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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사장님이 보고 있다!
작가 : 카렌
작품등록일 : 2017.12.9

시각장애인 사장님께 경제 신문을 읽어주는 개인비서 한지현.
"여자 나이는 크리스마스 케이크야. 25살 넘어가면 안 필린 다니깐."
남성우월주의자 할머니는 마음대로 그녀의 배우자 모집 광고를 신문에 내버린다. 꼼짝없이 할머니가 소개하는 사람과 결혼해야 했던 지현. 평소에는 단 한 차례도 사적인 대화를 나눈 적 없었던 사장님이 신문에 실린 광고를 봤다면서 지현에게 청혼한다.
"이 배우자 모집 광고에 내가 지원하고 싶습니다.“
사장님, 정말 진심이십니까?
habilis21@naver.com

 
사장님이 보고 있다! 7화
작성일 : 17-12-17 14:15     조회 : 197     추천 : 0     분량 : 8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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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한지현이랑 사장님이랑 뭐 있는 거 아니야?

 

 

 

 은비가 자주 찾는 단골 고깃집에는 자글자글 고기가 구워지는 소리와 맛있는 냄새로 가득했다. 지현은 한쪽 면이 다 익은 삼겹살을 집게로 뒤집으며 군침을 삼켰다.

 

  "우와! 이거 요번에 F/W 신상으로 나온 구두잖아. 외국에서만 살 수 있는 줄 알았는데 한국에서도 살 수 있구나.“

 

 지현이 삼겹살을 노릇노릇하게 굽고 있는 동안 은비는 그녀의 쇼핑백을 하나하나 풀어보며 몇 번이나 감탄사를 질렀다. 쇼핑백 안에 들어있는 명품들은 꽤 이름이 있는 건지, 은비는 물건에 적힌 브랜드 이름을 보면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다 구워졌으니까 그만하고 먹기나 해.“

 

 지현의 말에 쇼핑백을 한쪽으로 밀어둔 은비는 젓가락을 들었다.

 

  "진짜 안 믿긴다. 그러니까 저걸 언니가 직접 산 게 아니라 선물로 받은 거라고?“

 

 잘 구워진 삼겹살을 입으로 가져가던 지현이 잠시 멈칫하고 입술을 삐죽거렸다.

 

  "몰라. 선물인지 아닌지."

 

 나중에 재고 관리 다 끝났으니까 내놓으라고 할지 누가 어떻게 알아.

 

  "저렇게 비싼 걸 누가 언니한테 준 거야?“

 

  "사장님이.“

 

  "사장님?“

 

 표정이 환했던 은비가 이맛살을 잔뜩 구기고 혀를 끌끌 찼다.

 

  "아니, 진짜 웃기네. 사장님이 언니한테 이런 걸 왜 사주는 거야? 저거 못해도 천만 원 치는 되는 것 같은데. 그런데 언니도 그냥 저걸 덥석 받았어?“

 

  "안 가져가면 버리겠다는데 어떡해.“

 

  "아무리 그래도 유부남이 주는 선물을 그냥 받으면 안 되지. 50대 사장님이면 머리도 벗어지고 배도 나왔겠네.“

 

  "뭐라고?“

 

 은비가 지금 무슨 오해를 하는 것 같은데.

 

  "거참, 언니도 참 철딱서니 없다. 아버지뻘이라도 해도 방심하면 안 된다고. 50대라서 언니를 여자로 안 보겠다는 생각은 진짜 안일한 생각이라니까.“

 

 대뜸 정색하고 자신에게 훈계하는 은비의 모습에 지현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사장님 30대야.“

 

 술에 취해 눈이 살짝 풀린 은비가 두 눈을 끔벅이며 꿍얼거렸다.

 

  "30대라고?“

 

  "응. 그리고 머리도 안 벗어졌고 배도 안 나왔어.“

 

  "그, 그래?“

 

  "그래. 운동중독인 건지 가슴 근육도 탄탄하고 다비드상처럼 조각같이 생겼어. 권비드야, 권비드. 그리고 비율도 좋아서 멀리서 보면 모델 같아.“

 

  "우와, 정말?“

 

  "에그. 쓸데없는 착각하지 말고 고기나 먹어라.“

 

 지현은 싹둑싹둑 고기를 잘라 은비의 앞접시에 정갈하게 올려놓았다.

