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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펑더화이의 6.25
작가 : 주암
작품등록일 : 2017.12.15

펑더화이는 중국인민지원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온 총사령관이다. 펑더화이의 입장에서 보는 한국전쟁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중국은 5차전역에 걸쳐 미군과 한국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고 마지막으로 금성전투에서 엄청난 공격을 가하여 정전협정장으로 끌어낸다. 전선은 지루하고 소모적인 마지막 고지쟁탈전이 벌어지는데, 이런 과정에서 벌어진 삼감령전투는 중국군에 있어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이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서 흘러나온 첫 곡이 상감령전투의 주제곡이었다. 중국은 미제와 국경을 접하고 싶니 않아 이북이란 완충지대가 필요했고, 미국은 중공을 견제하기 위하여 남한이란 완충지대가 필요했다.

 
몸부림치는 백범 2
작성일 : 17-12-15 17:15     조회 : 303     추천 : 0     분량 : 1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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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1948년 초에 백남운(역사학자, ≪조선사회경제사≫의 저자)은 비밀리에 남하하여 홍명희(소설가, ≪임꺽정≫의 저자)를 만나서 통일정부를 수립하도록 하자고 제의한 바 있다. 홍명희는 이러한 제의에 동의하고 김규식에게 연락하여 동의를 받아냈고, 김규식은 김구와 협의하여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남북요인회담을 제안하는 서한을 보내자고 의견일치를 본다. 김구 김규식은 48년 2월 9일에 유엔 조위(조선임시위원단) 메논(인도인) 의장에게 남북요인회담 알선을 탄원하고, 또 북한의 스티코프 장군에게 김일성 김두봉 양 씨와 함께 남한에 왕림하여 남북요인회담을 하여 달라는 서신을 보냈으나 답신을 받지 못한다. 김구는 2월 10일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 함’이란 성명서를 발표하여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고 결사의 의지를 표명한다. 김구는 북한을 가기 이틀 앞 둔 17일에는 “나는 어떠한 모욕과 모략을 무릅쓰고라도 오직 우리의 통일과 독립의 활로를 찾기 위하여 피와 피를 같이한 동족끼리 마주앉아 최후의 결정을 보려고 결단코 가련다. 민족의 정기와 단결을 위하여 승패를 불문하고 피와 피를 같이한 곳으로 독립과 활로를 찾으러 나는 가련다.”라고 하여 듣는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쪽 정권이 세워져서는 안 된다는 김구, 김규식 등 소위 남북협상세력에 대하여 미 군정청은 물론 국내 우익 청년단체, 기독교 단체, 학생들까지 김구 일행의 북한행을 반대 저지하였다.

  그러나 김구는 49년 4월 19일에서 23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하고 이와는 별도로 소위 ‘4김 회의(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를 열자는 데 합의한다.

  김구는 4월 19일에 출발하고 김규식은 4월 21일에 출발하게 되는데, 김구가 출발하는 19일 아침 일찍 아들 김신(金信)과 선우진 비서(정식 명칭은 임정내무부 경위대원)만 데리고 북한행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경교장 앞마당은 김구 자신이 이끄는 한독당 인사들을 선두로 서북청년단 청년들, 월남한 기독교 단체 사람들, 부인회 단체 여성들, 황해도의 고향 사람들, 전국학련 학생 등 5백여 명이 웅성서리고 있었다. 그 안에는 일찍이 상해임시정부에서 같이 활동하고 105인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같이 옥살이를 하던 도인권 목사도 있었는데 그는 한독당의 옹진지구 책임자였다. 임시정부시절에 김구 주석 휘하에서 독립군 총사령으로 활동하던 이청천도 있었는데, 그는 대동청년단장으로 이승만과 노선을 같이 하고 있었다. 전국 유림의 좌장이며 성균관대학교 설립자 겸 총장인 김창숙도 있었다.

