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님 장미님 이리 좀 와 보세요! 도와달라구요.”
“시끄러워. 지금 바빠.”
“아 빨리 와! 애들 배역 정하고 있잖아. 너네 과니까 엄밀히 말하면 네 일인데 이건.”
지훈이 건우에게 소리쳤다. 이렇게 지훈이 있을 때는 승우가 나서지 않아도 된다. 건우는 왜인지 몰라도 지훈의 말은 잘 듣기 때문이다.
“나도 지금 바쁘거든, 뮤지컬 연습 일정 정해서 오늘까지 보내주기로 했어.”
“그건 네가 미루다가 이 사단이 난 거고, 이건 1학년 애들 빨리 줘야해. 얘네 대사 연습 당장 시작해도 부족할텐데.”
“야 학생회가 왜 3명이냐? 지훈이 너랑 승우가 알아서 해서 보내.”
“그치만 지망하는 역할이 다 몰려있어서 배역 정해주기가 여간 까다롭단 말이에요… 지민쌤 코멘트도 하나하나 정리해서 내일까지는 학생들한테 보내줘야하고…”
“아 시끄러, 몰라. 나 지금 바빠. 그건 너네끼리 해.”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동아리 회비 등을 분배하고 회의를 주도하지만 대게 이런 ‘선생들이 귀찮아하는 일’ 을 도맡아 하는 것이 학생회의 주된 일이다.
이번 스프링 쇼를 준비하면서, 작년 2학년들이 그러했듯 이번 2학년 학생회도 1학년들의 오디션 결과와 희망하는 배역을 나누고 있다.
“지망 역할이 많이 몰리네…”
“아무래도 다들 특징있는 역을 많이 하려고 하네요.”
“그러니까. 작년엔 여장은 다 피했다는데.”
“그런 거 보면 장미님이 큰 희생을 한 거죠.”
“그런데 저렇게 잘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어?”
“여자보다 예뻤죠 여자보다.”
“야 다 들리거든? 조용히 일이나 해. 잡담하면서 하니까 너네가 손이 느린거라구.”
한 손에 펜을 든 건우가 지훈과 승우 쪽을 보며 말했다. 승우는 툴툴거리며 계속 뭐라고 중얼거렸다.
“이번 일정은 어떻게 잡고 있어?”
“우리 방과후 일정 다 때려넣고 있는데?”
“야 그럼 우린 어쩌라고? 너넨 그거 다 얘기 된 거야?”
“너네가 알아서 맞추면 되지. 오기 싫음 오지 마.”
“잠깐만요, 맨날 모이자구요?”
승우도 눈이 동그랗게 되서 물었다. 일반인도 아니고, 매일 연습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시간이 남아 도나? 매일 오라고 하면 오히려 아무도 안 올텐데.’ 승우는 불만이었지만 내색은 안 하려고 했다.
“그럼, 준비 안 해?”
“맨날 모여서 뭐하게요?”
“그건 그때가서 정하고. 할 거야 많을텐데 뭐가 걱정이야.”
“쟤는 진짜. 야 애들 되게 싫어할걸?”
“싫으면 빠지라고 하든가. 뮤지컬 처음 올리는 거 아니야? 아직 넘버도 다 안 나왔고, 이번엔 주크박스같이 노래만 하는 것도 아니라며. 그럼 무조건 연습해야지. 두 분은 연기가 쉽나보지?”
지훈과 승우 둘 다 긴 한숨을 쉬었다. 열심히 한다고 해도 정도가 다르다. 건우는 대본도 다 헤져서 다시 제본을 해야 되도록 읽고 또 읽는 편이다보니 더 차이가 난다.
“연기 쪽은 저렇게 빡세요 원래?”
“나야 모르지. 맨날 모이는 데 우리가 안 갈 수도 없는 일이고… 아 나 그때는 공연 일정 있어서 매일은 힘든데...”
“저도예요. 저는 큰 일은 아니지만… 무슨 우리가 가족도 아니고 맨날 봐요?”
승우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지훈은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다는 듯 뒤통수를 긁었다. 학생들이 다같이 모이는 자리에 안 나타난다면, 그것도 연습하는 자리에, 그것만큼 뒷말이 나오는 일도 없을 것이다.
