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내에 설치된 공중전화 박스에서 영도가 수화기를 들었다.
“김비서님. 저 영도에요.”
[아, 영도학생. 핸드폰은 어쩌시고.]
“핸드폰 형한테 뺏겼어요. 그건 그렇고 저희 엄마 부산에서 봤다고 제보 들어온 건 어떻게 됐어요?”
[저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자리를 뜨신 후였습니다.]
김비서의 대답에 영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영도가 고등학생이 되면서 박회장이 점령하던 태산그룹 안에서도 영도의 라인을 타려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힘을 갖게 된 영도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엄마를 찾는 것이었다. 물론 아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모르게 할 수는 없었다. 최대한 빨리 찾아야 한다.
영도의 미간이 좁혀졌다.
“놓치신 거예요?”
[네, 죄송합니다. 그런데 조금 전 수원에서 봤다는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지금 정확히 어디 계시는지 알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어둡던 영도의 표정이 밝아졌다.
“연락 주시면 이번엔 제가 바로 가볼게요. 비서님이 가시면 엄마가 또 도망갈 수도 있으니까요. 제가 직접 찾아가야 얼굴이라도 한번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네. 그런데 핸드폰이 없는데 어디로 연락을 드릴까요? 민후 군한테 전화하면 되나요?]
“아, 그건 좀...”
하, 참. 핸드폰 없으니 엄마 찾는 것도 힘드네. 아버지 몰래 찾는 거라, 민후 형한테 얘기하기도 그렇고. 어쩌지.
영도의 생각이 복잡하게 굴러가던 사이, 전화가 툭 끊겼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공중전화에 넣은 돈이 떨어졌다. 동전을 더 넣기 위해 주머니를 뒤졌지만 수중에 한 푼도 없었다.
핸드폰도 없고 돈도 없고. 거지가 따로 없네, 완전.
신경질이 난 영도는 수화기를 쾅 내려놓고 공중전화 박스를 나왔다.
생각해보니 딴 데 새지 말라고 민후가 영도의 교복 값을 설이에게 맡겼던 기억이 났다.
각자 갈 길 가더라도 돈은 받고 갔어야 했는데.
영도는 설이와 헤어졌던 골목길로 다시 돌아갔다.
그곳에는 여전히 떼로 모여 있는 남학생들이 있었다.
오래도 한다... 신고했다면서 경찰은 안 오나?
무심코 스쳐지나가려던 중, 영도는 남학생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설이를 발견했다.
“....쟤 왜 저기 있어?”
기막혀 보고 있는 영도의 시선에 설이의 손에 들려있는 핸드폰이 들어왔다.
영도는 눈을 번뜩이며 미소를 지었다. 엄마와 관련된 연락을 시시각각 받을 수 있는 소중한 핸드폰이 바로 1층 손 안에 있었다.
**
형수가 어깨를 툭툭 밀치자 설이와 아라가 벽에 붙어 섰다.
열여덟의 눈으로 보나, 스물아홉의 눈으로 보나 비행청소년은 여전히 무서운 존재였다.
“애 괴롭히지 말고 보내줘.”
“내가 얠 왜 괴롭혀? 난 돈 많은 애는 안 괴롭혀.
거래만 하지. 너도 나랑 거래 트고 싶냐?”
와. 나 지금 삥 뜯기는 거야?
어른답게 큰소리 빵빵 치고 혼구녕을 내주고 싶은데. 설이도 모르게 나오는 말은 열여덟이 할 법한 대사뿐이었다.
“난 돈 없는데!”
피식 웃은 형수도 일진들이 할 법한 단골 대사를 내뱉었다.
“뒤져서 나오면 10원에 한 대다.”
설이는 머리를 굴려 재빠르게 계산을 했다. 설이의 교복값에 영도의 교복값에 간식값까지 합하면.. 이거 나 오늘 맞아 죽겠는데?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들키지 않는다는 자신감!
“뒤져봐. 진짜 돈 없어.”
설이를 훑어본 형수는 진짜 설이가 돈이 없어 보이게 생겼는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설이 손에 들린 핸드폰을 보고 말했다.
“일단 그 폰부터 내놔봐.”
“핸드폰은 왜?”
“돈 없다며? 그니까 핸드폰이라도 내놓으라고.”
형수가 핸드폰을 든 설이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벗어나려고 애를 써봤지만 그럴수록 형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으스러질 것 같은 아픔에 설이의 손에서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때, 누군가가 달려와 순식간에 형수의 팔을 꺾고 제압을 했다.
빨개진 손목을 감싸 안으며 고개를 올린 설이의 시선에 구세주의 얼굴이 보였다.
“박영도?”
설이를 향해 씽긋 웃은 영도가 형수를 저쪽으로 밀어버리며 말했다.
