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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펑더화이의 6.25
작가 : 주암
작품등록일 : 2017.12.15

펑더화이는 중국인민지원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온 총사령관이다. 펑더화이의 입장에서 보는 한국전쟁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중국은 5차전역에 걸쳐 미군과 한국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고 마지막으로 금성전투에서 엄청난 공격을 가하여 정전협정장으로 끌어낸다. 전선은 지루하고 소모적인 마지막 고지쟁탈전이 벌어지는데, 이런 과정에서 벌어진 삼감령전투는 중국군에 있어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이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서 흘러나온 첫 곡이 상감령전투의 주제곡이었다. 중국은 미제와 국경을 접하고 싶니 않아 이북이란 완충지대가 필요했고, 미국은 중공을 견제하기 위하여 남한이란 완충지대가 필요했다.

 
압록강을 건너는 펑더화이 1
작성일 : 17-12-15 17:34     조회 : 339     추천 : 0     분량 : 95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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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압록강을 건너는 평더화이

 

 

  1

 

  10월 19일이 왔다. 이날 펑더화이가 이끄는 중국인민해방군은 드디어 압록강을 건넌다. 얼마나 많은 회의를 거치고 얼마나 망설이던 결단이던가. 이날 미군 제1기병사단과 국군 제1사단이 평양을 점령하고 국군 수도사단이 홍원을 탈환하던 날이다.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소련에서 스탈린과 회담을 계속하고 펑더화이는 출동명령을 받고 선양(瀋陽)으로 군대를 집결하고 있을 때, 스탈린이 공군지원에 난색을 표하자 중국은 초긴장 상태가 되었다. 10월 13일 오후, 마오쩌둥은 다시 한 번 중난하이의 이년당(頤年堂)에서 중앙정치국 긴급회의를 주재하였다. 이날 회의는 소련의 공군지원이 없더라도 참전한다는 참으로 중국의 국운을 건 심각한 결정이 내려졌다. 마오쩌둥은 이제 토론보다도 하달식의 열변을 토하였다.

  “우리가 출병하지 않을 경우, 적은 압록강 기슭까지 밀어닥치게 될 것이오. 그 때는 모든 면에서 우리가 불리한 입장에 서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동북변방군은 전체가 전쟁에 말려들고 남만주의 전력이 제압당하게 될 것이오. 만약 미제가 조선을 완전 점령하고 나면 우리는 미제 침략군과 국경을 접함으로서 하루도 평안할 날이 없을 것이오. 그리고 미제는 조선을 영구지배하려 들것이 뻔합니다. 그들은 절대 일제처럼 빨리 물러가지 않을 것이오. 조선을 이 뒤로 백년, 이백년 아니 그 이상 지배할는지 모르오.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중국을 견제하기 위하여 조선을 자기의 세력권 하에 둘 필요가 있는 것이오. 때문에 우리로서는 절대 양보할 수 없는 한판 승부를 벌릴 수밖에 없소. 조선은 누천년 간 중국의 번속이었어요. 청일전쟁으로 일본이 우리의 번속을 떼어가 일한합방을 시켰으나 조선인은 누구나 일본인 되기를 거절하고 오늘 날까지 중국인으로 치열한 항일투쟁을 벌려 왔어요. 조선은 우리의 항일전쟁이나 해방전쟁에서도 우리와 함께 생사고락을 같이 했어요. 조선독립군, 조선의용대는 추호도 중국을 외국으로 생각한 적이 없어요. 38선 이북의 조선을 우리가 지원하여 해방구를 만들어 미제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완충지대를 만들어야 중국이 편합니다. 조선전쟁은 우리로서는 일종의 국내전쟁이란 것을 잊지 마세요.”

