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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펑더화이의 6.25
작가 : 주암
작품등록일 : 2017.12.15

펑더화이는 중국인민지원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온 총사령관이다. 펑더화이의 입장에서 보는 한국전쟁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중국은 5차전역에 걸쳐 미군과 한국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고 마지막으로 금성전투에서 엄청난 공격을 가하여 정전협정장으로 끌어낸다. 전선은 지루하고 소모적인 마지막 고지쟁탈전이 벌어지는데, 이런 과정에서 벌어진 삼감령전투는 중국군에 있어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이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서 흘러나온 첫 곡이 상감령전투의 주제곡이었다. 중국은 미제와 국경을 접하고 싶니 않아 이북이란 완충지대가 필요했고, 미국은 중공을 견제하기 위하여 남한이란 완충지대가 필요했다.

 
6.25 술래잡기 3
작성일 : 17-12-15 17:30     조회 : 299     추천 : 0     분량 : 7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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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그런데 정국은이 사유리와 헤어져 귀국하고, 이어서 다시 일본으로 들어올 때까지 정국은의 뇌리에서 하루도 떠나지 않았던 그림자가 바로 사유리였다. 사유리만 생각하면 모든 근심걱정이 사라졌고 삶의 의욕이 솟구쳤고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정국은은 동경에 도착한 첫날에 사유리에게 연락하였다. 기겁을 하고 놀란 사유리는 “이게 꿈이 아니지요?”하는 외마디를 지르고 모든 것 다 팽개치고 뛰어나왔다. 사유리도 실은 일본인과는 다른 사나이풍의 한국청년을 무척 동경하고 있었다. 두 남녀는 자연스럽게 그날 저녁 료캉에서 하룻밤을 지새웠다. 열정의 몸부림이 끝나고 다음 게임을 위하여 잠깐 휴식을 취하는 사이에 사유리는 오짜를 따랐다. 그리고 정국은이 한국을 나가고 없을 때 있었던 이야기를 마치 보고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의무라도 있는 듯 모두 털어놓았다.

  자기의 책임부서는 자기가 영어를 할 줄 안다는 이유로 미군 전담이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미군 중에서도 맥아더 쪽이 아니고 윌로비(Charles A. Willoughby) 소장 쪽이라고 했다. 일본에는 맥아더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연합군 최고사령부(GHQ. 연합국군 최고사령관총사령부〔SCAP〕라고도 함)라는 곳이 있고, 가장 예민한 작전이나 군사기밀을 다루는 극동사령부(FEC. Far East Command) 제2부장 찰스 A. 윌로비 정보관(G2)이 있었다. 극동사령부 G2는 물론 GHQ의 산하기관이지만 거의 독립기관처럼 발언권이 셌고, 맥아더는 윌로비가 제공하는 정보에 의하여 모든 작전계획을 짜야했다. 윌로비는 본국의 미 통합참모부(JCS. Joint Chiefs of Staff)와 마셜 국방장관의 지시를 직접 받고 있었다. KLO(주한연락사무소)도 동경의 극동군 사령부 정보참모부(G2) 휘하의 제441 CIC 파견대의 지시를 따르고 있었다.

  맥아더와 윌로비의 관계를 알려면 먼저 맥아더와 트루먼의 관계를 이해해야 한다. 맥아더와 투르만은 묘한 정적관계에 있었다. 맥아더는 웨스트포인트 제1기 수석졸업자로서 졸업성적 평균 98.14점을 받은 군 최고의 명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1, 2차 세계대전에 모두 참가하여 미국 최연소 사단장을 역임하였다. 1차 대전 때 맥아더가 육군 소장일 때 트루먼은 자기 휘하의 일개 포병대위에 지나지 않았다. 맥아더는 1937년에 퇴임하였으나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39년에 참전을 자원하였으며, 41년 현역복귀와 동시에 극동군최고사령관에 부임하였고, 45년 일본군을 격파하고 필리핀에 상륙하였으며, 동년 9월 2일에는 일왕의 항복을 받아냈고, 50년 한국전쟁에서는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함으로 ‘전쟁의 신’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거기에 비하여 트루먼은 웨스트포인트 진학이 오랜 꿈이었으나 시력이 나빠서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차 세계대전 때 시력검사표를 전부 외워 겨우 포병장교로 입대하였다. 정치적으로도 민주당 소속인 트루먼으로서는 공화당인 맥아더와는 노선이 달랐다. 더구나 맥아더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1944년과 1948년의 두 차례나 공화당 대통령후보경선에 도전한 적이 있다.

