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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펑더화이의 6.25
작가 : 주암
작품등록일 : 2017.12.15

펑더화이는 중국인민지원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온 총사령관이다. 펑더화이의 입장에서 보는 한국전쟁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중국은 5차전역에 걸쳐 미군과 한국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고 마지막으로 금성전투에서 엄청난 공격을 가하여 정전협정장으로 끌어낸다. 전선은 지루하고 소모적인 마지막 고지쟁탈전이 벌어지는데, 이런 과정에서 벌어진 삼감령전투는 중국군에 있어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이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서 흘러나온 첫 곡이 상감령전투의 주제곡이었다. 중국은 미제와 국경을 접하고 싶니 않아 이북이란 완충지대가 필요했고, 미국은 중공을 견제하기 위하여 남한이란 완충지대가 필요했다.

 
몸부림치는 백범 4
작성일 : 17-12-15 17:19     조회 : 297     추천 : 0     분량 : 10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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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김구는 연석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이날 평양기자단을 상대로 도착성명을 발표했다.

  “동포 여러분! 위도로서의 38도선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지만 조국을 양단하는 외국 군대들의 경계선으로서의 38도선은 일각이라도 존속시킬 수 없는 것이다. 38도선이 있는 한 우리에게는 통일과 독립이 없고 자주와 민주도 없다. 어찌 그뿐이랴. 대중의 기아가 있고 가정의 이산이 있고 동포의 상잔까지 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번에 꿈에도 그리던 이북의 땅을 밟았다. 내 고향의 부모형제자매를 만날 수 있게 된 것을 생각하면 광환(狂歡)에 넘칠 뿐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우리들이 민주자주의 통일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을 더욱 기뻐한다. 조국은 분열에, 동포는 멸망에 직면한 이 위기에 있어서 우리의 이 모임은 자못 심장한 의의가 있는 것이며, 우리의 임무도 중대한 것이다. 이 모임이 실패하면 전 민족이 실패할 것이오, 이 모임이 승리하면 전 민족이 승리할 것이다. 이 전제하에서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무엇이 있겠는가. 우리의 통일 독립의 완성은 미소간의 위기를 완화할 수 있으며, 미소위기의 완화는 세계평화의 초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4월 22일, 셋째 날 회의는 백남운의 사회로 진행하였다. 김구는 전날 도착한 한독당의 엄항섭, 조완구, 조소앙과 민주독립당의 홍명희 등과 상의한 결과 같이 연석회의에 참석하여 인사말이라도 하고 나오기로 하였다. 김구 일행이 호텔에서 1킬로 쯤 떨어진 모란봉 극장에 도착한 것은 정오가 조금 지나서였다. 회의장에서는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김구 일행은 회의장으로 들어가지 않고 2층 휴게실로 안내되었다. 휴게실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돌연 박헌영이 나타났다.

  “선생님, 저 박헌영입니다.”

  “반갑소. 남한에서 못 보고 여기서 만나네요.”

  “저는 평소에 선생님을 존경해 왔습니다. 이번 저희들의 뜻이 꼭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지요. 사상보다도 열 배나 더 중요한 것은 민족입니다. 민족의 힘으로 뭉치면 안 될 일이 없지요.”

  잠시 후에 김구는 회의실로 안내를 받았다. 사회를 보던 백남운이 “김구 선생 일행이 도착했다.”고 알리자 회의 참석자들을 일제히 기립박수를 보냈다. 백남운은 “집행부의 위임에 따라 김구, 조소앙, 조완구, 홍명희 네 분을 주석단에 추대할 것을 제의한다.”고 말하자 대표자들은 열렬한 박수로 승인하였다. 네 사람은 차례로 인사 겸 축사를 했다. 김구 차례가 되자 작심하고 5분 동안 축사 겸 연설을 했다.

 “여러분, 조국이 없으면 민족이 없고 민족이 없으면 무슨 당, 무슨 주의, 무슨 단체가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현 단계에 있어서 우리 전민족의 유일 최대의 과업은 통일 독립의 전취인 것입니다. 그런데 목하에 있어서 통일 독립을 방해하는 최대의 장애는 소위 단선 단정입니다. 그러므로 현하에 있어서 우리의 공동한 투쟁목표는 단선 단정을 분쇄하는 것이 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선 단정 분쇄를 최대의 임무로 삼고 모인 이 회합은 반드시 성공되어야 합니다. 국제관계에 있어서도 복잡다단한 바 있으나 우리의 민족적 단결로써 국제간의 친선과 양해와 투쟁에 노력한다면 모든 것을 호전시킬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김구는 축사가 끝나자 바로 퇴장하여 호텔로 돌아왔다. 오후 4시 50분에 회의는 속개되었다. 회의는 <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 초안 작성위원회 위원으로 홍명희와 엄항섭을 보선하고 토론을 계속하였다.