  그런데 김구 일행이 출발하려는 순간 갑자기 젊은 학생들이 와락 달려들어 바퀴 밑에 드러누웠다. 자기들을 깔아 뭉기기 전에는 못 간다는 것이었다. 김구는 자동차에서 내려 경교장 2층 베란다로 뛰어올라가 군중을 향해 사자후를 토하였다.

  “네놈들은 왜 여기 있는 거야. 한 번 간다고 내가 결심한 것은 누가 말려도 쓸데없어. 북조선의 공산당이 나를 미워하고 스탈린의 대변자들이 나를 시베리아로 끌고 가도 좋다. 북조선의 빨갱이도 김일성이도 다 우리들과 같은 조상의 피와 뼈를 가졌다. 그러니까 나는 이 길이 마지막이 될지 어떨지 몰라도 나는 이북의 우리 동포들을 만나보아야겠다. 나의 길을 막지 마라. 내가 가서 공산당에게 붙들려 죽는다 해도 무슨 대수인가? 이제 무슨 여한이 있어서 죽기를 두려워하겠는가. 나 김구는 칠십 평생을 잘하나 못하나 독립운동을 해왔다. 이제 마지막 독립운동을 하려는데 왜 길을 막는가. 내가 기필코 이북을 가려는 것은 우리는 절대 분단된 국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하나이다. 해방된 조국에서 두 동강이가 웬 말인가. 두 동강이가 나려면 패전국인 일본이 나야지 승전국인 우리가 왜 두 동강 나야 되는가. 나의 가는 길을 막지마라. 나는 반드시 북조선을 갈 것이다.”

  그러나 군중도 막무가내로 나왔다. 군중은 자동차 바퀴의 공기 마개를 뽑아버리고 전혀 흩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그런 사태는 점심때까지 계속되었다. 저지하는 세력은 두 부류였다. 한 부류는 진심에서 김구의 신변의 안위를 걱정한 사람이었고 또 한 부류는 분단을 찬성하는 극우파들이었다. 당시 해방정국의 한국인은 사회주의를 선호하는 비율이 70%를 넘어서고 있었다. 1946년 8월에 미 군정청 여론국이 8,45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사회체제에 대한 선호도 여론조사에서 자본주의 14%, 사회주의 70%, 공산주의 7%, 모른다 8%로 나타났다. 즉 좌익이념의 선호도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합하면 77%나 된 것이다. 단 공산주의와 사회주이의 정확한 차이는 잘 모르지만 공산주의는 급진적 개혁이고 사회주의는 단계적 개혁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어떻든 해방정국의 한국인의 성향은 자본주의적인 우익만은 아니었다. 때문에 온건사회주의자 여운형이 결성한 조선인민공화국은 사실상 당시 한국인의 성향에 가장 근접한 것이었고 그러기 때문에 그가 정부기능을 수행하고 있는데도 별 저항의식이 없었던 것이다. 조선인민공화국의 하부조직인 인민위원회는 1945년 11월 현재 3개 군, 13개 면을 제외한 남북한 전역에서 실시되고 있었다. 특히 지식인이라면 거의 전부가 자본주의보다는 사회주의를 선호하는 것이 대세였다. 그러나 오늘 경교장에 온 군중은 성질이 달랐다.

  선우진 비서가 무슨 지혜를 발휘하지 않으면 아예 떠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선우진은 수리를 맡겼던 김구의 다른 승용차를 경교장 뒷담 너머의 석물공장에 경비경관도 눈치 채지 못하게 대기시키라 하였다. 오후 2시가 되어서 김구와과 아들 신을 모시고 슬그머니 뒷담을 넘어 석물공장에 이르렀고 급히 엔진을 밟아 출발하게 하였다.

  김구 일행이 떠나자 뒤를 이어 민주독립당 대표 홍명희와 한국독립당의 조완구, 엄항섭, 조소앙 등이 출발했고, 21일에는 김규식과 민족자주연맹의 대표자들도 서울을 출발했다. 이에 앞서서 벌써 4월 9일에는 80명에 달하는 남조선노동당과 남조선 민주주의 민족전선 대표자들이 이미 평양으로 출발했었다.

