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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장미의 이름
작가 : 홍단
작품등록일 : 2017.12.14

꿈을 꿔.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의 꿈을.

알레테아의 혼잣말에 그가 묻는다.

...돌아가고 싶은 건가요?

대답은 생각보다 빠르고, 분명하게 돌아왔다.

돌아가고 싶다고 한 적은 없어. 기억 속에서 긁어내고 싶을 뿐이야.



알레테아도 한때는, 미치도록 돌아가고 싶었다.
그녀의 부모와, 형제와, 이웃들의 몸을 양분으로 피어난 그 혐오스러운 붉은 꽃들의 꿈을 꾸기 전까지는.

 
17화 - 엘피스(6)
작성일 : 17-12-17 21:27     조회 : 242     추천 : 0     분량 : 5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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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행히도 라키샤는 피를 너무나 많이 흘린 상태라, 구체가 소환되는 위치를 정상적으로 측정하지는 못했다. 그 탓에 소환된 구체는 엘피스의 머리통을 완전히 부수지는 못했다. 얼굴 절반을 갈아 버리는 데는 성공하긴 했지만. 얼굴 절반이 강판에 걸린 감자덩이처럼 추악한 몰골로 변해 버렸다.

 

  소녀는 그대로 쓰러졌고, 엘피스 역시 잔뜩 피 웅덩이가 생긴 길거리 위에 주저앉아버렸다.

 

  몸의 상처는 거의 나았고, 갈린 얼굴도 얼마지 않아 금방 회복될 터였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내장이 땅 위로 질질 끌리던 적도 있었는데, 이정도 상처쯤이야. 그렇게 큰 상처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프지 않다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 머리통만한 구체의 삼분의 일 정도가 몸의 내부에서부터 형성되어 근육과 살을 찢으며 튀어나왔다. 흥건히 피를 튀기며. 마치 작은 난쟁이가 살 속에 파묻힌 채로 한쪽 눈가를 물어뜯으며 비틀어 뽑아대는 고통이었다.

 

  물론 찰나의 순간이었다만 그 순간만큼은 잠시나마 정신을 놓아 버릴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그리고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은 고통.

 

  자신의 발치에 피와 지방이 엉겨 붙은 검은 금속 구체가 떨어져 있었다. 그 구체에 눈길이 가는 순간 방금 전의 강렬한 고통이 다시금 느껴져, 저도 모르게 헉 소리를 내며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던 것이었다. 만약 조준이 제대로 되어 머리통을 날려버렸다면... 상상하기도 싫은 끔찍함이 엘피스를 덮쳐왔다.

 

  ‘일단 진정하자. 젠장. 어떻게든 됐잖아. 다른 생각을 하자고.’

 

  엘피스는 잠시 길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로, 얼굴의 상흔이 회복될 때까지 다른 생각을 하려 노력했다. 물론 뺨 안쪽으로 단단히 박힌 고통을 잊어버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다른 쪽으로 머리를 굴려 댔다.

 

  싸우면서 느낀 거였지만, 소녀는 물질을 형성할 때 한 번에 한 개씩밖에는 소환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만약 여러 개 소환할 수 있었으면... 이미 자신의 머리는 터져 있었을 터였다.

 

  거기다 만들 수 있는 질량에 한계가 있는 것 같았다. 만약 무제한이었다면 자신의 머리 바로 위에 엄청난 질량의 구체를 만들어 떨어뜨리기만 하면 되는 일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상당히 유용하고 강력한 능력이지만 여러모로 제약도 있고 해서 다행이었지, 만약 조금만 더 강한 능력이었으면 뼈도 못 추렸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소녀가 마지막에 방심해서 단순한 작전에 걸려들어 줬던 것도 다행이었다. 끝까지 방심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쓰러져 있는 것은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리 여겨지는 싸움이었다.

 

  현 상황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할 만한 생각은 아니었다만, 그렇게 억지로라도 싸움에 대하여 복기하지 않으면 고통으로 정신이 나가버렸을 터였다.

 

  그렇게 고통을 어찌어찌 달래고 있을 무렵이었다.

 

  신전 쪽으로 향하는 거리가 소란스러워지는 것 같았다. 여기서 꽤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기는 했지만... 더 이상 복기하는 데 시간을 쓸 수는 없었다. 빨리 이동하는 게 좋겠어.

 

  엘피스는 으쌰 소리를 나지막이 내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로브 이곳저곳에 검은 금속으로 된 꼬챙이들이 잔뜩 박혀 있다는 게 좀 신경 쓰이긴 했지만, 일단 자리를 피하고 보아야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러다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소녀에게 눈길이 닿았다. 모독자의 권속이라 재생능력이 강해서 그런지 피가 아까처럼 콸콸 나지는 않고, 점점 멎어 가고는 있었다. 하지만 의식을 잃었는지,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저걸 어쩐다.’