  10월 14일 마오쩌둥은 중앙정치국이 결정한 지원군의 즉각 출병과 첫 단계 작전방안을 소련에서 회담 중인 저우언라이에게 전보로 알렸다. 스탈린은 애당초 중국 측에게 6개 사단만 출동하기를 희망했었다. 그러나 중공 중앙은 펑더화이의 건의에 따라 12개 보병 사단, 3개 포병사단 및 전차연대, 고사포연대, 공병연대까지 출동시키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마오쩌둥이 이런 결정사항을 소련에 있는 저우언라이에게 일부러 통지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소련이 중국의 출병상황을 이해하고 조속히 중국인민지원군의 곤란을 해결해 달라는 것이었으며, 또 하나의 이유는 만약 중국이 곤경에 처하게 되면 당신네들에게도 불똥이 튈 것이라고 하는 일종의 경고였다. 조선은 중국하고만 국경을 접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소련하고도 국경을 접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당신네에게도 북한이라는 완충지대는 절대 필요하니까.

  10월 15일, 펑더화이는 선양에서 지원군의 출국작전 준비태세를 점검하는 한편, 짧은 시간을 이용하여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철강회사인 안산강철(鞍山鋼鐵)과 선양병기창을 시찰했다. 바로 그때 평양의 위기는 경각에 달려 있었다. 김일성은 부수상 박헌영을 선양으로 급파하여 펑더화이와 회견하도록 하였다.

  “펑 사령관! 먼저 김일성 수상의 뜻을 전합니다. 김일성 수상은 지금 적이 평양을 육박하고 있다는 사실을 빨리 알리고 중국지원군이 시각을 다투어 출동해 주십사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김일성 동지는 빠른 시일 안에 펑 사령관과 면담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알았습니다. 우리 중앙은 최종결정을 내렸습니다. 10월 19일부터 지원군 부대가 압록강 도하를 개시할 것입니다. 조선인민군은 계속 적의 진격저지를 하여 공세를 지연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오늘 가오강(高崗) 동지와 함께 안둥(安東)으로 내려가서 부대배치와 도하작전 계획을 점검할 것입니다.”

  펑더화이는 10월 16에 안둥에서 지원군 사단장급 이상 간부대회를 소집하여 항미원조전쟁의 전략과 의의를 설명하였다.

  “동지들! 아군의 전력은 다음과 같다. 첫 단계로 제1선에 4개 군, 3개 포병사단, 도합 25만 명 병력이다. 제2선에는 15만명, 제3선에는 20만 명, 합계 60만 명의 병력이 된다. 공군은 작전 2개월 만에 8개 연대, 3개월째에 16개 연대가 될 것이다. 6개월 이내에 30개 사단이 좋은 장비를 갖추게 될 것이다. 화포의 보급도 문제가 없다. ‘미국 공포증’은 엄숙히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그러한 사상은 아군의 투지를 약화시킬 뿐이다. 적이 무기 장비 면에서 절대 우세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우리는 전술적인 측면에서 적보다 우세하다. 결연한 용맹성, 과감한 근접전, 폭탄병의 돌격, 총검에 의한 육박전, 수류탄 투척, 이런 것들은 바로 적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들이다. 우리는 조선 경내에 들어간 후에 절대로 교만하거나 강대국 원조자의 신분을 내세워서는 안 된다. 조선은 우리의 많은 소수민족 중에서 최상위권의 소수민족이다. 조선 노동당과 인민정부, 인민군과 광대한 인민대중에게 절실한 존경을 표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대국으로서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이다.”

  10월 17일 오전, 펑더화이는 참모장 제팡(解方. 원명 제페이란〔解沛然〕)에게 지시를 내려 작전참모 궁지에(龔杰)와 함께 먼저 박헌영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게 하였다.

  부대의 도하 하루 전(18일), 펑더화이는 가오강과 함께 마오쩌둥의 부름을 받고 급히 북경으로 날아갔다. 모스크바에서 저우언라이가 귀국할 예정이니 급히 최종 회동을 하자는 것이었다. 회의석상에서는 저우언라이가 스탈린과의 회담결과를 상세히 설명하고 펑더화이가 도강 직전의 중국해방군 상황을 자세히 보고하였다. 마오쩌둥은 결연한 자세로 하달한다.

  “현재 적은 평양을 단말마적으로 포위공격하고 있소. 아마 하루를 버티지 못하고 평양은 적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오. 적은 며칠만 더 있으면 우리의 국경인 압록강까지 진격해 올 것이오. 우리는 어떠한 난관에 봉착하드라도 지원군을 도강시켜, 원조(援朝) 계획을 차질 없이 시행하여야 하오. 시간도 더 이상 미룰 수 없소. 이왕의 계획대로 결행하시오.”

