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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펑더화이의 6.25
작가 : 주암
작품등록일 : 2017.12.15

펑더화이는 중국인민지원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온 총사령관이다. 펑더화이의 입장에서 보는 한국전쟁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중국은 5차전역에 걸쳐 미군과 한국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고 마지막으로 금성전투에서 엄청난 공격을 가하여 정전협정장으로 끌어낸다. 전선은 지루하고 소모적인 마지막 고지쟁탈전이 벌어지는데, 이런 과정에서 벌어진 삼감령전투는 중국군에 있어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이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서 흘러나온 첫 곡이 상감령전투의 주제곡이었다. 중국은 미제와 국경을 접하고 싶니 않아 이북이란 완충지대가 필요했고, 미국은 중공을 견제하기 위하여 남한이란 완충지대가 필요했다.

 
6.25 술래잡기 1
작성일 : 17-12-15 17:21     조회 : 313     추천 : 0     분량 : 9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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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6.25 술래잡기

 

 

  1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은 미국뿐만이 아니고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스탈린은 미국 때문에 힘을 쓰지 못하는 유럽에 영향력을 미치기 위해서는 미국의 관심을 유럽에서 아시아로 돌릴 필요가 있었다. 스탈린의 허락이나 묵인 없이는 6.25가 일어날 수 없었던 것은 상식이지만 6.25 이후에도 소련은 미국의 개입을 막을 기회는 있었다. 6월 27일 미국의 주도하에 열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남한에 대한 북한의 공격에 대하여 유엔 참전을 결의하여야 했는데, 그 때까지의 상식으로 보아 소련이 이를 승인할 리가 없었다. 당시 안전보장이사회는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다섯 나라(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중국)와 그렇지 않은 여섯 나라(인도. 유고슬라비아. 이집트. 노르웨이. 쿠바. 에콰도르)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 중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나라들에서 북한 편을 들어줄 수 있는 나라는 소련이 유일했다. 당시 중국대표는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아니고 대만 장제스의 국민당이었기 때문에 중국 역시 미국 편이었다.

  소련의 유엔대표 말리크(Y.A.Malik)가 크렘린 궁전에서 스탈린을 면회하고 있었다.

  “각하, 세계의 이목은 모두 소련이 이번에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우리는 미국의 시선이 유럽에서 아시아로 돌리기를 바라는 나라 아닙니까? 아주 잘 된 일이예요. 미국의 주도하에 한국전에 마음껏 참가하게 함으로써 도덕적으로 우리가 우위를 차지하고 미국의 시선도 아시아로 돌리게 할 수 있잖아요.”

  “그럼 거부권 행사를 하지 않아야 하는데 명목이 있습니까?”

  “있다마다요. 우리는 중국의 유엔대표권을 장제스에게서 빼앗아 마오쩌둥에게 주어야 한다며 모든 유엔 기구에서 대표들을 철수했지 않소. 이런 마당에 일부러 참석해서 이사회의 거부권을 행사할 필요가 없지요.”

  “알겠습니다. 유엔에서 참석을 종용해도 참석하지 않으면 되겠군요. 충분히 대의명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소련의 기권으로 말미암아 유엔군의 한국참전은 결정 났으며, 그 뒤 7월 7일에 있었던 유엔군 구성에 관한 회의에도 말리크는 참석하지 않았다. 유엔회원국의 무력원조를 미국정부의 주도아래 둔다는 내용의 공동결의안은 찬성 7표로 가결되었는데, 소련은 불참하였고 이집트, 유고슬라비아, 인도는 기권하였다.