 

  저대로 둔다고 죽지는 않겠지만, 이 도시에서 미쳐 날뛰는 권속 소녀를 그대로 둘 리가 만무했다. 거기다 야만인으로 보이는 생김새까지. 저대로 쓰러져 있다가는 곧 신전으로 끌려가 혹독한 꼴을 당하고 말 것이었다.

  아마 더 이상 능력을 써서 누군가를 해하지 못하도록 온몸을 다 망가뜨리거나, 끔찍한 고문을 가하다 죽일 것이란 것쯤은 눈에 훤히 보였다.

 

  하지만 이 미친 권속의 능력은 지금까지 만나 온 백성이나 권속의 능력 중에서도 상위권에 들어가는 능력이었다. 거기다 괜찮은 전투 센스까지 가지고 있으니... 사람 심장을 뽑아내려고 했던 것도 그렇고, 손가락 기부 이야기를 했던 것도 그렇고 정신이 온전치 못한 녀석이기는 했다만 이대로 신전에 끌려가게 두기엔 좀 - 아니, 많이 아까웠다.

 

  엘피스는 쓰러진 소녀를 보며 이걸 어찌할까 계속해서 고민했다. 사실 처음엔 싸우면서 죽지 않도록 조절을 했었다. 그러니 굳이 준비 시간이 필요한 마비독을 바른 석궁 화살을 쏘았던 것이었다. 아무리 미리 장전된 석궁이라도 당기는 데 시간이 아주 조금이나마 걸리기 마련이니까. 만약 그 자리에서 바로 단검을 던졌다면 지금쯤은 정수리에 단검 꽂힌 시체를 뒤로하고 벌써 떠나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안이한 싸움 방식을 채택한 결과, 결국 나중에는 목에 단검을 박아 넣고서야 이길 수 있었으니... 정 안 되면 죽일 생각도 했었음은 물론이었다.

 

  그렇게 짧은 시간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라키샤의 몸이 꿈틀거렸다. 그것도 매우 부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마치 관절 몇 개가 삐걱거리다 못해 부서진 것 같이 움직여 댔다. 거기다 기괴한 소리까지 목구멍으로 울컥울컥 토해 내면서 말이다.

 

  분명 그렇게 상처를 입었는데 벌써 정신을 차리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소녀가 도중에 깨어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이미 염두에 두고 있었던 엘피스는 당황하는 기색 하나 없이 미리 준비해 두었던 마비독이 발라진 석궁 화살을 꺼내, 그대로 소녀의 팔뚝에 박아 넣었다. 푹 소리와 함께 라키샤의 팔뚝 위로 파란 핏줄이 불거져 나왔다가 더러운 피를 울컥 하고 뱉어 낸다.

 

  “그겍... 크으으, 그아아아”

 

  라키샤는 쓰러진 채 온 몸에서 경련을 일으켰다. 바들바들 몸이 떨리고 하얀 피부 위로 파란 핏줄이 불거져 나왔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알 수 없는 신음소리를 입 안 가득 내뿜으며 라키샤는 온몸을 비틀어댔다. 어떻게든 움직이고 싶어서 안달이라도 난 것처럼.

 

  하지만 모든 노력이 허사였다. 라키샤의 몸은 빳빳하게 굳어갔으며 이윽고는 라키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의미 모를 신음소리 외에는 아무 것도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오로지 숨 소리와 목소리만이 라키샤가 죽지 않았음을 알려 주었다.

 

  “끄으으... 끄아아아!”

 

  라키샤는 분한 듯 비명을 질렀으나 성대 쪽에도 마비가 온 것인지 비명은 미미한 울음소리로밖에 화하지 못했다. 그 모든 과정을 엘피스가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런 상황에 갑자기 진저리라도 났는지, 라키샤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흑흑... 아아아아아아...”

 

  “무서워 할 것 없어. 마비독이라 죽진 않을 테니.”

 

  “라쉬미, 라쉬미 미안해... 거짓말쟁이도 못 잡고... 아아아아...”

 

  “...”

 

  “난 믿었는데, 믿었단 말야. 믿었단 말야...”

 

  뭐 언제라고 말이 통했겠느냐마는. 엘피스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흑...흑...”

 

  “이봐. 내 말 들려?”

 

  “으흑... 라쉬미...”

 

  “나 지금 바쁘거든. 곧 사람들이 이쪽으로 올지도 모른다고. 그러니까 그냥 들어.”

 

  엘피스는 아직도 하염없이 흑흑 울고만 있는 라키샤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죽고 싶지 않잖아? 라쉬미인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흑, 흑. 동생이야. 소중한...”

 

  “라쉬미 이야기 하자마자 말이 통하네. 휴... 그래. 라쉬미. 걔를 위해서라도 죽으면 안 되지 않아?”

