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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신월이 뜨던 밤
작가 : 달리아
작품등록일 : 2017.11.13

신월이 뜨던 밤, 죽은 중전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그 시각, 서울에서 의문의 사고를 당한 소월. 눈을 떠보니 내가 중전? 소월의 좌충우돌 중전 적응기.

 
자격지심
작성일 : 17-12-16 23:54     조회 : 218     추천 : 0     분량 : 9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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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밤새도록 열이 끓었다. 새벽녘에는 이대로 죽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열에 잠식된 의식이 서서히 멀어질 때마다, 차가운 수건이 내 정신을 일깨웠다. 시도 때도 없이 엄습해오는 불안감에, 마음 편히 잠에 들 수조차 없었다.

 

 '이러다 진짜 죽는 거 아니야?'

 

 생전 처음 겪는 일이었기에, 내가 느끼는 공포감은 더 했다. 나는 열에 달뜬 눈을 깜빡이면서 끊임없이 이 거지 같은 몸뚱이에 대해 생각했다. 어떻게 이렇게 나약한 몸이 있을 수 있지? 얘는 대체 몸 관리를 어떻게 한 거야? 이건 도저히 먹는 걸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안 되겠어. 일어나면 무조건 운동이다. 체력부터 키워야 해.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아직 인빈에 대한 복수는 요원할 모양이었다. 백날 마음속으로만 복수를 다짐하면 뭐 하는가, 정작 몸은 비실비실해서 잠깐만 나가도 이러고 드러눕는 판인데.

 

 그 후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른다. 머리가 멍하니 시간관념까지 함께 사라진 모양이었다. 문득 문밖에서 연심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마. 전하께서 납시셨사옵니다."

 

 응? 왕이 왔다고?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렸다. 평소와 달리 문밖에서 분주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주렁주렁도 달고 온 모양이네. 나는 바싹 마른 입을 열어 대답했다.

 

 "들어… 콜록, 들어 오세…에, 엣취!"

 

 아주 가지가지 한다. 나는 힘겨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화낼 힘도 없다. 이런 내 말을 용케도 알아 들었는지, 왕이 조용한 걸음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는 내 상태를 보더니 미간을 살짝 좁혔다. 왜 환자한테 인상을 찌푸리고 난리야. 어제 안 좋은 얘기를 실컷 들어서 그런 걸까, 그의 행동이 별로 곱게 보이지 않는다. 나는 슬쩍 눈을 감았다. 눈두덩이가 유난히 뜨겁게 느껴지는 것은, 열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시선 때문일까.

 

 "중전."

 "예에…."

 

 잔뜩 거칠어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보다 일어나서 대답해야 하나? …모르겠다. 아픈 사람한테 그런 예의까지 바라진 않겠지. 나는 잠자코 누워 있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이, 왕은 별다른 말없이 내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리고는 그 커다란 손을 턱하고 내 이마에 얹었다. 으아… 차갑다. 우습게도 가장 처음으로 든 생각은 '남자 손은 다 이렇게 차가운가?'였다. 그냥 얘 손이 유독 차가운 건가? 아무튼 그의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냉기에 조금씩 정신이 들었다.

 

 "괜찮소?"

 "엄… 네. 괜찮긴 한데… 손이 많이 차갑네요."

 "아, 미안하오."

 

 그는 내 이마에서 황급히 손을 뗐다. 으윽. 나는 작게 신음했다. 왠지 모르게, 그가 손을 떼자마자 열기가 확 치솟는 느낌이 들었다.

 

 "그냥 계속 대주시면 감사… 콜록! 하겠네요. 보시다시피 제 이마가 많이 뜨거워서."

 

 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왕, 그러니까 이강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다시 손을 올려 주었다.

 

 "너무 차갑다 싶으면 다시 말해주시오."

 "네. 근데 왜 오셨어요?"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얼마 전까지 중전을 외면했다는 나쁜 놈이, 새삼 걱정이 돼서 온 건 아닐 테고….

 

 "걱정이 되었소."

 "아 그러시구나… 예?"

 "중전이 밤새 아팠다는 말을 듣고… 경연도, 정사도, 그 어떤 것도 손에 잡히질 않았소. 그래서 온 것이오. 그대의 얼굴을 보면 좀 나아질까 싶어서."

 

 와, 얘 뭐니? 독심술이라도 쓰나? 그의 대답에 일차로 당황하던 나는, 어느새 꿍한 마음이 조금씩 풀어지는 걸 깨닫고는 이차로 당황하고 말았다. 이유 없이 자꾸만 벅차오르는 가슴을 단속하는 것만 해도 곤욕이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입꼬리까지 씰룩거리기 시작했다. 소월아, 정신 차려라… 대체 뭐가 그렇게 좋다고 그러는 거야? 심지어 저 말은 나한테 하는 말도 아니잖아.