  맥아더와 트루먼의 기싸움은 웨이크 섬 회담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50년 10월 15일 태평양 상의 웨이크 섬에서 역사적인 회담이 이루어진 것은 한국전에서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을 토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트루먼은 워싱턴으로 들어오는 정보들을 접하고 중공군이 참전할 것을 알고 있었다. 10월 2일 중국의 저우언라이 총리는 밤중에 북경주재 인도대사 파니카르를 불러 “미국이 38선을 넘으면 중국이 가만있을 수 없다.”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맥아더는 너무나 자신에 차 있었다. 중국의 참전여부를 묻는 트루먼에게 “중공군의 개입은 없을 것이오.”하고 거드름을 피웠다. 맥아더는, 그들이 혹시 한두 달 전에 개입했더라면 유효할 수 있었는데 이제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했다. 중공은 만주에 약 30만 병력을 보유하고 있고 그 중 10만 내지 12만 5천명이 압록강 연안에 배치되어 있는데 혹시 압록강을 도강한다면 그 중에서 5-6만 명 정도일 것이라고 했다. 맥아더는 이어 설명했다. 공군력이 없는 그들이 평양 쪽으로 내려온다면 역사상 유례없는 대살륙전이 벌어질 것이라고.

  트루먼은 호놀룰루에서 웨이크 섬(워싱턴보다 맥아더가 주둔한 동경에 가까움)으로 가기 위하여 10월 15일 새벽 6시 30분에 출발하면서부터 빈정이 상해 있었다. 감히 야전군 사령관이 미합중국 대통령을 부하 부리듯이 태평양 한 가운데로 오라고 하다니, 우환 중에 웨이크 섬에서의 그의 태도는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겨우 30분 전에 비행장에 나와서 기다리던 맥아더는 트루먼에게 전혀 상관대접을 하지 않았고, 보는 사람은 차라리 맥아더가 우위로 보일 정도였다. 트루먼은 정장을 하였는데 맥아더는 작업복 차림에 윗옷의 단추는 풀어져 있었다. 낡은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대통령인 트루먼에게 경례도 붙이지 않았으며 같이 동석한 육군장관 프랭크 페이스에게도 경례를 하지 않았다. 그는 뚜벅뚜벅 걸어가 그의 특유의 오만한 태도로 트루먼의 오른 팔을 흔들고 악수하였을 뿐이었다. 트루먼은 순간 화가 났으나 한편 생각하면 오히려 잘 됐다 싶었다. 맥아더가 이처럼 오판을 하고 있음으로서 한국전을 오래 끌 수 있으며 사 불리하면 잘라버리고 다른 사람을 임명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 때는 벌써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여 맥아더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때였다. 작전명 크로마이트(Chromite)라는 인천상륙작전은 해군의 일부 인사들이 성공률 5,000분의 1이라고 주장하며 격렬히 반대했던 작전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준비기간이 1년이나 된데 비하여 인천상륙작전은 단 한 달간의 구상으로 실행하여야 했다. 그러나 맥아더의 머릿속에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한 패튼 장군의 모습만 자기와 겹쳐 보이고 있었다. 트루먼은 미 해군 인사들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성공률 5,000분의 1이라니? 그것은 강군이 지키고 있을 때 이야기이고, 지금은 중공군도 아직 참전하지 않은 약한 이북을 상대로 세계에서 가장 강한 미국이 세계 16개국 군대를 이끌고 온 마당에, 차라리 성공률 100%라고 해야 옳은 말이었다.