  펑더화이는 먼저 내일 도강을 준비하고 있는 압록강 북안의 덩화(鄧華) 홍쉐즈(洪學智) 등에게 전화 통지를 하였다.

 

  지원군 각 부대는 엄격한 기밀 유지와 엄밀한 위장을 실시하라. 정치 동원과 식량 탄약 보급을 즉시 실시하고 서약대회를 개최한 다음, 즉시 출국 작전을 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도록 하라.

 

  펑더화이는 마오쩌등이 문서로 작성한 덩화, 홍쉐즈, 한센추(韓先楚), 제팡 및 동북군구 부사령관 허진넨(賀晉年)에게 보내는 특급 비밀전보를 발송하였다.

 

  수신 : 덩(鄧), 홍(洪), 한(韓), 제(解).

  참조 : 허(賀) 부사령관.

  4개 군 및 3개 포병사단은 예정 계획대로 조선에 입국 작전하기로 결정되었다. 내일(19일) 저녁 안둥(安東)과 지안(集安) 일선으로부터 압록강 도하를 개시한다. 엄격한 비밀 유지를 위하여 도하부대는 내일 황혼 시각부터 도하를 개시, 익일 새벽 4시에 정지하며 5시 이전까지 은폐를 완료하고 아울러 철저한 검사를 실시하라. 작전 경험을 얻기 위하여 첫째 날(19일) 2개 내지 3개 사단이 도하하고, 둘째 날부터는 적절히 증감하여 실시하라.

  마오쩌둥

  10월 18일 21시

 

  그리고 전에 이미 대강 결정된 사항을 이제 마지막으로 정비하여 중앙회의에서 최종결정을 하여 공포하였다.

 

  결정 : 펑더화이의 임시 지휘소와 제13병단 사령부(당초 동북변방군 사령부)를 통합,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부로 조직하여 펑더화이를 사령관 겸 정치위원으로, 덩화, 홍쉐즈, 한센추를 부사령관으로, 제팡을 참모장으로 각각 임명한다.

 

  긴박한 분위기 속에서 마침내 통일된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부가 정식으로 출범하였다. 동시에 지원군의 각 도하부대 역시 압록강변을 향해 급한 행군을 개시하였다.

  10월 19일, 북경에서 안둥으로 돌아온 펑더화이는 석양이 서쪽 하늘로 미끄러져 내리며 저녁 안개가 드리우고 있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조금 있으니 찬바람에 보슬비가 하염없이 뿌리며 압록강을 자욱이 덮어가고 있었다. 가을 날씨인데도 제법 차가운 기운이 온 몸에 스며들었다. 펑더화이는 운전수 하나만 불러서 차를 압록강 철교로 몰도록 하였다. 철교 입구에서 하차한 펑더화이는 검푸른 압록강 물을 내려다보았다. 시커먼 강물이 위용 있게 흐르며 강 건너 조선 땅에서 멀리 화재의 현장처럼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압록강은 물색이 오리머리처럼 검푸르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천리나 되는 긴 강줄기이다. 전에는 압록강이 조선 국내에 있는 강이었으나 지금 중조국경이 된 이후로는, 중국인은 자기네 강이라 말하고 조선인은 자기네 강이라 말하는 곳이다. 장백산(한국명 백두산) 천지의 동남쪽 연지산(胭脂山) 자락에서 발원하여 동북에서 서남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세차게 흐르고 있다. 그 물결소리는 마치 홍조 띤 어린소녀의 울음 소리인양 노래 소리인양 또는 고달픈 생활의 눈물이 방울져 떨어져 합수친 한 많은 강줄기인양, 또는 어느 선구자가 힘찬 찬가를 부르며 양안의 백성들을 일깨우고 있는 양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강이다.

  “오늘 내가 이 다리를 건너면 다시 이 다리를 건너서 돌아올 수 있을까?”