 

 그렇게 생각하니까 거짓말처럼 웃음이 뚝 멎었다. 중요한 점은 웃음이 멈춘 대신, 속에서 열불이 터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확확 뒤바뀌는 감정의 기복이 생소하게만 느껴졌다. 내가 진짜 왜 이러지? 혼란스러워하는 와중에도, 나도 모르게 삐뚜름한 말이 튀어 나갔다.

 

 "그렇게 걱정이 되면 진작 찾아오지 그러셨어요?"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소. 사실은 어제부터 내내 벼르고 있었소만, 부부인께서 처소에 드셨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오지 않았소."

 

 오늘의 나는 유달리 낯설다. 머리는 '나쁜 새끼'라고 외치고 있는데, 마음은 어느새 그의 설명에 홀린 듯이 납득하고 있는 것이다. 제멋대로 쿵쿵 뛰어대는 심장조차도 마치 내 것이 아닌 것처럼 생경하게 다가왔다. 생각해 보면, 이 몸은 '중전의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말에 호응하는 이 심장의 박동은 중전의 의지일까.

 

 "중전?"

 "네? 아, 네…."

 "대답이 없기에 잠에 든 줄 알았소. 혹시 과인이 휴식에 방해가 된 것이오?"

 

 한껏 기죽은 얼굴을 한 이강이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그리고 나는 지금껏 몰랐던 사실을 깨달았다. 이 자식… 꽤 생겼잖아? 짙은 눈썹과 뚜렷한 이목구비에서 나오는 중후한 매력이며, 그와 상반되는 여린 표정이 자아내는 그 모순적인 아름다움이라니. 나는 그의 외모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솔직히 꽤가 아니라 조금 많이 잘 생겼다. 그럼에도 '꽤'라고 표현한 것은 내 기준에서 그의 인성이 폐급을 넘어 쓰레기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조강지처를 버리고 바람을 피우다니, 물론 이 시대에선 이해될 수 있는 일이라지만… 어쨌든 그것 때문에 중전이 죽기까지 했는걸.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철저히 예의에 치중된 대답을 내놓았다.

 

 "그건 아니에요. 콜록, 와주셔서 고마워요."

 "…다행이오. 오래간만에 모녀끼리 담소는 잘 나누었소?"

 

 담소라. 글쎄, 나눌 담소가 있어야 나누던가 하지. 부부인을 생각하자 다시 마음이 복잡해졌다. 나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졌나 보다. 그 표정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이강이 남은 손으로 내 손을 꾹 잡아왔다.

 

 "차차 기억이 날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오."

 "…네?"

 "어의의 소견으로는, 반드시 중전이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했소. 그러니 너무 괘념치 마시란 뜻이었소."

 "아 예."

 

 나는 가만히 그와 눈을 맞췄다. 나는 번개도 안 맞았고요. 사실은 기억도 안 날아갔어요. 그냥 내가 중전이 아닌 거예요… 이렇게 말하면 그는 날 믿어 줄까? 나는 이내 고소를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딱히 증거도 없는 내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줄 리가 만무하다. 단순히 정신이 온전치 못하단 말로 일축하겠지. 아이들만 해도 그러지 않았던가. …그만큼 중전에 대한 그리움이 큰 걸까? 내가 중전이 아니라는 생각은 추호도 할 수 없을 만큼?

 

 나는 볼을 살짝 부풀리며 입술을 내밀었다. 멍하니 이불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왠지 서글퍼졌다. 나는 이들에게 뭘 바라고 있는 걸까. 그때, 그의 손가락이 내 볼을 꾹 하고 눌러 왔다. 입술이 힘없이 벌어지며 푸스스 바람 새는 소리가 났다.

 

 "…뭐 하세요."

 "훗."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은 그의 얼굴을 나는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연심이의 말로는, 이강은 웃는 일이 좀처럼 없다고 했다. 그래서 마냥 까칠한 줄만 알았는데, 나름 귀여운 짓도 많이 하는 것 같다. 이런 장난도 칠 줄 알고. 그런 내 시선을 느꼈는지, 그는 민망한 헛기침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실없이 웃고 있으려니 다정스러운 목소리가 말을 걸어온다.

 

 "변한 것 같소, 중전은."

 "…."

 "물론 과인도 그렇소만."

