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1일간 안보이기 닫기
모바일페이지 바로가기 > 로그인  |  ID / PW찾기  |  회원가입  |  소셜로그인 
스토리야 로고
작품명 작가명
이미지로보기 한줄로보기
 1  2  3  4  5  6  7  8  9  10  >  >>
 1  2  3  4  5  6  7  8  9  10  >  >>
 
자유연재 > 일반/역사
펑더화이의 6.25
작가 : 주암
작품등록일 : 2017.12.15

펑더화이는 중국인민지원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온 총사령관이다. 펑더화이의 입장에서 보는 한국전쟁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중국은 5차전역에 걸쳐 미군과 한국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고 마지막으로 금성전투에서 엄청난 공격을 가하여 정전협정장으로 끌어낸다. 전선은 지루하고 소모적인 마지막 고지쟁탈전이 벌어지는데, 이런 과정에서 벌어진 삼감령전투는 중국군에 있어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이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서 흘러나온 첫 곡이 상감령전투의 주제곡이었다. 중국은 미제와 국경을 접하고 싶니 않아 이북이란 완충지대가 필요했고, 미국은 중공을 견제하기 위하여 남한이란 완충지대가 필요했다.

 
몸부림치는 백범 1
작성일 : 17-12-15 17:13     조회 : 306     추천 : 0     분량 : 10304
뷰어설정 열기
뷰어 기본값으로 현재 설정 저장 (로그인시에만 가능)
글자체
글자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4. 몸부림치는 백범

 

 

  1

 

  하지는 한국에 해방군으로 온 사람이 아니고 점령군으로 온 사람이었으며 일본인을 보호하기 위하여 온 사람이었다. 동시에 한국을 친일파가 다스리게 기반을 다져준 사람이었다. 일명 태평양의 패튼(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영웅. 하지는 44년 10월 제24군단장으로 필리핀 레이터 섬에 상륙 일본군 섬멸. 동 10월 오키나와 상륙 점령)이라고 하던 하지였지만 한반도에서의 그의 행각은 완전히 낙제 점수였다. 원래 남한 군정 사령관 내정자는 스틸웰 육군대장(장제스 참모장 겸 주중미군 사령관)이었지만 장제스와의 불화 때문에 불발되었다. 그 다음으로 임명하려 했던 사람은 위드마이어 장군(스틸웰의 후임 장제스 참모장)인데 그도 중국에서 국공내전 중제문제 등의 일 때문에 임명이 철회되었다. 하지는 전형적인 미국 군인인데다 정치 감각은 전무하여서 피아도 구분하지 못하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여운형에게 대뜸 물었다.

  “당신은 일본하고 무슨 관계가 있소?”

  “아무런 관계도 없소.”

 하고 대답한 여운형에게 이번에는,

  “일본 놈(Jap)한테 얼마나 받아 먹었냔 말이요?”

 라고 질문하는 등 고소를 금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여운형은 기가 막혔다.

  “뭐라고? 이 한심스러운 인간 같으니라고. 당신 내가 누군 줄이나 알고 있는 거야?”

 하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도,

  “뭐? 말조심 해. 너야말로 여기가 어딘 줄이나 아는 거야? 이 ×새끼(퍽크유)!”

 하고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여운형도,

  “네 이놈!”

 하면서 벌떡 일어섰다. 부관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말렸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주먹다짐이 벌어질 뻔하였다.