  김구, 김신, 선우진 세 사람을 태운 자동차는 북으로 북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산과 들이 차창너머로 스쳐 지나가고 흰 구름이 무심코 떠있을 때면 세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같이 고개를 돌리곤 하였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바뀌었는데 오늘 이 정국을 잘 헤쳐 나가지 못하면 또 다시 자주권을 잃은 허깨비 나라가 되어 일제 36년보다 두 배, 세 배, 열 배의 고통이 올지 모르며 어쩌면 조선이라는 나라가 지구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국가는 어떤 일이 있어도 힘 있는 자주독립 국가여야만 하는 것이었다.

  김구가 우리 임시정부를 도와주고 광복군을 훈련시켜준 장제스의 후중난(胡宗南) 장군을 찾아 시안(西安)을 갔을 때 일본의 항복소식을 들었다. 후 장군은 마침 출타 중이었고 그것을 안 성 주석(省主席) 주사오저우(祝紹周)가 저녁 초대를 했다. 이번 시안을 간 것은 시안에서 훈련받고 있는 우리 광복군 OSS(미국전략첩보대) 대원을 제1차로 본국으로 보내고 그 길로 푸양(阜陽)으로 가서 거기서 훈련 받은 광복군 OSS를 제2차로 떠나보낸 후 충칭 임정청사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주 주석과 식사가 끝나고 후식으로 수박을 먹고 있는데 전령의 말을 듣고 전화실로 갔다가 돌아온 주사오저우는 “일본이 항복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했다. 김구는 “일본이 항복한다고? 큰일 났구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한 마디 소리를 지르고 들고 있던 수박을 땅에 떨어뜨리며 찻잔도 넘어지고 말았다. 김구는 전신에 힘이 빠지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땅바닥에 덥석 주저앉고 말았다. 잠시 후에 온갖 설움이 한꺼번에 몰려왔고 김구는 드디어 소리를 내어 오열하며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치며 울었다.

  우리의 힘으로 승전국이 되었어야 하는데 미국이 원자탄을 떨어뜨려 해방이 됐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우리의 힘으로 국내의 읍성 하나만이라도 점령하고 있었더라면 그래도 발언권이 있을 텐데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도망만 다니다가 해방을 맞이하고 말았구나.

  임시정부가 미국과 함께 조선본토 침공 작전계획을 짰던 이번의 광복군 OSS특수부대만 성공을 했어도 이렇게 억울하지는 않을 텐데…. 김구의 지시를 받은 광복군 제2지대장 이범석은 쿤밍(昆明)에 주재하고 있던 미군 제14항공대 간부 쉬노우더를 만나고, 다시 44년 가을에 충칭(重慶)의 주중 미군사령관 웨드마이어 중장을 만나 한미합작에 대한 합의를 보았다. 45년 2월에는 김학규 광복군 3지대장이 미군 제14항공단사령관인 첸놀트 장군을 만나 한미 공동작전을 설명하고 “한·미 양군은 공동의 적인 일본군을 박멸하기 위하여 상호 협력하여 공동작전을 전개한다.”는 구체안에 합의했다. 45년 5월부터는 김학규가 엄도해, 윤영무 등 22명을 적격자로 선발하고 시안과 푸양에서 미군용 군복과 보급품을 지급받고 훈련을 시작했었다. 디데이(D-day)는 45년 8월 29일 경술국치일(한일합방)이었다. 광복군은 산둥 반도에서 미군 잠수함을 타고 본국으로 진입하여 각종 공작과 파괴활동을 개시하고 무기는 미국 육군성에서 운반해 주기로 약속을 받았다. 비록 초기 22명과 추가인원 50여명 등 일개 대대 병력도 안 되지만 이 병력이 하다못해 낙하산이라도 타고 본토진입만 해보았어도 덜 억울했을 텐데…. 일본의 항복이 한 달만 늦었어도 기회는 왔는데….