 

  "언니, 그럼 사장님이랑 사귀는 거야?“

 

  "아니, 사귀긴 뭘 사귀어.“

 

  "그럼 사장님이 언니 좋아하는 거야?“

 

  "글쎄…… 그 비슷한 거?“

 

  "비슷한 거라니?“

 

  "사장님이 나랑 결혼하고 싶다고 말은 하는데 그게 진심인지 모르겠어.“

 

 지현은 들고 있던 집게를 내려놓으며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너 할머니가 신문에 내 '배우자 모집 광고'를 낸 거 알아?“

 

  "엄마한테 들었어. 할머니는 또 왜 그러신데?“

 

  "몰라, 나도 미치겠어.“

 

  "요즘 시대에 결혼 안 하는 게 뭐가 어떻다고 억지로 결혼을 시키시려는 거야.“

 

  "내 말이.“

 

 생각하면 할수록 기가 찬 상황에 고기를 씹는 지현의 표정이 점점 험악해졌다.

 

  "그런데 오늘 AK 백화점 휴무 아니야? 일 끝나고 AK 백화점 가려고 했는데 휴무라서 안 갔는데.“

 

  "맞아. 휴무였어.“

 

  "설마 사장님이랑 언니랑 단둘이 AK 백화점을 전세 낸 거야?“

 

  "한은비, 의사하지 말고 작두 타야겠다.“

 

  "정말?“

 

 지현이 다시 고개를 끄덕이자 은비가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중얼거렸다.

 

  "그냥 해본 말이었는데 진짜였다니.“

 

  "권우빈 사장님은 항상 비현실적인 생각을 현실로 만들어 버리시는 분이시라.“

 

  "언니 사장님이 AK 그룹 권우빈 사장이었어? 맞다, 언니 AK 그룹에 입사했지. ……근데 그 사람은 1년 전에 시각장애인 된 사람 아닌가?“

 

  "그걸 어떻게 알았어?“

 

  "당연히 알지. 권우빈 사장이 우리 담당 교수님 진료실에 자주 찾아왔었거든.“

 

 은비의 말에 지현은 아, 하고 탄성을 내지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너 안과에서 근무한다고 했지?“

 

  "두루두루 돌아다니는 데 그때는 안과에서 근무하고 있었지.“

 

 머리도 좋고 성실하고 끈기도 있었던 은비는 여자는 공부할 필요도 없다는 할머니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열심히 공부한 끝에 S 대학교 의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다. 레지던트 1년 차인 은비는 집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그녀를 만나려면 지현이 직접 대학병원 근처로 찾아가야 했다.

 

  "할머니는 예전부터 우리 앞길 막으시려고 안간힘을 쓰시더니 지금도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어. 언니 다음엔 나보고 결혼하라고 성화일까 봐 무섭다.“

 

 구시렁대는 은비를 보고 지현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은비는 조덕만 여사의 차남 한석준의 외동딸이었다. 지현의 부모님도 은비의 부모님도 모두 하나만 낳아서 잘 키우자, 라는 신조를 지니신 분이었지만, 덕만은 아들이 태어났어야 했다면서 항상 손녀들을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할머니한테 받던 눈치 생각하면 지금도 서러워. 진짜 언니가 없었더라면 난 본가에는 얼씬도 안 했을 거야.“

 

  "이미 다 지난 일인데 뭐, 그냥 예전 일이라 생각하고 넘겨야지.“

 

  "언니는 그럴지 몰라도 난 아직도 할머니가 미워 죽겠어. 내가 여자로 태어난 게 뭐가 죄야? 할머니는 옛날 분이시니까 그러신 거겠지 라고 참다가도, 화가 불쑥불쑥 튀어나온다니까.“

 

  "…….“

 

  "딸 낳았다고 명절 때마다 우리 엄마 죄인 만드는 거 보면 진짜 기가 막혀. 어쩜 그럴 수 있지? 언니도 할머니 때문에 대학 가자마자 본가 나간 거잖아.“

 

  "……그래, 그랬지.“

 

 대학교 때 홀로 월세방을 얻어 나와서 하루에 세 개씩 아르바이트하며 고생했던 기억이 떠오른 지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우리 엄마는 명절만 참고 넘어가면 됐지만, 큰엄마는 같이 살고 같이 일하면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어.“

 

 매일 새벽에 일어나 재료 손질을 하셨던 엄마가 떠오른 지현은 목이 메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언니, 그러지 말고 그냥 AK 그룹 사장이랑 결혼해라.“

 

 뭐라고?

