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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청연은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부지런을 떨었다.
세수를 하고 머리도 곱게 빗었으며 산에 들어오고 나서는 생전 입은 적이 없는 도포자락까지 꺼내어 입었다.
청연의 얼굴에 어딘지 모를 설렘이 느껴졌다. 그런 청연을 의아하게 쳐다보던 한결이 물었다.
“어르신 오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러자 청연이 웃으며 말한다.
“그래 보이느냐? 너도 어서 가서 몸을 깨끗이 하고 오거라. 곧 귀한 분을 만나러 가게 될 것 같구나.”
“혹 어제 상선이라는 자와 대화 때문입니까?”
한결이 불만 섞인 목소리로 되물었다. 청연이 한결에게 다가왔다.
“왜 싫으냐?”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한결은 얼굴에 불만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어찌 그러는 것이냐?”
“왜 다시 그 일을 하시려 합니까?”
“마음에 들지 않는 게로구나?”
“아닙니다. 어르신 하시는 일에 제가 어찌 말을 올리겠어요..”
아니라는 한결은 여전히 볼멘소리를 하였다.
“내 어릴 적부터 너를 키워 네가 내 아들과 다를 게 무엇이냐? 너의 표정만 봐도 다 아는데 내겐 말해주지 않을 것이냐?”
“허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서운하고 싫습니다. 어르신!”
“무엇이 서운하고 또 무엇이 그리 싫단 말이냐?”
“저희를 두고 어르신 혼자 그 먼 궁으로 가시는 게 서운하고, 어르신이 다시 위험에 처하는 것이 싫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또 무엇이냐?”
청연이 한결을 달래듯 말했다.
“왜 그런 전하를 도우려 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전하는 자신을 지키려한 사람들을 외면하신 비겁하고 나약한 분입니다. 어떻게 그런 사람을 주군으로 섬길 수 있습니까..?”
“한결아. 정치라는 것은 마음으로는 감정으로는 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다. 물론 나도 이광을 그렇게 외면한 전하가 원망스럽지만, 또 그 어린 전하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느냐..”
“지금 그들의 세력은 그때보다 몇 배는 더 강해졌습니다. 저잣거리에는 허수아비 왕이라는 노래까지 있다 하옵니다. 그게 지금 조선의 왕권이잖아요. 전하를 돕는 일은 지금 조선을 쥐고 흔들고 있는 안동김씨 세력을 모두 적으로 돌리는 일이라는 것을 제가 모를 것 같습니까, 하지 마세요 어르신. 가지마시고 그냥 못 들은 척 여기 계세요..”
“한결아..”
“어르신도 포기한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원범도련님 그렇게 떠나시고 더 이상은 희망이 없다 하셨습니다. 근데 왜 또 이러시는 겁니까?”
한결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이응경 형제가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그 어린 나이에 그렇게 무서워하던 대왕대비 전을 찾아가 난동을 부리셨다 하더구나..비겁한 분이 아니야. 나약한 분이 아니다. 한결아 얼마 남지 않은 그 목숨 나라를 위해 쓰시겠다 하니 이 늙은이도 그 생각에 함께 해드리고 싶구나. 그리고 그래야 내 죽어서도 이광 그자의 얼굴을 떳떳이 볼 수 있을 것 같아.”
“어르신께서 가시면 이곳에 남은 사람들은 어찌 되는 것입니까? 또.. 저는 어찌 되는 것이고요.”
한결이 울먹이며 말했다.
“내 혹여 너에게 함께 가달라 부탁하면 그리 해주겠느냐?”
“네? 저를 데리고 가주신다고요?”
놀란 한결이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청연을 올려보며 물었다.
“그래. 내가 부탁한다면 넌 어쩌겠느냐.”
“저야 어르신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평생 모시고 싶습니다. 근데 저 같은 천한 놈이 궁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까.”
한결의 순박한 물음에 청연은 웃음이 터졌다.
“하하하 네가 어찌 궁에 들어간단 말이냐. 이놈 그저 내 옆에 있어 달라 했거늘 궁에 들어갈 생각까지 하는걸 보니 아주 야망이 큰 놈이구나!”
청연이 한결을 놀렸다, 한결이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얼굴이 붉어졌다.
“아 그런 것이 아니오라 저는 어르신이 궁으로 들어가시는 줄 알았습니다.”
“일단은 한양으로 가는 것이 먼저다. 그리고 너는 나를 따라와 내 곁을 지키며 이곳의 병사들 관리까지 맡아줬음 좋겠구나. 할 수 있겠느냐?”
“목숨이 다 하는 날 까지 어르신의 명에 따를 것입니다.”
“지금보다 더 바쁘고 더 고된 날이 될 것이다.”
“지금보다 더 강해질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네가 곁에 있어 든든하구나.”
청연이 한결을 어깨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언제 떠나실 생각이십니까? 지금 바로입니까?”
“아니 떠나기 전 이곳에서 먼저 할 일이 있어.”
“그게 무엇이옵니까?”
“너 원범이를 기억하느냐?”
원범의 이름을 듣자 갑자기 한결의 얼굴이 붉어졌다.
“원범 도련님은 어찌 찾으십니까?”
청연이 한결의 말투에서 이상한 점을 느꼈다.
“너 혹여 그날 이후로 원범을 만난 적이 있느냐?”
“아,,아니요 없습니다. 저 세수하고 오겠습니다.”
한결이 말을 더듬으며 청연의 시선을 회피했다.
“어허 바른대로 말하지 못해! 원범이와 만나며 지낸 거야?”
청연이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한결이 원범과 친분을 유지하고 지냈다면 일이 쉬울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아 아닙니다 정말 아니에요. 그저 제가 혼자 가서 몇 번 보고 온 것이 다입니다.”
청연이 한결을 꿰뚫어볼 듯 쳐다봤다.
그제야 한결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 다시 말했다.
“아니.. 그 귀한 몸으로 나무 하고 궂은일 하는 게 안쓰러워서 가끔 진짜 가끔 나무해서 몰래 마당 앞에 갖다 논적이 몇 번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먼 발치에서 몇 번 본거 그게 다에요 절대 찾아가거나 앞에 나타난 적은 없어요. 용서해주세요 어르신.”
그러자 청연의 얼굴에 실망감이 비쳤다. 하지만 청연은 한결의 넓은 어깨를 감싸안으며 말했다.
“내 너를 이래서 아낀다. 한결아. 그리운 얼굴 보러 갈래?”
“그리운 얼굴이요?”
“그래, 그리도 보고 싶어 먼발치에서만 봤다는 그 얼굴 나랑 보러가겠느냐?”
“워,,원범 도련님을 보러가자고요?”
“그렇다는데도. 만나줄지 모르겠으나 일단 가보자! 얼른 세수하고 단장하고 나오거라.”
한결이 청연의 말을 이해하고 반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청연과 한결은 참으로 오랜만에 산을 내려갔다.
그들의 발걸음은 원범에게로 지금의 봉식에게로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