 

  이북의 막강한 군사력과 철저한 전쟁준비에 비하여 이남은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미군은 49년 6월에 철수한 이래 단 500명의 군사고문단만 남겨두고 있었다. 한국군은 모두 9만 8,000명이 있었으나 그 중에서 4만 명이 후방의 좌익세력(공비) 토벌작전에 투입되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는 전방에는 5만 명의 병력이 있을 뿐이었다. 그 중 국군이 미군으로부터 지원 받는 군사원조는 6만 5천명 분의 분량이었다. 한국의 육군은 8개 사단 1개 독립연대로 편성되어 있었다. 38선의 전방 방어를 위하여 서쪽에서부터 17연대(웅진반도)-1사단(청단∽적성)-7사단(적성∽적목리)-6사단(적목리∽진흑동)-8사단(진흑동∽동해안)으로 포진되어 있었다. 후방에는 서울에 수도경비사령부가 있고, 대전에는 2사단, 대구에는 3사단, 광주에는 5사단을 배치하여 공비소탕 작전을 벌리고 있었다. 이들 부대를 통합 지휘하고 있는 것은 육군참모총장 채병덕 소장이었다.

  공군은 대공포화가 없는 지역정찰만 가능한 L-4 연락기와 L-5 연락기가 있었고, 6.25 직전에 국민성금으로 캐나다로부터 구입한 단발엔진 훈련기 T-6 텍산 10대가 있을 뿐이었다. 소총은 국군 경비대 시절에는 일본이 버리고 간 38식 소총과 그것을 개량한 아라사카(有坂) 99식 소총뿐이었다. 6.25전쟁 중에야 미군으로부터 보급된 M1소총과 카빈소총이 있었으나 북한의 AK47의 라이센스 판인 58식 소총이 자동인데 반하여 한국군은 겨우 반자동 소총이었다. 유일한 독립 기병연대의 장비는 2차 세계대전 당시에 정찰용으로 쓰인 37mm 대전차포를 탑재한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 1개 대대가 있을 뿐이었다. 대전차포로는 2.36인치 바주카포와 포병 병과의 57mm 대전차포가 있었으나 그 성능은 향상된 소련의 후기형 T-34전차를 상대할 수 없는 병기였다. 포병은 105mm 화포와 4.2인치 박격포가 있을 뿐이었고 그나마도 1개 사단에 1개 대대만 배치되어 있었고 포탄은 형편없이 부족했다. 예컨대 백선엽 장군이 지휘한 개성-문산-파주 축선을 방어하던 국군 제1보병 사단은 전투 하루 만에 포탄이 바닥나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한편, 북한의 인민군은 민족보위상(국방부장관에 해당)에 최용건 부수상을 임명하고, 작전사령부를 만들어 김책 대장(4성 장군)을 사령관에 임명하고 강건 중장(2성 장군)을 참모장에 임명했다. 또한 전선사령부 밑에 서부전선을 담당하는 1군단과 동부전선을 담당하는 2군단을 창설하였다. 1군단장에는 김웅 중장을, 2군단장에는 김광협 중장을 임명하였다. 인민군 1군단 밑에는 제6사단, 제1사단, 제3사단, 제105전차여단을 두었고, 2군단 휘하에는 서쪽에서부터 제2사단, 제12사단, 제5사단이 배속됐다. 또한 예비부대로 제13사단을 1군단에 배치하고, 제15사단을 2군단에 배치하였다. 제10사단은 총예비대로 북한 전체 방어를 위해 평양지역에 배치하였다. 인민군과는 별개로 내무성(내무부에 해당)에 북한 주민의 월남을 막는 부대로 제38경비대(전투경찰대와 유사) 3개 여단을 편성하였다. 그 중 제3경비여단은 국군 제17연대가 포진한 옹진반도 바로 북쪽에 포진하고 있었다. 북한은 벌써 한국군이 1대도 없는 전차를 242대나 보유하고 있었고 이남 공군은 연락기 10대 뿐인데 반하여 211대의 공군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렇게 균형이 깨졌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는 불문가지 인데, 정보의 달인이라는 미국이 과연 그것을 모르고 있었을까? 6.25 사변이 발생하기 전에 남북한은 38선을 사이에 두고 수백 차례의 소규모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49년 1월 18일에서 50년 6월 24일까지만 해도 소규모 전투횟수는 총 874회나 되었다. 그 한 사례로 49년 3월에 발생한 무력충돌은 개성 서북쪽의 송악산에서 벌어졌는데 이때의 전투는 거의 전쟁수준의 충돌이었다. 그 외에도 충돌은 주로 웅진반도, 개성, 의정부, 춘천, 강릉 부근에서 자주 벌어졌는데 이 지역이 바로 6.25전쟁 중에 주공격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 1년 5개월 동안에 벌어진 전투만 이 정도인데 월경사건이나 경미한 충돌까지 합하면 물경 2천회 이상의 충돌이 있었던 것이다. 즉 수시로 이남의 방비태세를 시험 점검하고 있었던 것이다.

