기 건너편에서 한참동안 소리가 나지 않았다.
설이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지가 생각해도 할 말 없는 상황인 거지 뭐.
이겼다 생각하며 의기양양해하던 것도 잠시.
툭, 영도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이 자식이. 씩씩대는 설이를 효진이 뚫어지게 쳐다봤다.
“너 박영도랑 진짜 아무 사이도 아냐?”
“몇 번째 말해. 아무 사이도 아니라니까.”
“썰. 우리 엄마랑 아빠가 작년에 대판 싸운 적이 있었거든?”
“뭐?”
“그때 우리 엄마. 아빠가 무슨 말 해도 쳐다도 안 보고 무시 작렬하고, 설거지 할 땐 저러다 접시 안 깨지는게 용하다 싶을 정도로 신경질 부리고 그랬어.”
뜬금없는 효진의 말에 설이는 이야기의 맥락을 잡지 못하고 눈만 껌뻑껌뻑 하다 물었다.
“그 얘기가 갑자기 어디서 튀어 나온 거야?”
효진이는 심각한 얼굴을 하고 설이를 바라봤다.
“근데 말야.”
“응.”
“그때 느꼈던 살벌한 기운을 내가 요즘 널 보면서 다시 느낀다. 희한하지?”
생각지 못한 말이었다. 흔들리는 동공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서둘러 시선은 거뒀지만 말은 더듬댔다.
“얘..얘가.... 뭐래.”
때마침 수업종이 울리고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왔다.
서둘러 자리에 앉은 설이는 여전히 자신을 향해 꽂혀있는 효진의 시선을 느꼈다.
무서운 기지배. 하여튼 옛날부터 촉은 기가막히게 좋았다.
설이는 뒤를 돌아 효진을 향해 그만두라며 손을 훠이훠이 저었다.
**
“주번! 복도에 우유 터졌더라. 가서 닦고 와.”
대걸레를 든 오늘의 주번, 설이가 교실을 빠져나왔다.
조용한 복도를 지나가려던 설이의 시선에 수업이 한참 진행되고 있는 교실로 옮겨갔다.
원래 설이의 자리였던 맨 뒷자리가 보였다.
그러자 또다시 영도와의 추억이 담긴 어느 수업시간이 떠올랐다.
**
설이가 맨 뒷자리를 좋아했던 건 공부에 관심이 없어서기도 했지만, 그 자리에서 잘 보이던 나무도 한몫했다.
설이는 입학하자마자 그 나무가 마음에 들었다. 비실비실 대는 게 이상하게 마음이 쓰였었다.
그날도 설이는 창밖의 나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후, 보다 못한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루 종일 창밖만 보고 있는 윤설. 일어나.”
퍼뜩, 정신을 차린 설이가 쭈뼛쭈뼛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도가 그런 설이를 보며 놀리듯, 굳이 설이와 시선을 마주치며 픽, 웃어댔다.
곧이어 선생님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뭘 웃고 있어? 하루 종일 윤설만 보고 있던 박영도도 일어나.”
오오오오. 아이들이 짓궂게 놀려대는 소리가 설이의 귀에 웅웅대며 들렸다.
의자를 끄는 소리가 들리고 영도가 일어섰다. 힐끗 옆을 돌아본 설이의 시선에 영도의 빨개진 귀가 보였다.
서로를 향한 마음이 짝사랑에서 첫사랑으로 바뀌게 된 순간이었다.
**
그리워졌다. 그 순간이 그리운 건지, 영도가 그리운 건지는 모르겠지만...
설이는 주머니 속의 효진의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자신의 번호를 꾹꾹 눌렀다.
전화해서 마음과는 다른 이야기를 할 작정이었다.
핸드폰 진짜 팔아먹을 생각이냐고.
자꾸 이러면 민후 오빠한테 얘기할 거라고.
지금 바로 안 오면 내가 가서 끌고 오겠다고.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통화 버튼을 누른 설이는 핸드폰을 귀에 대지도 못한 채 서있었다.
어디선가 익숙한 벨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유행하는 벨소리가 아닌 핸드폰이 깔려있는 기본 벨소리였다.
또래 아이들처럼 유료결제가 필요한 최신가요 벨소리는 사용하기 힘들었던 설이 핸드폰의 벨소리였다.
설이는 소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계단 밑에서 벽에 기댄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영도가 보였다.
쓸쓸한 그 모습이
그래도 여기까지 와 준 그 마음이
설이의 심장에 쿵 내려앉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