  불란서 레지스탕스는 파리 입성 때 기어코 유엔군의 선봉대를 맡았다. 입성하면서 친독분자라고 생각되는 자국국민들을 즉결처분한 것이 9천여 명, 파리 입성 후 재판에 의하여 사형을 집행한 나치부역자 2천여 명, 유죄판결로 투옥시킨 자 4만여 명이다. 이 후에도 특별법을 만들어 친독분자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처벌할 수 있게 만들었다. 전체 불란서인의 5%를 유죄판결 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강한 발언권이 있을 수밖에 없다. 단 4년간 독일에 점령당한 상처를 그들은 그렇게 철저히 도려냈다. 우리는 일제에 36년간 점령당했으면서도 단 한 명의 친일파도 처단하지 못했다. 하지 중장은 오히려 친일파를 등용해 군정을 하고 있고 이승만은 친일파와 손잡고 단독정부를 만드는 중이다. 아아, 이를 어찌하면 좋으리. 이번에 친일 매국노를 처단하지 못하면 이 뒤로 국가가 위기에 닥쳤을 때 지금보다 더 많은 매국노가 우글거릴 것이다. 매국노가 처단되는 모습을 보아야 애국을 하는데 매국노가 우대받는 모습을 본다면 어찌 매국노가 나오지 않겠는가? 중국도 국민당 정권하에서 재판한 한간(漢奸. 친일매국노) 관련 안건은 약 25,000건이나 되었다. 그중 369명이 사형, 979명에 유기징역, 14명에 벌금형이 내려졌다.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쫓겨 간 후 빗겨나갔던 자들을 마오쩌둥 인민정부는 재조사하여 십 수만 명을 다시 처벌하였다. 네덜란드도 1945년 10월 15일 현재 나치협력자로 수감된 자가 96,044이나 되었다. 그 중 154인에게 사형이 선고되었고 39명이 사형집행 되었다. 무기징역은 148명, 15∼20년 징역형은 578명, 10∼15년 징역형은 4,589명, 10년 이하의 징역형은 531명이나 되었다.

 

  아버지가 무슨 생각에 골몰하고 있는 모습을 본 신이 고개를 들어 김구에게 물었다.

  “아버님, 아버님께서 김일성을 만난다고 단독정부가 이루어질까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진인사 대천명이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고 천명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우남(이승만)의 말도 일리가 있지 않습니까. 이북을 가보았자 이용만 당하고 아무런 소득도 없을 것이라는 말씀 말입니다.”

  “그렇지는 않다. 우남도 독립운동을 했다면 한 사람이지만 노선은 분명히 틀린 노선이다. 그 사람은 단독정부 건립만 머리에 가득하고 미국만 하늘처럼 믿는 사람이다. 우리는 지금 우리 손으로 무엇을 이루어야지 다시 남을 믿어서는 큰일이 난다.”

  “그래도 공산국가가 되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통일정부가 되면 공산국가가 되리라는 공식은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타협해서 세울 국가이기 때문에 최선의 길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 설사 우리가 원하는 체제가 아닐지라도 이념이라는 것은 민족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아무 것도 아니니라.”

  “그래도 지금 사회주의다 자본주의다 하면서 목숨을 걸고 있지 않습니까?”

  “민족주의라는 태산 앞에서 이념은 한 톨의 돌멩이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에 이념상 잘못된 선택을 하였다면 뒤에 이념을 바꾸면 되는 것이다. 주체적인 독립국가만 이룬다면 어떤 체제인들 바꾸지 못하겠느냐. 단 누구의 지배를 받는다든지 간섭을 받는 국가가 되어서는 아무것도 제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다.”

  “민족주의는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 아닙니까?”

