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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펑더화이의 6.25
작가 : 주암
작품등록일 : 2017.12.15

펑더화이는 중국인민지원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온 총사령관이다. 펑더화이의 입장에서 보는 한국전쟁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중국은 5차전역에 걸쳐 미군과 한국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고 마지막으로 금성전투에서 엄청난 공격을 가하여 정전협정장으로 끌어낸다. 전선은 지루하고 소모적인 마지막 고지쟁탈전이 벌어지는데, 이런 과정에서 벌어진 삼감령전투는 중국군에 있어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이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서 흘러나온 첫 곡이 상감령전투의 주제곡이었다. 중국은 미제와 국경을 접하고 싶니 않아 이북이란 완충지대가 필요했고, 미국은 중공을 견제하기 위하여 남한이란 완충지대가 필요했다.

 
6.25 술래잡기 2
작성일 : 17-12-15 17:23     조회 : 305     추천 : 0     분량 : 6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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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앞의 얘기로 돌아와서, 6월 24일 저녁에는 육군 장교구락부 개관 축하파티를 열어 채병덕 총참모장 이하 군수뇌부와 전국 주요 지휘관과 미 고문단 요원들까지 밤늦은 줄 모르게 술을 마셨다. 몇 달째 지속되던 경계령이 해제된 데다가 주말 밤이기도 해서 육군본부의 국장, 과장, 실장을 위시하여 군 수뇌부와 일선 지휘관을 포함해서 50여명의 고급장교들이 참가하였고, 재경 미 군사고문단 장교들도 여러 명이 참석하였다. 그날 파티는 2차로 국일관에 가서 새벽 2시까지 음주가 계속되었는데 술값은 연합신문 주필 정국은(鄭國殷. 1919년생)이 냈다. 그 날 새벽 북한군이 38선을 넘어서 밀고 내려오고 있을 때 대부분이 곯아떨어져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정국은은 휴전협정 직후 간첩혐의로 체포되어 여섯 달 만인 1954년 2월에 사형을 당했다는데, 실은 여기에 엄청난 미스터리가 있는 것이었다.

  한국전쟁의 가장 큰 미스터리 중의 하나가 간첩 정국은 사건이다. 그는 1953년 12월 5일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았고, 54년 2월 19일 사형이 집행되었다고 했다. 사형 집행이 이렇게 지연된 것은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한국사법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국방장관보다 더 윗선의 힘이 작용하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도 정국은을 사형에 처한 장면을 본 사람도 없고 시체를 확인한 사람도 없다.

  54년 1월 23일 2시에 홍제원 화장터 근처에서 일반 공개리에 총살형에 처하기로 한 정국은을 보기 위하여, 홍제원 화장터에는 찬바람이 몰아치는 매서운 추위에도 불구하고 아침부터 인파가 몰리기 시작하여 정오 무렵이 되자 수천 명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에서 올라온 언론사의 기자들은 정국은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으나 그 본인도 그의 시체도 구경할 수가 없었다.

  조선조 때 마을 이름이 홍제원이었을 때는 마을 곁을 흐르는 홍제천이 맑아서 토종 물고기들이 많았다. 몸이 더렵혀진 여인들은 이곳에서 목욕을 하면 그 욕이 씻어진다는 말이 있어 불원천리하고 찾아들곤 하던 곳이다. 그러나 사형장이 생기고 화장터가 생기면서 시신이 나가는 길목엔 죽은 자의 명복을 비는 무당의 집이 즐비했다.