  성조기는 군정을 실시하는 3년 내내 총독부 건물에 개양되고 있었다. 아베가 쓰던 조선총독 사무실은 그대로 하지 중장의 집무실이 되었다. 총독부청사는 미군정의 캐피탈 홀(Capital Hall)이라 불리게 되었고 나중에 우리말로 중앙청이라고 불리게 되는데 이는 정인보 씨가 캐피탈 홀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었다. 하지가 조선에 가장 먼저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오키나와 주둔 24군단 사령관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한반도 38도선 이남을 접수하라는 맥아더 사령관의 지시를 받고 무작정 온 사람이었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보다 조선총독부를 더 신뢰하였고 우리 광복군이나 독립군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일본군 출신 친일파를 동원하여 군정을 유지 하였다. 하지는 “한인들은 일본인에게 강탈당하고 매를 맞았다고 떠들어 대지만 증거가 거의 없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였고, 심지어는 김구를 다시 중국으로 추방하려고까지 하였다. 친일파 청산은 아예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친일파들은 모조리 서북청년단이니 조선민족청년단이니 대동청년단 등 극우단체에 가입하여 독립군, 민족주의자를 압박하는 선봉대가 되었다. 그들이 새로 만들어낸 용어가 ‘빨갱이’였다. 친일파를 청산해야한다고 주장하는 독립군이나 민족주의자에게는 무조건 빨갱이이라는 감투를 씌우고 보았다. 그것이 친일파들이 면죄부를 얻고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일 뿐더러 오히려 자기들이 국가에 공헌하고 있다고 역으로 큰소리 칠 수 있는 방편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반민특위에 의해 1차로 체포당한 친일파 478명마저 모조리 방면되어버리고 말았고 48년에는 반민특위 자체를 해산해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미국은 한국에 대해서 무지했기 때문에 그렇다손 치더라도 국내인들의 통일반대는 또 웬 말인가. 그들은 벌써 아베가 말한 것처럼 식민지 생활에 습관이 되어 남의 눈치 보기 선수가 되어 있었고 민족 본연의 양심대로 움직이는 군중이 아니었다. 여기서 김구는 커다란 결단이 필요했다. 김구는 죽음을 불사하고 북행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1945년 12월에 소위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가 열렸고 거기서 미·영·중·소 4개국에 의한 최고 5년의 신탁통치안이 가결되기에 이른다. 이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임정을 중심으로 국민총동원위원회가 결성되어 반탁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때 임시정부측은 결사적으로 반탁을 주장하였지만, 박헌영 측의 좌익계열은 찬탁을 주장하여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여 좌우 제휴에 의한 민족통일공작은 여간 어려운 과제가 되고 말았다. 그러던 중 46년 1월에 미·소 공동위원회 예비회담이 열렸으나 차츰 결렬 상태에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이의 타개책으로 이승만은 한민당과 함께 민족통일 총본부를 조직하고 자율정부운동을 벌렸다. 이승만은 정읍발언에서 얄타 회담과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의를 취소하여 38선과 신탁통치를 없애고 즉시 독립 과도정부를 수립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 계통의 한독당은 국민의회를 구성하여 반탁운동을 근본으로 하되 좌우합작과 남북통일을 실현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김규식·여운형 등 중간우파와 중간좌파가 주도하여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한다.

  46년 12월 미군정은 남조선과도입법의원(議院)을 창설하였고, 47년 6월에는 미 군정청을 남조선 과도정부라고 칭하였다. 47년 5월에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렸으나 이 무렵 미·소 냉전이 격화되면서 미·소의 의견대립으로 양측의 입장만 확인한 상태로 결렬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에 미국 정부가 47년 초부터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게 되면서 한국에 대한 정책변화를 가시화 하였다. 그해 3월에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여 냉전체제를 공식출범하고, 6월에는 마셜 플랜을 제시하였다.

  47년 7월 초까지만 해도 그나마 미·소공동위원회는 성공적으로 비춰졌지만, 7월 19일 여운형이 암살됨으로써 좌우합작운동은 사실상 결렬된 셈이다. 여운형은 45년 8.15 당일 밤, 자신이 이미 해방 1년 전인 44년 8월에 결성한 건국동맹을 모체로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하고 스스로 위원장을 맡고, 9월에는 조선인민공화국을 결성한다. 46년부터는 김규식, 안재홍 등과 함께 통일 임시정부수립을 향해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이를 반대하는 세력으로부터 테러를 당했다. 민족지도자 여운형은 테러와 끈질긴 악연을 지니고 있다. 1929년 중국에 있을 때 정치테러 2차례, 1945년 8월 이후부터 1947년 암살되기 까지 2년간 총 10차례의 테러를 당한다. 드디어 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차량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백의사의 집행부장 김영철이 선정한 한지근 등 5명의 집중사격을 받고 사망한다. 백의사(白衣社. 중국 장제스의 테러집단 남의사〔藍衣社〕를 본 땀)는 45년 11월경에 월남한 청년, 학생들을 중심으로 서울에서 조직되었다. 백의사는 임시정부 재무부장 신익희가 야심적으로 조직한 ‘정치공작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해방 이후에 신익희는 김구와 정치노선이 달라지면서 이승만 계열과 손을 잡고 있었다. 이승만이 아직 이화장으로 입주(47. 10. 18)하기 전 돈암장 시절에 반 이승만파로 유명한 전남도지사 서민호(미 컬럼비아대 수료)가 이승만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당신께서는 여운형 암살기도가 이렇게 여러 번 있어도 왜 철저히 범인 검거를 하라는 명령을 한 번도 내리지 않습니까.”