  북한의 남침준비는 이남의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에서 이미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당시 정보국장은 장도영 대령이었고 박정희는 파면된 상태에서 문관으로 채용되어 있었고 김종필 중위 등 육사 8기생들이 정보국을 메우고 있었다. 유양수(소령) 전투정보과장 주도로 작성된 49년 12월 ‘연말 종합 적정(敵情) 판단서’에는 “50년 춘계에 북한이 38도 선상에서 전면공격을 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50년 4월 28일에는 북한 공군 중위 이건준이 YKA-9형 전투기를 몰고 월남하였는데, 그는 “몇 개월 사이에 전쟁이 발발할 것이다.”고 진술하였다. 동 6월 10일에는 춘천 오대산, 강릉 해상을 통해 인민유격대가 침투하였는데, 포로 심문 결과 “전쟁준비가 완료되었고 명령하달만 기다리고 있다.”는 내용을 확보하였다. 동 6월 22일에는 동두천의 제1연대에 인민군 전사가 귀순하였는데, “남진을 위한 38선 지뢰해체를 명령 받고 탈영했다.”고 진술하였다. 이런 여러 가지의 정황을 최고 책임자인 채병덕(1916년생) 총참모장에게 모두 보고하였으나 웬일일까? 상황은 급박한데 실제는 아무런 별다른 조치가 없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남침이 임박할 즈음에는 벌써 4월 27일부터 29일까지 대기태세, 4월 29일부터 5월 2일까지 경계태세, 5월 2일부터 3일까지는 다시 대기태세, 5월 9일부터 27일까지 또 다시 대기태세가 발령되었다. 총선거(제1대 제헌국회는 48년 5월 10일 실시. 2대 총선은 50년 5월 30일 실시. 당시 제헌국회의원의 임기는 2년)를 전후한 5월 27일부터 6월 2일까지는 한 단계 위인 경계태세가 발령되었고, 6월 11일부터는 가장 높은 단계인 비상경계 태세가 발령되어 군은 최고조의 긴장상태에 이르렀다. 그런데 웬일인가? 6월 23일 24시를 기해 전국적으로 비상경계령을 해제한다는 명령이 하달되었던 것이다. 미 군사고문단과 채병덕 참모총장은 서울에만 앉아 있으면서 전방에서 입수된 긴급보고를 모두 묵살하고 있었다.

  6.25전쟁 시에 사단장과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 이형근 대장은 뒤에 그의 회고록에서 6.25전쟁 전후에 나타난 10대 불가사의를 제시한 바 있다. 그의 결론은 군대 내에 ‘통적분자(通敵分子)’가 없이는 도저히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었다.

  6.25 사변의 불가사의한 미스터리를 중요한 것만 몇 개 요약해 보아도 이렇다.

  첫째, 6월 10일 군 수뇌부의 대규모 인사이동으로 대부분 사단장이 부대를 장악할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했다. 채병덕 참모총장은 전군에 인사이동을 하달하는데 북한군 남침 시 가장 중요한 방어지역인 포천과 의정부의 사단장들을 교체하였고, 서울 방어에 가장 주요한 7사단과 수도사단의 사단장을 전방사단과 맞바꾸는 등 불필요한 인사이동을 하였다. 또한 육군이 보유하고 있는 차량 총 1,500대 중 500대를 느닷없이 정비를 해야 한다며 부평으로 후송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중화기의 일부도 수리를 한다는 명목으로 부평으로 후송하도록 명령을 하달하였다.

