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뵙겠습니다? 처음 뵈었다고 나를?
기막혀 보는 영도와 죽여 버릴 듯 보는 설. 두 사람의 시선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들의 사정을 알 리 없는 민후가 설이에게 따뜻하게 말을 걸었다.
“몇 학년이에요? 고등학생?”
“네, 고2요.”
“영도랑 동갑이네. 학교에서도 자주 보고 할 텐데, 우리 영도 좀 잘 부탁해요.”
민후의 말에 영도와 설이가 동시에 버럭 했다.
“얘가 왜!”
“제가 왜!”
보던 할머니가 이번에는 설이에게 꿀밤을 먹였다.
“기차화통을 삶아 먹었나. 왜 소릴 질러?”
생각지 못한 두 아이의 반응에 민후가 어색하게 웃으며 둘러댔다.
“아무래도 또래다 보니 부끄럽나 봐요. 그래도 한 집에 사는데 학교에서 아는 척도 하고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부탁 좀 해도 되죠?”
다시 발끈하려던 설이는 민후를 보니 마음이 약해져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 그럴게요.”
**
터덜터덜, 설이는 방에 들어와 그대로 침대 위로 점프해 이불을 뒤집어쓰고 괴로워했다.
아니 사람이 말을 하면 듣는 척이라도 해야지. 왜 또 잡혀오고 난리냐고!
사춘기 시절을 영도와 한 집에서 보냈다. 학교도 학교지만 집에서 지지고 볶다가 정이든 게 더 컸다.
그래서 더더욱 영도가 도망가는 걸 적극 밀어주었다. 그게 서로의 인생에서 완벽하게 아웃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자식이 말귀를 못 알아듣고!
설이는 있는 힘껏, 침대 위에 놓인 인형을 천장을 향해 던졌다.
쿵!
“방금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어?”
2층 방에서 민후와 대치하던 영도가 귀를 쫑긋했다.
“말 돌리지 말고 핸드폰 줘.”
“형. 핸드폰 없으면 요즘 왕따 당해. 갑자기 전학 가는 것도 서러워 죽겠데 나 왕따 당하는 꼴 보고 싶어?”
“왕따는 무슨. 노는 애들 모아서 우르르 몰려다니지나 마. 팔 아파. 핸드폰!”
이씨. 망설이던 영도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건넸다.
“압수야. 압수기한은 너 하는 거 보고 정할 테니까. 앞으로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있어.”
정색하는 민후를 보며 체념한 영도가 침대에 끙, 누웠다.
그런 영도의 머릿속에 설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 지금 이대로 오토바이 타러 가면 잡혀.]
대체 그걸 어떻게 안 거지?
영도가 방을 나가려던 민후에게 물었다.
“형. 저 밑에 사는 애. 좀 이상하지 않아?”
“귀엽기만 하더만. 뭐가 이상해?”
“눈도 이렇게 무섭게 치켜뜨고. 말도 요상하게 하고. 제정신 아닌 것 같던데?”
“괜히 기 싸움 하지 말고 친하게 지내.”
영도가 심드렁하게 돌아 누우며 말했다.
“뭘 친하게 지내? 내가 여기서 친구 만들 일 있어?”
그런 영도를 잠시 보던 민후가 입을 열었다.
“영도야. 난 네가 여기서 꼭 친구 같은 걸 만들었으면 좋겠어.”
“그건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서울에 있는 네 친구들 중에 믿는 놈 한 명이라도 있어?”
“!”
“오늘만 해도 네 친구란 놈은 너 대신 오토바이를 택했어. 그 조건으로 전화해서 너 부른 거야.”
딱히 놀랄 것도 없다는 듯 픽, 웃으며 영도가 말했다.
“그 새끼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너도 솔직히 그런 것 때문에 지치잖아. 네 돈이 좋아서, 네 집안이 무서워서. 그래서 사람들이 네 옆에 있다고 생각하니까 계속 거리감 두는 거잖아.”