  “뭐라고요? 나더러 범인검거령을 내리라고요?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인 것입네다.”

  “뭐요? 당신이 임시정부 주석 아니십니까? 미 군정청에라도 의뢰하여 범인을 잡아서 처벌하여야지요.”

  “듣기 싫어요. 누구한테 죄를 둘러씌우려는 것입네까?”

  “네, 알았습니다. ‘여운형 암살은 주석께서 묵인한 것이다’ 이렇게 보아도 되겠습니까?”

  “나는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묵인이라니요? 말조심해야 하는 것입네다.”

  하여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것을 보고 서민호는 직감적으로 여운형의 생명이 극히 위험하다는 것을 직감하였다. 서민호는 이왕 이승만과 독대한 김에 묻고 싶은 말을 하였다.

  “그리고 말입니다. 이것은 좀 화제가 좀 다릅니다만, 새로 건립할 국가에서는 대한제국의 황가를 부활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신 무슨 말을 하는 것입네까?(얼굴이 벌게져 화를 벌컥 내며) 그런 시대에 뒤떨어진 말일랑 해서는 안 되는 것입네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어디 황가 부활이라니 말이나 되는 것입네까?”

  “왜요? 오히려 민주주의의 선진국가라는 영국, 네덜란드, 덴마크 같은 나라들도 모두 황실이 있지 않습니까. 하다못해 일본도 왕이 있지 않습니까.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하고서 미국에 요구한 가장 큰 조건이 일본의 황실을 살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받아들여지자 비로소 일본은 완전한 항복을 한 셈이지요. 제가 알기로는 나라에 황제나 왕이 있으면 대외관계나 국내 정치안정에 훨씬 좋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아니, 뭐가 좋다는 것입네까?”

  “최고위 인사로 대통령이나 수상만 있으면 그가 무너졌을 때는 위로 아무도 없게 되는 것이지요. 대통령이나 수상은 신성도가 없는 인간이 직접 정치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수시로 바뀔 수도 있고 쫓겨 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뀔 염려가 없는 황제가 있으면 위로 한 단계 더 안전장치가 있는 셈이지요. 황제는 정치는 안 하고 상징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바뀔 염려도 없고 외국과의 외교에도 훨씬 권위가 있습니다.”

  “그렇게 좋다면 왜 미합중국 같은 나라가 그런 제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네까?”

  “미국에 무슨 역사가 있어서 황실 운운하겠습니까? 미국역사란 것은 기껏 해보았자 2백년 밖에 안 돼요. 그러나 조선(서민호는 ‘조선’이란 용어를 선호하였다. 그래서 훗날 광주에 대학을 세울 때도 ‘조선대학’이라 명명한다)은 단군왕검에서부터만 시작해도 5천년의 역사입니다. 환인, 환웅, 치우천황까지 합하면 9천년의 역사가 됩니다.”

  “당신 지금 나한테 역사교육을 시키는 것입네까? 나도 알만한 것은 알고 있습네다. 같이 미국교육을 받았다고 해서 말이 좀 통할까 했더니 영 안 되겠습네다.”

  “그럼 제가 질문을 하나 더 하겠습니다. 우리 황실과 황족들은 어떻게 대우하시겠습니까?”

  “새로 독립된 민주국가에 황실이니 황족이니가 어디 있어요. 미합중국처럼 맨 위에는 대통령 하나만 있는 것입네다. 알고 보니 당신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네다. 다시는 나를 찾아오지 마는 것입네다.”

  “알았습니다. 나와 당신과는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서민호는 무엇인가 굳은 결심을 한 듯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섰다. 이승만을 뒤로 하고 서민호는 돈암장을 나왔고, 그런 사흘 후에 여운형은 진짜 암살을 당하고 만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미군정청장 하지 중장은 이승만에게 정식 공문을 보내서 ‘귀하가 혹건의 정치적 암살’을 기도하고 있다는 고발자가 있으니 즉시 중지해 달라고 권고하였다. 그러자 이승만은 오히려 하지 중장에게 “당신은 고발자의 성함을 발로하여 철저히 조사에 편의케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발뺌을 하였다. 미 군정청에서 찾아 온 브라운 중령에게 이승만은 “나는 좌익 테러를 지시한 적이 없지만 좌익 테러를 중지하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아요.”라고 하여 거의 좌익세력은 테러를 당해도 괜찮다는 속내를 내비추고 말았다. 여운형 암살주모자 김영철은 서북청년단과 백의사를 왔다 갔다 한 인물이었다. 동시에 미국 방첩대(CIC)의 요원이기도 하였다. 요는 CIC는 미 군정청과는 다른 루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운형은 당시 한국 국민이 가장 존경하던 인물이었다. 해방정국의 1945년 10월, 잡지사 《선구》에서 서울시민 2,000명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을 이끌어 갈 양심적인 지도자는 누구?’라는 질문에 1.여운형 33% 2.이승만 21% 3.김구 18% 4.박헌영 16% 5.김일성 9% 6.김규식 5%로 나왔고,