  넷째 날 회의의 4월 23일은 김원봉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회의는 <전조선 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를 채택하는 순서로 시작되었다. 홍명희가 <결정서> 초안을 낭독하고, 회의는 그것을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이 <결정서>는 김일성과 박헌영 및 백남운이 행한 남북한의 정치정세 보고의 주지를 반영한 것이었다.  <결정서>는 미소공위가 결렬된 뒤 미국에 의하여 한국문제가 유엔총회에 이관되고 유엔소총회가 남한 단독선거를 결의하기까지의 과정을 비판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유엔소총회의) 이 결정은 우리 조국에서 남조선을 영원히 분리하여 미국 식민지로 변화시키려는 기도의 구현이다. 우리 조국의 가장 엄중한 위기가 임박한 이 시기에, 남조선에서는 우리 조국을 분열하여 예속시키려는 미국의 반동정치를 지지하여 우리 민족을 반역하며 조국을 팔아먹는 이승만, 김성수 등 매국노들이 발호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을 배족적 매국노로 낙인 함은 물론, 그들에게 투항하여 그들과 타협하는 분자들도 단호히 논죄하며 배격한다. 그들의 배족적 망국노적 책동으로서 남조선 인민들은 초보적인 민주주의적 자유까지도 박탈당하였으며 생활을 향상시킬 하등의 희망과 조건도 가지지 못하고 있다.”  <결정서>는 북한의 상황에 대해서 “북조선에 주둔한 소련군이 북조선 인민들에게 광범한 창발적 자유를 주었다.”고 칭송하면서 남한 단독선거는 단호히 파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미 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 예속화 정책과 그들과 야합한 민족반역자 친일파들의 음흉한 배족망국적 시도를 반대하며 소위 ‘유엔조선위원단’의 기만적 단선 희극을 반대하여 궐기한 남북 조선인민들의 반항을 조국의 완전 자주독립을 위한 가장 정당한 애국적 구국투쟁이라고 인정한다.”  이날은 <전조선 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 채택에 이어 비슷한 내용으로 3천만 동포에게 보내는 <전조선 동포에게 격함> 이라는 격문을 채택하고 사실상 남북연석회의의 중요한 일정은 끝났다.

  4월 24일은 남쪽에서 간 200여명 대표들이 황해제철소 시찰을 하였다. 4월 25일(일요일)은 11시부터 평양시 인민위원회 광장에서 연석회의 경축 평양시민대회가 열렸다. 34만의 군중이 동원되는 대성황을 이루었고 “국토를 양단하여 민족을 분열시키는 남조선 단독선거를 절대 배격하자” “모든 승리는 인민의 것이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김구와 김규식도 평양시민대회에 참가했다.

  다섯 번째 회의에 해당하는 4월 26일 속개된 남북연석회의는 민주독립당 홍명희가 사회를 맡았다. 남북연석회의는 첫날 사회를 김일성이 본 것을 제외하면 모두 남쪽 인사들이 맡았다. 회의는 또 미군과 소련군의 즉시 철수를 요구하는 메시지를 양국 정부에 보내기로 하고, 김책이 메시지를 낭독한 뒤 전달방법을 결정하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미국정부에 보내는 요청서는 서울주둔 미군사령관에게, 소련정부에 보내는 요청서는 평양주둔 소련군사령관에게 각각 전달하기로 했으며, 하지 미군사령관에게 전달하기 위한 대표로는 사회민주당의 여운홍 등 3명을 결정하였다. 여운홍 일행은 4월 29일 하오 3시에 서울에 도착했다. 북한 주둔 소련군사령관에게는 주영하가 4월 27일에 소련군사령부를 방문하여 전달했다.  오후 2시쯤에 애국가 제창과 김두봉의 만세삼창으로 남북연석회의의 공식 일정은 모두 끝났다. 4월 30일에 모란봉극장 응접실에서 4김 회담이 잠깐 열렸다. 벌써 연석회의에서 결론이 다 나와 버렸기 때문에 별로 토론할 일은 없었다. 이어서 극장 별관에서 남북연석회의 지도자가 모여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공동성명서>를 확정하였다. 첫째, 외국군대를 즉시 동시에 철거한다. 둘째, 통일에 대한 조선인민의 지망(志望)에 배치되는 어떠한 무질서도 용허하지 않는다. 셋째, 외국군대가 철거한 이후에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즉시 수립한다. 넷째, 남조선 단독선거는 설사 실시된다하여도 무효라는 것이었다.