 

 이강은 내가 대답이 없자, 멋쩍게 덧붙였다. 그래, 나는 모르겠지만 너는 확실히 변한 것 같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건지,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일단은 내 변명부터 하는 것이 우선이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샐쭉하니 말했다.

 

 "번개에 맞았잖아요."

 

 어차피 말해도 안 믿어줄 거, 우리 그냥 번개로 퉁칩시다. 내 말에 그는 씁쓸한 미소를 베어 문 채 말했다.

 

 "그랬지… 번개. 그래도 중전이 살아난 것은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소."

 "…."

 "후회… 하고 있소."

 

 말하는 본새로 보아하니, 그간 중전한테 했던 짓을 후회한다는 뜻인 것 같았다. 그러길래 후회할 짓을 왜 했니. 정작 네 사과 들어야 할 중전은 이 자리에 없는데.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러신가요."

 "그렇소. 그래서 하는 말인데… 혹여 몸이 다 나으면 과인과 함께 달을 보러 가겠소?"

 "달이요?"

 

 예기치 못한 제안에 놀란 탓일까, 대답하는 목소리에 잔뜩 삑사리가 났다. 그는 멍한 표정을 짓다가는 다시 나지막한 웃음을 터뜨렸다. 가뜩이나 뜨거운 얼굴이 화끈하고 달아올랐다. 아 진짜, 쪽팔리게…. 어찌나 창피했는지, 순간 기침까지 쏙 들어가 버렸다.

 

 "그렇소. 달이오."

 "…좋네요, 달. 오랜만에 소원 빌어야겠다."

 

 내 말에 그의 눈이 조금 커졌다. 왜? 아, 설마 중전이 예전에 비슷한 말을 했었나? 나는 묘한 기대감이 어린 그의 눈을 마주 보며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얼굴에 조금씩 실망감이 떠올랐다. …왠지 열받는다. 아니, 막말로 달에 대고 소원 비는 사람이 걔 하나야?

 

 "무엇을 빌려는 것이오?"

 "안 알려 줄 건데요?"

 

 뾰로통하게 대답하면서도, 나는 혼란스러운 기분에 휩쌓였다. 왜 이렇게 짜증이 나지? 내가 정말 죽을 때가 됐나?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갈 때가 된 거라던데. 그리고 그는 내 새침한 어투에도 아랑곳 않고 입을 열었다.

 

 "과인은 그리 빌 것이오. 평생을 그대와, 행복하게 살게 해달라고."

 

 말없이 마주친 두 눈. 나는 그의 진지한 눈길을 바라보다가, 이내 먼저 눈을 피했다. 두근두근. 주책스럽게도 심장은 평소보다 몇 배나 빠르게 뛰어대고 있었다. 그 소리가 어찌나 컸는지, 그에게 들리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왜 이러는 거야… 아까부터 치미는 이 감정은 대체 뭐냔 말이야. 나는 답답한 표정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중전, 왜 그러시오! 괜찮소?"

 

 걱정이 가득 담긴 그의 눈동자를 본 순간, 나는 무언가 둔중한 것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 소리 없는 탄식이 새어 나왔다. 저 눈빛이었다. 애정이 듬뿍 담긴 주위 사람들의 시선. 그것은 평생을 고아로 외롭게 살아온 나에게는 너무나도 과분한 관심이었다. 그렇기에 이토록 나를 흔들리게 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나는 중전을 시기하고 있었다. 그들의 관심이 내가 아닌 중전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 못 견디게 질투가 났다. 그런 비교가 의미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중전과 나를 구분 짓고 있었던 모양이다. 부끄럽다. 입술을 지그시 깨문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괜찮아요."

 

 내 체온 때문인지, 조금은 따뜻해진 그의 손이 내 얼굴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문득 이렇게 다정한 사람이, 중전을 외면한 그 사람이 맞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무슨 사정이라도 있었던 건가? 잠시 고민하던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왕과 중전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든 간에 지금은 내가 낫는 게 먼저다. 몸이 아프니까 생각도 자꾸 이상한 쪽으로 뻗치지 않는가. 나는 짐짓 씩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약 먹을래요. 빨리 나아야 달을 보러 가든 별을 따러 가든 하죠."

 "그렇게 하겠소?"

 

 내가 끄덕거리자, 그의 입에서 위엄 서린 음성이 흘러나왔다.

 

 "상선 있느냐."

 "예 전하."