 

 할머니에 대해 성토를 하던 은비가 뜬금없는 소리를 하자 지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할머니가 그렇게 언니가 결혼하길 원하시니까 할머니 뜻대로 결혼하는 거야. 그리고 나중에 이혼한 다음에 할머니한테 따지는 거지. 할머니가 결혼하라 해서 결혼했는데 이게 뭐냐고.“

 

  "너는 결혼이랑 이혼이 그렇게 쉬운 줄 아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은비를 보고 지현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야, 이게 그만 마시고 빨리 나가자. 내가 택시 잡아 줄게.“

 

  "AK 그룹 사장이라면 괜찮지 않나? 언니, 사실 내가 이거 언니한테만 말하는 건데…….“

 

 은비가 말끝을 길게 늘이자 지현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귀를 가까이 댔다.

 

  "사실 안과 담당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 AK 그룹 권우빈 사장의 증세가 조금 이상하다고.“

 

  "뭐가 이상한데?“

 

  "건강하던 사람이 갑자기 눈이 멀었다고. 이건 세계에서 처음 발견되는 특이한 사례라고 하셨어.“

 

  "그래?“

 

  ㅡ 사장님은 정확하게 1년 전부터 눈이 안 보이시기 시작하셨어. 그 전에도 눈이 안 좋으시긴 하셨는데 회사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로 갖고 계시던 지병이 악화하였지.

 

 지병이 있으셨다고 들었는데 아니었나.

 

 지현은 눈을 가늘게 뜨며 계속 은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응, 그래서 레지던트랑 간호사들끼리 수군거렸잖아. 혹시 진짜 안 보이는 게 아니라 안 보이는 척하는 게 아니냐고.“

 

  "설마 그럴 리가.“

 

 지현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나도 자세한 건 모르지만 권우빈 사장이 상속 문제로 무슨 문제가 있다네.“

 

  "사장님은 외동 아니었나?“

 

  "죽은 권우빈 사장 아버지한테 둘째 부인이 있었다던데?“

 

  "그래?“

 

  "응, 회사 때문에 결혼한 둘째 부인이었대. 그 둘째 부인한테 전남편 사이에 있던 딸이 한 명 있는데, AK 그룹 권정민 회장이 피도 안 섞인 손녀를 그렇게 아낀대.“

 

  "……그랬구나.“

 

 처음 듣는 AK 그룹의 가족사에 입안이 빠짝 마른 지현은 잔에 따라져 있는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

 

 

 

 한남동 저택 정문에 양옆으로 선 직원들은 사장님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오, 추워죽겠네. 겨울인데 꼭 이런 걸 해야 하는 거야?“

 

 잔뜩 미간을 좁힌 하늘이 양손을 겨드랑이에 집어넣고 구시렁댔다. 옆에서 코가 빨개진 세아가 입술을 덜덜 떨며 말했다.

 

  "어쩌겠어요. 위에서 하라면 해야지. 어차피 매일 하는 것도 아니고 딱 하루니까 좀 참아야죠.“

 

  "사장님은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하실 것 같았는데 의외로 부하 직원들의 퍼포먼스를 좋아하시나 봐.“

 

  "이건 사장님이 아니라 회장님이 지시래요.“

 

  "그래? 왜 굳이 이런 걸 시키시는 걸까?“

 

  "글쎄요. 직원들에게 사장님 얕보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이 아닐까요?“

 

 한남동 저택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월요일 아침마다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사장님이 차에서 내리시면 모두 허리 굽혀 인사했다. 가사 도우미부터 경호원까지 저택에서 일하는 70명의 직원이 한데 모여 사장님께 인사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멀리서 사장님의 리무진이 보이자 사람들은 서둘러 열을 맞췄다.

 

  "사장님, 나오셨습니까?“

 

 사장님이 리무진에서 내리자 직원들이 모두 고개를 숙이며 합창하듯 인사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사장님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레드카펫 위를 걸어갔다. 사장님의 코트에 뿌려진 향수 냄새가 은은하게 주변으로 퍼졌다. 항상 느끼는 것이었지만 사장님이 뿌린 향수 냄새를 맡으면 괜히 심장이 간지러워졌다. 머릿속으로 오늘 스케줄을 정리하던 지현은 눈앞에 검은 구두가 보이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지현을 지나쳐 갔던 사장님이 다시 돌아와 그녀의 앞에 우뚝 서 있었다. 이마에서 오뚝한 콧대까지 내려오는 라인이 오늘따라 유난히 예술이었다.