  ‘생존 인물 중 최고의 혁명가는 누구?’라는 질문에는 1. 여운형 20% 2.이승만 18% 3.박헌영 17% 4.김구 16% 5.김일성 7% 6.김규식 5%로 나왔다.

  여운형이 암살당함으로 이제 호랑이 없는 산골에 늑대나 승냥이들만 득실거리는 세상이 되었다. 여운형은 원래 양반가문의 종손으로 태어났으나 기독교사상을 받아들이면서 봉건유제를 혁파하기 위하여 신주를 땅에 묻고, 단발을 하고,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토지를 노비들에게 나누어주고 독립운동의 장도에 오른다. 그는 중국으로 건너가 만주의 신흥무관학교 등 독립운동기지를 방문하고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벌리기로 굳게 다짐한다.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아 파리에서 열리고 있는 제1차 세계대전 강화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하여 김규식을 파견하기로 한다. 독립청원의 주체가 필요했으므로 터키의 케말 파샤의 터키 청년당을 모방하여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김규식을 신한청년당의 대표로 파견한다. 또한 파리강화회의의 독립청원서 제출사실을 알리기 위하여 일본유학생 출신 장덕수, 이광수, 최익한을 유학생이 모인 일본 동경에 파견하여 2.8독립선언서를 발표하도록 한다. 장덕수 등 청년들은 2.8선언서를 가지고 다시 국내로 진입하여 손병희등 지도자들에게 소식을 전해 3.1독립운동을 일으키도록 계획한다. 여운형은 독립운동가가 가장 많이 집결해 있던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독립청원소식을 전하고 많은 운동가들이 상해로 집결하도록 권한다. 그가 상해로 돌아오는 도중에 국내의 3.1독립운동은 폭발하고, 상해에 돌아오자마자 전 세계에 이 소식을 전하고 이어서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작업에 참여한다.

  그러나 초대임시의정원이 된 여운형은 다수의 인사들이 조선왕실을 우대한다는 ‘복벽론(復辟論)’에 찬성하자 임시정부 활동에서 멀어진다. 중국대학의 축구팀을 인솔하고 동남아를 순회하기도 하는데 상해 야구장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투옥된다. 복역 후에는 조선중앙일보의 사장을 맡다가 1936년 베르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손기정 선수가 1위로 들어오는 사진의 일장기를 말소해버린 사건으로 신문이 폐간되고 여운형도 사장직에서 물러난다. 조선중앙일보 주최 마라톤대회에서 발굴한 손기정 선수는 여운형 아들의 양정고보 친구였다. 그 뒤 또 예비검속으로 수감되었다가 풀려나면서 일제의 폐망이 임박했다는 확신 하에 ‘건국동맹’이라는 전국적인 비밀조직을 결성한다. 8.15해방이 오자 여운형은 건국동맹을 신속히 건국준비위원회로 전환한다. 건준은 다시 신속히 조선인민공화국으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그해 9월에 진주한 미 점령군은 인공을 인정하지 않으며 상해의 임정도 인정하지 않고 오직 친일파들만 비호하였다.