  김규식은 자신의 ‘남북협상 5원칙’이 받아들여졌다고 만족했으며, 김구도 “남북통일이 실현되기 전에야 어찌 만족할 수 있으랴마는 다만 우리 과업 추진에 있어 하나씩 난관이 개척되어 나가는 것만은 매우 유쾌한 일이다.”라고 하며 만족했다.

   이 <공동성명서>는 5월 1일에 평양방송을 통하여 남한에도 알려져 선거정국을 흔들었다. 북한의 군사력 창설 작업에 남달리 관심을 표명해 온 이승만은 5월 3일에 논평을 발표한다.  “양군 철퇴 문제에 대해서 소련이 진심으로 공정한 해결을 원한다면 먼저 북한의 공산군을 해체시켜 무장을 회수하고 유엔 감시 하에 자유분위기에서 총선거를 하게 된다면 모든 문제가 순조로이 진행될 것이요, 그렇지 않고는 우리가 정부를 수립해서 국방군을 조직한 후에야 비로소 협의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소위 공동성명이라는 것을 나는 중요시하지 않는다.”   하지 중장도 이날 남북협상과 관련하여 소련을 격렬하게 공격하는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즉 지금까지 전 국민의 열망 하에 실시된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자에 의하여 허망하게 무효화 되어 가고 있었다.

  이로써 김구 암살은 예견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승만은 벌써 같은 달 49년 5월에 김약수 국회부의장을 비롯해 노일환 등 강경한 현역의원 13명을 북한 공산당이 침투시킨 프락치라고 둘러씌워 체포하였다. 6월 6일에는 경찰을 동원해 국회에서 통과하여 설립한 반민특위를 습격하여 짓밟음으로써 실질적인 해체를 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6월 26일에 김구가 암살당하며, 범인은 현역 육군소위 안두희였다.

  김구가 암살만 안 당했더라면 6.25사변도 일어나지 않았을 수 있고 선거정국에서 이승만에게 패배를 안겨 권좌에서 물러나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여운형만 암살되지 않았어도 한국의 정세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이승만은 자기 위 아래로 하나씩을 제거해 버림으로써 독불장군이 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안두희는 신의주에서 40여리 떨어진 평북 용천군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미쓰비시 등 일제 기업 제품을 취급하며 돈을 벌어 신의주 호상이 된다. 그는 토지측량기사 자격까지 딴 뒤 도정업에 손을 대고 일본군에 쌀 군납까지 하면서 평안도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거부가 되었다. 안두희는 아버지의 은덕으로 상업학교를 나와 만주로, 북경으로 흘러 다니며 허랑방탕한 시간을 보내고 한 때 금융조합 서기 노릇도 하였다.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으나 해방과 함께 진주한 소련군이 재산을 몰수하였고 김일성의 인민위원회에서도 3천 평 이상 소유한 자는 지주, 1천 5백 평부터는 부농으로 규정하고, 그들의 땅을 무상 몰수하는 것과 동시에 본인들은 전부 타고장으로 이주시켰다. 이들의 개인적 사정을 알 바 없는 낯선 고장 사람들은 국가가 ‘친일주구’ ‘역적’이란 딱지를 붙여놓은 추방자들을 심판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전국 곳곳에서 피비린내 나는 심판과 보복이 뒤따랐다. 안두희는 47년 단신 월남해서 48년 육군사관학교 특8기로 입교하여 이듬해에 졸업하여 포병사령부 연락장교 소위가 되었다. 이어서 이북 출신 반공우파 조직인 서북청년단에 들어갔다. 또한 이승만의 사조직이라 할 친일·친미파 소굴 ‘88구락부’의 행동대원으로 간택 받아, 소위 임관 뒤 3개월 남짓 만에 백범을 암살한다.