 

 문이 열리고 들어온 것은, 일전에 산에서 봤던 비대한 몸집의 사내였다. 그때 나보고 제정신이 아니라 그랬던 놈이잖아? 나는 상선이라 불린 사내를 슬쩍 흘겨봐 주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강은 여상한 어투로 상선에게 내 탕약을 가져오라 명령했다. 예, 하고 머리를 조아린 상선이 뒷걸음질 쳐 방을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심이가 탕약 그릇을 소반에 받쳐 들고 종종걸음으로 들어왔다.

 

 "마마, 탕약이옵니다."

 

 나는 탕약을 받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크으…!"

 

 쓰다. 어제 느낀 탕약 맛이 건강해지는 맛이었다면, 오늘 느낀 탕약 맛은 왠지 소주처럼 쓰디쓴 맛이다. 사탕 없나? 나는 입맛을 다셨다.

 

 "마, 마마!"

 

 연심이가 어색하게 웃으며 내게 눈치를 줬다. 옆에 왕이 있으니 조신하게 행동하라는 건가? 대충 말뜻을 파악한 나는 소매로 입가를 쓰윽 닦았다. 원래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게 사람 심리인 법이다. 연신 안절부절못하는 연심이와 옅게 웃는 왕을 번갈아 보면서, 나는 천천히 마음을 다잡았다. 굳이 중전과 나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니, 괜한 자격지심 가지지 말자고. 어찌 됐든 내가 이곳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진짜 중전'이 될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제야 답답했던 속이 확 풀리는 것도 같았다. 나는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연심아."

 "예 마마."

 "나 배고파."

 

 

 

 

 ***

 

 

 

 

 "이익…! 익!"

 

 수라상이 하나둘씩 들어오자,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끙끙댔다. 연심이가 그런 나를 부축하려 다가왔다. 그러나 그보다도 먼저 나선 이가 있었으니, 그 이름도 찬란한 이강이었다. 헙…! 그가 내 허리에 손을 얹자마자,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자동으로 배에도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렇게 경직된 자세로 몸을 일으키자니, 마치 내가 목각인형이 된 기분이었다. 나는 천천히 내 허리에서 손을 떼며 자세를 바로잡아주는 이강을 보며 물었다.

 

 "진짜 여기서 드시게요? 감기 옮을 텐데."

 "처음부터 그대와 함께 먹기 위해 온 것이오. 그리고 과인은 고뿔에 잘 걸리지 않는 편이오."

 

 예의 옅은 웃음과 함께 자신의 상 앞으로 가서 앉는 이강. 어차피 뭐라 해도 들을 기세도 아니었기에,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연심이와 왕의 기미상궁이 기미를 보고는 입을 열었다.

 

 "드셔도 좋사옵니다."

 

 왕은 기다렸다는 듯이 수저를 들었다. 나 역시 그를 따라 수저를 들으려 하는데, 손이 덜덜 떨려왔다.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는 것이, 숟가락이 아니라 아령이라도 드는 기분이었다. 그런 내 상태를 잠자코 지켜보던 연심이가, 조심스레 내 손에 들려 있던 수저를 가져갔다.

 

 "아직 지체가 미령하시니, 소녀가 먹여 드리는 것이 나을 듯 하옵니다. 괜찮으시옵니까, 마마?"

 "응, 부탁… 에취! 해."

 

 나는 간질간질한 코를 문지르며, 연심이가 떠주는 밥과 반찬을 받아먹기 시작했다. 주위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부끄러움보다는 배고픈 것이 더 컸다. 따뜻한 음식이 들어오니, 조금씩 기운이 났다. 어우… 좀 살겠네.

 

 "나 저거, 고기도 줘."

 "예, 마마."

 

 연심이는 충실히 내 시중을 들어주었다. 음. 생각보다 나쁘지 않군. 손발 하나 까딱 안 해도 입에 음식이 들어오다니, 이런 호사가 세상에 또 어디 있겠는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고기를 씹고 있자니, 돌연 궁금한 것이 떠올랐다. 나는 마찬가지로 고기를 입에 넣는 이강을 보며 입을 열었다.

 

 "고뿔에 잘 안 걸린다고 했죠? 지금까지 한 번도 걸려본 적 없어요?"

 

 그는 내 말에 곰곰이 생각하더니 은근히 여유로운 태도로 대답했다.

 

 "그렇지는 않소. 허나 최근 몇 해 동안은 단 한 번도 걸려본 적이 없소."

 "지금 건강하다고… 콜록. 자랑하시는 거죠."

 "그렇다고 할 수 있소."

 "흥. 저도 곧 튼튼해질 거예요."

 "하하. 기대하겠소."