  둘째, 6월 11일에 발동한 비상계엄령을 23일에 해제했다. 6월 23일 낮에 미 군사고문단장 직무대리인 참모장 라이트(William H. Wright) 대령은 일본에 가 있는 로버츠(William Lynn Roberts) 준장의 전화명령을 받고 채병덕 참모총장을 방문하였다. 이 날의 대화에서 라이트 대령은 24일 밤에 한국 육군참모학교 구내의 장교구락부 개관을 축하하는 칵테일파티를 열 것을 제안했다. 동시에 비상계엄령을 해제하도록 설득하였고 채병덕 참모총장은 이를 모두 수락한다. 채병덕은 라이트와 만난 이후 김백일 참모부장을 불러 6월 24일을 기해 전군에 비상계엄령을 해제하고 장병들의 휴가를 보내라고 명령한다. 물론 명목은 농번기에 장병들이 농사일을 돕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6월 24일 38선 근무병력의 3분의 1을 휴가 보내고, 나머지 병사들도 많이 외출, 외박을 시켰다.

  셋째,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기 전, 채병덕 총장은 군차량이 한 대도 한강교를 건너지 못하게 하였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였을 때는 국군 1사단은 문산에서, 주력부대는 미아리에서 싸우고 있었고, 미군의 보급품과 국군의 군수품이 창고에 그대로 있었다. 그런데 채병덕 자신은 한강을 건너며 이러한 군수품과 보급품을 이동하라는 명령도 없이, 싸우고 있는 국군에 대하여 후퇴명령도 내리지 않고 최창식 공병감에게 한강교 폭파를 명령하여 6월 28일 새벽 2시 30분에 한강교를 폭파하였다. 그리하여 6월 28일까지 국군 6개 사단이 붕괴되었을 뿐만 아니라 군수품과 보급품은 고스란히 북한 인민군의 손에 넘어갔다. 이로써 국군의 거의 반수인 44,000여명이 죽거나 포로가 되어 사실상 국군은 이 때 괴멸상태가 되고 말았다.

  한국군을 총지휘해야할 미 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은 벌써 6월 10일에 정년퇴임을 했고 24일 밤에는 귀국을 위하여 동경에 가 있었다. 채병덕 참모총장에게 파티를 건의했던 직무대리 라이트 참모장은 막상 자기는 파티에 얼굴만 내비추고 주말 휴가를 명목으로 그날 밤 비행기를 타고 동경으로 떠나버렸다. 참모총장 채병덕의 행동도 이해할 수 없는 면이 한두 가지가 아니고 그의 부관인 라엄광 중위(28일 행방불명)란 자는 나중에 장교병적부에도 없는 남로당 공작원이었음이 밝혀졌다. 즉 채병덕과 6.25 남침은 직간접적으로 분명히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1950년 1월 12일에 애치슨 미 국무장관의 이른바 ‘애치슨라인’이란 것이 선언되었는데 트루먼은 애치슨 선언이 있기 1주일 전에 벌써 성명을 통해 한국과 대만에 군사적 불개입을 천명하였다. 동시에 미 통합참모본부에서 작성한 아시아에 관한 전략계획서에서 “미국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한다 하여도 결코 무력수단으로 한국을 방어하지 않는다.”고 명시하여 국제사회에 공개한바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하루 만에 공군을 투입해 전선에 개입하였으며, 이틀째 되던 27일에는 유엔안보리 이사회를 열어 연합군 파병결의를 통과시켰으며, 전쟁발발 5일 뒤인 30일에는 지상군 파병을 결정할 정도로 신속하고 발 빠르게 한국전쟁에 개입하고 있다.