  암살사건이 있기 6일 전, 6월 20일에 김창룡의 지시에 따라 경무대 대통령 집무실을 들어선 안두희는 부동자세로 이승만에게 경례를 올렸다.

  “육군소위 안두희입니다.”

  “음, 아주 씩씩하게 생겼군. 고향이 이북이라고?”

  “네, 평북 용천입니다.”

  “음, 평북은 의인이 많이 나기로 유명한 고장이지. 신성모 국방장관으로부터 얘기 많이 들었어요. 내가 다 말해 두었으니 윗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잘 해요.”

  신성모는 이승만 직속의 고위층 행동대원인 소위 ‘88구락부’의 수장이다.

  “네 각하를 위한 일이라면 이 한 목숨 바쳐 멸사봉공하겠습니다.”

  “세부지시는 특무대장 김창룡이 내릴 것이니 그대로만 해요. 김창룡은 짐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에요. 뒤는 다 보아줄 터이니 아무 걱정 말아요.”

  이승만은 안두희에게 말하면서 자신의 호칭을 짐(朕)이라고 하였다. 이 말이 왜 나왔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안두희는 자기 귀를 의심하였으나 다시 캐 물을 계급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대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이 꿈속에서 자기가 왕이 되는 꿈을 꾸었는지 아니면 왕으로 잠깐 착각하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경무대를 나온 안두희는 하늘을 보았다. 하늘은 흰 구름이 몇 점 두둥실 떠있는 쾌청한 날씨였다. 자기에게 모든 행운이 밀려오는 양 흰 구름과 상쾌한 바람이 속삭여 주었다. 그 길로 안두희는 조선호텔 맞은편의 육본 정보국 3과의 이른바 특무대(SIS) 사무실로 가서 특무대장 김창룡으로부터 구체적인 지시를 받았다. 김창룡의 안배는 철두철미 하였다.

  안두희는 서북청년회(또는 서북청년단. 약칭 서청. 후에 대한청년단으로 통합)에 가입하여, 서울 제1지부이며 본부 직속인 종로지부 사무국장이 되었다. 서북청년회는 이북 각 도별 청년단체가 서울에서 결성한 극우 반공단체로서 좌익에 대한 복수심에 불탄 친일파 반공전선으로 경찰 및 군의 정보기관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경무국장 조병옥,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등 경찰 수뇌부의 적극적인 지원 하에 서북청년회는 경찰이 공개적으로 할 수 없는 성질의 대공테러를 담당하였다, 당시 ‘서청’ 이라 하면 우는 아이도 울음을 그친다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동시에 안두희는 어느새 우파 테러단체인 백의사(白衣社. 총사령은 염동진)의 제1소조 요원이 되어 있었고 동시에 한국주재 미군방첩대(CIC) 요원이 되어 있었다. 백의사는 정치인 장덕수와 여운형을 암살한 바로 그 지하조직이다.

  안두희는 한독당에 위장 입당하여 한 달 전에 김구 사무실에 꽃다발을 들고 온 적이 있기 때문에 이 날도 경비원이 별 의심하지 않았다. 낮 11시 30분에 찾아와서 12시 50분에 면회가 허용되었다. 누가 말도 안했는데 스스로 “무기를 차고 선생님을 뵐 수는 없죠.”하며 허리에 찬 권총을 스스로 내려놨다. 그리고는 비서 선우진을 따라 관리실을 나와 1층 홀로 들어서서 2층으로 올라갔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저 안두흽니다.”

  “음, 저번에 꽃을 가지고 왔던 청년이지?”

  “네, 그런데 선생님, 이번에 북한에 간 것은 아주 큰 잘못입니다.”

  “뭐? 어린 사람이 뭘 안다고 국가대사를 그렇게 함부로 말한 게야?”

  “뭘 아느냐 구요? 나도 알 것은 압니다. 그까짓 공산당 놈들하고 무슨 협상은 협상입니까.”

  “뭐라고, 그럼 협상을 해야지 전쟁이라도 해야 하단 말이야? 나는 협상을 하기 위하여 또 열 번이라도 북한을 달려갈 사람이야.”

  “공산당 놈들은 깡그리 죽여야 할 대상일 따름입니다. 남한만 단독정부를 수립해야 합니다. 선생님은 대한민국에 가장 큰 해를 끼친 암적인 존재입니다.”