  트루먼의 입장에서는 성공하였으니 망정이지 실패하였으면 고스란히 자기에게 책임이 전가될 것은 뻔한 일이었으니 생각하면 할수록 괘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략적으로도 갑자기 한반도의 허리를 잘라버렸기 때문에 부산까지 내려온 인민군은 퇴로가 막힘으로써 남반부는 동족상잔의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맥아더는 한국국민이 어떻게 되는 것쯤은 아예 고려의 대상도 아니었다.

  맥아더는 속전속결을 바라고 장병들에게 크리스마스는 본국에 가서 보낼 것이라고 호언장담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갑작스런 중공군의 참전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다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그는 드디어 트루먼에 의하여 51년 4월 11일 해임되고 매슈 리지웨이(제8군사령관은 이미 50년 12월 25일 임명됨)로 후임 사령관이 교체되고 말았다. 한국전쟁을 다룬 『종이호랑이 꼬리』를 쓴 종군지가 오에치피 킹(O.H.P. King)이 동경 다이이치 빌딩의 전 맥아더 집무실에서 리지웨이와 인터뷰하였다.

  “장군! 승리의 소임을 부여받은 군인으로서 목표가 결코 승리가 아닌 제한전쟁 수행을 강요받고 있는데, 거기에 대하여 일말의 후회를 느끼지 않습니까?”

  “나는 미 국방부의 지시에 따라 행동할 뿐입니다.”

  “저도 그 점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장군이 본부의 속박 대신에 전투의 승리를 위한 명령, 병력, 군수물자를 절실하게 바라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보도를 위해서가 아니라 은밀하게 장군의 속마음이 어떤지 알고 싶어서 하는 질문입니다.”

  “나는 미 국방부의 명령에 의문을 갖지 않습니다.”

  맥아더처럼 날뛰다가 잘리는 불행한 군인이 되지 않고 자기는 트루먼 대통령과 미 국방부의 방침(=윌로비의 지시)대로 제한전쟁을 하기 위한 지연작전의 소모전을 충실히 이행하겠다는 간접 표명이었다.

 

  건강한 두 남녀의 정국은과 사유리는 료캉에서 그날 밤 여덟 번의 운우지정을 나누었다. 다음날은 느지막하게 일어나서 요요기 공원을 산책하고 요요기의 젊음의 거리에서 이것저것 주전부리로 점심을 때웠다. 오후에는 신주쿠로 돌아와 교엔(御苑)에서 데이트하였다. 교엔에서는 그 드넓은 숲과 망망한 잔디밭을 보며 서로는 사랑이 영원하기를 바랐다. 두 청춘남녀는 양지바른 잔디밭에 벌렁 드러누워 흰 구름 흘러가는 파란 하늘을 쳐다보았다. 옆에 다른 청춘남녀들도 짙은 사랑 표시를 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정국은은 사유리의 손을 잡고 있다가 슬그머니 사유리의 배 위로 올라갔다. 사유리는 행복하게 받아들였고 주위의 다른 청춘들도 모르는 척 눈감아 주었다. 그날 저녁도 같은 료캉에서 투숙하였다. 둘째 날은 네 번의 운우지정을 나누었다. 아침에 눈을 뜬 것은 11시가 다 돼서 료캉의 오바상이 “오캭 상(손님), 오캭 상! 식사 준비할까요?”하고 부르는 바람에 겨우 부스스 눈을 떴다. 둘이는 유카타(浴衣)만 입고 오바상이 날라다 준 정성어린 식사를 하면서 정국은은 사유리에게 농을 하고 싶어졌다.