  미국은 “주한 미 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으로부터도 남북간의 급박한 사태는 보고받은 바 없다.”고 발뺌을 하지만, 설사 그랬다 하드라도 로버츠가 아니고도 정보 루트는 얼마든지 있었다. 주한 CIC는 물론, 주일 미 극동군 총사령부 제2부장 윌로비 소장(G2) 휘하의 캐논 첩보기관과, 역시 G2부장 휘하의 8240첩보부대, 그리고 미 공군 특수첩보대 등 최소한 4개 이상의 첩보기관이 북한, 만주, 연해주, 중국, 모스크바까지 원정해 첩보활동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워싱턴 통합참모본부와 CIA본부로 다량의 정보가 전송되고 있었다. 그 중 캐논첩보기관과 8240첩보기관으로부터 1949년 6월 30일부터 6.25 직전까지 1년간 발송해 온 정보가 무려 1,195건이었고, 1950년 초부터 전쟁이 일어나기 전날까지 약 6개월간에 보고된 정보건수 만도 417건이나 되었다. 때문에 미국이 북한의 남침계획을 몰랐다고 한 것은 처음부터 말이 성립될 수 없다.

  중국이 한국전에 참전한 이후에도 효과적으로 이를 저지할 방법이 있었는데도 일부러 그들을 한반도 깊숙이 끌어들이고 있는 감이 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한미 연합군이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갔을 때, 중공군은 참전을 선언하고 압록강 도강을 하고 있었다. 이 때 압록강과 두만강 다리를 폭파하면 중공군의 도강을 저지 내지는 지연시킬 수 있었는데도 미 통합참모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폭격금지명령을 내린 상태였다. 맥아더 장군은 중공군의 도강을 방치하고만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통합참모부의 명령을 어기고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 6곳의 교량을 즉시 공중폭격 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맥아더는 대거 참전한 중공군에 대비하여 본국에 병력과 군장비 및 보급품 지원을 요청했지만 묵살되었기 때문에 이에 맞서 싸울 것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맥아더의 폭파 명령은 워싱턴에서 날아온 전보에 의해 즉시 철회되고 말았다. “한·만 국경에서 북한 쪽으로 2킬로미터 범위에 있는 모든 목표물에 대한 폭격을 금지하라.”는 마셜 국방장관의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마셜은 워싱턴에 앉아서 천하를 읽었고 전후 평화질서를 창출해낸 사람이다. 맥아더와는 1880년생 동갑내기로 같은 5성 장군이지만 서로는 뱀을 보듯이 싫어했다. 맥아더가 웨스트포인트 출신으로 1925년 미육군사상 최연소(45세) 소장 진급을 하고 1930년에 참모총장에 임명되는데 반하여, 마셜은 버지니아 군사학교 출신에 지나지 않지만 대기만성형인 그는 1953년 마셜플랜으로 전후 유럽부흥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된다.

  기고만장하던 맥아더는 트루먼 대통령까지도 한껏 업신여기다가 51년 4월 11일에 해임 당한다. 트루먼은 맥아더가 자기를 해임할 것을 눈치 채고 미리서 사표를 내지 못하도록 새벽 1시에 보도 자료를 배포하는 치밀성을 보인다. 트루먼은 대학졸업장도 없을 뿐만 아니라 주방위군 계급장이 전부인 속칭 ‘미조리 촌놈’이었다. 맥아더의 이미지는 어딜 가나 선글라스에 수제 콘파이프(옥수수 자루로 만든 담배 파이프) 그리고 삐딱하게 쓴 헌 모자이다. 맥아더의 모자는 미 육군 모자가 아니다. 필리핀 육군원수로 취임했을 때 필리핀 대통령이 기념으로 만들어준 것이었다. 그가 그 모자를 고집한 이유는 다른 누구도 아닌 더글러스 맥아더라는 인간 하나만을 위하여 만들어졌다는 유니크한 모자였기 때문이지만 보는 사람은 심기가 편하지 않았다. 맥아더는 또한 일본에 주둔한 6년 동안에 단 한 번도 일본이외 지역에서 잠을 잔 적이 없다. 그가 한국이건 필리핀, 대만 등 타지에 간 적은 있지만 모두 당일로 일을 마치고 일본으로 날아왔고, 잠은 반드시 그의 숙소인 데이코쿠(帝國) 호텔(Imperial Hotel. 1952년까지 무려 8년간 미군의 숙소로 사용)에서 잤다. 알고 보면 맥아더에 대한 공격은 트루먼과 마셜의 합작품이었다.