“..그래서 뭐?”
“여긴 달라. 여긴 네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들밖에 없어. 그러니까 여기서 좋은 친구 만들어봐. 혹시 알아? 평생 함께 갈 친구 찾을 수 있을지?”
침대에서 일어난 영도가 굳은 얼굴로 민후를 쳐다봤다.
“날 너무 모르네 형. 난 그런 거리감이 좋아. 내가 가진 거에만 관심 갖는 사람들이 편하다고.”
같잖게 내 마음 속 파고 드려는 사람들 생각만 해도 피곤해.
영도는 그렇게, 상처받지 않기 위한 방어막을 겹겹이 치고 있었다.
**
“아, 저리 안가!”
할머니는 애기처럼 품속을 파고드는 설이의 등짝을 내려쳤다.
“왜? 좋아서 그러는데.”
설이는 푹 안긴 채 손을 뻗어 할머니의 얼굴을 매만졌다.
덜덜 떨리는 손을 할머니의 얼굴에 갖다 댔을 때, 그때 전해졌던 차가운 촉감. 그게 생각나서 다시 눈물이 또르르 떨어졌다.
“따뜻해. 할머니 참 따뜻하다. 진짜 꿈같아.”
꽃밭을 정리하던 할머니가 들고 있던 호미를 내려놓고 설이를 심각한 표정으로 봤다.
“어디 아파? 진짜 어디 아픈 거야?”
“안 아파. 쌩쌩하고 팔팔해. 이런 기분 진짜 오랜만이야.”
“다행이네. 그건.”
“그나저나 할머니 일 좀 줄여라.”
할머니는 목욕탕 청소일과 함께 간간히 갈비집에서 아르바이트까지 하고 있었다.
“하나라도 정리 하면 안 돼? 아니 그냥 일 다 그만둬. 그만두고 쉬어.”
“일 그만두면 밥은 뭐 먹고 살아?”
“내가 벌게! 알바 하면 되지.”
“공부해야지 알바는 무슨 놈의 알바.”
“아님 대출 받아. 내가 커서 다 갚을게.”
“헛소리 작작하고 할머니 도와주고 싶으면 이거나 정리하고 들어와. 허리 아파 뒈지겠다.”
할머니는 끙, 하고 일어나더니 집으로 들어갔다.
그렇지.. 고딩이 무슨 수로 할머니를 호강시켜주겠어. 설이는 고개를 푹 숙였다.
2층 계단 위에서 그 모습을 보던 영도는 괜히 시선을 돌리며 딴청을 폈다.
두 사람의 대화에 섣불리 끼어들기가 뭐했다. 왠지 지켜줘야 될 시간인 것 같았다.
아니지. 내가 왜 그딴 걸 신경 쓰고 있어?
골이 난 영도가 신경질을 팍, 내며 설이를 불렀다.
“야! 형이 집 열쇠 달래.”
설이가 손에 묻은 흙을 탁탁 털고 일어났다.
“기다려봐. 갖고 나올게.”
“화분 밑에 둬 그냥. 이따 찾으러 갈게.”
귀찮다는 듯 나른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은 영도가 다시 2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돌아섰다.
그러시던지. 설이 역시 심드렁한 표정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 잠깐.”
계단을 올라가던 영도가 할 말이 생각났는지 설이를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까 형이 한 말은 무시해.”
영도의 말에 설이가 무슨 말이냐는 듯 영도를 올려다봤다.
“형이 그랬잖아. 우리 친하게..”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는지 간파한 설이가 영도의 말을 툭 잘랐다.
“알았어.”
영도는 조금 황당해서 되물었다.
“뭘 알아?”
“친하게 지내지도 말고 아는 척도 하지 말자.”
“!”
“사이좋은 이웃사촌도 싫고. 말 섞으면서 싸우는 웬수 같은 이웃사이도 싫고. 그냥 윗집 아랫집.”
“....윗집 아랫집?”
설이가 경고하듯이 말했다.