  “사유리! 우리 몇 번인 줄 알아?”

  “뭐가요?”

  “열두 번이야. 첫 날 여덟 번, 둘째 날 네 번, 합이 열두 번.”

  “어머! 그걸 다 세고 있었어요?”

  사유리는 얼굴을 붉히며 젓가락 든 손으로 때리는 흉내를 한다. 둘이는 마냥 행복하기만 하였다.

  정국은은 《연합신문》 주일 특파원이라는 신분인데다가 미모의 젊은 여기자 사유리가, 가는 곳 마다 동행해 줌으로서 일본에서 무소불위의 행동을 할 수 있었다. 주일 미군의 동태며 일본 고위층의 동태까지 모두 알 수 있는 한국의 최전선 기자가 되고 말았다. 사유리는 특히 캐논 기관의 캐논(Jack Y. Canon) 육군 소령과 G2 부장 윌로비 소장과는 막역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G2 산하의 캐논 소령은 은근히 사유리를 사모하고 있는 사이였고, 윌로비 소장 역시 사유리를 반은 이성으로 반은 우정으로 대하는 사이였다. 사유리가 정국은을 대동하고 혼고(本鄕)의 구 이와사키 별택에 본부를 둔 캐논 기관을 방문했을 때 미군첩보원들은 모두 자기들과 물이 다른 동양의 선남선녀의 모습에 취해 있었다. 캐논의 안내를 받으며 케논 사무실로 들어가는 남녀를 본 미군들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가벼운 탄성을 발하기도 하였다. 소파에 앉자마자 부관이 차를 따르고 다른 부관은 오카시(과자류)를 가져오고 야단이 났다. 병사들은 캐논의 눈치를 보며 흥미진진한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눈치였다. 그들은 모두 캐논이 사유리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국은과 사유리의 거동을 보건데 연인관계가 분명한데 과연 캐논이 어떻게 나올까? 그러나 캐논은 결단이 빨랐다. 보자 하니 둘은 벌써 깊은 관계로 맺어진 것이 분명한데 여기서 헛수작 해보았자 자기만 꿩 떨어진 매가 되기 때문에 흔쾌히 웃으며 두 사람의 관계를 인정하였다.

  캐논기관(Canon Unit)은 당시 미군정 측의 공식명칭이 아니고 후에 일본의 매스컴이 붙인 이름이다. 캐논기관, 제트기관(Z機關), 혼고기관이라고도 불렀는데 그들이 제공하는 정보의 량은 엄청났다. 캐논 소령은 태평양전쟁 종전 후에 미군정의 정보를 총괄하는 G2의 정보장교로 참가하는데, 캐논의 유능함을 인정하여 윌로비가 점령정책을 실시하는데 필요한 정보수집을 위해 49년에 은밀하게 케논을 수장으로 하는 하나의 조직을 만든 것이다. 캐논기관은 일본인 공작원 조직인 시목판기관(柿の木坂機關. 가키노 기자카 기칸), 시판기관(矢板機關. 야이타 기칸), 일고기관(日高機關. 히다카 기칸) 등을 산하에 거느리고 있었다.

  캐논은 어딘가로 한참 전화를 하고 자리로 돌아오더니 갑자기 윌로비 소장을 만나러 가자고 하였다. 자기는 지프차의 조수석에 앉고 정국은과 사유리를 뒷좌석에 앉으라 하였다. 다이이치 빌딩에 이르자 부관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경례를 붙이고 안내한다. 윌로비의 사무실로 들어서자,

  “어서 와요 사유리.”

 하며 오직 사유리에게만 인사하고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한 참 후에야 캐논의 경례를 받고 그 뒤에 정국은을 의식하는 것 같았다.

  “이 분이 한국에서 온 정국은이란 사람입니까?”

  윌로비가 소개를 하자, 사유리가 이어서 보충설명을 한다.