 

 아기새처럼 연심이가 떠주는 국물을 받아마시던 나는 기대하겠다는 왕의 표정을 보고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말이랑 표정이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이 씨, 요게 날 무시해? 두고 보자. 내가 금세 건강해져서, 너한테 암바를 걸어주지. 왕한테 암바를 거는 중전이라… 사형 당하진 않겠지? 생각해보니 암바는 좀 심한 것 같기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이강은 빠른 속도로 비워지는 내 그릇에 자꾸만 본인의 몫을 덜어주었다.

 

 "중전, 이것도 드시오."

 

 나는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의아한 듯 물었다.

 

 "이거 안 좋아하세요?"

 "입에 안 맞소."

 "음. 그럼 거절 않고 받을게요. 감사합니다."

 

 보통 아프면 입맛이 없다고 하던데, 나한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나 보다. 그럼 그럼, 이렇게 꿀맛 같은데 어떻게 안 먹고 배기겠어. 그리고 나는 문득 어디선가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왕의 기미상궁이었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아닌데, 그럼 연심이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는데.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미상궁과 맞바라봤다. …근데 이것 봐라? 눈도 안 피하고 똑바로 노려 보네. 너도 혹시 인빈 따까리니?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중전의 권위고 뭐고 아주 땅바닥을 기는구나.

 

 반찬을 집어오던 연심이는 내가 입을 벌리지 않고 어딘가를 주시하자, 내 시선에 따라 고개를 돌렸다. 무언의 기싸움을 눈치챈 연심이가 놀란 듯 눈동자를 빠르게 굴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예전의 중전이었다면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겠지? 하지만 나는 예전의 그녀가 아니다. 어리버리 져줄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다. 나는 제법 오랜 시간 동안 눈이 마주쳤음에도 불구하고, 움찔하는 기색 하나 없는 기미상궁에게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굳이 인빈한테 직접 복수하는 게 전부는 아니잖아?

 

 "연심아."

 "예 마마."

 

 속삭이듯 묻는 내게 덩달아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연심이.

 

 "쟤도 인빈 편 맞지?"

 "일단은 그렇사옵니다만…."

 "그럼 됐어."

 "마, 마마. 어쩌시려고…."

 "괜찮으니까 보고만 있어."

 

 가뜩이나 기분도 꿀꿀했는데 잘 됐다 싶었다. 이걸 어떻게 손 봐주지?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는 짐짓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니?"

 "…예?"

 "아니, 너무 뚫어져라 쳐다보길래. 난 또 내 얼굴이 잘못된 줄 알았지."

 "소, 송구하옵니다…."

 

 이강의 냉랭한 시선이 기미상궁을 향했다. 기미상궁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

 

 "괜찮소?"

 "네. 체할 것 같고 아주 괜찮네요."

 

 내 비꼬는듯한 말투에, 그는 다시 기미상궁에게 싸늘한 눈초리를 보냈다. 그 눈빛이 얼마나 날카로웠는지, 기미상궁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나는 연심이가 주는 음식을 기쁜 마음으로 넙죽 받아먹었다. 곁눈질로 기미상궁을 흘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감히 인빈의 따까리 주제에 날 상대하려 들어? 나를 아주 개밥의 도토리로 보는 모양이야? 큭큭… 건방진 것. 조금씩 너에 대한 왕의 신임을 바닥에 처박아주지.

 

 낄낄거리고 있자니, 수저를 들고 있는 연심이가 간신히 웃음을 참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내심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기미상궁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아, 정말 밥맛 좋네요."

 "다행이오. 많이 드시오. 중전은 너무 마르지 않았소."

 "그래요? 글쎄요… 수라간에선 그렇게 생각 안 하는 것 같던데."

 "무슨 뜻이오?"

 

 급격히 냉담해지는 왕의 어조에 흠칫 굳어버린 기미상궁. 나는 그저 빙글거릴 뿐이었다. 내 뒤끝이 얼마나 긴데, 이대로 끝인 줄 알았다면 큰 오산이야.

 

 "별거 아니에요. 밥이 너무 맛있어서요. 앞으로도 많이 해줬으면 좋겠다는 뜻이었어요."

 

 이강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내 나직하게 말했다.

 

 "그런 것이라면 걱정하지 마시오. 내 단단히 명을 내려놓을 것이니."

 "네, 고마워요."

 

 나는 기미상궁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대꾸했다. 대체 주인이 얼마나 날뛰면, 수하까지 저렇게 안하무인이 따로 없을까. 너나 그 잘난 인빈이나, 왕의 총애를 받는답시고 그렇게 오만한 모양인데. 그 거만함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보자. 조만간 싸그리 뒤엎어 줄게.

 

 

 
작가의 말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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