  펑더화이는 조선쪽을 보다가 다시 시선을 중국 안둥(安東) 쪽으로 돌렸다. 안둥은 청산록수가 아름답고 풍경이 수려하기로 유명하며 고래로 아름다운 유람지인지라 일찍이 ‘만주의 작은 소항(東北小蘇杭)’이라 부르던 곳이다. 소주와 항주는 하늘아래 가장 아름다운 곳인데 안둥은 만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항인 것이다. 안둥(1965년부터는 단둥〔丹東〕 즉 동쪽을 붉은 물을 드리겠다는 의미로 개칭)이라 이름 붙인 것은 중국의 동쪽(조선)을 평안하게 하겠다는 의미로 붙인 것이다. 원래 신라 화랑의 매국행위로 당(唐)에 의하여 조선의 3국이 모두 망해버리고 없었을 때, 고구려 옛 땅에는 당의 안동도호부를 두고, 백제 옛 땅에는 당의 웅진도호부를 두고, 신라 옛 땅에는 당의 계림도독부를 두어 신라왕도 계림도독으로 임명하였었다. 그러던 안둥이 지금은 한국전쟁을 돕겠다고 몰려든 중공군들로 말미암아 전 도시가 온통 거대한 병영으로 바꾸어지고 말았다.

  국내전쟁에서 이골이 난 이 역전의 용사들은 오늘 또 다른 하나의 변화를 가져와야 했다. 그들이 그처럼 긍지를 느끼고 자랑스러워했던 ‘팔일오성(八一五星)’의 모표며 ‘중국인민해방군’이라고 새겨진 가슴의 흉장(胸章), 모든 장비에 새겨진 군휘(軍徽) 및 문서 수발신 때 사용하던 해방군의 관인 등을 오늘부터 일체 사용할 수가 없다. 그들은 지원군이라는 명목이기 때문에 모두 조선인민군복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팔일오성은 중국해방군의 자존심이었다. 1927년 8월 1일 난창(南昌)에서 장제스 국민당 군을 향하여 무장봉기를 하던 날을 기념하여 마오쩌둥 주석, 주더(朱德) 부주석, 리우샤오치(劉少奇), 저우언라이, 펑더화이의 이름으로 공포한 인민해방군의 군기, 군휘의 양식이다. 다섯 개의 별을 새겨 군기를 삼기도 하고 모자에는 큰 별 하나를 그리고 가운데 세로로 ‘팔일(八一)’이라고 새겼다.

  안둥의 북쪽 성곽에는 전장 산(鎭江山)이라는 높이 137m의 아름다운 산이 있는데 보통 ‘만주 8경(僞滿八大景)’ 중의 하나로 꼽히는 곳이다. 산은 그림처럼 수려하고 명승고적이 많으며 특히 곳곳에 당나라 설례(薛禮. 설인귀)가 동정(東征. 조선정벌)하던 유적이 많이 남아 있어서 중국인이 즐겨 찾는 곳이다.

  이 때 마오쩌둥의 아들 마오안잉(毛岸英)도 조선에 출전하기 위하여 안둥까지 왔다가 잠깐의 여유를 이용하여 전우들 몇 명과 함께 전장 산 공원을 유람하고 있었다. 그들은 정상의 전장 정(鎭江亭)에 올라 눈을 들어 사방을 훑어보았다. 멀리서 희끄무레한 안개 띠가 몰려오더니 산 밑을 휘감고 돌았다. 거기 중조국경인 압록강이 굽이쳐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마오안잉은 중조양국을 잇는 압록강 철교를 바라보고, 다시 눈을 들어 조선쪽의 촌락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바라보며, 바로 그 아래쪽의 혈흔이 낭자할 조선의 산야를 그려보았다. 마오안잉은 전장 정을 내려와 산허리쯤에 자리 잡고 있는 열사능원에 들렀다. 해방군과 당지 인민들의 영용한 희생으로 일제의 괴뢰정권인 위만(僞滿)정부를 타도하고 동북을 해방시키던 열사를 기리는 ‘요동해방기념탑’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였다. 조선인민군 장교복을 입은 마오안잉과 전우 쉬무위안(徐亩元), 양펑안(楊鳳安), 탕번(唐本)이 후열에 서고 다섯 명의 전사와 높은 모자를 쓴 소련 전문가가 두 줄로 앞 계단에 앉고 찍은 이 열 명의 사진은 마오안잉이 고국에서 찍은 마지막 사진이 되었다. 마오쩌둥이 “몇 개월 동안은 말하지 말라.”고 특별히 강조한 대로 압록강 도하 하루 전인데도 중국인민지원군을 환송하는 징소리 북소리도 없었고 격앙된 호각소리도 없었으며 ‘중국인민지원군 군가’의 “보무도 당당히 충천된 기세로 압록강을 건너…”하는 노래도 부를 수 없었다.