  마셜이 맥아더에게 한·만 국경의 폭격을 금지하였을 때, 미극동군 총사령부에는 중국 제4야전군 휘하의 제38, 제39 그리고 제40군단이 교량을 건너 신의주로 들어오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오고 있었다. 다급한 맥아더는 강력한 항의 전문을 워싱턴에 보내 교량폭파를 금지하려면 중공군의 병력에 대응할 수 있는 무기와 장비를 긴급히 지원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 때에야 비로소 워싱턴에서는 제한적 폭격을 승인하였다. “압록강 교량을 북·중 절반으로 나누어 북한 쪽만 폭파할 것.”과 “압록강 이북 영공을 침범하지 말 것.”이었다. 제한적 폭격을 하기 위하여 폭격기가 출격하자 중공군은 완충지역에서 일제히 고사포 사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폭격제한 때문에 고사포에 대한 반격을 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적 미그기가 출격하여 폭격을 방해했지만 추격도 할 수 없었다. 통합작전본부에서는 또 명령이 하달되었다. “만주 방향으로 도주하는 북한군에 대하여 모든 폭격이나 기총소사를 금지할 것.”과 “압록강 수풍 수력발전소를 폭격하지 말 것.”이었다. 수풍 수력발전소는 북한뿐만 아니라 만주와 시베리아 지역까지 전기를 공급하는 곳이어서 폭격을 하면 중공군과 북한군에 막대한 타격을 줄 수 있는 카드인데도 그 카드의 사용금지령을 내린 것이다. 특히 중국 북동부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의 3성에 형성된 종합공업지대가 압록강 수풍댐의 전력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전쟁이 있는 곳에 미국의 이익이 있다.”란 말이 있듯이 미국은 전쟁을 만들지 않고서는 유지되기 어려운 나라이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의 예상치 못한 조기 종전으로 인하여 잉여 전쟁물자 때문에 시달리고 있었을 때 마침 중국에서 국공내전이 벌어졌다. 미국은 장제스 국부군에게 다량의 군수물자를 제공함으로써 경제공항의 타개책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장제스군은 마오의 공산군에서 여지없이 패배 당하고 말았다.

  뒤이어 다행히 한국에서 6.25전쟁이 벌어짐으로 절호의 불황타개책이 생긴 것이다. 이제 압록강과 한강 사이를 오리락 내리막 하면서 잉여 전쟁물자를 소비하고 미국을 재무장하면 되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 정부는 군비축소 방침에 따라 숙련된 2차 대전 참전용사들은 대부분 퇴역을 하였고 국방예산은 1945년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연 909억 달러이던 것이 103억 달러로 삭감되었고, 병력은 하루에 15,000명씩 제대를 하여 1,200만 명이던 미군병력이 1947년 초에는 150만 명밖에 안 되었다. 예산이고 병력이고 거의 10분의 1수준으로 감소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국에는 상징적인 병력만이 남아 있었고 극동지역 미군의 43%는 전투력과 정보력 자체평가에서 최하위등급인 4-5등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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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절치부심 3 2017 / 12 / 15 308 0 6930   
5 절치부심 2 2017 / 12 / 15 317 0 9057   
4 절치부심 1 2017 / 12 / 15 317 0 6909   
3 이년당 희의 3 2017 / 12 / 15 314 0 10371   
2 이년당 회의 2 2017 / 12 / 15 323 0 4669   
1 이년당 회의 1 2017 / 12 / 15 515 0 9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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