“정 그러면 파트 나눠서 모이라고 할게. 모일 수 있는 사람은 매일 오라고 하고. 됐지? 걱정하지 마.”
“아 그러면 되겠네요!”
“애초에, 뭣하러 모든 사람이 다 모이겠냐? 넘버 나오면 그거 할 사람 정해질 거 아냐. 그때 그 팀들끼리 알아서 모이라고 하고… 이건 그냥 스케줄 다 비워두라고 미리 주는 경고같은 거지.”
“그렇지. 경고 같은 거야.”
건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이야기했다. 처음엔 모든 연습에 모든 인원을 동원해 연습하는 모습을 보게 만들려는 목적으로 한 일이었다.
하지만 보컬이나 연주자, 다른 배우들도 분명 원하는 노래에 맞춰 스케줄을 잡기 보단, 스케줄 되는 날에 해당하는 노래를 고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데뷔를 한 녀석들 뿐이니 자기가 나서서 하기보다는 어떻게든 구색만 갖추자는 녀석들이 많을 것이다.
건우 역시 매주 목요일은 시트콤 촬영이 있기에 연습에 넉넉한 시간을 주기는 힘들었다. 추가 촬영도 종종 잡히기 때문에 우선 모든 방과 후 일정을 연습으로 빼두었다.
“장미님은 스파르타네요.”
“FM 이지. 현장 스타일.”
“칭찬은 됐어.”
“칭찬한 거 아닌데요?”
“칭찬한 거 아니야.”
승우가 큭큭거렸다. 승우가 1학년 리스트와 지민의 코멘트가 담긴 카드를 가지고 지망 1순위, 2순위에 맞춰 적절한 배역을 적었다.
그러면 지훈은 그 종이를 새로 엑셀에 옮기는 중이었다. 엑셀로 저장해둔 역할 시트는 학교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라가고, 교내 게시판에도 크게 붙여질 것이다.
“아니 근데 그럼 뭐가 이렇게 오래 걸려요? 장미님,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와서 뒷 번호 애들 배분 좀 해요.”
“야야 그런 건 하던 사람들이 해야지, 내가 새로 끼면 헷갈려. 나중에 배역이 두 세명 겹치면 어떡하냐?”
“그럴 일 없으니까 빨리 와서 도와.”
“자기들이 일 못 하는 걸 가지고 정말…”
건우가 회장 책상에서 일어나 지훈과 승우가 있는 탁자로 갔다. 지민의 코멘트, 각 별점과 평균 점수를 합해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학생부터 자기가 원하는 배역을 가져가게 했다.
“얘는 뭐야?”
“누구요?”
“야 잠깐만, 아직 적고 있잖아.”
컴퓨터 앞에 앉아서 각 학생의 프로필과 점수지를 보며 타자를 치던 지훈이 보던 종이를 건우가 가져갔다.
“아니 얘는 배역이 아니라 보조를 하겠대?”
“모르죠 뭐.”
“특이한 애네. 누구지 얘?”
“몰라요, 유명한 애는 아닌 것 같은데.”
“근데 걔만 둘 다 무대 뒤 보조 하겠다고 적었어.”
지훈이 종이 더미를 뒤적거리더니 처음에 나눠받은 유진의 희망 배역이 쓰인 종이를 보며 말했다. 건우가 그 종이를 건네받자마자 지훈이 원래 보던 것은 낚아채 하던 일을 계속 했다.
“그것도 둘 다요. 진짜 착하죠?”
“착하기는. 이거 잘못 낸 거 아냐? 누가 장난 친 거라든가…”
“아니, 오디션 때도 그렇게 말했다던데.”
“흠 그래… 이유진? 누군지 모르겠네.”
“장미님은 오디션 안 가셨어요?”
“그 날은 일이 있어서. 됐어, 슬럼프라도 왔나보지. 내가 알 바 아냐.”
건우는 유진의 희망 배역이 적힌 종이를 다시 종이 더미에 내려놓았다. 승우가 자기가 가진 서류 더미의 반을 건네자 건우도 마지못해 자리에 앉아 나머지 서류들을 읽어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