  홍제원에 모인 사람들은 술렁이기 시작하였는데 오후 2시가 넘자 손원일 국방장관의 보도관제가 내려졌다. 이른바 오프 더 레코드(Off The Record. 비공개)였던 것이다. 언론사 기자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비공개라는 보도관제라면 사형집행을 함구하라는 의미일 터인데 정작 정국은의 사형조차 확인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자들은 하나라도 알기 위하여 집행장소가 변경되었는지 집행연기가 되었는지 국방부에 질문하였으나 보도관제를 내린 국방부가 일체 함구해버리고 만 것이다. 그리고는 2월에 일부 언론사들이 ‘국제스파이 사건 주범 정국은 사형집행’이라는 헤드라인을 내보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백두진 국무총리와 출입기자 사이에 열린 간담회에서 정국은에 대하여 기자들이 질문을 하였으나 “변동사항을 보고 받은바 없다.”고 하는 아리송한 답변만 하였다. 기자들이 “그러면 집행은 이미 공개리에 끝난 것인가?”고 묻자, “오늘 아침 신문에 부인이 옷 보따리를 가지고 형무소에 면회하러 갔다고 나있는 것을 보았다. 자세한 것은 국방부 소관이기 때문에 그 이상 모르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기자들은 어이가 없었다. 자기들이 쓴 부정확한 기사를 국무총리라는 사람이 그대로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기자들은 이번에는 국방부장관에게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군사재판의 결정권자가 국방장관인 것은 물론이고 국무총리마저 국방장관 소관이라고 한 바에야 그는 피해갈 길이 없었다. 그런데 손원일 국방장관의 답변은 더 알다가도 모를 선문답이었다. “정국은은 있던 그 자리에 있다.”라고만 하였다. 그 자리가 형무소인지 공동묘지 인지도 해명하지 않고 그 이상은 침묵해 버리고 만 것이다.

  그런데 그 후 경남 의령(宜寧)에서 민의원에 입후보한 무소속의 전성환(田成煥. 전 해군대령. 당시 변호사)은 의령군 낙서면에서 정견발표를 하면서 “10년 전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정국은은 현재 미국 뉴욕에서 미국정부의 일을 보고 있으며, 더욱 정씨는 그의 이름을 정국환(鄭國煥)으로 개명하고 얼굴도 정형수술을 해서 옛 모습이 아니다.”고 폭로하였다. 전성환은 자신의 발언 근거를 ‘정국은이 그의 부인에게 보내온 최근의 서신 내용’에 둔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정국은의 부인으로부터 정국은 사건의 재심요청 의뢰를 받았으며 재심의 법정대리인으로 위임받았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5대 국회위원에 당선되면 정씨의 사형집행여부를 밝히는 것은 몰론, 집행이 되었다면 정씨로 가장되어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의 신분도 밝혀내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전성환은 5대 국회위원에 낙선되었고 정국은 부인의 재심요청도 기각되고 말았다.

  정국은을 말하기 전에 먼저 채병덕을 말할 필요가 있다. 이들 둘은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채병덕은 평양공립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49기)하며 일본군 소위로 임관되었던 자이다. 그 뒤로 일본군 포공학교를 졸업하여 무기생산 분야에 종사 했고, 45년 일본 패전 때는 소령의 신분으로 부평조병창(富平造兵廠)의 제1공장장을 맡고 있었다. 46년 국방경비대가 창설되자 기간요원으로 특채되어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게 되고 대위로 임관되었으며, 이어서 국방경비대의 제1연대장, 제1보급부대장, 병기부대 사령관, 후방부대 사령관, 제4여단장 등을 역임했었다. 48년 8월에는 미군정 통위부(현 국방부) 총참모장이 되고 12월에는 육군 준장으로 승진했다. 49년 2월에 육군 소장으로 승진했고, 동 1월부터 10월까지 육군참모총장직을 맡는다. 그러던 중 남북교역사건으로 선배인 김석원 장군과 충돌하여 같이 예편되었다. 그러나 동 12월에 현역에 복귀하여 국방부 병기행정본부장에 임용되었고, 50년 4월 21일에 육군참모총장에 재임용되었다. 6.25사변이 일어나 연전연패하고 인민군이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게 되고 다시 패전을 거듭하자 육군참모총장은 정일권으로 교체된다.