  압록강 도하 당일인 19일, 북경에서 안둥으로 갓 돌아온 펑더화이는 전장 산 초대소에서 잠시 쉴 겨를도 없이 조선인민군군복으로 갈아입을 틈도 없이 장렬한 마음으로 출국 작전의 노정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오후 5시 30분에 제38군, 39군, 40군, 42군 그리고 3개 포병사단이 동시에 안둥, 창뎬 하구(長甸河口), 지안(集安)의 세 곳에서 동시에 출발을 개시하도록 하달하였다.

  펑더화이는 참모들에게 힘주어 말했다.

  “마오 주석께서는 안전을 고려해서 나더러 지휘소는 압록강 북안의 은폐된 장소에 설치하라고 했으나, 내 생각으로는 그래도 강을 건너 조선 경내에 설치하는 것이 김일성 수상과 통일된 작전을 수행하기에 편리할 것 같소.”

  이어서 덩화와 홍쉐즈에게 말했다.

  “적의 북침은 지금 시각을 다투고 있어요. 평양은 아마 지켜내지 못할 것이오. 나는 한 시 바삐 건너가서 김일성 수상과 회견해야겠어요. 날이 어두워지면 당신들은 제40군과 행동을 같이 하세요. 부대가 도강하는데 모든 편의를 제공하고 추호의 실수도 없도록 하세요. 알았지요?”

  “알았습니다, 펑 총. 안심하고 출발하십시오.”

  덩화와 홍쉐즈는 부동자세로 펑더화이에게 힘주어 경례를 붙였다.

  지안에서 출발하는 제42군 5만여 병력은 포만철로(浦滿鐵路)와 임시 가설한 부교를 이용하여 도강을 시작하였다. 그들의 목표는 조선반도 동북부의 장진호 지구(함경남도)였다. 포만철로는 조선의 만포선(滿浦線)과 중국의 메이지 선(梅集線)을 연결하는 철로이다. 만포선은 평안남도 순천에서 평안북도 만포까지의 철로이고, 메이지 선은 지린 성(吉林省) 메이허커우(梅河口)에서 지안까지 연결하는 선양(瀋陽) 철도국 산하의 중국철로이다. 이를 조선총독부에서 1939년 10월 1일에 만포압록강 교량을 완성하여 중국선과 조선선을 연결시킴으로 평양에서 지린까지 연결하는 간선을 만들었다. 이날 바람은 차고 가랑비는 한기가 들 판이었다. 제42군의 군단장 우루이린(吳瑞林)과 정치위원 저우뱌오(周彪)는 짐을 지고 총을 메고 냇물처럼 끊임없이 이어지는 병사와 탄약 및 각종 포를 실은 노새와 말을 바라보며 행군을 독려하고 있었다.

  제38군은 제42군의 뒤를 바싹 따라서 도강하고 있었다. 강을 건너면서 병사들이 큰소리로 잡담을 하자 간부로부터 즉시 저지당하였다. 왜 잡담을 해서는 안 되는가 질문을 하자 간부는, “하늘에 날고 있는 미국 비행기에서 들릴 수 있다.”고 했다. 그러자 병사들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발걸음마저 가볍게 옮기며 강을 건넜다.