  “네, 이 분은 한국에서 온 연합신문 주일특파원입니다. 저희 아사히신문에서 협력관계에 있는 사이입니다. 참으로 유능한 한국인으로서 장군께서 이 분과 일을 하시면 미국에 큰 보탬이 될 것입니다.”

  “이거 원, 질투심이 나서 들을 수 있나. 사유리 상에게서 이런 정도의 인정을 받았다면 틀림없는 사람인데 둘은 도대체 어떤 관계입니까?”

  “네, 저와는 결혼을 약속한 사이입니다.”

  사유리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정국은의 사전 허락도 받지 않고 결혼을 약속한 사이라고 하자 정국은은 깜짝 놀랐고 윌로비나 캐논도 눈이 휘둥그레 졌다.

  네 사람이 오랜만에 한가로운 이야기들을 하다가 윌로비는 정국은을 보고,

  “정국은 씨에게는 내가 단둘이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 방으로 잠깐 가실까요?”

  “좋습니다. 장군께서 저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니 영광입니다.”

  정국은이 응접실에서 윌로비의 개인 집무실로 따라 들어와 의자에 앉자 대뜸 이런 말을 하였다.

  “지금 저희 극동군 사령부 G2에서는 한국정부나 한국군 관계자와 극비의 연락을 취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당신이 그 일을 맡아 주실 수 있습니까?”

  “좋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습니다.”

  “아까 말을 들으니 한국에서도 언론기관에 몸담고 있어서 특히 군기관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오신 것 같은데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아마 군고위층들과 저처럼 많은 인맥을 맺고 있는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좋습니다. 그럼 내가 하나 제안을 하겠습니다. 먼저 미 극동사령부 G2 휘하의 동경 제441 CIC파견대원이 되어줄 수 있습니까?”

  “좋습니다. 그렇게 되면 저야 활동하기에 편리해서 좋지요.”

  “동경 제441 CIC파견대는 한국의 KLO부대를 관장하고 있습니다. 정국은 씨는 주로 채병덕 총참모장과 박헌영과의 긴밀한 연락을 취하는 일을 해주셔야 겠습니다. 봉급은 미군 봉급규정에 의하여 지급하되 위험수당, 특별수당 등이 더해지고 필요하다면 무진장의 보조가 가능합니다.”

  “좋습니다. 두 사람 다 저와는 아주 친한 사람들입니다. 박헌영은 제가 스승처럼 모시는 분이고 채병덕 장군은 저와는 술친구이기도 합니다. 무슨 임무라도 수행하겠습니다. 그런데 노파심에서 말씀드리는데 박헌영과 채병덕은 적대관계에 있는 것쯤 물론 알고 계시겠지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 선생님 같은 분이 필요합니다. 그럼 내일 저녁에 나와 사유리 짱과 우리 세 사람만 같이 식사를 합시다. 단 재정지원 담당 부관과 CIC 행동요령을 설명할 정보참모가 같이 참석하여 자세한 설명을 드릴 것입니다. 사유리 짱은 정국은 씨의 약혼녀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어와 일본어가 능숙하기 때문에 정확한 의사전달을 위해서 꼭 참석이 필요합니다. 식사 후 뒤풀이는 캐논 소령과 몇몇 부관들도 동참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한국의 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은 곧 퇴역하고 라이트 대령에게 직무대리를 맡길 것이오.”

  “좋습니다. 알았습니다.”

  “그리고 사유리 상과 정국은 씨가 살 집은 우리 극동군 사령부의 안가를 사용하세요. 내일 우리가 식사할 곳도 안가이지만 뎅엔죠후(田園調布)에 우리 사령부의 안가가 몇 채 있으니 사용하도록 하세요. 그러고 보니 내가 두 사람의 신방을 차려주는 꼴이 되고 말았군. 하하하….”

  “하하하하.”

  정국은도 쟁쟁한 실력자로부터 허심탄회한 말을 듣고 같이 기분 좋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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