  “네 이놈! 썩 나가지 못할까?”

  김구는 주먹을 들어 책상을 힘껏 내리치며 사자처럼 노하였다. 그 때 안두희의 몸속에서는 또 다른 한 자루의 권총이 나왔다. 서대문의 경교장에 울러 퍼진 4발의 총성. 그것은 일흔 셋의 국부 김구의 가슴에 꽂힌 원한의 총성이었다. 총소리를 듣고 달려간 선우진 비서와 경비원을 보고도 권총을 들고 태연히 2층에서 걸어 내려오는 안두희는 “선생을 내가 죽였습니다.”라고 태연자약하였다. 그런데 안두희를 체포한 것은 경찰이 아니고 헌병이었다. 사건현장에는 벌써 헌병대가 미리 도착하여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 후에 달려온 서대문경찰서장과 서울지검장은 접근이 차단되었다.

  사건 당일, 상층부에서는 벌써 자기들은 사건과 무관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속 들여다보이는 위장행각을 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뜬금없이 아침 일찍부터 낚시를 간다고 챙겨 나갔고, 신성모 국방장관은 아프다고 주위에 알리며 몸져 누웠고, 국무총리는 때 아닌 사냥을 하러간다고 나갔다.

  특무대 영창에서 즉시 안두희를 면회한 김창룡은 “안 의사 수고했소. 내가 지키고 있으니 안심해요.”하면서 들고 온 술과 담배를 내려놓고 간이침대를 펴주며 편히 쉬라하였다. 김창룡은 이승만이 가장 총애하는 극우테러 행동대원이었다. 김창룡은 원래 만주에서 악질로 소문난 일본 ‘헌병보조원’으로서 독립군을 색출하면 무자비하게 칼로 베어버리기로 유명하였다. 해방 후 고향인 함경남도 영흥으로 갔으나 거기서 북한의 인민위원회에 체포되어 처형되기 직전에 남쪽으로 탈출하였고, 공산당에 대한 적개심이 펄펄 끓고 있는 친일파의 표상이었다. 이승만은 안두희가 수감 중에 직접 “안심하고 있으라.”하는 친필 메모를 보내줌으로 암살자는 아무런 걱정 없이 대우를 받으며 단잠을 잘 수 있었다.

  이승만은 6.25 때 한강 다리를 폭파하고 피난 갈 때도 김창룡에게 형무소의 안두희를 빼내오라 해서 데리고 가는 의리를 지켰다. 한국전쟁 때 종군했던 강원룡 목사(크리스천 아카데미 설립)는 국군이 북상할 때 평북 순천에서 제2사령부 인사참모 박남표 장군과 사담을 나누던 중 기절초풍할 이야기를 들었다.

  “강 목사님, 그것 아십니까? 안두희가 지금 이 부대에 있다는 것 말입니다.”

  “네? 백범 암살범 안두희 말입니까?”

  “네, 바로 그 안두희입니다. 이 부대에서 칙사대우를 받고 있지요.”

  “네? 나는 안두희가 사형을 당했던지 어느 감옥에 있을 걸로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그렇게 순진하시니까 목사가 되지요. 안두희는 이 박사가 ‘내 허락 없이는 인사이동을 하지 말라’는 지령을 내렸기 때문에 누구도 인사이동을 시키지 못합니다. 여기서 신변보호를 하고 있지요.”

  “그럴 수가 있습니까?”

  “하하하, 안두희는 이승만 정권에서 보면 강 목사님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 정 반대의 인물이랍니다.”

  안두희는 51년에 대위로 예편했는데 어떻게 된 셈인지 52년에 중령으로 군에 몸담고 있었다. 그는 양구에서 큰 군납공장을 소유하고 동부전선 11개 사단에 군납을 책임 맡고 있었다. 군납공장 한 쪽에는 연못이 있었고 그 연못에는 잉어, 붕어 등 각종 희귀물고기가 우글거렸고 연못 옆에는 그림 같은 정자가 있고 그의 저택이 있었다. 연못은 작은 섬에 다리가 놓여 이었고 손님이 오면 연못에 배를 띄워 같이 노닐었다. 민간인은 들어오지도 못하고 군부 사람들만 들어올 수 있는데 새로 사단장이 부임하면 반드시 안두희에게 인사하러 왔다. 그런데 그 땅은 원래 홍주범(洪疇範)이란 민간인의 개인소유였는데 그 지방의 김 형사라는 사람이 세 얻어 쓰고 있었다. 남의 땅을 마구 뺏어 시설을 하자 김 형사는 왜 남의 땅에 허락도 없이 시설을 하느냐고 항의하였다. 안두희는 “이 자식이 내가 누군 줄 알고? 중대한 국가사업을 하고 있는데 무슨 잔소리야?” 하면서 망치(장도리)로 머리를 쳐서 피가 낭자했으나 아무도 말을 못하고 물러서야 했다.