 

  "한 비서, 좋은 아침입니다.“

 

 지현은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인가 싶어서 얼른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한남동 저택에 한 비서는 그녀밖에 없었다.

 

  "네, 사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어제는 잘 들어갔습니까?”

 

  “네? ……네, 자, 잘 들어갔습니다.”

 

 사장님의 돌발행동에 모든 직원의 이목이 지현에게 쏠렸다.

 

  "한 비서, 나한테 제출할 보고서는 다 준비됐습니까?“

 

  "네, 오늘 바로 드리겠어…… 에취!“

 

 갑자기 불어오는 찬 바람에 지현은 입을 틀어막고 기침했다.

 

  "한 비서, 혹시 감기 걸렸습니까?“

 

  "아, 아뇨, 감기는 아닙니다.“

 

 눈동자를 굴리며 주변 눈치를 살피던 지현은 어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신을 걱정해주는 사장님이 고맙긴 했지만, 자신에게 꽂히는 직원들의 시선이 따가워서 이쯤하고 그만했으면 했다.

 

  "자, 이거 받아요.“

 

 사장님이 재빨리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자, 지켜보던 직원들이 소리를 낮춰서 옆 사람과 분주하게 수군거렸다. 들리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라서 그런지 유독 소리가 귓속으로 쏙쏙 박혔다.

 

  "어머, 뭐야. 한지현이랑 사장님이랑 뭐 있는 거 아니야?“

 

  "장난 아니다. 하긴 예전부터 한지현이 은근히 사장님 편드는 거 보고 뭔가 있지 않을까 싶었어.“

 

  "대박이야. 대박. 그동안 단둘이 집무실에서 뭔 짓을 했길래.“

 

 딱히 잘못한 건 없었지만, 순간 지현은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제 집으로 돌아오면서 후회했습니다.“

 

  "네? 무슨 후회요?“

 

  "그날 그냥 한 비서 집 비밀번호를 알려달라고 할 걸 그랬습니다.“

 

 그 순간 지현은 사장님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지금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크게 낸 지현이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자, 사장님은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머금었다.

 

  "훗, 농담입니다.“

 

  "아, 놈당이시죠? 농담? 아이, 참, 사장님은 무슨 그런 농담을. 하하하하하, 농담이래요. 사장님이 지금 농담하신 거래요.“

 

 지현은 급히 주위에 있는 직원들에게 변명했지만, 직원들은 사장님과 자신의 사이가 심상치 않은 사이라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어머, 뭐야. 저 두 사람?“

 

  "잤네, 잤어.“

 

  "그치?“

 

  "그래, 잔 거야.“

 

 아니, 핸드폰 진동 소리도 잘 듣던 사람이 이 소리는 왜 못 듣는 거야?

 

  "그럼 나중에 봅시다.“

 

 사장님이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 지현의 주변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어머 어머 어머, 진짜, 대박이야, 대박!“

 

  "지현 씨, 아까 사장님이 하신 말씀이 무슨 소리야? 지현 씨 어제 사장님이랑 만났어?“

 

  "네? 아니, 그게…….“

 

 지현은 말끝을 흐리며 억지로 얼굴 근육을 움직였다.

 

  "사장님이랑 일요일에 만나서 뭐했어?“

 

  "일요일에 만났으면 당연히 데이트한 거지.“

 

 사장님이 직원들이 다 있는 앞에서 자신에게 말을 걸 줄 누가 알았으랴. 그것도 온 직원이 나와서 사장님을 맞이하는 월요일 아침 시간에 집 비밀번호 얘기를 하다니.

 

  "사장님이랑 데이트? 그럼 지현 씨 사장님이랑 사귀는 거야?“

 

  "아니에요. 데이트는 무슨. 그냥 만나서 백화점 재고조사 좀 했어요.“

 

  "재고조사?“

 

  "네, 재고조사요. ……그럼 전 이만 들어가 볼게요. 사장님께 드릴 보고서가 있어서요.“

 

 마음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직원들에게 대충 말을 얼버무린 지현은 급하게 저택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사장님, 정말 왜 이러세요."

 

  "내가 뭘요?“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사장님의 뻔뻔함에 지현은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새 나왔다.

 

 정말 뭐가 문젠지 몰라서 묻는 거야 아니면 나 약 올리려고 작정한 거야.