  그 때 모스크바 3상회의(미·영·소 삼국의 외상회의)의 신탁통치 결정은 남한사회를 뒤흔들어놓았다. 당초 미국은 5년 이상의 신탁통치를 제안했지만 소련이 가능하다면 빨리 독립시키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여 3년 신탁통치로 합의를 보았다. 그런데 동아일보는 “소련은 미국이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3년 신탁통치를 주장해 관철했다.”고 뉴욕발로 가짜뉴스를 내보낸다. 이에 이승만, 김구 등 우파 지도자들은 국민들의 분노를 선동하였다. 당장 독립이 되지 않으면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세 나라의 강대국이 합의한 것을 받아들이고 일정한 신탁통치를 거친 뒤 독립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다면 그것이야 말로 가장 현실적인 대안일 수 있었다. 3상회의의 방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미소공동위원회가 진행될 수 없었고 남북간에 단독정부가 세워질 수밖에 없었다. 여운형이 주장한 좌우합작이 성공된다면 이승만 등 우파는 주도권을 상실하고 발붙일 곳이 없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미국은 47년 9월에는 소련의 반대를 물리치고 한국문제를 일방적으로 유엔에 제기한다. 47년 11월에는 유엔총회에서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을 구성하고, 그 위원단의 감시 하에서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의한다. 47년 11월 14일에 유엔 소총회의 결의에 의하여 인구비례에 의한 남북한 총선거 실시안과 선거관리를 위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 설치안이 가결된다. 이것은 미국 스스로가 제안했던 신탁통치를 거치지 않은 한국독립과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를 통한 한국통일안이 유엔에서 통과되었음을 의미한다.

  북한을 점령하고 있던 소련군 사령관은 48년 초에 활동을 개시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한다. 이 때문에 유엔 소총회에서는 선거의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만 총선거를 하기로 결의하여 48년 5월 10일에 남한에서만의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5월 31일에는 최초의 국회라는 것이 열렸다. 이 제헌국회는 7월 17일에 헌법을 공포하였고, 간접선거에 의하여 초대 대통령에 이승만이 당선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최고인민회의’ 선거를 실시하여 48년 9월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하게 되고 소련을 위시한 공산제국이 이를 승인한다. 정부수립을 끝낸 북한은 이어서 미소양군의 철수를 요구하였고, 이에 부응하여 소련은 48년 10월부터 철병을 개시한다. 남한에서는 공산세력이 준동한다는 이유로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을 요청한 바 있고, 때문에 미군 주둔은 잠시 연기되기도 하였으나, 49년 6월에 미국도 약 5백 명에 달하는 군사고문단만 남기고 남한으로부터 철병을 완료한다.

 

  그 때, 제주도에서는 5·10총선거를 둘러싼 찬반 세력이 격렬히 대립하고 있었다.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반대투쟁을 벌이던 제주도민에 대한 경찰 및 우익단체의 무차별적 테러가 극심하여 도민들의 불만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북출신의 경찰관들이 제주에 파견되자 좌익세력은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반대하고, 반미·반서북청년단 등의 구호를 외치며 민중봉기(제주 4·3사건)를 주도하고 유격전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이승만은 제주도민에 대한 보복 정치로 계엄령을 선포한다. 미 군정청은 처음에 경찰병력을 제주에 투입하여 이를 진압하려 하였으나, 사태가 더욱 악화되자 군을 투입하여 제주도 전체를 초토화시키고 말았다. 총 희생자 14,033명(사망 10,144, 해방불명 3,519명, 후유장애 156명, 수형자 214명)이라는 비극을 초래한다. 이렇게 하여 제주도에서는 5·10총선거도 치르지 못하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여수순천 반란사건이 터진다. 이는 48년 10월 20일, 전남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당시 국방군) 제14연대가 일으킨 사건이다. 5·10총선거를 반대하여 일어난 제주 4·3사건이 확대되어 가자 정부에서는 제14연대의 1개 대대를 제주도로 출동시켜 이를 진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제14연대 안에 있던 지창수 상사(연대 선임하사관. 병사소비에트 소속), 김지회 중위(연대 작전참모 보좌관. 북측 공작원) 등 좌익세력들은 제주도 출동을 거부하고 단독정부수립 반대와 조국통일을 내세우며 반란을 일으킨다. 그들은 제주도로 가서 정부군과 대립할 것인가, 육지에서 대립할 것인가를 의론한 결과, 만약 제주도로 가서 반란을 일으키면 고립된다는 것을 알고 여수에서 봉기하게 된다. 이 때 14연대 대위였던 박정희는 남로당 군사총책 간부(군사부장)였다. 박정희는 ‘대구 10·1사건’으로 형 박상희가 경찰에 의해 피살되자 그에 대한 복수심과 형의 친구 이재복(남로당 군사부 총책. 원래 경북연천 중앙교회 목사)의 권유로 남로당에 가입했다. 박상희는 46년 선산(善山) 인민위원회 내정부장으로, ‘대구 10·1사건’ 때 미군정하에 시달리던 2천여 명의 민중과 함께 구미경찰서를 습격하고 모든 기능을 ‘인민위원회’로 이양하라고 요구한다. 그는 민중들과 함께 무기탈취, 양곡 135가마 탈취, 선산면사무소 및 선산군청 습격 등을 하다가 경찰총격에 사살된 자이다.