  “그렇지 않다. 모든 잘난 나라들은 민족주의에 성공한 나라들이다. 미국은 링컨을 축으로 청교도민주주의라는 민족주의에 성공했고, 중국은 있지도 않은 중화민족의 위대성을 만들어 중화사상이라는 민족주의를 성공시켰다. 일본은 우리가 전한 신교를 축으로 천황중심의 민족주의를 만들어냈다. 우리는 그들보다 역사도 더 길고 민족적 자산도 더 풍부하련만 내 사상을 만들어내는데 실기하고 있구나.”

  이 때 길이 좁아지자 갑자기 가까운 수풀 속에서 장끼 한 마리가 퍼드득 하늘로 솟아오른다. 급브레이크를 밟는 통에 차가 기우뚱 하였고, 어느덧 바싹 뒤따르던 기자들의 차도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다시 차는 서서히 움직였다.

  김구는 온화한 얼굴로 신을 돌아보며 감개무량해 하였다. 상해 마당로(馬當路) 4번지 빈민가 임시정부 청사에서 김구는 신의 종아리를 걷으라 하였다. 신은 지은 죄가 있어서 아무 말 없이 종아리를 걷었다. 김구는 국기봉을 들고 종아리를 후려쳤다.

  “이 놈, 이 못난 놈, 그래 대학을 떨어지면 어쩌자는 거냐.”

  김구는 또 종아리를 후려쳤다.

  “너 하나만은 잘 가르쳐 보려 했는데, 나라의 동량을 만들어보려 했는데, 다 틀렸구나. 이놈.”

  이 때 밖에서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김구 선생 계신가?” 하는 소리에 “누구세요.”하며 잠깐 매를 놓고 나가보니 차오따중(曺大中) 장군이었다. 손님을 맞이해 놓고 김구는 “잠깐만 기다리게. 아들 훈육을 시키는 중이네. 이놈이 글쎄 대학시험을 떨어지고 말았네 그려. 이제 군대나 보내야겠네.” 하면서 또 매를 들어 종아리를 때렸다. 이 때 차오따중은 얼른 매를 빼앗았다. “이 사람 이게 무슨 짓인가. 말로 해도 충분히 알아들을 나이게 되었네. 이제 그만하게. 신은 어서 나가 보거라.”하자, 신은 종아리를 내리고 조용히 두 분께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여보게, 대학은 꼭 북경대 청화대만 대학이 아니네. 다른 대학도 얼마든지 있어. 신이 대학을 떨어진 것은 어쩌면 조선을 위하여 잘된 일인지도 모르네. 지금 공부가 뭐가 그리 중요한가. 조선은 이 뒤로 모든 군사지식이 절실히 필요할 걸세. 그 중에서도 공군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낄 걸세. 공군에 보내면 어떨까?”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네만.”

  그래서 김신은 대학은 국립서남연합대학 철학과에서 대충 학력만 갖추고, 부친의 뜻에 따라 중화민국 공군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텍사스 주의 랜돌프 공군비행학교까지 졸업했다. 덕분에 한국에서 너무나 절실한 공군의 제1인자가 되었고 작년(48)에 국군창설에 지대한 공로를 세웠다.

  차오따중은 장제스의 부탁을 받고 가끔 임시정부에 들려보고 상황보고를 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장제스의 부탁을 받고 오긴 하지만 김구의 동생 겸 친구가 되어 사담도 나누고 국가지사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는 사이가 되었다.

  “나도 퉁(彤)이라는 아들을 하나 얻었네. 아직 어리지만 나는 이 아이에게 마음껏 자유를 주려고 하네. 그래도 나중에 다 한 몫을 하드라고.”

  “알았네. 알았네. 장 총통은 무사하신가?”

  “그럼, 건재하시지. 단 공산당과의 관계가 문제일세. 지금은 국공합작으로 같이 항일전을 벌리고 있지만 결국엔 공산당과의 한판 승부를 해야겠지. 어쩌면 한국도 중국과 같은 처지가 되지 않을까?”