  정국은은, 일제 강점기의 친일파로서 일본 아사히신문 서울지국의 기자를 하였고, 8.15해방 이후에 남로당에 가입하여 기간지 《국제신문》의 편집국장으로 공산주의 선전에 앞장섰다. 49년에 반민특위에 의해 경기도 경찰의 끄나풀로 일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나온 바 있다. 정국은은 박흥식 등 거물급 친일파와 함께 반민특위 활동 초기에 검거되었는데 당시 나이는 32세였다. 병보석으로 석방되어서는 《국방신문》을 경영하며 군사기밀을 탐지하여 공산당에 정보를 제공하였다. 그 후 수사기관에서 조사가 시작되자 《연합신문》 주일특파원이 되어 동경으로 도피하였고 조총련계의 비호를 받으며 비밀리에 활동을 계속하였다. 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국제연합군 기자구락부에 소속되어 종군기자로 참전하여 군사정보 수집을 계속하다가 그 정체가 드러나자 국제연합군 사령부로부터 추방명령을 받았다. 국제연합군 사령부는 한국 전쟁에 참전하는 모든 자유진영의 군대를 통솔하기 위해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라 50년 7월 24일 동경에 설립된 총본부이다.

  정국은은 일제 강점기에 아사히신문 서울지국 기자로 일할 때 아사히신문 본사에 들른 적이 있다. 그 때 아사히신문의 미모의 여기자 사유리(小白合) 짱을 알게 된다. 그녀는 일본여성 특유의 새소리 같은 교성(嬌聲)과 애교는 그대로 지니고 있으면서도 미모가 훤칠한 비교적 활달한 현대여성이었다. 짙은 눈썹에 앵두처럼 조그마한 입술을 가진 동그스름한 얼굴의 전형적인 일본 미녀형을 겸비한 여인이었다. 듣기로는 자기 아버지가 해군제독의 부관이었는데 패전 소식을 듣고 할복자살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애교 넘치는 일본여성이면서도 눈에서 가끔씩 번득이는 섬광이 스쳐가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본사 안에서는 잠깐 소개받고 몇 마디 말을 하며 무척 호감이 가는 여성이구나 정도로 느끼고 지나쳤던 사람이다. 동경외국어대학 영미어과를 갓 졸업했다는 그녀는 일본인 지식인들이 모두 그렇듯이 미국에 대하여 아주 관심이 많았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그녀를 긴자 번화가에서 우연히 단둘이 만나게 되었다.

  “아라! 한국에서 온 정국은 상이지요?”

  “네, 사유리 짱. 웬일이세요. 밖에서 뵈니 반갑네요.”

  “혼자이십니까?”

  “네, 혼자 거리구경을 하고 있어요. 한국에 가져갈 오미야게(御土産)라도 있나 해서 이것저것 보고 있습니다.”

  “저도 오늘은 별로 바쁘지 않는데 제가 안내해 드릴까요?”

  “영광이지요. 일본이 이렇게 엄청난 나라인지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 뒤에 새로 생긴 깃사탱(喫茶店)이 있는데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번화가에서 한 블록 안으로 들어가니 식당가가 즐비한데 여러 가지 놀이문화가 섞여 있어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광경들이었다. 경성에서는 본정통 1정목(충무로)에서 모던한 멋쟁이들이 드나드는 모습을 보았지만 긴자의 거리는 그보다 열배는 더 찬란했다. 깃사탱이라는 찻집에서 처음으로 고히(커피)를 마셔보았다.

  “아라! 정 상은 고히를 처음 마셔보십니까? 호호호호….”

  “네, 처음 마셔봅니다.”

  정국은은 멋쩍어서 손가락으로 머리를 긁었다. 사유리는 미쓰코시 백화점을 위시하여 여기저기 번화가를 안내했고 저녁에는 미도리야 스시집에서 같이 식사를 했다. 미도리야는 기모노를 입은 40대 중반의 아주머니 두 명이 서빙을 하는데 두 사람 다 무척 교양 있고 예의 발랐다. 사유리와는 아는 사이인지 서로 반갑게 인사하였고 오짜(御茶)를 따르는 모습도 각별히 공손했다. 사유리는 다다미방에 꿇어앉아 맞은편에 앉은 정국은의 식사를 돕기도 했는데, 정국은은 레몬을 짜려는 사유리에게 “제가 하겠습니다.”하며 사양하려던 손길이 그만 사유리의 손을 가볍게 잡고 말았다. 활달한 사유리였지만 남성의 손이 얹히자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둘이는 어느덧 상당히 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한국으로 돌아올 때는 용기를 내어 포옹하고 키스를 했으나 사유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사양하지 않고 몸을 맡겼다. 시간만 더 있었으면 더 깊은 단계로 진전할 수 있었을 텐데 시간이 없었던 것이 한스러웠다.