  제39군은 창뎬 하구(長甸河口)에서 도강하고 일부는 안둥에서도 출발하였다. 너무나 조용히 다리를 건너며, 겨우 이 다리가 얼마나 긴지 지금이 몇 시인지 정도나 물으며 다음에 자기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잘 알고 있는 병사들을, 제39군 군단장 우신추안(吳信泉)은 의미심장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마오안잉은 창뎬 하구에서 10월 24일 덩화가 이끄는 사령부를 따라 도강하고 있었다. 창뎬 하구는 압록강 철교의 북쪽 창뎬 진(長甸鎭)의 관뎬(寬甸)에 있는데 상하구촌(上河口村), 하구촌, 하하구촌이 있었다. 인민 지원군은 상하구촌의 철교와 하구촌의 인도교를 이용하여 도강하고, 다리 상류에 가교를 가설하고 다리 하류에는 목선으로 부교를 만들어 동시에 도강하고 있었다. 여기서 다리를 건너면 조선의 청성군과 이어지며 중국인민지원군 총부의 대유동(大楡洞)과 가장 가까운 거리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 뒤로 이 다리를 폭파하기 위하여 미군의 대대적인 폭격이 이어졌다. 한중 국경을 잇는 다리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나 치열한 폭파작전이 벌어지지 않는 곳이 없었지만 이곳도 미군의 끈질긴 폭격이 이어진 것이다. 11월 9일은 미 공군 F-47 전투기 24대가 내습하여 폭탄 70여발을 투하하여 그 중 5발이 명중되었다. 그 뒤로 연속 6일 동안 매 번 20여대의 폭격기의 폭격이 이어졌다. 다시 수리하여 도강작전을 벌렸으나 51년 봄에 다시 폭격을 개시하여 3월 30일 정오에는 전투기 대여섯 대의 폭격으로 철교에 4발이 명중되고 인도교에 3발이 명중되었다. 창뎬 하구는 마오안잉이 이곳을 통하여 도강하여 한 달 후(11월 25일)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뒤에 이곳에 마오안잉 학교를 세워 기념하고 있다.

  제40군은 안둥을 통하여 도강하고 일부가 창뎬 하구에서 도강하였다.

  제1진 4군의 각 사단병력은 번득이는 지력을 가진 린뱌오가 책임지고 안배하였다. 제38군의 제112, 113, 114사단 병력은 펑청(風城) 지구에서 선발하였고, 제39군의 제115, 116, 117사단 병력은 랴오양(遼陽) 지구에서 선발하였다. 제40군 118, 112사단 병력은 안둥 지역에서 선발하고, 제42군의 제124, 125, 126사단 병력은 퉁화(通化) 지구에서 선발하고, 그리고 기타부대에서 선발하여 포진하였다. 린뱌오는 일단 신분성향에서 국부군(장제스 군) 출신중 위험분자는 무조건 인민지원군 안에 편입시켰다. 그 신분성향 분석표는 각 군과 사단의 정치위원에게만 1급 비밀로 전달하고 사단내의 위치 안배는 정치위원이 책임을 맡게 했다. 정치위원은 중대장급 이상에서 일체 국부군 출신을 배제하였다. 전체 중국인민지원군 정치위원은 펑더화이가 겸하고 있기 때문에 각 군, 각 사단의 정치위원은 지위배정을 평더화이에게 결재를 맡아야 했다. 제42군 정치위원 저우뱌오가 린뱌오를 만났을 때 직격탄으로 질문을 던졌다.

  “린 총, 이제 시간이 없습니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지시가 필요합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설에 방해가 될 국부군 출신을 이번 항미원조전에서 소비하자는 취지는 잘 알고 있는데 일선에 있는 저희들이 어떻게 안배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나는 한 사단내의 병력 중 3분의 2 이상을 국부군 출신으로 채울 작정이오. 3분의 1의 인민해방군은 국부군 출신을 감독할 병력이고 3분의 2의 병력은 소비할 병력이오. 우리는 항미원조(抗美援朝)도 목표이지만 거기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국부군 불만세력을 제거하는 것이오.”

  “알겠습니다. 그대로 시행하겠습니다.”

  저우뱌오와 린뱌오는 서로 얼굴을 보며 무엇인가를 다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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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조선의용군의 입북 1 2017 / 12 / 15 319 0 11453   
6 절치부심 3 2017 / 12 / 15 307 0 6930   
5 절치부심 2 2017 / 12 / 15 316 0 9057   
4 절치부심 1 2017 / 12 / 15 317 0 6909   
3 이년당 희의 3 2017 / 12 / 15 314 0 10371   
2 이년당 회의 2 2017 / 12 / 15 322 0 4669   
1 이년당 회의 1 2017 / 12 / 15 515 0 9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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