“그래. 윗집 아랫집. 그것만 하자고.”
쾅! 할 말을 끝낸 설이가 벙 찐 표정의 영도를 뒤로 하고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
[그래. 윗집 아랫집. 그것만 하자고.]
[윗집 아랫집. 그것만 하자고.]
[윗집 아랫집.] [윗집 아랫집.] [윗집 아랫집.]
영도는 우걱우걱 밥을 입에 밀어 넣고 있는 설이를 뚫어지게 보며 그녀가 한 말을 떠올렸다.
그 후로 벌써 일주일 가까이 지났지만 설이는 자신이 내뱉은 말을 정확하게 지키고 있었다.
설이의 세상에서 영도는 투명인간이었다.
퍽! 영도의 등이 찌릿하게 아파왔다. 할머니의 등짝 스매싱이었다.
“뭐하고 있어? 밥알로 산수공부하고 있어?”
영도는 너무 아파서 끽 소리도 내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했다.
그런 영도를 보고 민후가 픽, 웃었다.
하지만 설이는 곁눈질로도 영도 쪽은 보지도 않고 퍽퍽 밥을 떠먹었다.
그런 설이의 등짝에도 할머니의 스매싱이 찾아왔다.
“아! 왜!”
“넌 요즘 왜 이렇게 밥을 많이 처먹어?”
“맛있으니까 그렇지!”
진짜 맛있었다. 11년 만에 할머니가 차려준 밥을 먹는데 뭐든 안 맛있겠나.
밥에 물만 말아줘도, 귀찮다며 계란도 없이 라면만 툭 끓여줘도. 설이는 할머니가 차려주는 거면 뭐든지 미슐랭 뺨치게 맛있게 느껴졌다.
“이 배 봐. 배. 챙피하지도 않어?”
할머니가 설이의 삼겹살 배를 잡고 흔들었다.
“그냥 둬, 할머니. 나 지금 한창 먹을 때잖아.”
설이가 할머니의 손을 뿌리치며 입을 열자, 입 안에 있던 밥알 한 톨이 날아가 테이블 위에 안착했다.
그걸 본 영도가 썩은 표정으로 수저를 내려놓았다.
여자에 대해 갖고 있던 환상을 단 며칠 만에 이 아이가 아주 나노단위로 흔적도 없이 산산조각 내주고 있었다.
“교복도 다시 사야 될 것 같은데. 살이 이렇게 쪄서 교복이 맞겠어?”
할머니의 말에 민후가 반가워하며 말했다.
“잘됐네요. 영도도 교복 사야 되는데.”
“그래? 그럼 둘이 같이 갔다 와.”
밥을 넘기던 영도가 사래에 걸려 콜록댈 때, 두 눈이 동그래진 설이가 소리쳤다.
“내가 왜 같이 가? 싫어!”
에이씨. 쟤는 왜 또 내가 할 말을 대신 하냐고! 짜증나게. 영도는 속에서 열불이 나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
나가려는 설이를 붙잡은 할머니가 꼬깃꼬깃한 지폐를 건넸다.
“이걸로 네 교복 사고 영도 맛있는 것도 사주고 그래.”
“아니, 맛있는 걸 왜 사줘 걔를?”
“왜 이렇게 못돼 처먹었어? 잘해줘! 저 청년들 우리 집에서 공짜 밥 먹는 거 아냐. 교장선생님이 쟤네 밥 해주는 대신 월세 깎아주는 거 알아 몰라?”
“몰라. 그리고 밥값 받은 대신 밥 해줬으면 됐지 뭘 이렇게 잘해 주냔 말야.”
“너는 할머니라도 있지. 저 둘은 부모도 없잖아.”
“쟤가 부모님이 없어?”
없긴 개뿔. 너무 많아서 문제야, 할머니.
“없으니까 저렇게 둘이서만 살겠지. 교장 선생님도 안쓰러우니까 도와주시는 거고. 다 사정이 있어서 그럴 테니까 또 애한테 쓸데없이 물어보고 그러진 마.”