 

  남북연석회의는 48년 4월 19일부터 모란봉 극장에서 남북조선 재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로서 이북의 3개 정당과 12개 단체, 이남의 41개 정당 사회단체 등 총 56개 정당과 사회단체 695명이 참석했다. 남한 쪽에서는 남조선로동당, 근로인민당 등 좌익계열 정당만이 아니고 한국독립당, 민족자주연맹 등 우익계열 정당들도 참가했다. 그러나 회의를 마치고 남하한 민족지도자들은 남한에서 거의가 암살당한다. 그런데 그 암살의 주체는 거의가 이승만의 비호를 받은 극우반공단체와 미 CIC(Counter Intelligence Corps)와 그 뒤를 잇는 KLO(Korea Liaison Office)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CIC는 해방이후 남한에 주둔한 전투부대 미 제24군단 아래 설치되었던 정보기관이다. 미 육군 24군단 예하에는 크게 두 그룹의 정보기관이 있었다. 하나는 4개의 일반참모부(G-1, G-2, G-3, G-4) 중 정보참모부로 알려진 G-2였고 다른 하나가 CIC로 알려진 방첩대였다.

 

  원래 1945년 9월 9일에 제224 CIC편견대가 처음으로 남한에 들어왔고, 소속요원 대부분은 태평양전쟁 당시 리이테 전투(필리핀 Leyte만에서 벌어진 미·일 해전)와 오키나와 전투에서 활약했던 멤버들이였다. 제224 CIC편견대는 다양한 CIC전투부대편견대, 수도부대, 지역부대들과 함께 활동했다. 이 편견대는 처음에는 도쿄의 제441 CIC편견대의 통제를 받다가, 1946년 2월 13일 서울의 제224 CIC편견대가 남한주둔 모든 CIC파견대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장악한 뒤, 4월 1일에 모든 CIC파견대가 971 CIC파견대로 교체되고 나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그 뒤 미 육군 제24군단 정보처 산하에 대북공작을 담당했던 첩보부대인 442 CIC를 창설하고, 그 뒤 1948년 8월 미 극동군사령부(GHQ) 정보처에서 442 CIC를 기반으로 당시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던 백의사, 정의사 등 여러 극우반공단체를 망라해서 켈로(KLO)부대를 만드는데, 대북첩보를 위하여 주로 서북청년단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북출신이 중심이었다. 1948년 12월 CIC는 공식적으로 철수했으나 그 상당수의 요원은 그대로 남아서 켈로 부대로 알려진 KLO와 미극동공군의 대북첩보기관인 미 공군 인간첩보부대(USAF HUMINT)로 역할이 옮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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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6.25 술래잡기 1 2017 / 12 / 15 313 0 9418   
13 몸부림치는 백범 4 2017 / 12 / 15 298 0 10070   
12 몸부림치는 백범 3 2017 / 12 / 15 299 0 7732   
11 몸부림치는 백범 2 2017 / 12 / 15 303 0 11143   
10 몸부림치는 백범 1 2017 / 12 / 15 306 0 10304   
9 조선의용군의 입북 3 2017 / 12 / 15 304 0 8035   
8 조선의용군의 입북 2 2017 / 12 / 15 314 0 9334   
7 조선의용군의 입북 1 2017 / 12 / 15 320 0 11453   
6 절치부심 3 2017 / 12 / 15 308 0 6930   
5 절치부심 2 2017 / 12 / 15 317 0 9057   
4 절치부심 1 2017 / 12 / 15 317 0 6909   
3 이년당 희의 3 2017 / 12 / 15 314 0 10371   
2 이년당 회의 2 2017 / 12 / 15 322 0 4669   
1 이년당 회의 1 2017 / 12 / 15 515 0 9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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