  여순사건의 책임자로 박정희도 체포되나 그는 놀라운 생존전략을 발휘한다. 그는 연행 되자마자 자기가 알고 있는 군부 내 남로당 조직체계와 명단을 고스란히 숙군작업을 주도하고 있는 김창룡에게 제공함으로서 면죄부를 받는다. 박정희와 함께 여순 반란사건의 진짜 주모자 이재복도 체포되는데, 이재복은 46년 대구 10·1폭동의 주모자이기도 하다. 대구 폭동사건의 두 주모자는 바로 당시 해주에 있던 남로당 당수 박헌영과 현지 대구에 있었던 남로당 군사총책 이재복 목사였다. 이재복은 48년 제주 4·3사건 때도 군사부원 이중업을 대동하고 강문석과 같이 제주도에 잠입하여 제주도 폭동 주모자 김달삼을 집중 지도한 인물이다.

  김창룡의 숙군작업은 이재복이 체포되어 넘겨준 500여 명의 남로당 핵심 당원의 명단과 이재복의 비서 겸 군사연락책 김영식이 체포되면서 급물살을 타게 된다. 김창룡의 숙군수사 팀은 김영식을 통해 군대 좌익세포 명단을 통째로 입수하게 된다. 덕분에 당시 숙군작업으로 남한 국군 중 5%에 해당하는 4,700여 명을 빨갱이로 몰아 처벌하고 수백 명을 총살형과 징역형에 처한다. 이로써 군부 내의 남로당 핵심조직이 와해되어버리고 만다.

  그 때 제14연대는 인민군을 편성하고 여수 읍내로 진격하여 여수 시가지를 장악하는 한편, 여수를 해방구로 삼고 순천에 이어 구례·남원·곡성·보성·화순·광주·광양·하동 등으로 진출하였다. 정부는 육·해군의 합동작전으로 여수를 탈환하고 반란군을 진압하는데, 이 과정에서 여수·순천 지역은 사망자 2,334명, 부상자 2,050명, 실종자 4,318명 등 수많은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를 내고 진압된다. 이승만 정부 수립 2개월 만에 겪은 이 사건으로 이승만은 오히려 철권통치와 반공주의 노선을 강화함과 동시에 숙군 작업을 무난히 해내게 된다.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글자
20 압록강을 건너는 펑더화이 3 2017 / 12 / 15 329 0 6725   
19 압록강을 건너는 펑더화이 2 2017 / 12 / 15 320 0 10192   
18 압록강을 건너는 펑더화이 1 2017 / 12 / 15 340 0 9574   
17 6.25 술래잡기 4 2017 / 12 / 15 293 0 6576   
16 6.25 술래잡기 3 2017 / 12 / 15 300 0 7644   
15 6.25 술래잡기 2 2017 / 12 / 15 306 0 6509   
14 6.25 술래잡기 1 2017 / 12 / 15 314 0 9418   
13 몸부림치는 백범 4 2017 / 12 / 15 298 0 10070   
12 몸부림치는 백범 3 2017 / 12 / 15 300 0 7732   
11 몸부림치는 백범 2 2017 / 12 / 15 304 0 11143   
10 몸부림치는 백범 1 2017 / 12 / 15 307 0 10304   
9 조선의용군의 입북 3 2017 / 12 / 15 305 0 8035   
8 조선의용군의 입북 2 2017 / 12 / 15 315 0 9334   
7 조선의용군의 입북 1 2017 / 12 / 15 320 0 11453   
6 절치부심 3 2017 / 12 / 15 308 0 6930   
5 절치부심 2 2017 / 12 / 15 317 0 9057   
4 절치부심 1 2017 / 12 / 15 318 0 6909   
3 이년당 희의 3 2017 / 12 / 15 315 0 10371   
2 이년당 회의 2 2017 / 12 / 15 323 0 4669   
1 이년당 회의 1 2017 / 12 / 15 516 0 9126   
이 작가의 다른 연재 작품
등록된 다른 작품이 없습니다.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   신고/의견    
※ 스토리야에 등록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 본사이트는 구글 크롬 / 익스플로러 10이상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주)스토리야 | 대표이사: 성인규 | 사업자번호: 304-87-00261 | 대표전화 : 02-2615-0406 | FAX : 02-2615-0066
주소 : 서울 구로구 부일로 1길 26-13 (온수동) 2F
Copyright 2016. (사)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 All Right Reserved.