 

  라쉬미라는 녀석이 누군지는 잘 모르겠다만, ‘라쉬미’라는 아이를 화두에 올려놓자마자 말이 조금이나마 통하기 시작했다. 계속 라쉬미라쉬미 입에 달고 다니기에 화두에 올려 봤을 뿐인데 바로 효과가 나타나다니, 그나마 안도할 만한 일이었다.

 

  “라쉬미가 거짓말쟁이의 심장을 먹고 싶다고...”

 

  “네가 죽어버리면 심장이고 뭐고 못 가져다주고 끝나. 그럼 라쉬미는 배고파하다가 어떻게 되려나?”

 

  “안 돼! 라쉬미는... 라쉬미만은 안 된단 말이야...”

 

  “그래. 그런데 넌 지금 움직이지도 못하네. 난 널 두고 갈 생각인데.”

 

  마음에도 없는 말이었다만 엘피스는 일부러 꾸며내 가며 말을 이어나갔다. 사람들이 올까 노심초사하느라 점점 말의 속도가 빨라지기는 했다만.

 

  “두고 가면 어떻게 되려나. 사람들이 와서 널 잡아가지 않을까. 보아하니 소동을 좀 벌인 것 같은데, 신전에 끌려가게 될 지도 몰라. 생사람 심장을 뜯으려 했잖아?”

 

  “하지만 약속을 안 지켰단 말이야...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야...”

 

  라키샤의 숨소리가 가빠지며 발작하기 직전의 목소리로 변해 가고 있었다. 나름대로 말이 통하는가 싶다가도 언제 발작할지 모르니 참으로 다루기 어려운 녀석이었다.

  라키샤의 이상 기류를 감지한 엘피스는 바로 라쉬미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라쉬미가 배고파하잖아. 홀로 남겨지게 할 수 없잖아?”

 

  “라쉬미 배고파해... 하지만 라쉬미는 저주를 받았는걸... 사람이랑 권속이랑, 위버멘쉬랑, 백성이랑... 이런 거만 먹을 수 있단 말야... 그런데 내가 다 잡았었는데... 거짓말... 거짓말쟁...”

 

  어째 무슨 이야기를 해도 이야기 결말이 저리로 가는 것 같아 심히 유감스러웠다. 이야기에 진전이 없으니... 거기다 또 발작을 일으키려는 듯 목소리가 가빠지는 바람에 이번에는 입을 그대로 틀어막는 수밖에 없었다.

 

  엘피스는 라키샤의 입을 틀어막은 바로 그 상태로 나지막이 제안을 하나 했다.

 

  “그만! 내가 하려는 이야긴 그게 아냐. 잘 들어. 넌 이대로 가면 내가 여기다 방치해 둬서 신전에서 죽게 돼. 라쉬미도 그럼 배고픔에 못 이겨서 죽게 되겠지? 그러니까 이번엔 나와 약속하는 거야.”

 

  그 말을 한 순간 라키샤가 읍읍읍 소리를 어떻게든 쥐어 짜내며 울부짖었다. 마비당한 몸으로도 어떻게든 불쾌감을 표시하려는 것처럼. 아무래도 ‘약속’이라는 단어가 걸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엘피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난 널 죽게 내버려 두고 싶지 않거든. 능력도 아깝고, 신에게 넘겨지는 꼴도 유쾌한 꼬락서니는 아니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그대로 풀어 줬다간 문제가 생기겠지. 내가 위버멘쉬라는 것을 대충 깨달은 이상 넌 내 살점을 계속 노릴 테니... 그러니까 약속하는 거야.

  너의 능력으로 나에게 힘을 보태 줘. 내가 이 도시에 온 건 어떤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거든. 그렇게 해 주면 난...“

 

  순간 읍읍 소리만 내던 라키샤가 엘피스의 손가락을 물어뜯었다. 마비가 와 있음에도 어떻게든 혼신의 힘을 다해 일을 저지른 것 같았다. 그 바람에 반사적으로 입가에서 손을 떼어 내고 말았다.

 

  “내가 왜? 무슨 짓을 하려는 줄 알고! 어떻게, 뭘 믿고 또 속으란 거야! 거짓말쟁이는 질렸단 말...”

 

  “대신 매일매일, 원하는 만큼의 살을 찢어 주겠어. 이게 내 약속이야. 넌 날 돕는 대신 이 자리에서 죽지 않고, 매일 원하는 만큼 살을 찢어 가는 거야. 만약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내가 자는 사이 심장을 파 가던가 마음대로 해. 어때, 괜찮은 제안 아닌가?

 

  길바닥에서 처량하게 질질 끌려 가 죽은 건지, 아니면 나에게 협력해서 너도 살고 라쉬미도 배 불릴 건지. 모쪼록 빨리 선택하도록 해.”

 

 
작가의 말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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