“핸드폰이 무슨 죄냐? 말로 하자.”
패거리들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선 형수가 고통보다 더한 쪽팔림에 얼굴이 벌개져 소리쳤다.
“까고 있네. 너 누구야?”
“나? 전학생. 미안하다, 친구야. 학교에서 왕따는 시키지 말아줘.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라.”
베시시 웃는 영도에게 형수가 달려들던 그때, 경찰들이 호루라기를 불며 골목으로 달려왔다.
순식간에 형수패거리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한시름 놓은 설이가 아라의 가방에 묻은 흙을 털어 건네주었다.
“괜찮아? 아우 저 진짜 철없는 고딩 자식들.”
아라는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설이를 보더니 가방을 휙 뺏어 들었다.
“윤설. 너 뭔데 아까부터 친한 척이야?”
그렇지. 너랑 나랑 사이가 좋지는 않았지. 그래도 구해주겠다고 뛰어든 사람한테 말하는 거 하고는..
설이가 욱하며 받아치려는 사이, 아라는 뉴페이스인 영도를 슬쩍 보며 가방을 멨다.
“...고맙다?”
그렇게 툭, 말을 내던지고는 아라는 가방을 메고 사라졌다. 학교에서 온갖 잘난 척은 다 하는 게 여기서 삥 뜯기고 있었던 게 쪽팔린 듯 했다.
설이는 아라의 뒷모습을 흘겨보며 중얼댔다.
“내가 미친년이지. 저런 걸 구해주겠다고.”
그 말에, 영도가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봤다.
“네가 할 말은 아니다?”
“뭐가?”
“쟨 싸가지 없게라도 고맙다고 하는데 넌 뭐냐? 나한테 뭐 할 말 없어?”
“있지. 여긴 또 왜 왔어? 각자 갈 길 가자며.”
“돈이 있어야 가지. 너 내 교복 값 떼먹으려고 그랬지? 떼먹으려면 제대로 떼먹어야지 별것도 아닌 새끼들한테 삥 뜯기려고 가져갔어?”
노려보던 설이는 주머니에서 영도 몫의 돈을 꺼내 건넸다.
그래도 영도가 가지 않고 바라보고 있자, 할머니가 준 간식값까지 영도의 손에 쥐어주었다.
“다 줄 테니까 빨리 가.”
“어딜 가? 같이 가야지.”
“왜 이랬다 저랬다 해? 이따 오라며! 각자 가자며!”
“아니 생각해 보니까 할머니가 그렇게 말씀하셨더라고. 같, 이. 가라고.”
영도가 빙그레 웃었다.
**
전시되어 있는 교복을 훑어보던 영도는 교복을 입고 탈의실에서 나오는 설이를 힐끗 바라봤다.
저걸 어떻게 구워삶아야 핸드폰을 빌려 쓸 수 있을까.
“괜찮은데? 할머니는 어딜 보고 살이 쪘다고 하시는 거야? 이렇게 날씬..”
설이의 교복 태를 훑어보던 영도가 차마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더듬었다.
날씬.. 그 뒤에 뭐? 설이가 질문하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날씬...에 가까운 딱 표준 체중이기도 어려운데!”
저걸 그냥. 오랜만에 입은 교복에 마음이 들떠 있던 설이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쌩, 찬바람을 불며 설이가 다시 탈의실로 들어가 버렸다.
이것 참. 지금까지 영도를 싫어하는 여자도, 영도가 잘 보이고 싶은 여자도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설이의 마음을 살 수 있는지
영도는 도통 감이 잡히지를 않았다.
흠, 어쩌지...
영도는 안 쓰던 머리를 요리조리 굴려보기 시작했다.
**
개학식 날.
설이는 영도가 따라올까봐 서둘러 언덕길을 뛰어내려갔다.
읍내에 갔다 온 이후부터 영도가 설이의 주변을 기웃 기웃 거리는 바람에 아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설이는 한참을 뛰어 내려와서야 걸음을 늦추기 시작했다.
그런 설이의 어깨에 어디선가 나타난 영도가 손을 툭 올렸다.
“기다리느라 목 빠지는 줄 알았다.”
놀란 설이가 움찔하고는 화를 삭히며 물었다.
“너 요즘 뭐하는 거야? 왜 이렇게 졸졸 쫓아다녀?”
영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나랑 대화해 주는 거야?”
“그래. 대화하는 데 돈 드는 것도 아니고 말해봐.”
“할 말.. 이라기보다는 부탁할 게 좀 있는데”
“서론 무지하게 기네. 그니까 말하라고.”
“..핸드폰 좀 빌려 쓰자.”
“핸드폰?”