  해방정국에서 어느 날 박헌영이 정국은이에게 좀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정 선생의 이름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정 선생 같은 엘리트가 국가를 위하여 일을 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저도 어떤 방법으로 국가에 봉사할까 모색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조선공산당에 입당해 주세요. 우리민족이 나아가야 할 길은 사회주의 국가건설밖에 없습니다.”

  “좋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저는 지금까지 민족에 반하는 친일을 해왔습니다. 우리가 독립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지요.”

  “알고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 독립이 불가능했던 것도 사실이지요. 그러니 더 멸사봉공하여 속죄하는 마음으로 국가를 위하여 일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지금까지 저만이 가지고 있던 모든 유력한 비밀 수단들을 국가를 위하여 다 쏟겠습니다.”

  정국은은 흔쾌히 응낙하였다.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면서 박헌영은 정국은이 북한의 문화선전성 부부장이 되었다고 임명장을 가져왔다. 그런데 부부장이란 것이 어떤 직책인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인민무력부처럼 장이 부장(部長)이라면 부부장의 직책이 있을 법도 하다. 그러나 문화선전성인 경우는 장이 문화선전상이기 때문에 차관에 해당하는 직제가 부상(副相)이다. 북한의 초대 문화선전상은 연안파 허정숙이었고 부상은 소련파 기석복이었다. 즉 정국은의 문화선전성 부부장이라는 직책은 명예직이었던 것이다.

  정국은은 처음에는 남로당 기관지 ≪국제신문≫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남조선노동당의 정치노선을 선전하다가 ‘국제통신사’를 만들어 더욱 활동무대를 넓힌다. 국제통신사는 대중의 인기를 모으는 가운데 주로 소련의 ≪타스통신≫을 수신하여 연재하였다. 이 때문에 당국으로부터 폐간을 당하고 정국은은 반민밀정 혐의로 반민특위에 체포당하였으나 가까스로 병보석으로 풀려났던 것이다. 그 뒤 그는 다시 언론계 활동을 재개하여 군수뇌부들과 접촉하였고 육군본부의 기관지 ≪철군(鐵軍)≫의 판권을 인수하여 이름을 ≪국방신문≫이라 고쳐 발간하였다. 정국은은 신문의 위력을 이용하여 군고위층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채병덕과도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언론의 효력을 안 채병덕은 오히려 정국은을 이용하여 자기의 출세기반을 삼고자 하였다. 정국은은 군고위층과의 관계와 국방신문을 통하여 미국의 군사원조를 상세히 알게 되었고 이를 낱낱이 박헌영에게 보고하였다. 그는 또 한편 ≪태양신문≫ 가두 판을 발행하여 남조선노동당의 정치노선에 유리하게 논설을 전개하였다. ≪국방신문≫과 ≪태양신문≫이 다시 폐간되고 남조선노동당 간부들이 당국에 의해 체포당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그는 수사망을 피하여 신속히 일본으로 피신한다.

  그런데 그가 일본으로 피신할 때의 신분은 ≪연합신문≫ 주일특파원이라는 합법적인 신분이었다. 그가 떳떳한 신분으로 도일할 수 있는 데는 채병덕의 개인적인 비호가 있었고 남로당당원들의 협조가 있었다. 남로당의 거물급 간첩인 김삼룡(金三龍)의 비서 김형륙(金炯六)은 정국은이 도일할 수 있게 모든 수속을 직접 대신하였다. 정국은이 일본에 도착하여서는 동경을 무대로 음악평론가 박용구와 함께 조선인연맹의 보호를 받으며 첩보활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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