  “아닐세, 중국은 공산당과 피를 흘리고 싸운 적이 있지만 한국은 공산당과 피를 흘리고 싸운 적이 없어. 합작해서 통일을 이루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네.”

  “꼭 그렇게 되기를 바라네. 그러나 공산당은 쉽게 보아서는 안 되네. 우리 중화민국과 힘을 합해서 공산당을 쓸어버리세 그려.”

  “하하하, 우리는 아직 공산당과 싸우지 않는데도 그러네.”

  그런데 차오따중의 우려가 지금 현실로 나타나려 하고 있다. 어쩌면 차오따중은 그 때 벌써 한국의 미래를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차오따중은 실은 일본육사를 졸업한 사람이다. 장제스는 그런 인제들을 암암리에 중용하여 군사요직을 맡게 하였다. 우리의 임시정부가 상해에 있었듯이 중국의 혁명본거지(임시정부)는 일본에 있었다. 때문에 일본의 많은 협조를 받은 전력이 있는 중화혁명당과 그 뒤의 국민당은 항일을 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공산당의 입장에서 항상 국민당의 항일태도가 마음에 안든 이유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중화민국의 국부(國父) 쑨원(孫文)은 1894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흥중회를 조직하고 이듬해인 95년에 광저우(廣州)에서 첫 거병을 하였으나 실패하고 일본으로 피신한다. 1905년에 일본 동경에서 유학생, 화교들을 중심으로 중국혁명동맹회를 결성하여 반청(反淸) 혁명운동을 다시 전개한다. 그 때 일본여성과 결혼하고 많은 일본인들로부터 지원을 받는다. 1911년 쑨원은 남경에서 신해혁명을 크게 성공시킴으로써 1912년 1월 1일에는 중화민국 임시총통에 부임한다. 그러나 북양군벌의 거두인 위안스카이(袁世凱. 전 주찰조선총리)와 타협하여 그에게 대총통직을 넘겨주었다. 같은 해 제2차 신해혁명에 실패하고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여 이듬해에 중화혁명당을 조직하여 반원(反袁)운동을 계속한다. 1917년 광저우에서 군정부를 수립하고 대원수에 취임하며 1919년에 중화혁명당을 개조하여 중국국민당을 결성한다. 중산(中山)이라는 그의 호는 1895년 30세의 나이로 일본에서 사용하던 가명 나카야마 키코리(中山樵)에서 유래한다.

  쑨원은 대륙낭인 흑룡회(黑龍會)의 두목 도야마 미쓰루(頭山滿)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 때 일본에 정치적 망명을 한 아시아의 지도자는 김옥균, 쑨원을 비롯하여 영국 총독 살해에 실패하고 일본에 망명한 인도의 라쉬 비하리 보스(Rash Behari Bose)와 베트남의 항프랑스 운동의 지도자 판 보이 차우(Phan Boi Chau. 潘佩珠) 등이 있었는데 모두 흑룡회가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었다. 흑룡회는 최초의 정한론자(征韓論者)인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후예인 일본 낭인의 대부 도야마 미쓰루가 1881년에 설립한 현양사(玄洋社)를 효시로 한다. 명치유신으로 해체 당한 사족(士族. 무사계급)의 불평분자들이 국가와 밀약으로 뒷돈을 받아 조직한 국가주의 야쿠자 집단이다.

  한국의 동학혁명 때 부산에서 결성한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 등의 천우협(天佑俠)은 현양사의 지류였다. 국모 명성황후를 살해한 도 가쓰아키(藤勝顯) 역시 천우협 소속이다(일본 후쿠오카 쿠시다〔櫛田〕 신사에는 명성황후를 살해한 120cm의 일본도가 전시되어 있다). 도야마는 일생동안 어떤 공식적인 직함도 갖지 않았지만 그 영향력은 어마어마하였다. 우치다 역시 어떤 공직도 없이 막후에서 막대한 힘을 가지고 정치활동을 하는 인물이다. 우치다는 1905년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조선에 부임할 때 참모로 다시 조선에 온다. 그는 대표적 친일단체인 일진회에 막대한 자금을 대어주며 한일합방을 순종에게 건의하게 하는 막후 조정역할을 맡았었다.