“어. 전화 받을 데가 있는데 형한테 핸드폰을 뺏겼어. 공중전화도 동네에 별로 없고. 우리 집에도 전화기가 없더라.”
싱겁기는. 별 것도 아니구만.
심드렁하게 듣던 설이는 영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점차 오래전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영도는 김비서를 통해 엄마를 찾고 있었다.
핸드폰을 민후에게 뺏긴 뒤, 김비서와 연락할 수단이 없어 난감해 했고. 설이에게 부탁해, 설이의 핸드폰을 통해 연락을 주고받았었다.
그때는 아주 친한 사이는 아니더라도, 딱히 나쁜 사이도 아니었기 때문에 영도가 설이에게 부탁하는 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결국 엄마를 찾는 일은 영도에게 큰 상처로 남겨졌다.
어쩌면 이 일도, 우리의 만남처럼 시작을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기대감에 가득 찬 영도를 잠시 보다가 설이가 입을 뗐다.
“안 돼. 싫어.”
“어려운 거 아냐. 그냥 연락 오면 나 바꿔주고. 가끔 전화 빌려주고 그러면 돼. 통화료는 낼게.”
“너랑 아는 척, 친한 척 하는 것도 싫다고 했지? 근데 내가 왜 네 부탁을 들어줘? 총 맞았니?”
차갑게 말을 끝낸 설이가 달려가 버스에 올라탔다.
저거, 저거. 점점 더 싸가지가 없어지네?
황당함도 잠시, 영도는 다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아부도, 부탁도 안됐으니 방법은 딱 하나.
협박인데..
협박에 필요한 건 약점!
저 싸가지의 약점은 무엇일까나..
**
오랜만에 학교에 온 설이는 설레는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설이의 자리는 맨 뒤였다. 공부하기 싫어하는 설이가 반장에게 조르고 졸라 얻은 자리였다.
교실에 들어온 효진이 설이를 보고 달려왔다.
“야. 그거 알아? 오늘 전학생 온대.”
심드렁하니 보며 설이가 말했다.
“그래? 왠지 엄청 별로인 애가 올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알고 있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영도는 하필! 우리 반으로 배정을 받았고 쓸데없이 기다란 기럭지 때문에 하필! 맨 뒤에 앉은 내 옆에 앉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절대 그렇게 두지 않겠어.
때마침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영도가 들어왔다.
영도를 알아본 아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던지 말던지 특유의 심드렁한 표정으로 반 아이들을 훑어보던 영도는 맨 뒤에 앉은 설이와 눈이 마주쳤다.
같은 반이었어?
갑자기 학교가 흥미로워진 영도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영도가 미소를 짓자 설이를 제외한 교실 안 여자아이들은 상기된 표정이 되었다.
“서울에서 온 전학생이야. 인사해.”
담임의 말에 영도가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를 했다.
“이름은 박영도고, 잘 지내보자.”
영도의 인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여자 아이들이 수군댔다.
“뭐야, 목소리도 멋있잖아.”
“다리 길이 봐. 서울 물 먹어서 그런가.”
반 아이들을 쓱 둘러본 담임이 설이의 옆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리는 저기 맨 뒤. 설이 옆자리가 좋겠네.”
지금이다. 설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선생님! 저 자리 좀 바꿔주세요.”
그렇게 나오시겠다? 영도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개학 하자마자 무슨 자리 타령이야?”
“제가 방학 중에 눈이 갑자기 너무 안 좋아져서요. 칠판이 하나도 안 보여요.”
“그럼 안경을 써.”
설이는 잠시 천장을 바라보며 울음을 참듯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알아봤는데 안경이 생각보다 비싸더라고요. 뭐.. 알바를 하나 더 알아보는 방법도 있긴 한데...”
당황한 담임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알겠어. 여기 맨 앞으로 와.”
설이는 고개를 꾸벅 하고는 재빠르게 가방을 챙겨 교탁 앞에 앉았다.
살았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설이의 모습을 보며, 영도는 조금 전 자신을 노려보던 설이가 한 말을 떠올렸다.
[너랑 친한 척, 아는 척 하는 거 싫다고 했지?]
영도의 눈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윤설의 약점을 알아냈다.
윤설의 약점은 박영도, 바로 나였다..!
저 아이는 이유불문 무조건적으로다가 날 싫어하고 있었다.
“영도는 아까 말한 대로 저기 맨 뒤로 가고.”
담임의 말에도 영도는 미동하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설이를 바라보았다.
저거 저거 또 왜 저래?
설이는 그런 영도의 눈빛을 보며 불안감을 느꼈다.
영도는 설이에게서 담임으로 시선을 쓱, 옮기고는 입을 열었다.
“선생님. 저도 자리 좀 바꿔 주세요.”
영도의 손가락이 천천히 사색이 된 설이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여기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