 

  "직원들 앞에서 어제 우리가 만났다는 걸 말씀하시면 어떡해요.“

 

  "그게 뭐가 어때서요? 우리 사이에.“

 

 우리 사이에?

 

 지현은 망부석처럼 모든 동작을 멈췄다.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이인데요?“

 

  "몰라서 묻는 겁니까?“

 

  "네.“

 

  "우리 데이트했잖아요.“

 

  "언제요?“

 

 탁.

 

 사장님이 화가 난 듯 흰 지팡이로 바닥을 크게 내려쳤다.

 

  "어제 했잖아요. 한 비서는 바로 어제 일도 기억 못 합니까?“

 

  "그게 무슨 데이트에요!“

 

  “그럼 어제 우리가 한 건 뭡니까?”

 

  “그건 데이트가 아니라 AK 백화점 재고조사였죠.”

 

 사장님은 미간을 좁히고 손가락을 오므렸다가 폈다를 반복했다.

 

  "뭐예요. 그럼 한 비서는 로맨스 영화에서나 나오는 오글거리고 손발이 없어질 것 같은 데이트를 상상한 겁니까?“

 

  "……뭐, 상상은 하지 않았네요.“

 

 지현은 앙다문 입술을 삐죽거렸다.

 

  "같이 분위기 좋은 데서 밥 먹고 집에 데려다주고 마지막 인사로는 '잘 자요, 내 꿈 꿔요' 이런 거요?“

 

 잘 알고 있으면서!

 

 지현은 사장님께 서운함을 표현하려고 하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분위기 좋으면 근처 술집에서 술도 한 잔 마시고?“

 

  "술은 안 돼요. 저는 사장님과 술은 절대 마시지 않을 거예요.“

 

  "술은 왜요? 술은 왜 마시지 않을 거라고 하는 겁니까?“

 

  "그거야…….“

 

 할 말이 없어진 지현은 아랫입술만 잘근 깨물었다.

 

  "얼굴은 왜 붉어집니까? 한 비서, 혹시 나랑 이상한 생각 했어요?“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도, 사장님이 자신을 몰아세우자 지현의 얼굴은 점점 붉게 물들었다.

 

  "네? 제가요?“

 

  "네, 한 비서 순진한 줄 알았는데 사실은 음란마귀였군요.“

 

 음란마귀? 내가, 내가 음란마귀라고?

 

 목까지 빨개진 지현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진짜 사장님 오늘따라 말이 안 통하시네요.“

 

 지현의 낯이 황당함으로 물들었지만, 우빈은 픽 하고 웃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알고 보니 한 비서는 내가 마지막에 배웅해주면서 뽀뽀도 해줘야 했는데 일해줘서 서운했군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이맛살을 찌푸린 사장님이 갑자기 손으로 넥타이를 풀어 해졌다. 역동적으로 넥타이를 푸는 사장님의 손은 마디마디 공들여 조각한 것처럼 섬세하면서도 유려했다.

 

  “가, 갑자기 넥타이는 왜 푸시는 거예요?”

 

 놀란 지현이 주춤 뒤로 물러섰다.

 

  "사실 나도 한 비서한테 데이트다운 데이트 해주고 싶었습니다. 데이트의 정석이라고 하면 같이 영화 보고 밥 먹고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 저녁까지 함께하는 것이겠죠.“

 

  "…….“

 

  "하지만 한 비서도 알다시피 나는 사람들의 말하는 일반적인 데이트를 하지 못합니다.“

 

  "…….“

 

  "영화관에서 영화를 못 본 지가 벌써 1년이 넘었군요. ……제길.“

 

 지현은 숨을 멈추고 사장님을 바라보았다. 백화점 엘리베이터에 내려서 방향을 잡지 못하던 사장님의 모습을 떠올린 지현은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장애는 불편한 거지 불행한 게 아니에요.

 

 지현은 외모도, 능력도 어디 하나 빠지지 않은 사장님이 단지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열등감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팠다.

 

  "사장님, 전 단지 저택에 있는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거예요.“

 

  "…….“

 

  "사장님이 시각장애인이라고 하더라도 저는 사랑하면 얼마든지 결혼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정말입니까?”

 

  “네, 진심이에요.”

 

  "그럼 내가 여기에 지원해도 되는 거죠?“

 

 사장님이 책상에 올려진 한 장의 초대장을 가리켰다. 책상에 다가가 초대장을 펼친 지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어이가 없어서 실소조차 터져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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