  쑨원이 2차 신해혁명에 실패하고 일본에 망명하던 993일간은 도야마가 각별한 후원자가 되어주었다.

  “도야마 선생, 이렇게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받으니 감사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큰 나라가 작은 나라에 이렇게 많은 신세를 질 줄이야 어찌 알았겠습니까.”

  “어느 나라가 크고 어느 나라가 작습니까. 나라의 영토가 크고 작은 것으로 나라의 대소를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것이 지나(支那. 일본이 China를 음역해서 부르던 이름) 인의 고질적인 병폐지요. 스페인은 나라가 커서 남미를 다 점령하였습니까. 영국은 나라가 커서 인도를 식민지로 삼았습니까. 일본이 나라가 커서 일청전쟁, 일로전쟁에서 중국을 이기고 러시아를 이겼습니까?”

  “그렇고 보니 그러네요.”

  “황국은 항상 지나를 동생 취급해 왔지요. 성덕태자께서도 수양제에게 국서를 보내면서 ‘해 뜨는 나라의 천자가 해지는 나라의 천자에게 안부를 전하노라.’하지 않았습니까?”

  “아, 그렇습니까?”

  “황국은 지나가 필요하다면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애로사항이 있으면 무엇이나 허심탄회하게 말씀하세요.”

  “현재 우리의 급선무는 만청중부를 타도하는 것입니다. 일본이 만청정부를 타도하는데 일익을 담당해 주신다면 조선 정도는 일본이 차지하는데 이의가 없습니다.”

  “아, 그래요? 하하하하.”

  쑨원의 조선을 일본이 차지해도 좋다는 말은 전에 호놀룰루의 흥중회 연설에서 했던 내용과는 다르다. 그 때는 “고대를 회복하고 중화를 공고히 하자(恢復高臺, 鞏固中華).”를 캐치프레이스로 삼았다. 이 고대(高臺)라는 말은 고려(조선)와 대만을 말한다. 동학혁명을 진압하러 조선에 온 청국과 불청객 일본은 조선 내에서 청일전쟁을 벌린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서 청국 군을 몰아내고 조선을 차지하며 대만까지 할양 받았었다. 그 때 자기의 번속인 조선과 대만을 일본이 빼앗아 갔으니 그것을 다시 회복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쑨원이 이번 2차 혁명에서 실패하고 다시 일본에 망명하여서는 만청정부만 타도하는데 협력해 준다면 조선(과 대만)을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쑨원은 일본에 대하여 아주 호의적이다. 그가 창제했다는 중산복(中山服)도 일본의 가쿠란(學蘭. 화란식의 학생복)을 보고 모방한 것이며 북한의 인민복은 이 중산복을 본 따 만든 것이다.

  장제스는 1906년 4월에 북경 인근의 보정(保定) 군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교육을 받았고 그 다음 해에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유학하여 1909년 5월에 제21기로 졸업한다. 일본에서 그는 다른 유학생들과 같이 봉건 청조에 반대하고 중국에 새로운 공화국을 세우고자는 열망으로 쑨원의 중국동맹회에 가입했고, 1909년부터 1911년까지 일본제국군에서 복무한다. 1924년 쑨원의 명으로 황포군관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교장을 맡으며 많은 학생들을 배출하고 군사간부를 양성하여 자신의 인맥을 쌓고 1925년 3월 쑨원이 사망한 이후 국민당을 장악하였다. 1927년 4월에는 상해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을 축출하고 1928년 북경을 점령하여 북벌 완수를 선언했다. 장제스의 자로 쓰이는 중정(中正)은 1913년에 쑨원의 중산을 본 따서 두 번째로 바꾼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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