하나도 안 궁금하네요. 그것도 너무 많이 알아서 문제네요!
대문을 열고 나온 설이의 시선에 설이 못지않게 짜증이 잔뜩 난 채로 서있는 영도가 보였다.
설이가 앞장을 서고 영도가 껄렁껄렁 뒤를 따라갔다.
그렇게 두 사람은 말없이 버스를 타고 읍내까지 나갔다.
버스에서 내린 설이가 또 쌩하니 영도를 앞질러 갔다.
대단하다, 대단해.
영도는 그런 설이의 뒤를 보며 기막혀 하다가 입을 뗐다.
“거기! 1층!”
설이가 고개를 돌렸다.
“뭐?”
“윗집 아랫집만 하자며. 그래서 1층. 뭐 맘에 안 들어?”
우리 설이. 예쁜 설이. 잘못한 일 있을 땐 쏘리. 영도가 설이를 부를 때 쓰는 애칭은 정말 별별 것들이 다 있었다.
하지만 다시 만난 열여덟의 박영도는 설이를 1층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설이는 미련을 털어내듯 애써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맘대로 불러. 안 부르면 더 좋고.”
“그럼, 1층으로 하자. 1층은 조금 이따 와라?”
“뭐?”
“친한 척 아는 척 안하기로 했잖아. 여기서부턴 알아서 각자 가자.”
영도는 어이없어 하는 설이를 앞질러 갔다. 유치한 건 알지만 드디어 이긴 것 같아 마음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그런 영도의 시선을 붙잡는 것이 있었다.
골목길 한 구석에서 남학생들이 누군가를 괴롭히는 듯 원으로 동그랗게 모여 있었다.
진짜 조그만 동네에 있을 건 다 있네. 골목대장도 있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지나쳐 가려던 영도가 멈칫하고 뒤를 돌아봤다.
설이가 움직이지 않은 채 그 아이들을 보고 있었다.
설마.. 저기 뛰어들려는 거야?
영도는 귀찮은 표정으로 다시 돌아와 설이 앞에 섰다.
“너 혹시 어울리지 않게 불의를 보면 못 참는다거나 그런 캐릭터는 아니지?”
설이는 아이들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입술을 깨물었다. 이것 참. 어른 된 입장에서 그냥 지나칠 수도 없고.
설이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내가 그렇게 정의감이 있진 않고. 대신 오지랖은 있는 편이라.”
핸드폰을 들고 112를 누르며 설이가 영도를 스쳐지나갔다.
봐도 봐도 정상은 아냐.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영도가 인상을 팍 썼다.
에이씨. 또 저게 먼저 가잖아!
영도는 재빠르게 뛰어가 신고 전화를 하는 설이를 앞질러 갔다.
저 유치한 고딩. 설이는 그런 영도를 한심하게 보며 신고를 끝내고 핸드폰을 닫았다.
그때, 설이의 귀에 낯익은 목소리가 꽂혔다.
“이거 안 놔? 아 이거 놓으라고!”
어? 저 목소리. 강아라잖아!
예감이 맞았다. 남학생들에게 둘러싸여 괴롭힘을 당하고 있던 아이는 아라였다.
이렇게 다시 보니 효진이 못지않게 아라도 무지하게 반가웠다.
결혼 후, 상류층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빙빙 겉도는 설이에게 툴툴대면서도 먼저 다가와 말이라도 한마디 건네준 친구였다.
그리고 그런 아라의 손목을 잡고 있는 무섭게 생긴 저 남학생. 바로, 이 조그만 동네를 평정하고 계신 일짱. 지형수였다.
최근에 들은 소식으로는 커서도 지 버릇 못 주고 깡패 짓 하다가 지금은 콩밥 먹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설이는 깡패 꿈나무 지형수와 그 패거리들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설이를 부르듯, 다시 아라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휴.. 심호흡을 한 설이가 뚜벅뚜벅 골목길로 걸어 들어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